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트 자료실
과거
정말 답이 없는 난제네.
그 전쟁의 여파로 에제트는 최근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원래도 한산했던 자료실은 지금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이곳이 아직 폐쇄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스크린에서 반짝이는 빛이 아사르의 얼굴을 스치며, 두꺼운 음영으로 그의 찡그린 눈썹을 강조하는 듯했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아사르는 스크린을 다급히 끄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아하!
카무이.
방문자를 확인하자 긴장이 풀린 아사르는 무심코 키보드를 눌러 스크린을 깨웠다. 스크린은 여전히 대기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카트레브도 있어.
아사르, 우리, 왔어.
숙소에 가만있지 않고 왜 여기에 온 거야?
널 찾으러 왔지. 숙소의 다른 사람들은 밖에 나가려 하지 않거든.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의무실에, 있어.
카트레브의 한마디에 셋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응. 태양 코로나 유전자 악화 때문에 흑점이 된 멤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활동할 기분이 남아 있는 건 씨앗 단계를 돌파한 우리 셋뿐일 거야.
하지만 우리도... 더는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잖아.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아사르?
이걸 물어보려고 날 찾아온 거야?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아사르는 발로 의자 두 개를 끌어와 둘에게 앉으라고 했다.
연구실에서도 어쩔 수 없는걸...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니?
흑점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는 걸 너희도 알잖아. 태양 코로나 유전자와 퍼니싱을 억지로 분리하든지 아니면 버티다가 죽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어.
가능성이라면, 단 하나... 저번에 그 의사가 말해 줬잖아.
진정한, 황금 태양이, 나타나면.
그래. 새로운 데이터가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 그래야 멈춰버린 발리콘 계획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어.
변화가, 없으면, 돌파는, 정체돼.
생각에 잠긴 카무이는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씨앗 단계의 인원수를 늘리면 어떨까? 적어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는 있잖아.
세계 정부가 왜 이주 작전을 멈췄는지 알아? 그건 우리 셋에게서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야. 그래서 에제트의 나머지 멤버들을 이곳으로 돌려보내서, 전환 훈련을 계속하게 한 거야.
그 후의 일은 너도 잘 알잖아. 아무도 우리가 돌파한 원리를 알아내지 못했고, 의무실에 가는 멤버만 계속 늘어나고 있어.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그때 우리는 다른 멤버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새로운 단계로 돌파할 수 있었잖아.
하지만 왜 이 방법을 널리 쓰지 않는 걸까? 다른 멤버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카무이의 말에 잠시 망설인 아사르는 대기 화면을 한번 보고는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필요한 에너지양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었던 거겠지.
그리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황금 태양 전환에 필요한 에너지의 질을 만들어낼 수 없어서, 지금 양으로 질적 변화를 이루려 하고 있다는 거야. 그들은 우리를 믿지 않아.
그럼, 우리가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면 되잖아?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서 우리가 충분히 투자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그들도 납득할 거야.
라이프한테, 물어볼까?
...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계속 너희한테 세계 정부를 믿지 말라고 했잖아. 그들 눈에 우리는 실험용 쥐일 뿐이야. 권력과 부를 쌓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비열함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거야. 이런 중요한 시점에 세계 정부가 우리의 군수품에까지 손을 댈 리가 없어. 연구용 자원이든, 전시 보조제든 건드리지 않을 거야.
아사르는 입 모양만 몇 번 바꾸더니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는 분명 우려할 만한 다른 게 있을 거야.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야.
아사르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스크린을 다시 켰다. 그러자 스크린에 아사르가 실시간으로 연결한 단말기의 데이터베이스가 나타났다.
데이터베이스에는 수많은 파일이 정렬되어 있었고, 각 파일의 모서리에는 세계 정부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훈련 자료야?
잠깐, 평소에 보던 거와 달라. 뒤에 있는 이 데이터는 뭐야?
태양 코로나 유전자와 뇌 활성도 점검 데이터야. 우리의... 진짜 결함이기도 하지.
무슨... 뜻이야?
아사르는 그중 한 파일을 열었다. 그 자료의 주인은 최근 흑점이 된 멤버이자, 셋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태양은 영원한 걸까, 카무이?
아니.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우리의 개조는 태양을 본뜬 거야. 에너지를 태워 힘을 내뿜는 아주 단순한 원리지.
