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트 자료실 입구
과거
아사르는... 여전히 올 생각이 없는 거야?
카무이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저은 카트레브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충돌과 솔직한 대화 이후, 그들은 라이프와 합의를 이뤘다. 라이프는 셋의 체내 에너지 총량과 태양 코로나 유전자 활성도를 재검사하고 기록한 후, 그 데이터를 세계 정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그들이 세계 정부의 확률 평가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다시 한번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였다.
아사르는 검사에만 마지못해 참여했을 뿐, 나머지 시간에는 문을 굳게 잠그고 그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지금처럼 평가 결과를 알리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사르는, 관심이 필요한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돼.
나도 많이 걱정돼. 하지만 아사르는 요즘 계속 우리를 피해 다니잖아.
아사르가 기분 나빠하는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만 해.
그럼, 이제 들어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두 소년을 바라보았다.
왜? 그땐 이 방법밖에 없다며 자신만만해하더니 이제 겁이 나기 시작한 건가? 너희에겐 두려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라이프는 오늘 소년들에게 알려 줄 결과 자료를 책상 위에서 정리했다.
우리는 그런 겁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렇지, 카트레브?
응, 두렵지 않아.
그냥... 조금 긴장했을 뿐이야. 또 뭔가 잘못되면, 당분간은 다른 해결책을 찾기 힘들 것 같아서 그래.
흥, 허세만 부리는 녀석. 방금 무슨 일이든 앞장서겠다던 그 기세는 어디 갔어?
물론 있지! 방금도 내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긴장은 되지만, 그게 우리가 나아가는 걸 멈추게 할 순 없어. 진짜 무섭더라도, 난 계속 제일 앞에서 힘껏 나아갈 거야!
좋아, 돌격병. 그럼, 네가 제일 먼저 와서, 평가 결과를 확인해 봐.
뭐, 뭐라고?!
잠깐만. 카트레브, 밀지 마!!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다고!!
후, 심호흡 한번 하자! 들이쉬고... 내쉬고...
안 되겠어. 아직도 긴장돼! 난 눈을 감고 있을 테니, 카트레브, 네가 먼저 결과를 보고 알려 줘!
계속 뒤로 물러나는 카무이를 보고 카트레브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고는 카무이를 붙잡아 억지로 앞으로 끌고 갔다.
카무이, 돌격, 직접 봐.
자자, 장난은 그만 치고, 카무이, 카트레브, 둘이 같이 와서 확인해 봐라.
마음에 준비는 됐어? 결과는...
에제트 통신실
과거
마음에 준비는 됐어? 아사르~ 미리 말해두지만, 퍼니싱에 침식을 당하면 더 이상 되돌릴 방법이 없어.
확실해? 이게 정말 어떤 물질로도 파괴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고?
시선을 떨군 아사르는 마리스가 건네준 물질을 바라보았다.
물론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이것을 받아들였겠어? 그리고 지금 인간의 저 처참한 모습을 봐. 이것에 맞설 수 있는 걸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
퍼니싱에 복종한다면, 바로 영원을 얻을 수 있어.
난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아. 이건 그저 에제트를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날 당신 같은 존재로 취급하지 마.
흥, 자기가 무슨 선한 사람인 줄 아네. 죽음과 퍼니싱으로 모든 가족의 목숨을 직접 끝내고, 삼키려 하면서...
말조심 좀 하지? 그건 "해탈"이자, 가족의 융합이라고.
이대로 살아남는다 해도, 이 잔혹한 세계는 결국 그들을 나한테서 빼앗아 갈 텐데. 차라리 더 나은 곳으로 일찍 보내는 게 낫잖아?
그들을 잘 알거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의 이상이라고. 이렇게 해야만, 우리 가족이 영원히 하나가 될 거야.
지난번에 네게 그 힘을 보여준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나 보네. 몇 번 더 확인해 볼 생각은 없어? 원래 의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그것에 내가 원하는 힘이 있다는 걸 확신하니까.
