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과거
띵...
산산이 부서진 금속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주위에 살아 있는 이가 없어서인지 그 소리는 유독 크게 들렸다.
카이는 길을 가로막은 녹슨 파이프에 걸려 비틀거렸지만 계속 나아갔다. 하지만 이내 기와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정말 운도 더럽게 없군.
얼마 전 내린 비로 공기는 답답하고 끈적여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지면의 웅덩이에는 악취가 나는 물이 고여 있었고, 빗물에 쓸려온 흙과 오물이 뒤섞여 질척거렸다. 방금 기와에서 미끄러진 것도 분명 이것 때문이었다.
카이는 이곳이 원래 깔끔하고 넓은 공원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노인들은 운동을 즐겼으며, 한가롭게 노니는 비둘기도 있었다.
카이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그 평화로운 시간이 바로 어제 일인 듯, 손만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카이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그 행복했던 순간과 에제트 사람들은 결국 사라진 환영일 뿐이었다.
너무 배고파서 환각이라도 본 건가?
뭘...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먼저 먹을 거나 좀 찾아봐야겠어.
카이는 원래 계획대로 이곳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챙겨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할 줄은 몰랐다.
한 번은 다른 난민 구역을 지나던 카이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임신부에게 남은 식량을 전부 주었다. 그리고 침식체와 싸우다 방향 탐지기가 망가지는 바람에,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려서야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홀로 떠도는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단했지만, 카이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짐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수색한 카이는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먹을 만한 것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긴 쓸 만한 거라면 사람들이 예전에 다 가져갔겠지. 식량 같은 필수품은 말할 것도 없을 거고...
남은 건 쓸모없는 연료 같은 것뿐이네.
모두 쓸모없는 것들뿐이야.
눈을 감은 카이의 머릿속에는 너무 피곤해서 잠시 휴식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결말은 그저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카이의 의식은 곧 어둠 속에 잠겼지만, 그 어둠 속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파 기름 같은 냄새였다. 거기에 후추 냄새도 섞여 있었고, 마치 카이의 코앞을 맴도는 것 같았다.
?
너무나 익숙한 냄새에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카무이의 커다란 얼굴이 불쑥 나타났고, 그들 사이엔 조금 남은 압축 비스킷이 놓여 있었다. 그 향긋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이 압축 비스킷이었다.
카무이가 눈을 깜빡이자, 카이도 따라서 눈을 깜빡였다. 둘은 몇 초간 얼어붙은 듯 서로를 바라보았고, 압축 비스킷 부스러기 한 조각이 카이의 얼굴에 떨어져서야 이 정적이 깨졌다.
야호! 카이, 잘 잤어?
으아아!!
카이는 재빨리 카무이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부스러기를 급하게 털어내며 조금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카, 카무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아사르와 카트레브까지 왜 여기에 온 거야?!
아사르는 눈을 위로 굴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짜증 난 듯이 카무이가 흔들어대던 압축 비스킷을 빼앗았다.
음식을 낭비하지 마, 카무이. 그거 카이에게 주려고 남겨뒀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줘.
뭐, 장난친 게 아니야. 네가 너무 급하게 굴면 카이가 놀랄 수 있다고 해서, 이렇게 천천히 주의를 끌어보려고 한 거잖아.
그리고!! 내가 개발한 "후추 마법" 압축 비스킷은 나 다음으로 카이가 제일 좋아한다고! 압축 비스킷에는 후추가 딱 맞아! 카이를 깨우기에는 이게 최고라니까!
어때? 카이? 하나로는 어림없지? 압축 비스킷은 아직 많으니까 실컷 먹어!
후추와 파, 내가 가져왔어.
제발 조용히 좀 해줄래.
카이는 평소처럼 카무이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그리고 카무이가 건네는 압축 비스킷도 받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마침내 할 말을 정리한 듯 카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음, 이거 "후추 마법" 압축 비스킷이야. 너 입맛이 변한 거야?
이렇게 맛없는 건 음식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까, 너희나 천천히 먹어.