하지만 태양은 영구기관이 아니야. 결국 태양이 태우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일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힘을 얻기 위해 태우고 있는 건 대체 무엇일까? 정말 그때의 에너지와 평소 먹는 보조제일 뿐일까?
그러니까...
제자리에 얼어붙은 카무이는 이 정도까지 말이 나온 이상,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것이 바로 이 계획의 불가피한 결함이야. 유전자 차원의 결함이지.
연소는 우리를 조금씩 쇠약하게 만들고 있어. 카무이. 우리 몸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거야. 우리가 가진 강력한 힘은 그냥 겉모습에 불과해.
우리가 소모되는 속도는 생리학적 나이를 훨씬 초과하고 있어. 신체 기능으로 보면, 이 자료의 주인은 이미 노년기에 가까울 정도로 쇠약해졌어.
쾅!
카무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그래서 계획이 멈춘 거였어. 그들이 시도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발리콘 계획에 참여한 모두는 다 타버린 거야. 우리는 우연히 기반을 보충받은 운 좋은 놈들일 뿐이야.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어! 이 실험은 너무 위험해. 지금 당장 세계 정부를 찾아가서 해명을 요구해야 해.
뭘 어떻게 요구할 거야? 이 자료의 출처는 공개되지 않은 거라, 유효한 증거로 사용할 수도 없어. 세계 정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들은 계속 부정하고 핑계를 대면서 근거 없는 허위 정보에 불과하다고 할 거야.
그럼... 맞아! 우리에게는 라이프가 있잖아!
라이프는 분명 우리를 믿을 거야! 게다가 우리는 증거를 가지고 있잖아. 흑점이 된 멤버들의 몸에 분명 증거가 남아 있을 거야!
시간 없으니까, 어서 가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카무이는 이 말만 남기고 곧바로 밖으로 달려갔다.
카트레브가 바로 뒤를 쫓아갔지만, 갑자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아사르를 돌아보았다.
아사르, 여기서, 오래, 기다렸지?
무슨 뜻이야?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아사르.
우리한테, 말해. 일찍, 말해.
무슨 일이든, 나와 카무이가, 도와줄게.
카트레브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사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리 사라진 카무이를 향해 달려갔다.
바보가 둘이네...
그들은 그토록 가까운 사이였다. 아사르가 아무리 자연스러운 척해도,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곧바로 아사르의 행동 뒤에 숨겨진 뜻을 알아챘다.
하지만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아사르를 믿기로 했다. 이런 믿음은 오히려 아사르를 더 위선적이고 비열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꼭 말할게, 카트레브.
모든 게 끝나면, 너희에게 솔직하게 말할게.
아사르는 아무도 없는 자료실에서 혼자 약속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기기를 끄고, 둘의 뒤를 따라갔다.
에제트 의무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카무이는 간호사의 손에서 마대를 빼앗았고, 간호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무이를 바라보았다.
카무이, 지금은 성급하게 굴 때가 아니야.
뒤따라온 아사르가 카무이의 손을 잡아 누르며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간호사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셋은 원래 라이프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지휘실과 훈련장 어디에서도 라이프를 찾지 못했다. 결국 의무실에서 회복 중인 멤버들과 정보를 먼저 공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의무실의 문을 열자, 병상은 텅 비어 있었고, 이불만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개인 물품을 정리하는 간호사가 없었다면, 오전까지 이곳에 흑점이 된 병사들이 있었다는 걸 누구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다 어디로 간 거야? 왜 간호사가 그들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거야?
혼란에 빠진 카무이는 마음속에서 작은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손에 든 마대를 열어보자, 안에는 익숙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셋이 그렇게 찾았던 라이프가 문을 열며 나타났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세계 정부가 하달한 군령에 따라, "발리콘 계획" 소속 부대는 즉시 20% 비율의 인원을 차출한다. 차출된 자는 즉시 일반 전투 편제로 전환되어 본부의 지휘 아래 전선에 투입된다. 이 명령은 즉시 발효된다.
너희 셋은 차출 대상이 아니니, 평소처럼 훈련을 계속하면 된다.
이건 또 언제 내려진 군...
동시에 카트레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카무이를 뒤로 가렸다.
카무이가 눈을 부릅뜨며 말하려던 찰나, 아사르가 재빠르게 카무이의 입을 막았다.
보고.
카트레브, 말해봐.