그리고... 당신이 했던 약속을 잊지 마. 에제트를 더 이상 탐내지 않고, 세계 정부에 에제트를 인간 문명에서 "멸망"한 문명으로 보고하고 기록해 주기로 한 약속 말이야.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꼼수를 부리지 않겠지? 난 솔직한 답이 필요해.
내가 말하면, 그대로 믿을 거니?
그리고 네가 예전에 계속 경계했던 건, 네가 아직 뭔가를 가지고 있어서였어. 그래서 그걸 잃는 게 두려웠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잖아, 안 그래?
"인연"도 결국 "부담"이자, "속박"일 뿐이야.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넌 더 이상 발목 잡히지 않을 거야. 즉,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거지.
"퍼니싱"... 처음부터 당신의 목적은 이것뿐이었잖아.
권력이니 지위니 하는 건... 다 핑계와 위장일 뿐이었어.
허~ 맞아. 그래서 우린 같은 부류라고 내가 말했잖아, 아사르.
난 너와 똑같거든. 인간이 지배하는 이 추악한 세계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지.
하지만 그에 비해 퍼니싱은 아름답고, 강력한 존재야. 이 세계의 주인은 진작에 바뀌어야 했어.
어때? 네 가족들과 함께 나와 손잡고, 우리만의 새로운 제국을 세워보지 않을래?
난 당신의 새로운 세계 따위엔 관심 없거든. 그러니 앞으로 우릴 건드리지 마.
우리의 세계에는... 에제트만으로 충분해.
아사르는 단말기에 떠오른 정보를 바라보았다. 연락실로 오기 전, 아사르는 모든 에제트 멤버에게 통신을 보내, 에제트에서 대기하면서 긴급 임무 명령을 기다리게 했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자료실에 있는 카무이 셋은 예외였다. 그들은 평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쯤 아사르를 향해 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사르는 퍼니싱으로 가득 찬 용기를 열어 주사기에 담은 뒤, 심장을 향해 힘껏 찔렀다.
으윽!!
이내 아사르의 몸이 변이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핏빛의 힘이 무수한 개미처럼 몸을 기어올라, 아사르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는 듯했다. 극심한 고통에 아사르는 몸을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사르는 미리 준비한 장치에 다가가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리스가 준비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아사르가 보유한 내부 권한으로 에제트의 시스템 중추에 빠르게 침투했다. 이제 몇 초만 있으면 모든 방어 시스템과 구조 요청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될 것이었다.
게다가 마리스가 배치한 수많은 침식체들이 이미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에제트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굶주린 늑대처럼 먹잇감에 덮칠 준비를 마쳤다.
경보!! 경보!! 기지 반경 4km 범위 내 퍼니싱 이상 파동 감지!!
2급 경보 방안 가동 예정. 에제트▇▄▆▅▂▃▁전체 멤버...
전▅▇▃체█▃▅멤버...
시스템 중추▅▇▃마비█▃▆▂▃... 자폭▇▄█▃▆▂모드▅▇▃▄가동...
1급▆▇▄▅▃▂▁경보▆▃▇▄▅▂... 가▇▃▆▂▄▅동...
지금부터... 에제트는, "집"의 질서를 세울 거야.
아무도 떠날 수 없어. 그 누구도 이 집을 배신할 수 없어!!
에제트 멤버 숙소
과거
너희도 눈치챘어? 보호 시스템의 퍼니싱 농도 보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응, 마침 나랑 캐롤도 이 문제를 연구하던 참이었어.
정확히 말하면, 이 현상은 3일 전부터 시작됐어. 그때 나와 캐롤이 야간 순찰 중이었는데, 요즘 라이프 쪽이 너무 바빠 보여서 시스템 작동을 점검하려고 했었거든.
대부분 시간대엔 문제가 없었지만... 일정 시간 동안, 에제트의 모든 시스템이 잠깐 멈췄었지. 정확히는 매일 밤 한 번씩, 대략 5초 정도였을 거야.