날 따라오지도 말고, 더 이상 찾지도 마. 난 이미 더 좋은 곳을 찾아서, 그리로 가는 거니까 막지 마.
말을 마친 카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카무이 일행과 거리를 두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카무이는 어리둥절했다. 카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토록 좋아하던 후추마저도 이렇게 거절하는 걸까?
카무이는 의문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카이에게 다가갔지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카이는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그 말을 믿을 리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카이.
이 며칠 동안 혼자 떠돌면서 많이 고생했을 텐데,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
...
아니. 난 절대 다시는 에제트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빨리 가라고!! 더는 날 신경 쓰지 마!
카이는 홱 몸을 돌려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카이는 아무런 조명도 챙기지 않았고, 하늘은 서서히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카이는 짙어가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카이는 그저 멀리, 더 깊이 도망치고 싶었다. 이 폐허 뒤로만 숨으면 그들이 영원히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으윽!!
이상한 바람 소리에 카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고, 이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크아악!
그건 폐허에 침입한 침식체였다. 놈은 분명 카이의 존재를 발견하고 뒤쫓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이의 상태와 체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카이는 무기를 챙기지 않아서 꺼낼 수 있는 건 호신용 비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변에 쓸 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며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의 공격은 민첩하게 피했지만, 반격하기 위해 달려들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서 몸을 웅크린 채 쪼그려 앉고 말았다.
크아악!
침식체가 덮쳐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카이에겐 더는 도망가거나 피할 힘이 없었다.
카이!!
뒤쫓아온 카무이가 침식체의 공격을 막아냈고, 아사르와 카트레브는 행동 능력을 잃은 카이의 곁을 지켰다.
아사르! 넌 카이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 카트레브는 남아서 날 도와줘!
카무이는 소리를 지르며 묵직한 대검으로 침식체의 코어를 향해 어둠을 가르며 내리찍었다.
다행히 이 침식체는 손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었다.
침식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급히 카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카이의 상황은 어때?
외상은 없지만, 태양 코로나 유전자의 부작용이 심각해.
억제제를 가져와서 다행이네. 어서 주사하자.
카무이는 즉시 카이에게 억제제를 주사했고, 그 후 일행은 카이가 전에 머물던 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그렇게 셋은 주변을 경계함과 동시에 카이를 돌보면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여긴... 너희는... 카무이...
너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서 꺼져!
카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망가려 했지만, 이내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카이!
카무이가 재빨리 카이의 몸을 받아안았다. 한때 그렇게 듬직하고 따스했던 몸이 지금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에제트로 돌아가서 치료받자.
안 돼. 난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난 반드시 에제트를 떠나야 해.
카이.
카무이의 돌려 말하는 배려심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아사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가 왜 떠나려 하는지 알아. 여기는 우리가 널 구했던 곳이잖아. 넌 여기서 모든 가족을 잃었고, 그 후 에제트에 들어왔지.
여긴 오래전에 폐허가 되어버렸어. 이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고, 넌 더 절실하게 알고 있겠지.
네가 여기에 와서 남은 시간을 보낼 거라고 카무이가 예상했어.
이젠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예전 집으로 도망친 거야?
하지만 네가 에제트에서 겪은 모든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 바보가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널 찾으러 온 이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렇게 쉽게 집을 나가겠다고 하지 마.
...
카이, 내가 마법약을 가져왔어.
마법약?
아사르와 나머지 둘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런 환상적인 단어가 카트레브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카트레브는 품에서 평범한 압축 비스킷 한 봉지를 꺼내 서툴게 카이의 품에 안겨주려 했다.
카이, 먹어. 먹으면, 울지 않아.
?
바람아,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쉰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낯익은 노래에 카이는 잠시 멍해졌다. 그건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 멜로디였다.
달콤한 노랫소리가 살며시 들려오고{226|153|170}~ 반짝이는 별빛이 조용히 흘러가네{226|153|170}~
바람아, 불어라{226|153|170}~ 바람아, 불어라{226|153|170}~ 저 멀리{226|153|170} 아름다운 곳으로{226|153|170}
카이, 왜 불러? 노래.
