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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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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5-11 가장 멀고도 가까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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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숙소

에제트

캐롤이 열나니까 무조건 따뜻하게 덮어줘야 해! 나 어릴 때 열날 때마다 우리 집에선 다 이렇게 해줬어.

차갑게 해야 해!! 네가 나은 건 그냥 네 목숨이 질겨서 그런 거야!

사람이 아프면 일단 잘 먹어야 해. 어제 받은 과일 꽤 달아 보이던데...

단건 알겠는데, 왜 내 사물함에 함부로 손을 대냐고! 미리 말해두는데, 내 과일을 가져가면 캐롤한테만 줘야 해. 네 몫은 없어.

일주일을 쉬면 캐롤은 몸이 다 나을 수 있나? 그때 가서도 훈련을 못 버티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돼.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살길은 열리잖아. 우리끼리 믿고 뭉치자! 당장 급한 건 캐롤을 보살피는 거야.

좁은 방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캐롤은 주변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며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은 곧장 고통스러운 기침으로 번졌고, 캐리가 급히 다가와 캐롤을 살폈다.

캐롤!! 왜 그래, 괜찮아?

캐리가 캐롤의 등을 두드려주자, 순식간에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캐롤만 쳐다보고 있었다.

콜록, 콜록, 나 괜찮아, 언니.

캐롤은 고통스럽게 기침을 몇 번 더 뱉어내더니, 건네받은 물로 마른 목을 축이고서야 완전히 숨을 돌렸다.

그냥... 다들 이렇게 모여서 얘기하는 게 좋아서 그래. 어릴 때 내가 아프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언니가 이렇게 같이 있어 줬잖아.

그때, 다들 나한테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웃긴 얘기도 하면서 웃게 해줬는데.

그걸 듣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웃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곤 했어.

자고 일어나면... 병은 다 나았었고, 다들 다시 행복하게 웃었는데.

어머니, 아버지... 흐흑...

캐롤은 폭신한 침대, 안전한 울타리, 생존 걱정 없이 부모님과 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뛰놀던 따뜻한 옛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날들은 이미 너무나 아득하게 멀어져 버렸다.

캐리, 캐롤! 여기서 절대 꼼짝하면 안 돼. 곧 누군가 너희를 찾으러 올 거야.

캐롤의 아버지는 들이닥친 침식체를 막아내다 온몸이 꿰뚫렸고, 어머니는 무너져 내리는 벽에서 두 딸을 밀쳐낸 뒤 영영 잔해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쪽에... 생존자가 있어!

아이들은 에제트 수색대가 발견할 때까지 어둡고 차가운 집 지하실에 웅크려 숨어 있었다.

그날 이후... 에제트의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갔고, 대화 소리도 점차 사그라졌다. 누군가를 돌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서로의 어설픈 경험에 의지한 채 근근이 온기를 나눌 뿐이었다.

밤마다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맬 때면 어김없이 같은 꿈이 반복되었다. 부모님이 곁에 걸터앉아 울다 웃으며,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인제 그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속삭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언니가 캐롤의 몸 위로 쓰러지듯 잠들면, 그 묵직한 무게에 놀라 퍼뜩 눈을 떴다. 그제야 캐롤은 침대 곁이 텅 비어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곤 했다.

캐리는 차마 아픈 동생의 머리를 품에 안아주지도 못한 채, 미친 듯이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알아. 나도 다 알아. 나도 너무 보고 싶어.

흐흑... 나도... 나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

평소 씩씩하던 소년이 끝내 슬픔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우렁찬 울음이 자매의 가냘픈 흐느낌을 덮어버렸다. 이에 시끌벅적하던 방 안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고, 주위에 서 있던 아이들마저 덩달아 슬픔에 잠겼다.

서로 의견이 안 맞아 티격태격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것 자체가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 아이들은 마땅히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살아야 했다. 넘어지면 부모가 일으켜 주고, 걱정 없이 내일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지금처럼 숨 막히게 가혹한 훈련을 억지로 버텨내며, 연약한 몸뚱이로 죽음의 문턱을 헤매는 비참한 현실에 내몰려서는 안 되었다.

나... 나 어제 훈련받다가 세게 넘어졌는데... 팔에서 피 엄청 철철 났어.

옛날엔 주사 맞는 것도 무서워서 엄청나게 울었는데, 어제는 말도 못 꺼내고 몰래 약을 찾아서 혼자 붕대를 감았어.

내가 예전에 읽은 그림책에서 그랬거든. 집이 있는 아이만 사랑받는 거라고. 근데... 우린 이제 다 고아잖아. 집 없는 애들이잖아.

라이프 아저씨네가 내가 쓸모없어진 거 알고 싫어할까 봐, 날 내다 버리고 다신 챙겨주지 않을까 봐 너무 무섭단 말이야.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카무이가 불쑥 끼어들면서 아이들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단호하고 힘차게 말했다.

라이프 아저씨가 우릴 버릴 리도 없잖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너희는 절대 집 없는 애가 아니란 거야!

너희는 전부 에제트의 아이들이잖아. 여기 에제트가 바로 너희 집... 아니. 우리들의 집이야!