뭔가를... 테스트하는 것만 같았어.
오늘 상부에 보고하려고 했는데, 라이프와 카무이 일행은 평가 일로 바쁘고, 아사르는 우리더러 숙소에서 대기하라고 해서 일단 미뤄뒀어.
그럼, 보호 시스템은 어땠어? 확인해 봤어?
어제 점검했을 땐 정상이었어. 그러니 지금도...
잠깐!! 뭔가 이상해!! 보호 시스템이... 모두 붕괴됐어!
소녀들은 놀라움을 참지 못했다. 보호 시스템은 에제트를 퍼니싱의 침식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막이었고, 한 번 사라지면 기지 내 저장된 태양 에너지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서두르자! 라이프, 카무이 아니면 아사르나 카트레브를 찾아가서 확인해 봐!
그녀들은 함께 휴게실로 뛰어갔다. 모두가 휴게실에 대기하고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일행을 보고 다들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어서 움직여! 일단 사람부터 찾자! 아사르는? 아사르가 무슨 지시를 내리지 않았어?
아사르? 너희가 오기 전에 연락이 왔는데, 곧 올 거라면서 우리보고 대기하라던데.
"똑, 똑똑"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금 올 사람은 아사르 외에 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거봐, 내가 곧 온다고 했잖아.
아사르, 근데 오늘은 좀 이상하네.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면서, 왜 노크를 하는 거지?
달렌은 의아해하면서도 즉시 달려가 아사르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숙소 밖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아사르는 좀 멀리 서 있을 뿐, 방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방금 문을 두드렸던 손을 내밀고 있었다.
모두 아사르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달렌은 별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가 아사르를 방 안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에바는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간 수상한 붉은빛을 눈치챘다.
에바는 달렌이 끌어당긴 그 손이 이미 비정상적으로 변이된 것을 알아차렸다.
퍼니싱?!
달렌!! 위험해!! 어서 피해!!
뭐...
윽?!!!
달렌이 에바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달렌의 심장은 이미 자신이 데려오려던 손에 의해 꿰뚫리고 말았다.
그제야 달렌은 방금 데리고 오던 손이 인간의 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붉은 물질이 달렌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와 섞이며 전신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아... 사... 르?
대체... 왜...
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뒤에 있는 이와 시선을 마주하고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아사르도 달렌을 바라보았지만, 퍼니싱의 영향으로 그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미 일그러지고 기형적인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달렌... 너...
아사르, 왜 이제야 왔어? 우린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론 괜찮지! 이게 바로 우리가 바라던 방식이잖아.
근데 알지? 난 아픈 게 제일 무서워. 그러니까 꼭 아픔을 느끼지 않게, 빨리 끝내 줘.
아사르... 아파... 하지...
당연하지, 달렌. 난 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너희 모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너희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거야.
으악?!!!
아사르는 손에 힘을 주어 달렌의 심장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그 후 가슴에서 손을 빼낸 아사르는 숨이 멎은 달렌이 쓰러지는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도망쳐...
에바는 뒤로 달려가며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동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사르가 미쳤어!! 퍼니싱에 침식됐어!!
모두 어서 도망쳐!!!
순간 멤버 숙소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모든 이가 개미처럼 미친 듯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달렌!!! 조금만 더 버텨!! 빨리 지혈해 줘!!
달렌은 이미 죽었어!! 캐롤, 어서 따라와! 안전한 곳을 찾아서 숨어야 해!!
카무이와 라이프는 어디 있어?! 어서 찾아!!
으아악!!!
도리안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사르가 대검으로 도리안의 양다리를 내리쳐 모든 뼈를 부숴버렸고, 그는 바닥에서 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사르... 달리는 게 너무 힘들어. 날 위해 방법을 좀 찾아줄래? 내가 장거리 달리기를 제일 못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음, 영원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좋겠어. 어쨌든 달리기만 안 하면 돼.
