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5 저무는 태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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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5-12 태양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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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숙소 휴게실

에제트

아사르는 문틀에 기대어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왔어?

카무이는 피곤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카트레브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아사르는 그 표정만 보고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라이프 쪽에서는 그 군령에 대해서 뭐라고 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로... 우리를 사지로 내몰 셈인 거야?

여전히 아무것도 가르쳐 주질 않네.

카무이가 씁쓸하게 웃어 보이자, 뒤에 서 있던 카트레브가 카무이의 머리를 툭툭 다독여 주었다.

카트레브는 에제트에 처음 들어와 적응하지 못하던 시절, 밤마다 남몰래 보육원 식구들을 그리워하며 울곤 할 때 카무이가 아사르를 데리고 와서 지금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하던 그 다정한 손길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 오늘은 가족의 날이잖아. 망칠 수는 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우리가 모두 다 같이 맞서면 돼.

저기 봐!! 드디어 왔어!

셋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기에 무거운 고민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야! 그걸 다 먹으면 어떡해! 다음 달 가족의 날 때 먹으려면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니까!

아벨이 맞은편에 앉은 아이를 향해 투덜거렸다.

그, 그게...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가족의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령이 내려오면 우리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잖아. 나중에 먹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지금 다 먹어 치우는 게 낫지.

퉤퉤퉤!! 재수 없게 무슨 소리야? 마지막일 리가 없잖아!

됐어. 그냥 먹게 놔둬.

앞으로 일어날 일은... 지금 우리도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에바의 담담한 말에 허겁지겁 간식을 집어삼키던 달렌조차 멈칫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음식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이제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자리에 모여 앉아서, 카무이와 아사르 그리고 카트레브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 군령에 관해서는 더 알아낸 것이 없어.

라이프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서 자기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만 해.

방법? 방법을 찾겠다고 했어? 꿈 깨, 카무이. 우리를 도울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군말 없이 따르게 할지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거겠지.

라이프는 상부에 건의해서 군령을 취소시킬 방법을 찾겠다고 했어.

벌써 석 달이나 지났어, 카무이!

정말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뭐라도 했겠지.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때? 소식도 없고, 정보도 그대로야. 그리고 여전히 어물쩍 넘어가려고만 하잖아. 정신 차려! 넌 속고 있는 거라고!

...

그 사람들은 에제트의 가족이 아니야. 우리를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고. 라이프한테 중요한 건... 우리보단 자기 전우들이랑 병사들이야!

아사르... 싸우지 마.

괜찮아, 카트레브.

카무이가 낙담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카무이는 아사르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라이프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겠는가.

카무이, 너한테 화풀이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난...

응. 알아.

지금 우리의 훈련 상태나 전환 진도로 실전에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 게다가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원을 가야 하는 곳들은 전부 고위험 전투 구역이야.

우린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어.

카무이는 차마 그 말까지는 내뱉지 못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만 있는 건 아냐. 라이프가 도와주거나, 특훈을 통해서 전환 속도를 높인다면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그게 희망이 될지 절망이 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그래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첫 번째는 에제트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군령이 내려오면 그때 대응하는 것.

두 번째는... 군령이 정식으로 내려오기 전에 몰래 도망치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계 정부의 지원도 끊기고 에제트 요새의 보호도 받을 수 없어. 말 그대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야.

카무이가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의 미래를 다 같이 결정했으면 좋겠어.

어떤 길을 택하든, 우린 끝까지 너희 곁에서 지켜줄게.

아이들은 의외로 차분했다. 사실 다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던 삶을 향한 희망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에제트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난 죽으러 가기 싫어.

이 지옥 같은 전쟁통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침식체들도 피해서 여기까지 왔어. 전투력 평가를 통과해서 에제트에 들어오려고 일주일 내내 밤잠 줄여 가며 남몰래 훈련까지 했다고.

이제 겨우 강해질 기회를 잡았는데... 무사히 전환에 성공하면 나 같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못 해 보고 허무하게 버려지는 건 싫단 말이야!