쉿... 아이들이 잠들었어.
아이들, 방금까지, 울었는데...
내겐 마법약이 있으니까.
카이는 마술을 부리듯 뒤에서 압축 비스킷 몇 봉지를 꺼냈다.
아, 네 식량을 모두 아이들에게 나눠준 거였어?
압축 비스킷, 마법약?
응, 여기에 마법을 걸었거든. 이렇게 "가족의 사랑"을 조금 넣으면 마법약이 되는 거야.
이 아이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춥지도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을 거야.
신기하지? 너희가 조금 더 크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카이는 항상 그렇게 따뜻하게 모두를 대했었다.
마법, 나도 배웠어, 그러니까...
그러니 그만 울어도 돼, 카이. 이제는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아도 돼.
그 누구도 카이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말과 행동으로 카이에게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했다.
나...
서투른 따뜻함에 카이는 그저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다시 괴로운 듯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난... 너희랑 같이 돌아갈 수 없어.
마법약의 힘이 모자란 거야? 괜찮아. 나와 아사르한테 아직 많이 있으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발리콘 계획이 정체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더는 돌파한 멤버가 없잖아!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라이프 쪽의 부담은 이미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됐을 거야.
상부에서 최근 테스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명단을 작성하라고 했어. 난 흑점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시간이 남았다 해도 결과는 뻔해.
난 이제 전환할 가능성이 없단 말이야. 오히려 통제를 잃을 수도 있다고. 자원만 낭비하며 모두에게 부담이 되느니... 차라리 물자와 희망을 너희에게 남기고 떠나는 게 낫잖아.
부담이 아니야, 카이.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 사이에 부담이란 말을 쓰지 않아.
그리고 넌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나왔잖아. 그러면 밖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
넌 마지막까지 우리를 생각해줬어, 그러니 우리도 너와 같은 마음을 가져도 되겠지?
희망은 에제트 모두의 것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건, 우리 가족 모두가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우리를 믿어, 카이. 그리고 너 자신을 믿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카이는 카무이를 껴안고는 목 놓아 울었다.
그들은 이미 수많은 어두운 밤을 함께 견뎌왔다. 지금도 그 끝없는 여정 중 한순간일 뿐이지만, 그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았다.
등불이 없어도,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도,
그들은 따스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황금 태양 훈련장
에제트
하아!!
카무이가 고함을 지르며 전력으로 공격했다. 이마에서 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지만, 연습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사르 역시 조금 전에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친 터라 카무이보다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카무이의 체력이 걱정된 아사르는 이번 데이터를 기록하자마자 바로 기기를 껐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야.
카무이, 카트레브. 일단 훈련을 멈추고, 이쪽으로 와서 데이터를 확인해.
카트레브는 자신을 더욱 극한까지 몰아붙인 터라 제자리에서 잠시 휘청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카무이와 함께 아사르 쪽으로 걸어갔다.
신체 능력은 더 강해졌지만, 안정성이 떨어졌어.
그리고 우리 체내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 전환율과 의식의 바다 안정도가 모두 오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0.67%를 넘지 못하고 있어.
그렇다는 건... 변화가 거의 없단 말이지.
우리 훈련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야.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태양 코로나 유전자의 전환 단계에 있다는 거야.
이번 정체기에 들어가면서, 모든 노력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아. 아무리 많이 쏟아부어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잖아.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획기적인 진전이 없는 이상 에제트는 세계 정부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주 작전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고, 에제트는 끊임없이 더 많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어느 쪽의 압박이든 결국 에제트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었다.
계속, 훈련하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자.
카트레브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해결책은 이것밖에 없었다. 라이프는 군부와 정부 쪽의 일을 그들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발리콘 계획을 진척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단 한 명만이라도 돌파에 성공한다면 에제트에 더 큰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무리하진 마.
거칠게 숨을 몰아쉰 아사르는 억누를 수 없는 근육통에 동작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몸이 망가지면 진척이 오히려 더 늦어질 거야. 오늘은 다 한계를 넘었으니, 일단 돌아가서 쉬자.