아사르, 내 다리를 어떻게 해본다고? 내 다리...
다리가... 너무 아파...
일어나야 해. 어서 도망가야...
이렇게 하면... 네 소원대로 될 거야. 도리안.
여기서 편히 쉬어. 이제 더는 달리지 않아도 돼.
다들 아직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지, 아사르가 흩어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고,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게임을 다시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아사르!! 이번엔 네가 술래야. 우리를 잡으려면 정말 빨리 달려야 할걸?
어서 가자!!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 아사르가 절대 찾지 못할 거야.
어쩔 수 없네. 그럼, 한번 놀아주지.
숨을 시간은 딱 5초만 줄게. 시간 지나면 기다리지 않을 거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제 모두, 집 돌아갈 시간이야.
이게 바로 가장 완벽한 가족이었다. 아사르는 모두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사르는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그들이 원하는 것만 채워줄 것이다.
퍼니싱의 계단을 올라, 모든 이가 제 자리를 찾으면, 그들은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모습으로 하나로 모일 것이다. 그들은 완벽한 전체를 이루어, 다시는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언니!!
숙소 안에는 생존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사르는 가장 멀리 도망간 캐리와 캐롤에게 다가가 주저 없이 캐리의 목숨을 끝낸 뒤 캐롤의 품에 쓰러지는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언니! 언니는 왜 항상 그렇게 바쁜 거야? 계속 언니를 찾을 수 없었다고. 그리고 왜 자꾸 혼자 앞서가서, 날 홀로 남겨 두는 거야?
언니랑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어.
바보야, 내가 앞서가는 건 네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야. 그러면 앞에 어떤 위험이 닥쳐도 내가 먼저 널 대신해서 감당할 수 있잖아.
넌 어릴 때부터 겁이 많았으니까, 뭐든 내가 먼저 해볼게.
나도 알아... 캐리. 네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네 동생 캐롤뿐이었지. 뭘 하든 항상 그녀 앞에 서서 위험을 막으려 했잖아.
그리고 캐롤, 너도 마찬가지로 언니를 가장 소중하게 아꼈잖아. 걱정하지 마. 너희의 소원은 내가 모두 이루어줄게.
난 너희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해줄 거야.
미친놈... 넌 그냥 미치광이일 뿐이야.
죽어!!
캐롤이 무기를 들어 휘둘렀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사르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는 바람에, 그녀는 목이 조여 숨이 끊길 뻔했다. 캐롤은 처음으로 아사르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내며, 억지로 고개를 들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풉... 쿨럭쿨럭... 아사르, 네가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을 것 같아?
이미 카무이와 카트레브에게 통신을 보냈어. 넌 오래 버티지도 못할 거라고!!
아악!!
아사르, 우리만 신경 쓰지 말고, 카무이와 카트레브도 챙겨줘. 라이프도 함께 부르면 좋을 것 같아.
우리도 알거든. 에제트의 모두에게 다 정이 깊지만,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너한테 특별한 존재잖아.
기다리지 말고, 어서 가! 우리 에제트는 누구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잖아.
아사르는 캐롤을 캐리 옆에 내던져, 두 자매가 서로를 꼭 끌어안게 했다. 어릴 적처럼 서로를 껴안고 잠든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사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집으로 데려올 거야.
넌 지금... 어릴 때처럼 가장 사랑하는 언니 품속에서 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돼.
대... 대체 무슨 일이야?!
소란을 알아챈 병사들이 급히 달려왔으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끔찍한 광경일 뿐이었다. 병사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훈련생들을 보며 경악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믿기 힘들다는 듯 멀리 서 있는 아사르와 눈이 마주쳤다.
아사르!! 우리만 빼놓고 또 무슨 재미있는 걸 하고 있었어? 유치하다고 하지 마. 우리도 긴장을 풀 시간이 필요하잖아.
좋아... 바로 이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거니까.
