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작의 권위를 빌린 알파는 모든 관문을 통과해 성녀의 앞까지 곧장 나아갔다.
여공작이 무릎을 꿇고 복수가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도할 때, 언제나 알파의 살의와 공명하던 장검의 칼집이 조금씩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소원이 있는지 내게 말해 보렴.
알파는 어깨를 떨며 복부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은 고통을 참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통쾌한 웃음소리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조야·니벨리아,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큰일이구나. 누군가가 마귀에 씌었구나.
알파가 내뱉은 이름을 듣고도 성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손에 든 성물을 들어 올려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곁에서 성녀를 보필하던 신도들이 일제히 앞을 가로막았다.
스카프가 흘러내리자, 알파가 고개를 들었다. 오드아이는 보석처럼 빛났고, 짐승의 뿔에서는 핏빛 장미의 은은한 광채가 배어 나왔으며, 하얀 머리카락 끝은 붉게 물들어 불꽃처럼 휘날렸다.
여공작이셨군요. 이곳에서 당신을 심판해서는 안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의 영혼은 사악함과 너무 깊이 얽혀 있습니다.
성물에서 물결 같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자, 밀폐된 방 안에 바람이 일며 성녀의 치맛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샹들리에는 불꽃처럼 일렁였고, 피아노는 유령이라도 깃든 듯 스스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문과 창문이 저절로 닫히더니, 어디선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고하신 분의 이름을 받들어 네게 마귀의 이름을 고할 것을 명하노라. 이로써 그를 영원히 축출하리라.
조야·니벨리아, 열세 살에 도둑질하다 부모에게 들켜 다락방에 감금되자, 한밤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지. 그 후에는 기억 상실증 환자로 위장해 수도원에 숨어들었어.
지성하신 분의 진실을 대신해 네게 마귀의 이름을 고할 것을 명하노라. 이로써 그 죄를 사하리라.
조야·니벨리아, 열아홉 살에 수도원 장부를 위조해 부당 이득을 취했지. 그리고 발각되자 원장을 모함할 함정을 파서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결국 원장은 오명을 쓴 채 조사받던 중 절망하여 자살했지만, 조야는 유유히 도망쳤지.
성녀는 비웃으며 성물을 알파의 척추에 갖다 대고는 장치를 조작해 바늘을 찔러 넣었다. 약물이 흘러 들어오자, 알파는 미친 짐승처럼 발버둥 쳤다.
결국 알파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금빛에 둘러싸인 그 모습이 마치 제물이나 백합, 혹은 어린양 같았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증명을 대신해 선언한다. 여공작은 이미 구제 불능이니, 오직 화형만이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눈앞의 여자가 사라지기만 한다면, 자신의 비밀도 다시 "비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홀 안의 무리도 함께 순장시킬 생각이었다.
불을 붙이기 전 몸을 숙인 성녀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넌 죽어 마땅해. 새 옷을 사주지 못했던 부모,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했던 원장, 입만 열면 장사 얘기뿐이던 조사단처럼 말이야.
왜 너희같이 성가신 존재들은 계속 나타나는 거야? 나도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어. 너희가 날 몰아붙인 거라고.
내 뒤에 있는 신상이 보이니? 그분은 영원히 내 편이야. 그래서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매번 도망칠 수 있었거든. 내가 그분께 기도하면, 그분은 응답해 줘.
아니,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아.
눈을 뜬 알파의 칼이 성녀의 가슴을 겨누었다.
약물 따위는 여공작에게 털끝만큼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알파는 죄인의 자백을 직접 듣고 싶었기에, 조금 전까지 벌어진 모든 일은 성녀가 스스로 죄를 시인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분이 너에게 자비를 베푸는 걸 허락하지 않겠어.
성녀가 뒷걸음질 치자 여공작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꿰뚫어 바닥에 고정했다. 다급해진 성녀는 옷을 찢고 달아나려다 몸의 절반이 넝쿨로 이루어진 본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홀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대문 쪽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신도들이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성녀는 넝쿨을 뻗어 벽을 타고 달아나려 했으나, 여공작은 바짝 뒤쫓으며 끊임없이 줄기를 베어내 퇴로를 차단했다.
왜 날 계속 쫓아오는 거야?
인간과 비교하면, 이종과 요괴인 우리가 서로 더 닮았잖아?
여공작은 대답 대신 허공으로 도약해, 장검으로 성녀의 심장을 꿰뚫어 그대로 벽에 꽂아버렸다.
날 죽인다고 저 아래 사람들이 네게 감사라도 할 줄 아나?
아니. 오히려 널 더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또 다른 안식처를 파괴했다며 원망할 거다.
진실한 영웅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위선적인 성녀에게는 몰려들지. 조금의 달콤함만 쥐여 주면 두 손으로 모든 것을 바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다.
