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라... 안개 속으로... ▆▁▂▄▁...
살육... ▆▁▆▁▂... 요괴▃▅▆▁... 새...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베로니카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괴이하고 낯선,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베로니카는 이 목소리에 홀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누구야?!
▃▅▆▁▂▄▁... 와라... 안개 속으로... ▆▁▂▄▁...
▆▁▂▄▁... 너는... 요괴 새가... ▂▄▁... 되어야 해.
안개 속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치며, 괴이한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
베로니카는 손에 쥔 기병창을 더 굳게 움켜쥐고는,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전히 익숙한 거리이자 베로니카가 줄곧 지켜 온 도시였다.
치안관으로서 늘 안개 속을 순찰하던 그때처럼, 베로니카의 발소리가 텅 빈 거리 위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베로니카가 지나치는 거리의 집마다, 따스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과 창문은 굳게 닫혀, 거리에 흐르는 짙은 안개를 차단하고 있었다.
컥... 컥...
안개 속 괴이한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베로니카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덮쳐들었다.
흥, 고작 이런 하찮은 수작이 전부냐?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더니 베로니카의 기병창이 안개 속의 괴물을 베어 넘겼다. 괴이한 그림자가 물러나자, 거리는 다시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따스한 불빛이 번지는 창문들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저 창 너머에는 베로니카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너희는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 모두를 잘 지켜내는 것뿐이야.
어찌 됐든 이 도시는 베로니카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에, 베로니카는 다소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지금처럼 안개 속을 계속 거닐며, 그 괴물들을 베기만 한다면...
지금처럼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가기만 한다면...
갑자기 창문 너머의 빛이 일순간 모두 꺼지더니, 거리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그러고는 흐릿한 그림자들이 안개 속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개 속 그림자들은 괴물이 아니라, 베로니카가 익히 알고 있는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베로니카를 반기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냥감을 옥죄듯 거리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요괴 새... 살육하는 요괴 새...
제발... 저희를... 인도해 주세요.
안개 속에 머물면 안 돼. 너희에게는 안개에 저항할 능력이 없어.
다들 돌아가서 문과 창문을 단단히 잠가!
하지만 안개 속 주민들은 본래의 자세를 유지한 채, 그 괴이한 말만 거듭 되풀이할 뿐이었다.
베로니카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들은 오랜 세월 자신들을 지켜 온 치안관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주민들의 광기 어린 말이 베로니카의 머릿속에 울리는 괴이한 목소리와 겹쳐졌다.
▆▁▂▄▁... 너는... 요괴 새가... ▂▄▁... 되어야 해.
요괴... ▆▁▆▁▂... 새▃▅▆▁... 의... ▂▄▁...숙명을... 받아들여라.
닥쳐…
베로니카는 온 의지를 다해, 머릿속 괴이한 목소리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단조로운 말을 되풀이하며 점점 더 커졌고, 베로니카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마저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주민들의 그림자가 베로니카 앞에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다.
선혈을... 바치니... 받아들여...
살육하는 요괴 새...
주민들의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베로니카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괴이한 요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혈을 향한 극도의 갈구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맹렬한 불길처럼 베로니카의 목구멍을 태우고 있었다.
피...
그 괴이한 열망이 베로니카의 몸 안에서 고동치며 어떤 생명의 진홍빛을 갈망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그 갈망에 이끌려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안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흐릿한 그림자는 베로니카의 눈앞에서 조금씩 흩어져 가며 그 무엇에도 닿지 않았다.
내게... 피를...
안개 속에서 회색 그림자 하나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회색 옷을 입은 그림자는 베로니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기병창을 집어 들고는 손목을 그었다.
회색 옷을 입은 자의 손목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자, 베로니카는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회색 옷을 입은 그림자는 베로니카의 입가로 손목을 가져갔다.
...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베로니카는 인간의 따뜻한 손목을 물어 진홍빛 달콤함을 탐욕스럽게 들이켰다.