중대의, 다른, 병사들은?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안다. 이전에 의무실에 있던 흑점 멤버들은 대부분 태양 코로나 유전자를 인공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에, 더는 위험이 없을 거야. 하지만 황금 태양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에제트에 남을 이유가 없어서, 이번 차출 인원에 포함된 거야.
나머지 멤버도 세계 정부가 특별히 마련한 의료센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흑점 성분을 되돌릴 연구를 계속할 거야. 결과가 나오면 그들의 행선지도 에제트 내부에 공시될 거고.
무표정한 얼굴의 라이프는 모든 말을 미리 준비해 둔 듯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더 궁금한 게 있나?
질문, 없어.
그럼, 돌아가서 계속 훈련하도록.
응.
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읍... 읍!
카무이는 어깨와 팔을 힘껏 휘두르며 아사르의 제압에서 벗어났다.
왜 날 막은 거야?! 이건 사실이 아니잖아!
평소와, 달라.
카무이는 카트레브의 말 뒤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 라이프의 태도는 평소와 분명히 달랐고, 어떤 이유에서든 방금 자신의 행동은 규율 위반으로 처벌만 받을 뿐, 진실은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카무이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됐어.
카무이를 끌어당겨 토닥인 아사르는 라이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마리스, 내가 다시 당신을 찾게 될 거라고 말했던 게, 혹시 이것 때문이었나?
아사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돌아가서 얘기하자.
아사르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라이프의 행동이 결코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세계 정부의 군령을 받은 이상, 이러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제트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고 해서 꼭 옳은 건 아니었다. 라이프에게도 한계가 있었고, 예전의 오딜리와 에우르디스처럼 이런 사람은 결코 에제트를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해.
에제트 의무실 후방 지원 창고
카무이, 아사르, 카트레브 셋은 건물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각오는 됐어? 지금 들어가면 군의 규율을 위반하는 거야.
10분 뒤면, 우리가 설정한 신호 차단이 해제될 거야. 그러면 라이프가 전에 추가로 설치한 신호 관측 장치가 숙소를 떠난 우리를 감지할 것이고, 곧바로 우리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할 거야.
망설일 필요 없어. 봐봐, 지금 숙소에 몇 명이나 남아 있어? 매일 흑점이 된 멤버가 의무실로 보내지고 있는데, 반나절도 안 돼서 "완치"됐다며 에제트를 떠난다는 게 말이 돼?
모두를, 위해서, 시도할, 가치가, 있어.
아사르, 여기서 정말 답을 찾을 수 있는 거야?
확실해.
아사르는 눈길을 살짝 돌려 자신의 단말기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날 라이프와 헤어진 뒤, 아사르는 다시 마리스와 연락했다. 마리스는 단지 "의무실"이라는 세 글자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열만 보내왔다. 아마도 어떤 프로그램의 비밀번호인 것 같았다.
이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마리스의 태도는 항상 손에 쥔 카드의 수량에 따라 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아사르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들어가자.
의무실 후방 지원 창고는 셋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와보니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단서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니, 셋은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방금 뿌려진 먼지네. 입구는 여기야. 방금 누군가가 들어갔어.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카무이는 방 한구석 바닥에 숨겨진 문을 열었다.
그러자 칠흑 같은 터널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환한 조명 아래, 널찍한 실내에는 관찰 캡슐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몇몇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클립보드를 들고 관찰 캡슐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때론 무언가를 적고, 때론 캡슐 옆의 조작 콘솔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수치 G...
읍!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연구원의 입을 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관찰 캡슐을 보며 수치를 기록하던 연구원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졌다.
다음 순간, 강한 타격감을 느낀 연구원은 곧 의식이 희미해졌다.
눈을 완전히 감기 직전, 연구원은 멀리 있는 동료를 보았다. 그 동료의 등 뒤에도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큰일 났...
...
카무이는 손에 힘을 더 주어 연구원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목소리마저 죽였다.
이들은 분명 에제트의 의료진이 아니었다. 카무이는 기절한 연구원의 명찰을 확인한 뒤, 조용히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사르와 카트레브가 있는 관찰 캡슐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너희가 말한 인공 제거라는 거야? 더는 위험하지 않다는 거 맞아?!
카무이는 눈을 감으며, 한 글자 한 글자씩 말을 이어갔다.
관찰 캡슐 안의 멤버는 전출된다고 발표된 흑점 멤버와 완벽히 일치했다.
그들은, 죽어야 해.
카트레브! 진정해! 카무이, 이리 와서 도와줘!
