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우주 연대기 / 밤안개 속의 진혼곡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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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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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힘에는 거대한 관성이 있었다. 맛없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 같은 사소한 일상만으로도 모험의 기억을 덮어 버리기에 충분했고, 그 모든 것이 혼란 속에서 겪은 환각에 불과했다고 믿게 했다.

사장, 비싼 원두 좀 사면 안 돼? 할인 안 하는 콩 좀 산다고 살림 거덜 나는 것도 아니잖아.

자, 여기 신문이랑 토스트, 그리고 맛없는 핸드드립 커피야. 와,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이네. 오늘은 손님을 보기가 힘들겠네.

실내의 한기 탓에 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지냈으나, 바늘 끝에 찔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라 손을 빼는 과정에서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 매달린 단추 하나가 밖으로 딸려 나왔다.

오, 미니 인형의 작은 선물이네~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추리 소설 한 권을 집어 들고는 소파 깊숙이 파묻혀 고양이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문 앞 팻말 영업 중으로 바꿔 걸어 두고, 올 때 우산 챙기는 거 잊지 마. 단서도 잡았으니 어서 약속 장소로 가보기나 하라고.

모험과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엘레나는 못 들은 채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레이 레이븐의 발소리가 현관 너머로 완전히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입술을 떼었다.

위기행자.

늘 위기 속에 내던져지면서도 기어이 살아남잖아. 너에겐 그런 축복을 빌어줄게.

그럼, 저는요? 저는 어떻게 부르실 겁니까, 엘레나? 그게 지금 당신의 이름이군요.

아니면 "여동생"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위대한 창조물을 받드는 처지이니 말입니다.

작업대 삼아 쓰는 테이블 앞에 앉은 정체 모를 남자가 제 잔에 커피를 채우고는 컵 테두리를 매만질 뿐, 정작 입을 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냥 엘레나라고 불러.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너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직감이 일러주더군, 너처럼 위험한 존재와는 깊이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말이야.

전 그냥 당신을 보러 온 것뿐입니다.

그분의 실험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러 왔습니다. 똑같은 표본을 되풀이해서 폐기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엘레나. 그보다 무의미한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왜 콜레도르를 지워 버린 것처럼 날 직접 지워 버리지 않는 거지?

분위기는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엘레나는 무심히 책장을 한 장 넘기며, 대담하게도 그다음 추리를 툭 내뱉었다.

지우지 않은 게 아니라, 지우지 못한 것뿐이겠지. 내 짐작이 맞다면 우리가 같은 계층을 공유하는 탓에, 그분께서 네게 그런 권한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신 모양이야.

인간들과 어울리더니 제법 영민해지셨군요.

하지만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벗어날 만큼 영리해지지는 못했군요.

네 "선의의 경고"는 고맙게 받아두지. 하지만 무얼 선택할지는 내 몫이야.

머지않아 다시 마주하겠지만, 지금은 아주 정중하게 물러가 주었으면 좋겠군.

행운을 빕니다, 엘레나. 인간들처럼 작별 인사를 나누도록 하죠.

운 또한 실험의 일환이니 말입니다. 차마 직시할 수조차 없는 존재를 대면했을 때, 당신에게 부디 과분한 행운이 따르길 빌어드리지요.

남자의 환영은 그대로 사라졌고, 커피잔은 언제 비워졌는지 알 수 없는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커피 자국만 둥글게 남아 있었다. 엘레나는 코웃음을 쳤다.

성녀의 사건이 일단락되자, 도시의 상징인 성당은 즉시 재건에 착수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선 그곳에서 모든 고통은 역사가 되어 박제되었고, 모든 재앙은 오롯이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으며, 오직 영광만이 신에게 바쳐졌다.

수녀

새로 부임한 성직자시군요. 발령장은... 아니, 됐습니다. 행정 절차는 나중에 밟기로 하고 우선 고해소로 가보시죠.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섰으니까요.

수녀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신의 길을 걷기로 맹세한 몸이라면 평생을 헌신으로 보답해야 하는 법, 저 고통에 신음하는 영혼들을 마냥 기다리게 하실 셈입니까?

빛 한 점 허락되지 않는 고해소는 비좁고 침침했다. 격자 구멍이 뚫린 칸막이와 딱딱하기 그지없는 의자 두 개는 이곳이 안락한 카페가 아님을 방문자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있었다.