너희는 라이프가 나중에 에제트로 데려온 사람들이지만, 오래전부터 에제트의 일원이었어.
그러니 누구도 빠져서는 안 돼.
우리만의 아름다운 꿈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야.
아직 아무런 응답이 없어. 조금 전부터 신호가 모두 끊어진 상태야.
라이프, 카무이 그리고 카트레브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카무이 일행이 떠나려는 순간, 기지 내에서 이상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곧 중추가 붕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이프 휘하의 병사들이 먼저 멤버 숙소의 상황을 확인하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젠장... 신호탑이 침식체에 의해 파괴된 건가?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침식체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다른 멤버들에게도 응답이 없어. 어쩌면 모두 다...
카무이는 주위의 침식체와 싸우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프가 에제트 중추의 비상 시스템을 가동한 덕분에 기본적인 적신호 스캔은 가능했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화면에는 수많은 붉은 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침식체가 이미 에제트 내부에 침입해 그들을 포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어서 가서 모두를 구해야 해! 어쩌면 그들이 아직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카무이!! 카트레브!! 어서 뒤로 물러나!!
라이프가 다쳤어, 내가 엄호할게.
카트레브가 말을 마치자마자 라이프를 뒤쪽의 방으로 밀어 넣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침식체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구조하러 가는 도중 새롭게 나타난 침식체 무리와 마주쳤고, 점점 구석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근처에 작은 비상 대피실이 있어 그곳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침식체들이 끈질기게 추격해 왔고, 결국 누군가는 나가서 침식체들을 막아야만 했다.
카트레브!! 내가 도와줄게!
상황을 파악한 카무이가 즉시 달려들어 카트레브를 도와 몇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들은 힘을 합쳐 한동안 버텨냈고, 결국은 비상 대피실로 들어가 문을 잠글 수 있었다.
잠깐은 안전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우리가 지원하러 가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라이프, 다른 지원군과 연락이 돼?
통신이 끊겼어. 누군가가 에제트를 탈출해 지원군을 데려오지 않는 한, 방법이 없어.
하지만 침식체들의 수가 너무 많아. 소수 병력으로는 탈출이 힘들 거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인력을 빼면 남은 사람들이 버텨 낼 수 없을 거야.
그럼, 모두를 데리고 탈출 캡슐로 가는 건 어때? 우선 부상자와 허약한 멤버를 보내자고!
우리는 여기 남아서 최대한 버티면 돼.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으니, 어서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
카무이가 무기를 들고 뛰쳐나가려는 순간, 카트레브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금 이상을 발견한 뒤부터, 카트레브는 계속 단말기만 뚫어지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전진하는 동안 카트레브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래서 카트레브는 방금 카무이가 돌진하고 자신이 상처를 처리하는 동안, 이 생각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카트레브? 손에 뭘 들고 있는 거야? 잠깐?!!
카무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카트레브는 금빛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카무이의 혈관에 꽂고는 망설이지 않고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들은 조금 전에 너무 서둘러 이동하는 바람에 각자가 무엇을 챙겼는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카트레브는 당시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에너지 긴급 추출 장비를 챙겼다.
다행히 지금 모두 쓸모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네 에너지를 전부 나한테 주면, 넌 어떡하려고 그래?
힘도 없이 어떻게 이 침식체들과 싸우고, 나중에...
카무이.
카트레브가 카무이의 말을 중간에 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트레브는 항상 카무이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대답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더 미루면 모든 것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늦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린, 이길 수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시간을 끌어봤자, 소용없어.
이것 봐, 내가 너한테, 에너지를 주면, 넌 돌파할 수 있을 거야.
카트레브는 카무이의 손을 들어 올려 팔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퍼니싱에 침식된 부위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카무이 자신도 퍼니싱의 영향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너지를, 네게 줄게. 넌 공중 정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아. 거기엔, 구조체 기술이 있어. 넌 전환에... 성공할 거야.