카무이는 달렌의 팔을 살피더니,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레 소년의 다친 팔을 들어 "호" 하고 입김을 불어주었다.

호오... 이렇게 불면 아픈 거 싹 다 날아간다. 보통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의학적 근거는 전혀 없는 민간요법이지만, 어린 달렌에게는 그야말로 직효약이었다. 달렌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 우리 가족들은 내가 기분 안 좋을 때 옛날이야기도 해줬는데, 카무이, 해줄 수 있어?

난 해줄 순 있는데... 그런 건 아사르가 더 잘해. 난 이야기하다가 내가 먼저 잠드는데, 걘 듣는 사람을 먼저 재우거든!

카무이, 지금 그걸 칭찬이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유치하게 무슨 이야기야. 우리가 애도 아니고.

뭐가 유치해! 그럼, 뭐 할 건데? 모처럼 훈련도 없는데. 게다가 오늘은 우리 집이나 다름없는 에제트 생일이잖아? 이런 특별한 날엔 뭐라도 해야지.

생일 파티라면 무조건 생일 축하 노래부터 불러야지!

에이, 생일 축하 노래는 세상 사람이 다 부르는 거라 하나도 특별하지 않아. 우리 에제트만의 뭔가 독특한 걸 찾아야 한다고.

음... 그야 간단하지!

카무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에제트에는 원래 매달 가족의 날을 챙기는 전통이 있거든. 지금은 상황이 좀 특수하니까, 우리끼리 오늘을 우리만의 가족의 날로 정해버리자.

기념식으로는... 내가 에제트 전통 노래를 가르쳐 줄게, 어때?

When I see birds migrate
(철새들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Over mountains and rain
(산과 비를 넘어서)

<i>Fly through the dark of fate (운명의 어둠을 헤쳐 나가)</i>

<i>Chasing light beyond the haze (안개 너머의 빛을 쫓아)</i>

<i>Home’s the place where they land together (고향은 그들이 함께 내려앉은 곳)</i>

<i>Head up to see the sun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며)</i>

<i>Across thousands of years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i>

<i>Countless flames burnt inside (수많은 불꽃들이 타오르고 있네)</i>

<i>With sparks of life (생명의 불꽃과 함께)</i>

Ah the sun comes back every dawn~~~
(태양은 매일 아침 다시 떠오르고)

제법 그럴싸하게 화음이 쌓이던 노래에 웬 뜬금없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는 음정과 박자를 죄다 무시했고, 목청은 또 어찌나 큰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는 처참한 노랫가락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고장 난 확성기처럼 무아지경으로 악을 써대던 목소리는, 옆 사람이 참다못해 뒤통수를 한 대 갈긴 뒤에야 뚝 끊겼다.

바보야!! 조용히 있으라니까 기어코 나서고 난리네. 너 음치인 거 몰라?

왜 때려!! 그러다 약이라도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그리고... 나 방금 꽤 잘 부르지 않았어?

둘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좁은 숙소 안까지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캐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았다.

로렌 아저씨? 아저씨예요?

로렌은 얼른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숙소 안으로 들어와 캐롤의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우리 캐롤, 귀 밝은 건 여전하네. 역시 대단한걸!

몸은 좀 어때? 많이 아파? 아저씨가 쉬는 데 방해한 건 아니지?

캐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가, 로렌이 오해할까 봐 얼른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언니 오빠들이 의무실에 데려다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방해라니요. 저도 아저씨 엄청 보고 싶은걸요.

캐롤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에 로렌은 그제야 시름을 던 듯 환하게 웃어 보인 뒤 챙겨 온 커다란 가방을 들어 올려 입구를 활짝 벌려주었다. 몸이 불편한 캐롤이 힘들게 고개를 들이밀지 않아도 속이 훤히 보이게끔 배려한 것이었다.

다행이구나! 자, 이것 좀 봐봐. 아저씨가 좋은 것을 챙겨 왔단다.

이것은 지금 네가 앓고 있는 병에 딱 맞는 약이고... 저기 안쪽에 있는 것은 영양제라는 건데, 몸을 튼튼하게 해주는 약이야.

남은 것들은 아저씨가 바깥 임무를 돌 때마다 하나씩 모아둔 간식들이야. 쓴 약을 먹기 싫어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렴.

아 참, 제일 중요한 것을 깜빡할 뻔했구나! 이 브로치는 어떠니, 예쁘지? 내 딸아이가 너에게 꼭 전해달라며 챙겨준 선물이다. 너희 또래 여자아이들은 다들 좋아할 물건이라고 하더구나.

캐롤은 손을 뻗어서 가방을 받았다.

챙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로렌 아저씨. 하지만 저번에 챙겨주신 간식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더는 안 주셔도 돼요.

캐롤이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어 돌려주려 하자, 로렌이 급하게 그 손을 막았다.

어차피 이 간식들은 처음부터 다 널 주려고 챙겨둔 거다. 나중에 줄 간식을 지금 미리 주는 셈을 칠 테니까 사양하지 말고 받으렴.