맞아!! 우리는 에제트의 정식 대원이고 발리콘 계획의 훈련생이야. 자랑스러운 황금 태양의 씨앗이라고! 저 윗선에서 말하는 쓰레기나 쓰고 버리는 소모품 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우리가 에제트에 오기도 전에 퍼니싱 때문에 죽었다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너무 어렵게 집을 되찾았고, 서로 의지할 동료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어.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포기를 당해야 하는 건데?!

맞아. 우리도 이제 스스로 싸울 수 있어! 우리끼리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치면, 분명 다른 곳에서도 우리만의 집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당장 나가자!! 우리만 뿔뿔이 흩어지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든 간 그곳이 바로 우리의 에제트야!

소년들의 눈동자에 다시금 빛이 감돌았다. 더 이상 두려울 건 없었다. 높은 자들이 그토록 겁내는 비극을 이들은 이미 지겹도록 겪어왔다.

소중한 보금자리와 가족을 빼앗기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시간. 정처 없이 떠도는 비참한 생활은 차라리 익숙했다. 하지만 그 가혹한 운명이 기적처럼 아이들을 한데 묶어 주었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까지 쥐여 주었으니, 절대로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길을 택하겠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내뱉었다.

그래. 우리를 무시하는 놈들에게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

누군가가 우리를 포기한다면 우리끼리 서로를 붙잡아 주면 돼. 우리 힘으로 증명해 보이자고.

우리를 폐허에 던져두면 그대로 죽어버릴 줄 알았겠지만, 천만에.

우리는 폐허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끝내 꽃을 피울 거야. 에제트의 선배들처럼, 우리만의 집을 다시 만드는 거야.

그곳이 진정한 우리들의 에제트가 될 거야!

소년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고생길이 뻔한 방랑 생활조차 이들에겐 설레는 모험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이들에게 안락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가족"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언젠가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보게 될 터였다.

다음 날 밤, 마침내 "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요새의 경비 경로를 꿰뚫고 있던 카무이 일행은 감시를 피해 소리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온종일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일행은 숲속 바람이 잦아드는 언덕 아래에 천막을 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카무이, 아사르, 밥 먹어.

카트레브가 천막 안으로 들어와 통조림 두 통을 내려놓으며 밤늦도록 회의 중인 둘을 챙겼다.

고마워. 마침 잘 왔어. 작전 계획만 마무리하고 바로 먹을게.

어, 카트레브! 얼굴이 왜 이렇게 젖었어? 이리 와. 닦아줄게!

아벨이, 물가를 찾았어. 다들, 씻는 중이야.

카무이가 궁금한 듯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 아래 아이들이 근처 샘가에 모여 웃고 떠들며 세수하고 있었다.

어제 경로를 다시 짚어봤는데, 이동 속도가 좀 늦긴 해도 침식체와 마주치지도 않았고 에제트의 추격병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아. 보급소에서 챙긴 물자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역할 분담은 그대로 가자. 카무이는 엘리트 인원을 데리고 앞에서 길을 열고, 카트레브는 계속 뒤쪽을 경계해 줘.

알았어. 계획대로라면 세계 정부의 영향력이 적은 보육 구역부터 찾아야 해. 거기서 일단 자리를 잡고 상황을 보자.

기지 자료실에서 지도를 가져왔다고 했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아사르는 카무이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밖을 내다보았다. 품속에 숨겨둔 지도를 꺼내지도 않았다.

보육 구역 후보지가 몇 군데 있는데, 장단점이 있어서 고민 중이야.

서두를 것 없어. 불침번 서면서 정리했다가 교대할 때 알려줄게.

그 지도는...

카무이! 아사르! 어서 와서 좀 씻어!

카무이가 입을 떼려는 찰나,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말이 끊겼다.

아무튼 오늘 밤도 평소처럼 두 팀으로 나눠서 불침번 서자. 내가 전반부를 맡을 테니까, 너희 둘은 후반부 맡아. 잠자리는 꼭 붙여서 마련하고.

그래. 오늘 다들 고생 많았어.