난 괜찮아. 체력이 아직 좀 남아서 더 연습할 수 있어!!
너희 먼저 돌아가서 쉬는 건 어때? 아니면 여기서 구경해도 돼! 요즘 새로 개발한 훈련 방식을 보여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카무이가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카무이의 몸도 이미 한계를 넘었다는 신호였다. 곧이어 머리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카무이에게 밀려왔고, 그에게는 더는 저항하거나 버틸 힘이 없었다. 그리고 의식은 이미 반쯤 혼미한 상태였다.
카무이!
아사르와 카트레브는 즉시 카무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그를 부축해 의무실로 달려갔다.
의료실
에제트
간단한 진단과 치료를 받은 뒤에야 상태가 안정된 카무이는 병상에 널브러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파... 너무 아파.
카트레브... 대련할 때 좀 봐주면서 해. 너무 아프단 말이야.
아사르... 왜 너까지 때리는 거야? 네 압축 비스킷을 먹지 않았다고...
곁에 있던 두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뒤 카트레브는 카무이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보려 했지만, 카무이는 깨어날 기미 없이 잠꼬대만 이어갈 뿐이었다. 카트레브는 하는 수 없이 이미 표정이 굳어버린 아사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사르는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냅다 달려들어 카무이의 뺨을 사정없이 갈겨 기어이 눈을 뜨게 했다.
아사르는 말없이 다가가 굳은 얼굴로 카무이의 귀를 30도, 60도, 150도까지 비틀었다.
아파! 아프다고! 누구야?!
깜짝 놀란 카무이는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귀를 비튼 이에게 따지려 했다. 하지만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앞에 서 있는 아사르를 보자 입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무이가 아사르의 이런 화난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전에도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전장에 뛰어들어 상처가 더 나빠졌을 때, 아사르는 병실에서 카무이를 쏘아보며 약을 발라 준 적이 있었다.
형...
친한 척하지 마. 소용없어.
카무이, 넌 정말 배짱도 좋아. 훈련 구역의 퍼니싱 농도를 높인 것도 모자라서, 이젠 안전 기준치까지 넘겨버린 거야?
넌 임계치를 사다리 타기로 정한 거 같니?! 얼마나 많은 실험과 정밀한 계산을 거쳐서 나온 건지 알기는 해? 훈련 중에 네가 퍼니싱 때문에 죽지 않도록 정해 놓은 거라고!!
두 배나 넘게 올려서 대체 뭘 하려던 거야! 죽고 싶으면 전장에 나가. 훈련장에서 쓰러져서 우리가 신 치우게 만들지 말라고!!
아사르는 너무 격분한 나머지 선을 넘은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옆에 있던 카트레브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아사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말했어.
함부로, 말하면, 입 막고, 또 하면, 입 때려.
아사르는 잠깐 움찔했다. 카트레브의 말은 처음 들은 게 아니었다. 어릴 적 철없이 카무이에게 거친 말을 퍼부을 때, 에제트에 막 온 카트레브에게 거부감을 품을 때, 오딜리는 이 규칙을 내세우며 그들을 혼내주곤 했다.
아사르는 더는 말하지 않고 카트레브의 손목을 살며시 잡으며 이젠 놓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카무이, 잘못해서, 아사르, 마음 아파.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카무이는 조금 겁먹은 듯 아사르와 카트레브를 번갈아 바라보며,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아사르, 카트레브.
너희를 걱정시키지 말아야 했어.
아사르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잠시 혼자 뾰로통하고 있었다. 그러다 카무이의 의기소침한 얼굴을 본 아사르는 비로소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우리와 상의했어야지.
속도를 올리고 싶다면, 우리 같이 조금씩 올려가면 되잖아. 한계에 닿으면 바로 멈추고.
카무이, 잊지 마. 우린 아직 최종 전환기에 들어서지 않았고, 구조체로 개조되지도 않았어.
우린 아직 인간이야. 평범한 인간이라고.