죽어라.
네 죄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 상관 없다. 널 심판하러 온 사람도 오직...
여공작은 옷깃에서 금화 한 닢을 뜯어내더니, 입술을 깨물어 금화에 피를 바른 뒤 성녀의 이마에 붙였다.
금화를 본 순간 가짜 성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죽음의 위압감 앞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고, 오늘 치러야 할 대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조야는 마침내 그 이름을 떠올렸다.
루… 루… 루시…
끝내 다 말하지 못한 이름은 바람 소리에 묻혀 흩어졌고, 성녀는 목이 졸린 채 피가 멎는 듯한 축축한 질식감에 휩싸였다.
알파, 내 이름은 알파야.
이 피에 맹세컨대 금화로 네 목숨값을 치르게 하마. 나 알파가 직접 널 심판하겠다.
조야·니벨리아, 지옥에나 떨어져라.
스물네 살에 사기죄로 체포되었고, 출소 후에는 조직을 위해 일했지. 그러고는 "이종" 계획을 위해 수녀 행세를 하며 아이들을 꾀어내 잡아들였어.
구백사십삼 명의 아이 중 살아남은 건 극소수. 제일 어린아이는 갓 돌을 넘겼고, 제일 큰 아이도 열네 살이 채 안 됐어.
실험의 본질은 아이들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는 거였어. 아이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안개에 감염돼 변이하고, 그중 극소수만이 그나마 조금 더 오래 버틸 뿐이지.
그 아이들은 계속 실험체로 쓰이며 진화하게 돼. 인간의 이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괴물로 말이야. 그게 바로 흔히들 말하는 이종이지.
조직은 이 실험을 피의 선별이라고 불렀지.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선별을 통과한 건 과연 진화한 인간일까? 아니면 타락한... 괴물일까?
괴물이었어.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신의 권능을 손에 넣으려 한들, 결국 남는 건 위조품뿐이야.
수녀, 고아들이 널 엄마라 부르는 걸 꽤 즐겼지? 그 수많은 아이의 목숨을 딛고 금자탑을 쌓아 올렸잖아. 자애로운 어머니답게, 지옥에나 떨어져서 그 아이들을 보살피라고!
불타는 영혼들이 네게 입을 맞추려고 기어 오고 있잖아. 아이들이 울고 있어, 들려?
알파는 천천히 파효를 뽑아 들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은 피가 아니라 실가닥이었다. 여공작이 의아해하는 사이, 여공작의 등 뒤에서 넝쿨이 조용히 뻗어 나왔다.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여공작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고, 기척을 느꼈을 때는 이미 코앞까지 닥쳐온 뒤였다. 여공작이 황급히 몸을 틀었으나, 심장을 빗겨간 넝쿨이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위기의 순간, 알파는 재빨리 장검을 쥔 손을 뒤로 꺾어 넝쿨째 자신의 어깨를 찔렀다. 단숨에 남은 넝쿨을 끊어낸 그녀는 이로 술병 마개를 물어뜯어 뱉고는,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뒤로 크게 도약했다.
여공작의 궤적을 따라 호박색 술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나뭇가지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알파의 잔영을 뒤쫓았으나, 그 압도적인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뿐하게 내려선 여공작은 근처의 등불을 낚아채더니 장막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은 이내 발악하던 성녀의 전신을 집어삼켰고, 그 처절한 마지막 저항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저 여자가 성녀님을 죽였다.
이건 신성 모독이다.
신도들이 알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달리던 기세는 어느새 기괴하게 기어가는 몸짓으로 변질되었고,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갔으며 눈동자에서는 이성의 빛이 꺼진 채 탁하게 흐려졌다. 인간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변이는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안개 괴물이다. 신도들이 안개 괴물로 변이했다.
정말이네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여긴 안개도 없잖아요. 일단 도망치시죠.
신도들은 까다로웠지만 다행히 수가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점차 여공작의 등 뒤로 모여들며 뒤따라 후퇴했다.
곁문으로 가. 거긴 신도들이 없어.
불길은 계속 타올랐고,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문을 향해 몇 번이고 돌진했다. 철문이 열리자,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혼란 속에서 한 부인이 넘어지자, 갓난아기의 유골이 바닥에 흩어졌다. 부인은 바닥을 기며 흩어진 유골을 주워 모으려 했다.
안 돼요, 우리 아기 밟지 마세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다들 안 들려요? 성녀님께서...
성녀를 입에 올린 순간 여인은 무언가 깨달은 듯, 몰려드는 인파와 바닥을 기는 신도들 그리고 불타는 나무 형상의 안개 괴물을 번갈아 보았다.
이 광란의 세계는 이미 영시의 경계에 다다라 있었다. 여인은 넋이 나간 채 낯선 사람에게 팔을 붙들려 끌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