깊은 밤,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전반부 불침번을 맡은 아사르만이 홀로 깨어 있었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딱히 위험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카무이, 카트레브와 같이 쓰는 천막으로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카트레브는 이번에도 셋의 잠자리를 빈틈 하나 없이 붙여놓았다.

아사르는 베개 밑에서 단말기를 꺼내고, 짐 속에 숨겨 두었던 지도와 전황 자료를 펼쳤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망설이던 아사르는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카무이

아사르...

일어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온 카무이의 목소리에 아사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손이 아사르의 팔을 붙잡았다.

카무이가 깬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자지 않았던 걸까? 설마 다 눈치챈 건가?

잠시 망설이던 아사르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추궁을 당하던 무엇이든,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카무이, 너...

하지만 뒤를 돌아본 아사르를 "맞이한 건", 세상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자는 카무이의 얼굴이었다.

...

카무이

얘들아... 무서워하지 마. 내 뒤로 숨어.

옆에서 자던 카트레브도 잠버릇이 고약하긴 마찬가지였다. 카무이의 배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수시로 발로 차는 바람에 카무이가 끙끙대고 있었다.

카트레브

눈 온다, 추워. 아사르는, 가운데 앉고, 카무이는, 오른쪽, 난 왼쪽에...

바보들.

아사르는 카트레브의 다리를 치워 주었다. 조금만 있으면 다시 똑같아지겠지만, 그래도 둘이 걷어찬 이불을 끌어다 다시 덮어 주었다.

볼일을 다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가려던 아사르는 결국 다시 돌아와 카무이의 벌어진 입을 꾹 다물게 해 주었다.

내 자리에 침 묻히기만 해봐, 바로 밖으로 쫓아낼 줄 알아, 카무이.

천막을 나온 아사르는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지도와 자료를 훑어본 아사르는 쪽지를 꺼내 확인할 필요조차 없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버린 그 번호로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5분이야. 아사르 군, 무려 5분이나 늦었네? 다음번에도 늦으면 이 통신망을 바로 없애 버릴 거야.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길래. 나도 모르는 척하고 도와주지 않으려고 했지 뭐야.

하지만... 이번 딱 한 번만 봐 줄게. 너희가 너무 불쌍해서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 거야. 같은 처지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아사르는 마리스의 도발에도 동요하지 않고 심호흡을 한 뒤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기다려줬잖아.

대체 에제트에서 뭘 얻으려는 거지?

흠... 난 똑똑한 아이가 좋더라, 아사르.

당연히 원하는 게 있지. 이건 "거래"니까. 거래가 뭔지는 잘 알지?

세계 정부는 에제트의 옛 아카이브실에 있는 "어떤 물건"에 관심이 많거든. 근데 라이프가 입을 열어야 말이지.

하지만 라이프의 오른팔인 아사르 군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에제트에 무슨 짓을 하려고?

내가 뭘 하겠어? 세계 정부와 에제트는 공동의 적을 둔 혈맹이야. 난 그저 내 동맹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을 뿐이고.

에휴, 아사르. 넌 다 좋은데 의심이 너무 많아. 지난번에 들렀던 보급소도 내 말대로 물자도 넉넉하고 안전했잖아, 안 그래?

난 이미 너희에게 필요한 걸 줬어.

설마 곁에 있는 아이들보다 너희를 속인 그 위선적인 요새가 더 소중하다는 건 아니겠지?

...

아사르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카이브실 비밀번호를 알려줄게. 하지만 그전에 나머지 지도 절반을 내놓았으면 하는데.

좋아! 난 너처럼 결단력 있는 애가 참 좋더라.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리스가 나머지 자료를 아사르의 단말기로 전송했다.

아사르 역시 약속대로 상대방이 원하는 비밀번호를 알려 줬다.

전에 했던 약속은 아직 유효한가?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해도 되는 거지?

의구심 섞인 질문에 통신 너머의 의원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지. 나의 소중한 작은 태양들아. 걱정하지 마.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을게.

여긴 뭔가 이상해.

아사르의 판단에 따라 일행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보육 구역 외곽에 이미 도착해야 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울창한 숲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정보가 업데이트됐나 봐. 하지만, 이 근처에 보육 구역이 있는 건 확실해.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서 쉴 곳부터 찾자.