몸 안에서 광폭하게 날뛰던 그 힘이 인간의 생명력에 젖어 들더니 조금씩 평온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인간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베로니카의 손목을 꼭 쥐고 몸을 숙여 이마를 베로니카의 이마에 살며시 맞댔다.
인간의 목소리와 함께 짙은 안개가 조금씩 밀려들더니 베로니카의 시야를 뒤덮었다.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오고, 베로니카는 몽롱한 혼돈 속으로 잠겨 들었다.
안개가 일렁이며 둘을 휘감자, 거리와 주민들의 그림자, 괴물들까지 모두 흩어져 사라졌다.
오로지 베로니카의 손목을 굳게 쥐고 있는 따뜻한 감촉만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때 익숙한 감각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고, 베로니카는 회색 옷을 입은 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player name]...
베로니카가 눈을 뜨자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며 인간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에 들어온 곳은 안개 낀 거리가 아니라 베로니카가 공무를 처리하던 방이었다.
조금 전의 기괴하고 몽환적인 광경은 모두 흩어져 사라졌고, 그저 지친 와중에 본 한바탕 환영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손목에 머무는 따스함만큼은 조금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다.
인간은 베로니카의 곁에서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베로니카는 몸을 곧추세우며 자기 손목을 인간의 손에서 빼냈다. 그러고는 방금 긴 꿈에서 깨어난 듯 잠시 내비쳤던 미세한 흐트러짐을 단숨에 정돈했다.
인간 또한 베로니카가 방금 악몽에 시달리며 보인 흐트러진 모습을 굳이 들추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
내 꿈에서 뭘 봤어?
베로니카의 눈에 미묘한 감정이 언뜻 스쳐 갔다.
"증거"라도 찾아냈어? "살육하는 요괴 새"인 내 모습을 봤을 테고, 안 그래?
인간은 반대쪽 손목을 들어 베로니카에게 보여 주었고, 그 피부에는 정말로 어떠한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몸을 돌려 인간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창밖으로 흐르는 하얀 안개를 바라볼 뿐이었다.
베로니카는 말이 없었지만, 인간은 예민한 감각으로 그녀가 일부러 닫아건 마음속에 억눌러 둔 감정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는 나왔어?
그러니까, 네가 여기 온 이유는 내가 그 악몽 속에서 보인 "꼴사나운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네?
검시 결과, 사건 정보, 자료실 열쇠까지 다 가지고 있잖아.
또 뭐가 필요한 거야? "위대한 탐정님".
몸을 돌린 베로니카의 눈에는 종잡을 수 없는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베로니카의 의심에 인간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받았던 의뢰 전보를 꺼내 보였다.
전보에 적힌 "살육하는 요괴 새"라는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도시에서 뭘 봤지?
로코라는 자를 만났구나?
베로니카의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예전에 내 밑에 서기관이 있었는데, 안개가 들이닥치자 그 겁쟁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
알렉세이와 달리 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끝까지 짊어지지는 않았어.
로코는 그저 한심한 겁쟁이일 뿐이야. 알렉세이처럼 안개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을까 봐 두려워했던 거지.
그러다 어느새 "안녕의 집" "수장"이란 자로 둔갑해서 매일 기괴한 기도나 올리고 있는 거야.
내 원한이 향하는 곳은 분명해.
로코를 건드리지 않은 건 "안녕의 집"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마주하는 건 오로지 미지의 공포뿐이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의지처까지 빼앗을 순 없어.
베로니카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매일 밤 꿈속에서 그 광경을 마주하고 그 목소리를 들어.
안개의 영향에 저항할 수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정신이 이상해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밤 꿈속에 나타나는 그 광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이게 바로 그 "숙명"이라는 건가?
이런 방식으로 나를 약하게 만들고, 굴복시키려 한다니 정말 가소로워.
인간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방금까지의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재미없는 농담이군.
하지만 베로니카도 마침내 평소의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베로니카는 인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고, 둘은 나란히 선 채 창밖을 뒤덮은 하얀 안개를 묵묵히 응시했다.
