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자, 베로니카는 다시금 수없이 거닐었던 도시의 거리 위에 서 있었다. 주위는 흐르는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얼굴이 흐릿한 사신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손바닥에는 피처럼 짙고 끈적한 어둠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베로니카에게 너무도 익숙한, 수도 없이 꿈속을 맴돌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넌 이 평범한 인간의 육신에 너무도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었다.
"치안관"이라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누려라. 살육하는 요괴 새여.
네게 속한 이 도시를 다스리고 모든 이가 네 날개 아래 무릎 꿇게 하라.
닥쳐!
베로니카는 온 힘을 다해 무기로 사신의 형체를 이루는 어둠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잠시 흩어졌을 뿐 이내 다시 흘러내리며 응집했다.
얼굴이 흐릿한 그 "신"은 여전히 베로니카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어둠이 응집되어 이루어진 흐릿한 얼굴 위로 "인간"의 것과 흡사한 미소가 어렴풋이 떠오른 듯했다.
난 "실험 품"이 자신의 의지를 갖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자격이 있는 "실험 품"이라면, 마땅히 조건 변화에 반응하여 내가 예상하는 결과를 내놓아야지.
저 쥐들처럼 말이지. 저것들은 정말 말을 잘 듣거든. 아주 지나칠 정도로 말이야.
빵 부스러기 한 줌만 뿌려 줘도 내 뜻대로 움직여 주잖아.
사신의 의지에 응답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수많은 쥐가 쏟아져 나와 발치에 모여들며 점점 그 수를 불려 갔다.
사신의 힘은 강대했고, 형체 없는 압박이 끊임없이 베로니카의 육신을 짓눌러 고개를 숙이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은 채, 차갑게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흥,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주제에, 뭘 믿고 굴복하라는 거지. 가소롭군. 이 비겁한 겁쟁이!
어서 나와서 당당하게 내 앞에 서 봐. 못 하겠지? 네 그 더러운 모습을 내가 보게 될까 봐 두려운 거냐?
내 말이 틀렸나? 뒤에 숨어서 저 역겨운 쥐들이나 부리는 비겁한 놈!
하지만 얼굴이 흐릿한 그림자는 베로니카의 격앙된 질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신"의 말투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고 그저 한낱 물건이자 존중받을 가치조차 없는 "실험 품"을 대하는 듯했다.
너는 강력하다. 하지만 내게 진정으로 "굴복"하지 않는 걸 보니, 아직은 부족하다.
아직 내가 보고자 한 모습은 아니군. 난 네가 "살육하는 요괴 새"의 형상으로 내 앞에 나타나길 바란다.
그러니 날 실망하게 하지 마라, 베로니카.
아주 미세한... 변화 하나만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사신의 손에서 흘러나온 그림자들은 흩날리며 자신에게 합당한 귀결점을 갈구했다.
흘러내리는 어둠이 베로니카의 몸을 휘감으며 그녀가 굳게 지켜온 이성을 집어삼켰다.
사신의 위압이 다시금 그녀를 짓눌렀고, 베로니카의 목구멍에서는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피... 어디 있어...
베로니카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말을 제어할 수 없었으며, 몸 안의 어둠에서 비롯된 강대한 힘이 육신의 통제권을 두고 사투를 벌이는 듯했다.
베로니카의 갈망에 호응하듯 살아 숨 쉬는 제물이 그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온몸이 피로 물든 인간이 베로니카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이 살아 있는 육신은 장차 베로니카에게 봉헌될 피의 양식이 될 터였다.
[player name](이)라는 그 탐정은 마땅히 네게 귀속되어야 한다.
거머쥐어라. 그의 살과 피를 취하라. 네게 속한 모든 것을 누려라, "살육하는 요괴 새"여.
격렬한 통증이 베로니카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그녀가 붙들고 있던 이성을 조금씩 잠식해 갔다.
점차, 베로니카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점차, 더 많은 것들이 베로니카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의뢰인으로서 탐정에게 맡긴 의뢰, 안개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던 그 든든함, 일찍이 자기 손목을 굳게 쥐여 주던 인간의 온기...
너는... 누구야?
베로니카의 의식에서는 어떠한 이성적인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곤 따스한 선혈을 향한 갈망뿐이었다.
내게... 너의 피를...
베로니카는 인간의 살과 피에서 풍기는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향기와 함께 생명력을 머금은 따스함을 느꼈다.
인간은 고개를 들어 베로니카의 두 눈을 응시했고, 그 표정에는 상대를 홀리는 마력이 깃든 듯했다.
인간의 표정과 말투에는 베로니카가 이해하기 힘든 위화감이 묻어났다.