좋지 않은 날씨에 안개까지 끼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마침내 보육 구역의 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았다! 저기 봐!!

아벨이 기뻐하며 입구 쪽 연락 장치를 찾으려 다가갔다. 하지만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잠겨있지 않을 것을 발견했고, 가볍게 밀자 맥없이 열렸다.

어?

잠깐! 들어가지 마!!

카무이가 외쳤지만, 무모한 소년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벨이 보육 구역 안으로 급히 뛰어들자마자 보이지 않는 공격이 그를 덮쳤고, 아벨은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침식체다!!

안개 속에서 붉은 눈빛이 번뜩였다. 카무이는 즉시 달려가 소년을 일으켜 세우고 뒤로 물러났다.

카무이!! 왼쪽이야!!

아사르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한 카트레브가 이를 악물고 다른 침식체의 기습을 간신히 막아냈다.

윽!!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침식체가 여기까지 들어온 건가?!

!!

카무이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칼이 또 다른 침식체의 돌진을 저지했고, 기합과 함께 침식체를 수 미터 밖으로 날려 버렸다.

크르릉!!!

이 정도 숫자라면... 안에 훨씬 더 많을 거야!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보육 구역은 이미 함락됐어!!

도망쳐!!

아이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헤매고 헤맨 끝에 도착한 곳은 보육 구역 외곽의 허물어진 벽 근처였다.

이곳의 침식체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기습에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안전할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콰직!"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캐롤이 튕겨 나갔다. 짙은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기계 팔이 그녀의 배낭을 찢어발기고 벽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으아악!!

캐롤!!

캐롤!! 피해!!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무장한 로렌이 달려와 캐롤의 앞을 막아서며 공격을 대신 받아냈다.

뒤이어 다른 병사들도 속속 도착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숙련된 실력과 장비를 갖춘 그들은 주변의 적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로렌 아저씨?!

안전한 퇴각로를 확보했다! 모두 우리를 따라와!

놈들이 너무 끈질기게 붙어 있어요!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요!!

카무이가 조를 향해 소리쳤다. 일부 침식체를 처치하긴 했으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놈들에게 발이 묶여 후퇴는커녕 버티는 것조차 한계였다.

우리가 남아서 뒤를 맡을게!

명심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뛰어! 무조건 무사히 에제트로 돌아가는 거다!

로렌 아저씨!! 저도 남을게요! 같이 싸워요!

안 돼! 캐롤, 이번만큼은 아저씨 말을 들어야 한다.

너희는 발리콘 계획의 희망이야. 에제트, 아니 모든 인간의 미래야.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앞장서는 게 당연해.

여기서 죽게 둘 순 없어. 조! 캐롤을 데리고 어서 가!

쳇, 알았어! 로렌, 잘 들어. 난 애 보는 건 질색이니까 너도 반드시 에제트로 돌아와야 해!

서둘러! 늦으면 다 죽어!

울부짖는 캐롤을 무시한 채, 조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침식체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다른 병사들도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남은 자들은 압도적인 수의 침식체와 마주하게 됐다.

윽!

침식체들이 로렌을 에워쌌다. 놈들은 당장이라도 로렌을 찢어발길 듯 으르렁대며 위협했다.

하!! 목청만 크면 다인 줄 알아? 내가 겁먹을 것 같냐!

너희 같은 괴물 놈들이 우리 인간의 터전에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가족들을 죽였지!

누구한테나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굴겠지? 상대가 노약자든 병자든 상관없이 말이야. 내 딸은 분명 너희 같은 놈들의 손에 죽었을 거야.

그때는 내 딸을 구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라. 이 악마 같은 놈들아, 그 아이들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다 지옥으로나 꺼져라!!!

지옥에나 가버려, 괴물 놈들아.

우리 애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못한다!

로렌이 수류탄 핀을 뽑았다. 그것이 마지막 마무리였다. 이제 아무도 에제트로 도망치는 아이들을 쫓아가지 못할 터였다.

아이들이 우리 대신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로렌은 생각했다.