카무이?
아사르 옆에 있던 카무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둘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카무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라이프, 왜 그랬어?
결국 이곳을 찾아냈구나.
라이프의 침묵에 신경이 곤두선 듯, 카무이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고통과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지경이 됐는데도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너희 눈앞에 있는 게, 바로 사실이다.
라이프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조작 콘솔로 걸어가 시스템을 가동했다.
열어봐라. 너희가 알고 싶어 했던 모든 답이... 이 안에 들어 있다.
라이프는 천천히 암호화된 파일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 순간, 아사르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그 비밀번호는 마리스가 그들에게 보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무이가 앞으로 달려가 파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발리콘 계획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견되었다. 실험 방식으로 인해 피실험자에게 유전자 결함이 발생했으며, 주요 증상은 신체 기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는 것이다."
"기존 자료와 현재 실험체 샘플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해 냈다. 다음은 발리콘 계획 모든 멤버에게 적용되는 최신 데이터이다."
"실험자의 최대 생리학적 수명은 35년에 지나지 않으며, 전환 분기점은 17세에서 19세 사이로 나타난다."
"성인이 된 후 실험자의 신체는 잠재적 노화기에 들어가게 되지만, 장기와 육체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최고 수준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장기와 육체가 기능을 잃기 시작하면, 노화기가 즉시 시작된다."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거야, 라이프?
왜 진작에 알려주지 않았던 거지?! 우리가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미 늦었다.
너희를 포함한 훈련생 3분의 2가 이미 기능 퇴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어.
너희보다 나이가 많은 멤버들은 흑점이 가져다준 파괴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아직 악화하지 않은 멤버들도 시간이 지나면 쇠약해져서 결국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지금 에제트에 남아 있는 "씨앗"은 너희 셋뿐이야. 그리고 너희도 생리적 기능의 황금기를 지나가고 있다. 더 시간을 끌면 모두 늦어버릴 거야.
우린 너희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희 신체가 쇠약해지기 전에 그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해.
세계 정부는 발리콘 계획이 유전자 결함을 일으킨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우리가 모두 고작 35년밖에 살 수 없다는 것도,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없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던 건가?
너희 몸속의 유전자 결함이 모두 발리콘 계획 때문만은 아니다.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개입했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었어.
발리콘 계획의 원형은 황금시대 때부터 에제트 내부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퍼니싱이 폭발한 뒤에야 전황에 맞춰 조정된 것뿐이야.
너희 몇 세대 전의 에제트 멤버들부터 유전자 개조로 인한 결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대대로 유전되어, 결국 너희 부모님은 물론 너희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거야.
라이프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격분한 사람은 오히려 아사르였다.
거짓말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그런 증상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그건 그냥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이전의 개조는 퍼니싱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결함도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지.
우리가 에제트에 부임하기 전에, 에제트의 성인들이 먼저 발리콘 계획 실험에 참여해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도 이 때문이야.
개조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신체 기능은 곧 쇠약기로 접어들 운명이었어. 그래서 그들은 희망을 너희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걸기로 한 거다.
너...
아사르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카무이가 제지했다.
그럼, 연구팀의 최종 결론은?
...
라이프는 말없이 다른 파일을 열어보았다.
"현재 진행 상황을 감안하면, 흑점 멤버의 태양 에너지를 추출하여, 전환 성공률이 가장 높은 훈련생의 돌파를 먼저 지원하는 것을 제안한다."
"추출 후 흑점 멤버는 생리적 기능 면에서 정상적인 면역력을 회복할 수 없으며, 급속히 쇠약해져 결국 사망에 이를 것이다."
"이에 따라 추출 후 즉시 관찰 캡슐에 냉동 보관하여 시신을 실험 표본으로 저장하고, 후속 연구에 활용할 것을 권장한다."
...
이게 당신들의 최종 결론인가? 이게 당신들이 선택한 방식인 거야? 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거지? 왜 이렇게 손쉽게 포기한 거냐고?!
우리는... 노력해 봤다.
너희가 많이 화날 거라는 걸 알아. 이해해.
대체 뭘 이해한다는 거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다고? 아니면 유전자 개조 결함 때문에 에제트의 모두가 정상적인 성장 주기조차 가질 수 없다는 거?
나와 카무이는 6년 만에 19살의 성장을 마쳤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괴물로 태어났단 말이야!