인간의 목숨은 하나뿐이야.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네가 몇 번이나 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카무이는 아사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사르가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는 건 자신을 용서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카무이는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너희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몸을 더 아끼도록 할게.
하지만...
카무이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계속 조금씩 시도할 순 없잖아. 이젠 시간이 얼마 없어.
마리스가 얼마 전에 정보를 좀 흘려줬어. 에제트가 세계 정부에 더 확실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세계 정부에서 자원 할당량을 다시 줄이거나, 물자 지원을 전부 끊어버려 에제트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할 거래.
마리스? 왜 그 여자와 연락한 거야?!!!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아사르를 보며 카무이와 카트레브는 깜짝 놀랐다.
카무이, 어떻게 아직도 마리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거야? 대체 어디서 찾은 거지?!
그쪽에서 먼저 익명 메일로 연락해 왔어. 하지만 신분을 숨기지 않아서 누군지 알 수 있었던 거야.
마리스가 에제트에서 뭔가를 얻으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어.
만약 마리스가 원하는 것이 타협할 만한 거라면, 에제트가 이 시기를 버텨낼 수 있도록 좀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근데 마리스의 목적은 딱 하나뿐인 것 같았어. 에제트를 해산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복종하고 통제받게 만들거나.
그건 불가능해.
맞아. 그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마지막 선택지만 남았네. 지금의 전환 정체기를 빠르게 돌파해서, 그 성과로 에제트의 자원 보급을 얻어내는 거야.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태양 코로나 유전자는... 아직 한참 부족한 상황이야.
아사르는 카무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발리콘 계획에서 그들은 현재 가장 뛰어난 훈련생 셋이라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론 연구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 그들에게 남은 승부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태양 코로나 유전자를 빠르게 전환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나도, 카무이랑, 같이 할게.
상황을 이해한 카트레브는 오히려 카무이의 판단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일을 카무이 혼자 짊어지게 하는 건 반대했다. 그래서 카트레브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도 카무이와 함께 더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꿈도 꾸지 마!!
거친 목소리에 카무이는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라이프가 언제부터인지 그곳에 서 있었다.
어? 라이프?
검사 보고서에 네 체내 퍼니싱 농도가 안전 기준치를 넘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고 나왔고, 의사가 라이프한테 알렸어.
아사르는 태연하게 병상 옆에 기댄 채, 자신은 "막지 않았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 성격상 절대 말들을 리가 없고, 또 혼자 몰래 무리한 추가 훈련을 할 게 뻔하니까.
아사르 말이 맞아.
오늘부터 훈련실의 퍼니싱 농도를 엄격하게 통제하겠다. 그리고 앞으로 과다 훈련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카무이, 네가 에제트를 위해 이런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해치는 방식을 쓰지 마라.
하지만 에제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카무이는 라이프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래서 에제트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길 바랐다. 카무이가 병상에서 막 일어나려던 순간, 라이프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하지만 라이프의 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운 위로처럼 느껴졌다. 카무이는 그 온기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이런 온기를 느끼지 못한 지 얼마나 됐을까?
오딜리와 에우르디스가 떠난 후, 그들을 이렇게 아이처럼 달래주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항상 앞장서서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어. 이런 걱정거리는 우리 늙은이한테 맡겨.
난 아직 세계 정부와 줄다리기 중이야. 에제트에 오기 전에 난 그래도 좀 영향력이 있는 부사관이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모두 각자 힘을 보태면 반드시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맞아.
정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다 같이 방법을 찾으면 돼.
날 믿어. 카무이. 우린 꼭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거야.
카무이는 아사르의 단호한 눈빛에서 이 말이 결코 허황된 자기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사르는 그런 확신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카무이와 에제트 모두에 대한 그의 약속이었다.
아사르는 자신의 방식대로 에제트를 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사르는 조용히 단말기를 거두었다. 빛나는 전자 스크린이 그의 뒤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깜빡이는 화면 위에는 방금 보낸 메일이 남아 있었다.
"에제트의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특히 카무이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우리의 약속을 잊지 마세요. <color=#ff4e4eff><size=40>마리스 의원님</size></col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