고막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붉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불꽃은 거대한 벽이 되어 적들이 오는 길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통신실

에제트

라이프는 대원들의 신호가 표시된 홀로그램 창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확인 신호에도 응답이 없자,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너희 때문이야. 철없는 꼬맹이 녀석들 때문에!!

조는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제트에 돌아오자마자 라이프에게 증원을 요청해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폭발로 무너진 잔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연락실로 돌아와 로렌의 신호를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건 정적뿐이었다. 남겨진 병사 중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신호 장치는 파괴된 것으로 표시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너희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멍청한 로렌이 너희를 구하겠다고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은 없었을 거야.

특히 캐롤, 너를 구하겠다고 고집부리지만 않았어도 로렌은 죽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보육 구역에 침식체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캐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동생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캐롤도 항상 언니와 동료들 뒤에만 숨던 가냘픈 소녀가 아니었다. 캐롤은 손에 쥔 브로치가 부서질 듯 꽉 움켜잡은 채 스스로 앞으로 나섰고, 참아왔던 울음을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나 때문이야. 떠나기 전에 나를 항상 돌봐주던 로렌 아저씨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 작별 인사를 적은 편지를 남겼어. 그걸 보고 우리가 떠난 걸 아신 거야.

로렌 아저씨가 생일 선물로 줬던 이 브로치는 사실 아저씨의 딸이 선물한 거였대. 아빠가 어디 있는지, 무사한지 딸이 확인할 수 있게 위치 추적기가 들어 있었대.

그래서 아저씨가 그렇게 빨리 우릴 찾을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편지만 쓰지 않았어도, 이 브로치만 안 받았어도...

전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아저씨가 죽은 거라고!

캐롤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조에게 허리를 깊게 숙인 캐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처절한 흐느낌만이 새어 나왔다. 조 역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참견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바보들한테도 너희 같은 꼬마들 뒤치다꺼리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이제 돌아오지 못해!! 지금 와서 그런 소리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죽으려면 너희가 죽었어야지.

조!! 닥쳐라!!

라이프의 호통과 카무이의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조가 손을 휘두르는 찰나, 카무이가 재빨리 끼어들어 캐롤 대신 뺨을 맞았다.

카무이!!

!

아사르, 난 괜찮아. 카트레브, 그만하고 내 옆으로 와.

카무이는 뺨을 맞은 충격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면으로 조를 응시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도망쳐서 생긴 일이니, 책임은 내가 져야지.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게.

하지만... 결코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야. 우린 이미 이주 계획 군령에 대해 알고 있었거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동료들이 죽으러 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야.

탈출을 계획한 건 나니까 내가 책임질게. 대신, 군령을 수행하기 싫어하는 다른 애들은 제발 보내줘. 그 애들이 아무 이유 없이 버려지고 희생당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믿으면 안 돼! 계획은 나도 같이 짰다고. 처벌을 하겠다면, 날 처벌해!

나도 포함이야.

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결정은 우리가 다 같이 내린 거잖아. 절대로 너희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래요! 우린 그냥 억지로 끌려가서 죽기 싫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에요!

벌을 주려거든 우리 모두를 벌하세요! 저들에게 쓰레기 취급당하며 고위험 구역으로 내몰리느니, 우리 목숨으로 로렌 아저씨와 대원분들께 속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조용히 해!!

라이프의 고함에 소란스럽던 연락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 잘못이다. 카무이가 날 찾아왔을 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놔야 했다.

군령이 내려왔지만, 우선 우리 군인들이 구조 임무를 완수하기로 이미 상부와 협의를 마쳤다.

너희는... 기지에서 훈련에만 전념하면 됐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충분한 힘을 갖게 된 후에 차근차근 실전에 투입하려 했어.

라이프는 착잡한 심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진심 어린 그의 목소리에 아이들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 반대입니다!!

구조 지역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부에서도 발리콘 계획 멤버들을 투입해 변수를 만들려 했던 거고요!

병사를 다 보낼 순 없습니다. 에제트 기지를 지킬 인원도 남겨야 하니까요! 엘리트 부대도 못 한 일을 우리 병사들의 목숨을 깎아가며 메꾸란 말입니까?