아사르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던진 질문에, 나머지 셋은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
라이프, 아사르가 말한 게 사실이야?
이게 너희에게 큰 충격이라는 걸 안다. 지금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해결책을 거의 찾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믿어 줘. 내가...
라이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던 찰나, 예기치 못한 통증이 갑자기 몰려왔다. 그리고 라이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쳤다.
라이프?!
잠깐만... 이건 태양 코로나 악화 반응이잖아? 왜 라이프에게...
물어볼 시간도 없이, 셋은 서둘러 라이프를 부축해 그곳을 떠났다.
그 후, 일행은 의무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의사는 즉시 라이프를 치료했고,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의사는 세 소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때처럼, 라이프는 너희가 위험에 처하는 걸 바라지 않았어. 그래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세계 정부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군인들에게 태양 코로나 유전자를 주입하고 훈련을 진행했어.
하지만 늙은것들은 개조를 위한 최적의 나이를 한참 지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무의미하게 고생만 하는 거라고 그때도 말했었지.
너희도 이걸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남은 건 라이프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봐.
세 소년은 의사가 건넨 서류를 손에 든 채, 라이프의 병실 문 밖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이 청원서에 적힌 이름들은 떠난 흑점 멤버들과 일치해.
카무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라이프는 한 번도 그들을 강요한 적이 없어. 그저 사실을 알려줬을 뿐이야.
그들은 에제트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에너지를 포기한 거야.
그리고 라이프도... 최선을 다했어.
부정적인 모든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졌고, 카무이는 오히려 그동안 라이프에게 삐졌던 것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장기적인 해결책은 아닌 데다가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모두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헌신했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순 없어. 그들의 기대를 저버려선 안 돼.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사르는 카무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힘없이 몇 마디를 내뱉었다. 카트레브는 아사르의 이상한 모습을 눈치채고 부축하려 했지만, 아사르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유전자 결함이 사실이 된 이상, 우리가 아무리 받아들이기 싫어도, 정해진 현실은 바꿀 수 없어.
우리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해.
일반 훈련자들의 에너지로 부족하다면, 씨앗인 우리 셋의 에너지로 채우면 돼.
우리 셋 중 돌파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한 명을 선택해서 나머지 둘의 에너지를 모두 그에게 주는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이 방법이 가장 현명해.
라이프가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지만, 라이프나, 자발적으로 희생한 흑점 멤버들이나, 자신 이외의 에제트에 있는 그 누구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세 소년을 가장 큰 희망으로 생각했기에, 먼저 나서서 그들에게 위험을 감당하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건 그들이 직접 결단을 내려야 할 일이었고,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이들 역시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그렇게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럼, 그때 가서 우리 함께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거야.
웃기는 소리하지 마. 카무이, 넌 대체 언제쯤 현실을 받아들일 거야?
아사르는 이성을 잃은 듯 웃으며, 카무이에게 다가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방법을 시도했는지, 네가 한번 계산해 봐. 그중에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었어?
더 오래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도 무방하지.
어릴 적, 우리가 너무 느리게 자라고, 너무 약해서 걱정했었지. 그때 엄마랑 아빠는 우리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우리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말해 주셨어. 그게 당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찾은 방법이었어.
하지만 좀 더 자라고 나니, 퍼니싱이라는 악마가 나타났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때 그들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했고, 우리는 그 말을 믿으며 기다렸지.
하지만 결국 퍼니싱 때문에 죽고 말았어.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희망이 아니었던 거야.
그 뒤에 우리는 또 무엇에 희망을 걸었지? 세계 정부? 에제트의 다른 멤버들? 라이프? 아니면 우리 자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어! 계속해서 답을 찾아왔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얻은 게 뭔지 말해보라고!!
우리는 계속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 왔어, 카무이.
하지만 우리는 계속 잃기만 했어.
난 이제 똑같은 결말을 반복해서 마주하는 게 지겨워.
오딜리와 에우르디스가 떠난 그 순간부터 카무이 일행은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걸어가는 모든 길의 끝엔 항상 절망의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수없이 추락해왔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도 알아, 아사르.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어.
우리 뒤에는 아직 에제트가 있어. 우리마저 포기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데?
우리보다 먼저 간 가족들도 분명 같은 마음이었을 거야. 그들이 실패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도, 뒤에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너도 가족들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난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아사르. 그리고 잃는 게 나 자신이라 해도 상관없어.