그럼, 너희는 어쩔 셈이야?! 다친 멤버들 그리고 흑점 단계에 접어들어서 의무실에 있는 멤버들까지 전부 데려갈 순 없잖아!!
가지 않아. 나와 라이프가, 그들을 찾으러, 갈게. 내가, 잘 지킬게.
그리고, 아사르도, 찾을게. 우린, 함께 버틸 거야. 네가,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와서, 우리를, 구할 때까지.
하지만...
카무이가 계속 반박하려 했지만, 방금 주입된 에너지로 인해 최종 전환기로 강제로 들어서고 있었다. 몸에 강렬한 반응이 나타난 것을 느낀 카무이는 그만 행동을 멈췄다.
내 몸이... 으윽!!
타오르는 것... 같아.
안 돼.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해!!
라이프는 앞으로 다가가 통증 때문에 힘이 빠진 카무이를 부축했다.
카트레브의 말이 맞아. 시간을 끌다가는 전멸할 뿐이야.
우리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남겨야 해. 카무이, 생리학적 나이나 능력으로 봤을 때 네가 가장 뛰어나고, 전환에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우리를 믿어라. 우리가 에제트에 남은 모든 이를 지켜낼 것이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끝까지 버티고 있을게.
카트레브, 넌 계속 앞으로 가서 사람을 구하고, 난 카무이를 탈출 캡슐로 데려갈게.
응.
라이프는 말을 끝내자마자 카무이를 부축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카트레브가 갑자기 카무이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만.
카트레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카무이의 얼굴에 묻은 오물들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카트레브는 카무이와 처음 만났을 때를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카트레브가 혼자 살아남은 보육원에서 카무이도 이렇게 그의 눈물이 섞인 흙먼지를 닦아 주었었다.
고마워, 카무이.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나.
이 말을 끝으로 카트레브는 손을 놓았고, 라이프에게 떠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트레브는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린 카트레브가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트레브는 망설이지 않고 아사르의 단말기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달려갔다. 어떤 일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카트레브는 대략 짐작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이번에 완전히 끝맺기로 결심했다.
카트레브?
마지막 에제트 병사를 처리하고 난 아사르는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몸을 돌린 아사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트레브였다.
어떻게 네가 먼저 온 거야? 카무이와 라이프는? 그 녀석이 너보다 먼저 달려와야 하는데.
아사르.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허... 뻔하지 않아? 난 지금 에제트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있어.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집을 만들고 있다고.
너도 나를 비난하러 온 거야? 그들처럼 내 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날 욕하고, 미워하려고?
카트레브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아사르에게로 다가갔다.
난... 묻지 않아. 아사르는, 날 구해준, 가족이니까. 네가 하는 일을, 난... 막지 않을 거야.
아사르, 가족이 필요하다면, 날 데려가. 대신, 카무이는 놓아줘, 가게 해줘.
너희가 날 구해줬어. 난 이 은혜를... 기억하고 있어.
난, 영원히 아사르 곁에 있을게. 떠나지 않을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 그리고 카무이를 보내줘. 그들에겐 자유가 필요해.
자유... 라고?
차가운 표정으로 칼날을 뽑은 아사르는 주저 없이 카트레브의 심장을 꿰뚫었다.
카트레브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아파. 하지만, 괜... 찮아.
난, 아사... 르와... 함께...
카트레브, 어떻게 자유 따위가 "가족"보다 중요할 수 있겠어?
하지만 괜찮아. 난 항상 너를 동생처럼 여겨왔으니까. 네가 철이 없어서 카무이를 보내주고,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도, 난 탓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날 배신하지 않고, 이 가족을 배신하지 않은 걸 봐서, 용서해 줄게.
집에서 편히 쉬어. 나중에 카무이까지 데려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카트레브는 원래부터 표정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몸부림을 치지도, 두려움을 보이지도 않았다. 카트레브는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카무이 일행이 자신을 에제트로 데려간 그날부터, 그는 자신의 목숨을 그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카트레브는 가족인 아사르를 원망할 수 없었고, 그저 카무이가 걱정될 뿐이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카무이.