언젠가, 나 같은 "이종"이 정말로 살육하는 요괴 새가 된다면...
그땐 너와, 그리고 네 그 조수와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갈 거야.
그 안갯속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거든.
둘이 장난꾸러기인 어린 조수를 언급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속에 한 줄기 불길한 예감이 어렴풋이 솟아올랐다.
인간은 그제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소녀가 어느새 한참이나 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인간의 우려에 응답이라도 하듯, 안개 속에서 또다시 어렴풋이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 어디 있지... ▁▃▄... 너는... 어디...
▁▃▄... 너는... 존재해서는... 안 돼... ▃▅▆▁▂▄▁...
지워라... ▃▅▆▁... 소멸시켜라... ▆▁▂▄▁...
안개 너머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질 무렵, 엘레나는 자신의 방에서 무료함을 달래며 산더미 같은 사건 기록과 자료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엘레나는 낮게 중얼거리며, 펜 끝으로 노트 한구석에 의미 없는 낙서를 휘갈겼다.
몹시 골치 아픈 수수께끼라도 마주한 듯, 펜 끝으로 "안녕의 집"이라는 글자 위에 빙글빙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음, 지금까지의 단서를 종합해 보면... 안녕의 집, 이상한 쥐, 그리고 전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살육하는 요괴 새...
그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건, "살육하는 요괴 새"의 강림을 기원하는 건가?
근데 단순히 "기도"만으로 정말 효과가 있나? 기원하는 의식이라면 "제물"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 도무지 모르겠네! 뭔가 단서가 빠진 느낌이야.
다소 풀이 죽은 엘레나는 펜을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빠져들었다.
...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엘레나의 사념 속으로 기괴한 통증 한 줄기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정체 모를 기괴한 힘이 엘레나의 사고를 서서히 옭아매 왔다.
▆▁▂▄▁... 어디 있지... ▁▃▄... 너는... 어디...
▁▃▄... 너는... 존재해서는... 안 돼... ▃▅▆▁▂▄▁...
지워라... ▃▅▆▁... 소멸시켜라... ▆▁▂▄▁...
그와 동시에 엘레나의 창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쥐 한 마리가 엘레나의 발등 위로 천천히 기어올랐고, 발톱의 미세한 감촉에서 역겨운 미끈함이 전해졌다.
뭐야 이거...
엘레나는 황급히 쥐를 쫓아 버렸지만, 창밖에 어렴풋이 나타난 기괴한 그림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구야?
한 청년이 엘레나의 창밖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익숙해 보였다.
엘레나는 그제야 그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 결코 나타날 리 없는, 아니 나타나서도 안 될 얼굴이었다.
알렉세이라는 이 청년은 이미 며칠 전, 전신의 피가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간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레나는 안개 자욱한 밤, 알렉세이의 주검이 묘지의 차가운 흙 아래로 영영 파묻히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었다.
!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뒤였다.
엘레나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기괴한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그녀를 향해 빠르게 뻗어 나갔다.
인간과 베로니카가 황급히 엘레나의 방으로 달려갔을 때,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엘레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사건 기록과 자료들, 그리고 엘레나가 항상 들고 다니던 그 노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펼쳐진 노트 위에는 엘레나의 익숙한 글씨로 "안녕의 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위에는 빨간 펜으로 거듭 강조하듯 동그라미가 여러 겹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섬뜩한 것은 노트 위에 줄지어 찍혀 있는 더러운 흔적들이었다. 피로 얼룩진 그 자국들은 수많은 쥐의 발자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엘레나가 이곳에서 골똘히 추리에 잠겨 있던 그때, 어떤 기괴한 힘이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낸 것만 같았다.
글씨, 쥐의 발자국, 어지럽게 흩어진 단서들이 인간의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지더니, 결국 "안녕의 집"이라는 그 기괴한 장소를 명확히 가리켰다.
...
그놈들... 더는 참지 않겠어.
치안관은 기병창을 쥐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