늦었군.

나를 여공작이라 불러도 좋아. 아직 저들이 이 칭호를 빼앗아 가진 못한 모양이니까.

고해라기보다는 선포라고 하는 게 낫겠군.

조만간 안개 지역으로 가서 필요한 살육을 좀 벌일 생각이거든. 물론,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야.

오?

교리에 대한 이해가 아주 유연한 것을 보니, 넌 꽤 괜찮은 성직자인 것 같아.

좋아.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약속할게.

잿빛 안개 위의 존재인 그분에게 선전포고할 거야.

알파가 지칭하는 이는 명확했다. 콜레도르를 지워낸 자, 성안의 사람들을 유린한 자, 잿빛 안개를 흩뿌린 채 끝내 우리를 버린 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실 승산이 크지 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안개 지역에서 사육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이 "상자" 밖으로 나가서 보고 싶어.

부두가 황폐해지기 전, 도시의 배들은 먼바다까지 나가기도 했고, 선원들은 고래라는 생물을 본 적이 있다고 해. 난 종종 그게 어떤 존재일지 상상하곤 했어.

바깥 세계가 지금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참혹할지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미래라는 이름의 그 막연한 "가능성"이라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나... 그리고 우리는 이제 물러설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쳐야만 해.

알파는 경계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파효를 칸막이 앞 나무 선반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왜 갑자기 루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그레이 레이븐이 단추를 꺼내 든 찰나, 알파는 루나가 심어둔 조그만 잔꾀를 단번에 간파했다. 실의 반대편 끝자락이 그레이 레이븐의 겉옷에 단단히 꿰매어져 있었던 탓이다.

루나는 루나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난 내 일이 있어. 우린 서로 자유야. 죽이고 나서...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면, 루나와 나는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너와 그 알람 시계처럼 말이야. 서로 챙겨 주면서도 자유를 누리는 거지.

알파의 그 말에 범죄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위험한 또 다른 일이 떠올랐다.

맞아. 루나의 영혼을 담아둘 그릇으로 엘레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선택지였으니까.

나와 루나 모두 확실히 그렇게 "계획"했었지.

말하고 싶지 않아.

이유는 없어. 그냥 엘레나에게 손대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엘레나가 네 보호 아래 있어서일까? 아니면 날 구해준 적이 있어서? 아니. 그런 건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군.

불의를 저질러 지옥 불에 몸을 태우는 일은 없어야 해. 어떤 일은 한번 시작하면 결코 돌이킬 수 없거든.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그게 유일한 이유야. 이종이라 할지라도, 난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되는 걸 선택할 수 있으니까.

이례적으로 단어를 고르는 데 신중하던 알파는 모든 문장을 심상 속에서 수없이 가다듬고 정제한 뒤에야 비로소 무거운 말마디를 뱉어내는 듯했다.

멈춰. 헛소리를 들어줄 의무는 없어.

내 인내심도 얼마 남지 않았어. 이 고해는 언제 끝나는 거야?

맞아.

처음부터 그랬어.

오랫동안 품어 온 내 유일한 소원이었으니까.

사막에서 죽어가는 낙타처럼, 영혼 또한 끝없이 방황하며 한 모금의 샘물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은 이미 물어봤잖아.

...

[player name], 넌 그런 존재니까.

아니. 올바른 일을 해낼 존재라서.

아니. 내가 유일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라서.

그리고... 됐다. 기까지 하자.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오늘 이 고해소에서 나갈 수 없는 모양이네.

그래, 나는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아. 나는 내 강함을, 이종으로서의 운명을, 그리고 내가 스스로 지은 이름 알파를 받아들였다.

알파는 일어나 커튼을 열고, 조용히 탐정의 눈을 응시했다. 두 손을 벌리자 그 사이에 가느다란 실 같은 선이 서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넌 그 답을 알고 있지만, 난 입 밖에 낼 수 없어. 적어도 억지로 말하게 하지 마.

행복하길 바란다, 알파——탐정은 그보다 더 좋은 축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 이전에 “알파”는 빛바랜 삶을 의미했지만, 그 이후로 알파는 정의될 수 있는 미래를 가지게 되었다.

좋아. 이제 안개 속으로 출발할 시간이야.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저 너머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운명의 전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