어서 가. 카무이,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가.
나와, 우리를 대신해서, 자유롭게, 살아가.
라이프는 의식을 잃은 카무이를 탈출 캡슐에 태우고, 목적지를 공중 정원으로 설정한 후, 발사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라이프는 카무이가 목적지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공중 정원에 도착하기만 하면 진정한 황금 태양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후 라이프는 카무이의 단말기를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없어서 카무이를 대신해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위에 뜬 메시지를 확인한 라이프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프가 이미 벌어진 일들과 앞으로 닥칠 일들을 이해하게 된 순간, 아사르도 그곳에 도착했다.
흥, 드디어 내 차례인가? 아사르.
카무이는?
넌 이제 카무이를 찾지 못할 거야. 그를 해칠 생각은 접어치우고,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라.
그래도 체면은 지켜주고 싶었어, 라이프. 엄마, 아빠가 떠난 뒤로, 당신이 그분들을 대신해 어른 노릇을 해줬으니까.
하지만 카무이를 도망치게 놔두다니... 당신이 먼저 카무이의 "배신"을 도와준 이상, 나도 이제 옛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사르는 마지막 가족에 대한 "회수"를 마쳤다.
아니. 아직 카무이가 남아 있기에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회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아사르는 카무이를 잠시도 기다릴 수 없었다.
아사르는 에제트의 모두의 의식을 추출해서 자신의 몸에 섞으려 했다. 하지만 힘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아사르의 흡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사르는 카트레브의 몸을 차지했다. 예상대로 카트레브의 몸을 흡수하자, 그 의식들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고, 아사르는 마침내 융합을 완성했다.
하지만 지금의 에제트는 너무나 공허했고, 과거의 활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육체를 이 집을 위해 활용하기로 한 아사르는 일부 육체를 자신의 몸에 접합시켰고, 나머지는 생전에 가장 행복해 보였던 모습으로 유지시킨 채 에제트 곳곳에 세워두었다.
그들은 영원히 여기에 머물며,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카무이가 떠나기 전, 아사르는 몰래 그의 의식의 바다 일부를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카무이라는 존재 전체를 대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아사르는 카무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심지어 몸까지 잃었다고?
흥, 아니면 뭐? 카무이가 떠날 땐 이미 크게 다친 상태였고, 태양 코로나 유전자 전환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도 매우 심각했어. 게다가 네가 건드려서 의식의 바다까지 불완전해졌잖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거야.
그리고 내가 너 대신 카무이를 데려올 거란 기대는 하지 마. 난 이미 공중 정원 배신자 명단에 올랐으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
"그럼, 좀 더 참을성 있게 기다려보자. 아직은 최적의 타이밍이 아니야."라고 아사르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온전하고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려는 카무이가 필요했다.
아사르는 끊임없이 공중 정원을 엿보며, 바보 같은 카무이가 점점 더 불완전해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무이는 또다시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계속하여 주변의 모두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어도, 카무이는 여전히 교훈을 얻지 못하는 바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 순간, 아사르는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아사르는 날마다 카무이를 주시하며, 높이 떠 있는 공중 정원이 추락해 카무이를 끌어내릴 순간을 기다렸다.
공중 정원이 파오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에제트로 탐지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 아사르는 드디어 그날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인간도 귀신도 아닌 꼴이 되고도 포기하지 못한 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어차피 이건 네 목적에도 맞아떨어지니까, 그냥 늘 하던 대로 협력하면 돼.
내가 모든 걸 떠올리게 해줄게, 카무이.
우리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얻음과 잃음을 다시 한번 겪게 될 거야. 사랑받고, 미워하고, 얻고 빼앗겼던 그 모든 과거를.
네가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겪어본다면, 반드시 나처럼 될 거야. 그리고 이 잔혹한 세계를 증오하게 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