베로니카는 언젠가 눈앞의 이 인간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베로니카는 그 말이 또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기괴한 위화감은 여전히 베로니카와 인간을 잇는 마지막 연결고리처럼,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너는... 아니야.
막 부서지려는 이성과 인간의 선혈을 갈구하는 욕망이 한데 뒤엉켜, 베로니카의 머릿속에서 격렬한 통증을 일으켰다.
인간은 과다 출혈로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려다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마침내 일어서서 베로니카를 끌어안았다.
인간은 남은 숨을 다해, 마지막 말을 토해냈다.
<color=#ffffffff><size=50>정신 차려.</size></color>
<color=#ffffffff><size=50>정신 차려! 베로니카!</size></color>
인간이 온 힘을 다해 끌어안자, 베로니카는 차갑고 뻣뻣하게 굳은 몸이 자신의 품 안으로 쓰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인 베로니카는 품 안에 안긴,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인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선혈은 목덜미의 상처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베로니카의 두 손을 적시며 아직 남아 있는 미지근한 온기를 전해왔다.
...
베로니카의 손을 타고 흐르는 인간의 뜨거운 피는 예전 그의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처럼 형체 없이 두 손을 감싸안았다.
그러자 베로니카의 의식을 휘감고 있던 차가운 혼돈이 그 온기에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안개가 일렁이며 베로니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다시금 변해 갔고,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수도 없이 거닐던 도시의 거리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미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베로니카는 더 이상 그러한 환영에 휘둘리지 않았다.
사신의 그림자가 미궁의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자, 베로니카는 마침내 줄곧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줄곧 뒤에서 귀신 놀음을 하던 자식이 바로 너였구나?
그 빌어먹을 남자를 조종해 네 꼭두각시로 삼은 뒤, 사악한 힘까지 주며 도시 전체의 민심을 휘둘렀어.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이성을 잃게 만들고, 내 부관마저 편히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지.
검은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의 남자는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상대의 추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니, 흥미롭군.
그분께서 널 선택하셨으니 넌 확실히 우수한 "실험 품"이다.
"사신의 권속"이 가볍게 손짓하자 손바닥 위에 정교한 모형 미궁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쥐 몇 마리가 내는 소리였다. 쥐들은 미궁 안에서 끊임없이 출구를 찾으려 애쓰며 각 모퉁이의 발판을 발톱으로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올바른 길을 찾아 보상으로 음식 한 조각이라도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쥐들은 무감각하고 기계적으로 발판을 거듭 누르며 미궁 안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올바른 시도를 할 때마다 주어지는 보상이라곤 위쪽 장치에서 떨어지는 비스킷 부스러기 한 줌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쥐들이 한순간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시도를 반복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의지는 사라지고, 오직 등 떠밀리듯 본능만이 남았다.
성공이 머지않았어, 이제 코앞이군.
핵심적인 변수 하나만 더하면 실험 대상에게 흥미로운 변화가 생기지. 너도 저것들과 다를 게 없어.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네게 주어진 "숙명"이지. 너는 이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너에게 속한 그 올바른 길로 걸어가라, 베로니카.
죽어 버린 인간도, 베로니카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먹이를 갈구하는 쥐들도, 그의 실험실 안에서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더러운 표본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베로니카의 마음을 집어삼키며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혼돈마저 조금씩 불살라 버렸다.
나를 그 더러운 쥐들과... 한데 묶어 말하지 마!
나는 네 실험 품 따위가 아니야!
베로니카는 인간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기병창을 치켜들어 눈앞의 높은 미궁 벽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의식이 허망에서 현실로 내려앉는 그 찰나, 베로니카는 지척에 있는 인간의 얼굴을 다시금 또렷하게 마주했다.
더 이상 환영 속 차갑게 굳어 생명을 잃은 육신이 아니라, 끊임없이 항거하는 용맹한 자였다.
온몸이 피에 젖었음에도 회색 옷차림의 그 모습은 여전히 베로니카의 곁에서 끈질기게 싸우고 있었다.
[player name]...
베로니카는 기병창에 의지해 몸을 일으킨 뒤 다시 인간의 곁에 서서 대결에 합류했다.
한편, 허망 속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던 그 검은 머리와 황금빛 눈동자의 남자는 이 순간 "사신의 권속"의 신분으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신의 힘을 얻은 "대변자"는 여전히 이 떠들썩한 향연을 주관하고 있었다.
모두가 오랫동안 널 기다려 왔다. 우리의 초대를 거절하지 마.
우리처럼 새로운 힘과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곳을 줄곧 방해해 온 "걸림돌"부터 처리해야겠군.
사신의 권속이 손짓하자 형체 없는 어둠이 사방에서 흘러나와 인간의 몸을 휘감았다.
[player na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