그럼, 자네 말은 마리스 의원의 제안대로 아직 성인도 안 된 이 아이들을 대신 죽으라고 내보내자는 건가?!

우린 군인이고 전사다! 그리고 어른이다! 아무리 큰 압박이 와도 우리가 짊어져야 해. 그게 우리의 의무다!

...

조는 자기 본심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억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조는 단지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럼, 제 이름도 지원 명단에 넣어주십시오.

한참이 흐른 뒤, 조가 어렵게 입을 뗐다.

지원이 필요한 지역들을 봤습니다. 제 고향과... 로렌의 고향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습니다. 전부 우리 병사들이 한때 삶을 일궈냈던 소중한 터전들일 겁니다.

대원들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가족이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거기 갇혀서 누군가 구해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더군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장교님을 몰아세우며 이주 계획을 서둘러 달라고 보챘던 건, 사실 이 때문이었습니다.

제발 저희를 보내 주세요. 어차피 누군가 나서서 희생해야 한다면, 최소한 고향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소원이라도 이룰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고향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딪혀 보고 싶습니다.

...

카무이는 조의 떨리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그의 붉게 충혈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마주하자, 카무이의 가슴 한구석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희는 발리콘 계획의 희망이야. 에제트, 아니 모든 인간의 미래야.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앞장서는 게 당연해.

로렌 아저씨의 마지막 한마디, 폭발하는 불길 그리고 결연한 조의 옆모습... 그 장면들이 머릿속을 타오르듯 스쳐 지나갔다. 에제트의 그 누구도 가족을 저버리지 않았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과 선의가 도리어 균열을 만들었고, 배후에서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은 진짜 원흉을 잊게 했다.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그 군령.

카무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저도 갈게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순간, 카무이가 결연히 손을 번쩍 들었다.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어요. 이건 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발리콘 멤버의 대표로서 저도 이주 작전에 참여하겠습니다.

군령의 분석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에요. 실전이 태양 코로나 유전자의 전환을 도울 수도 있고, 조금이라도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잖아요.

라이프 대장,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나도 전사인걸. 우리 에제트 대원들의 몸속에는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우리도 당신들을 지키고 싶어. 모두의 터전을 지키고 싶다고! 우리에게 힘을 보탤 기회를 줘!

나도 갈게. 내 실력도 카무이한테 뒤지지 않아.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에제트의 영웅 정신, 내가 이어받을게!

우리, 다 같이 간다.

저도 갈래요!! 로렌 아저씨의 가족이 살아있다면, 제 손으로 꼭 구해낼 거예요!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다른 훈련생들도 하나둘씩 동참했다. 에제트가 준 따뜻한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자신들을 지켜준 병사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몸을 던져 에제트를 지켰다면, 이제는 자신들이 그들의 집과 모두의 고향을 지킬 차례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소년들의 눈빛을 보며 라이프는 잠시 망설였지만, 끝내 그들을 막지 않았다. 전우들의 희생을 줄일 수만 있다면, 한 줌의 희망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언젠가 카무이에게 말했듯, 영원히 그들을 품 안에 가둬둘 수는 없었다. 이토록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언젠가 시련을 딛고 찬란한 태양처럼 빛나리라 믿었다.

청원서는 자료실에 두겠다. 작전에 자원할 사람은 와서 서명하도록.

마감은 일주일 뒤다. 그날, 여기 이름이 적힌 자들 모두와 함께 출전할 것이다.

조와 병사들이 가장 먼저 서명했고, 카무이, 아사르, 카트레브를 비롯한 훈련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발리콘 계획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이들은 남은 아이들에게 기지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으면 자신들이 앞에서 지켜 주겠다고 안심시켰다.

남겨진 아이들은 침묵에 잠겼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서명한 이들의 눈빛에는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소리 없이 번져나가는 용기라는 이름의 불꽃이었다.

일주일 뒤, 라이프는 최종 명단을 확인했다. 모든 병사와 모든 발리콘 계획 훈련생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라이프는 마지막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