나를 잃기 전에, 가족을 며칠이라도 더 지킬 수 있다면, 난 그 며칠을 끝까지 버텨낼 거야.
내가 사라져도,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에제트에는 희망이 남아 있을 거야.
우리 가족도 이렇게 이어져 온 거잖아?
라이프, 깨어났어.
카트레브의 말에 둘은 다툼을 멈췄다.
너희가 어떤 결정을 하든, 직접 라이프한테 얘기해.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난 지쳤어. 그러니 먼저 돌아갈게.
카무이는 아사르가 더 이상 자신과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카무이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사르와 억지로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아사르가 지쳤다면, 카무이가 대신 나서면 될 일이었다. 카무이는 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그들에게 희망을 찾아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올 줄 알았어.
에제트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고.
에제트에는 이제 어떤 희망도 없어. 그러니 고집스럽게 버티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이 길은 정말 험난해. 어쩌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어. 카무이, 정말 각오한 거니?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이상주의적인 순진함은 고통만 가져올 거고, 너희는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고. 축하해. 이제 더는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졌네.
알고 있어. 앞으로도 분명 셀 수 없이 많은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 고난을 겪음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야.
난 절대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어. 반드시 이 현실을 바꿔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낼 거라고.
현실? 절망과 고통만 안겨 주는 현실은 진작에 사라졌어야 해.
잔혹한 현실이 반복되는 결말 속에서 우리를 버렸다면, 왜 그 현실로부터 시혜를 바라야 하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
나의 소망은 에제트에 있는 모두를 지켜내고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게 하는 거야. 아직 인간 생존자가 있다면...
우리의 터전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거야. 인간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꼭 우리의 터전을 다시 세울 거라고 믿어.
생명은 너무 연약하기에, 이 추악한 세계 때문에 너무 쉽게 흔들리지.
난 이미 우리를 더 단단히 묶을 수 있는 견고한 매개체를 찾았어. 이걸로 우리 가족은 더는 흩어지지 않을 거야.
난 이 세계를 사랑하니까.
난 이 세계를 증오하니까.
그리고 난 에제트라는 가족을 영원히 사랑할 거니까.
에제트의 모든 식구들이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줬어.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떠났고, 일부는 여전히 잔혹한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어. 우리는 계속 잃어왔지만, 우리가 했던 모든 노력은 결국 "사랑"이라는 단어가 증명해 주고 있어.
난 절대 그들의 죽음과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해 남은 상처를 잊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이어가고, 남기고 싶은 것은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나에게 주고 싶어 했던 "사랑"이야.
그들이 나에게 가르쳐 줬으니, 나도 이 따뜻함을 온 세계에 전하고 싶어.
이게 바로 내가 기억하고 싶고, 그들이 나를 기억할 때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야.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한, 가족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태어날 때부터 나의 세계는 오직 에제트뿐이었어.
엄마와 아빠, 카무이, 카트레브 그리고 에제트의 다른 사람들, 우리는 힘겹게 여기까지 왔지.
하지만, 이 세계는 우리를 상대로 무슨 짓을 했을까? 우리의 소중한 가족을 빼앗고, 끝없는 고통을 안기며, "운명"이라는 족쇄로 우리를 묶어버렸어.
매번, 우리가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믿을 때마다, 이 세계는 잔혹하게 그것을 폐허로 만들어버렸지.
세계가 무자비한 폭군이라면, 차라리 그냥 멸망하게 내버려두는 게 나아.
세계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난 나의 방식대로 이 가족을 영원히 하나로 묶어놓을 거야.
난 에제트에 희망을 가져다줄 거야.
난 에제트에 죽음을 가져다줄 거야.
그리고 희망의 대가가 나 자신일지라도, 살아남은 모든 이들도 끝까지 나아갈 것이기에 멈추지 않을 거야.
광풍이 우리의 불꽃을 몇 번이고 꺼뜨린다 해도, 그 불꽃이 정상에 올라 꺼지지 않는 태양이 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불꽃을 다시 피워낼 거야.
우리가 결국 잃을 운명이라면, 잃음 그 자체를 품에 안으면 돼. 죽음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더 영원한 연결이 될 테니까.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없다면, 그냥 어둠 속에서 잠들면 돼. 더 이상 의미 없는 발버둥은 칠 필요가 없어. 밤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 줄 거니까.
이제부터 우리의 가족, 에제트의 모든 이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그들을 집으로 데려갈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