그래. 로렌이 말한 대로 받으렴. 저 로렌 아저씨가 우리 캐롤이 좋아하는 사탕을 얻어내려고 어제 나한테 아주 울고불고 난리였다. 내 몫인 사탕까지 전부 뺏어가려고 어찌나 진상을 부리던지.

야! 애들 앞에서는 내 체면을 좀 살려주라.

캐롤, 저 조 아저씨가 하는 말은 믿지 말아라. 다 지어낸 헛소리야. 내가 울기는 왜 울겠니.

로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조가 로렌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누굴 보고 아저씨라고 하는 거야? 내가 형과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 우리 캐롤한테 나는 든든한 오빠고, 형이 진짜 늙은 아저씨지!

아저씨가 뭐 어때서 그래. 이게 다 중후한 매력이라는 것을 네가 알기나 해? 캐롤이 내 딸과 동갑내기인데, 저번에 내 딸내미가 너를 보고도 아저씨라고 불렀잖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다른 아이들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감탄했다.

와, 로렌 아저씨, 조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구하셨어요?

어... 뭐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가 의무실 사람들과 아주 친하거든. 말만 하면 척척 내준다고...

잠깐만, 너희들, 오빠나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이번에도 저희가 큰 신세를 졌네요.

캐리가 캐롤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며, 조와 로렌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에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캐롤, 아저씨가 이번에 바깥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봤는데...

로렌과 조가 아이들과 신나게 수다를 떠는 동안, 캐리는 사물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가방 안의 물건들을 공용 사물함에 정리하려고 했다.

캐리, 짐 정리는 우리들이 할게. 너는 저쪽으로 가서 캐롤의 곁에 있어 줘.

약품들은 보통 사물함 높은 칸에 보관하는데, 까치발을 든 캐리가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카무이가 얼른 그 물건을 받아 들었다.

아사르, 카트레브. 이것들을 좀 봐봐.

약병을 사물함에 넣으려던 카무이가 약품의 이름과 규격을 확인하고서 어딘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 두 병은 특급 규격을 받은 약이야. 기지 내에서는 2급 이상의 군사 직함이 있어야만 배급을 신청할 수가 있어.

우리 같은 훈련생이나 로렌 아저씨 정도의 일반 병사 권한으로는 이 약을 신청하지 못해.

여기 있는 이 세 병도 마찬가지야.

아사르가 자신이 정리를 하던 구역의 맨 위 칸을 가리켰다.

수량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보니... 우연이거나 실수로 섞여 들어온 것은 절대로 아니야.

조가, 눈을 피했어. 거짓말이, 분명해.

카트레브가 자신의 몫을 신속하게 정리하고서 카무이와 아사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음... 어쩌면, 선의의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카무이와 아사르도 약품 정리를 모두 마쳤다. 다른 아이들이 분위기에 한껏 들떠 있는 틈을 타서, 세 소년은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받으며 숙소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 약을 준 사람, 꼭 찾아야 하는 거야?

응.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요즘 에제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 입으로 들어가는 약은 조심하는 편이 안전해.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안에 몇 명이 없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너희 말대로 해. 나는, 뒤따를게.

지금 누구를 찾고 있는 거니? 꼬마 친구들.

복도의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조용하게 상의를 하던 세 소년은 갑자기 끼어든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계획을 멈추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마리스 의원님.

카무이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사르와 카트레브를 제 등 뒤로 숨기려는 행동이었다.

카무이, 맞지?

그리고 네 형은... 아사르라고 했었나? 발리콘 계획의 성과 보고서는 잘 봤다. 훈련생 중에서 단연 돋보이더구나.

어머, 카트레브를 깜빡했네. 미안해라. 뒤에 숨어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네.

물론 너도 아주 훌륭하더구나.

칭찬은... 고마운데.

지금 시간이면... 다른 애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셋만 따로 나오다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니?

아니. 그냥 오늘 추가 훈련을 할까 말까 상의하던 중이었어. 그게 다야.

흐음~

마리스는 아사르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경계심이 많은 건 좋은 거야. 너희가 훌륭한 전사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증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정말 너희를 도우러 온 거니까. 너희가 찾고 있는 그 특급 약품도 사실 내가 보낸 거야.

이제 날 좀 믿을 수 있겠니?

우리가 약을 두고 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방금 말했잖아, 우리 아사르 군. 내가 가져다준 약인데 어디로 갔는지는 뻔히 알 수 있잖아.

그 두 병사도 내가 보낸 거란다. 평소에 너희와 사이가 좋다며? 그 사람들도 나를 믿고 따르는데,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정확히 어떤 약을 보내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의원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고. 나중에 그 사람들에게서 빠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야.

마리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 이를 어쩌지? 난 그냥 약을 가져갈 권한만 줬어. 구체적으로 어떤 약을 가져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정말로 확인을 해 보고 싶다면 그 아저씨들에게 직접 물어봐도 좋아. 난 전혀 상관없어. 다만...

상황이 급해서 정식 절차를 밟지 못했을 텐데. 혹시라도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서 감사받게 된다면...

너희도 알다시피 지금 세계 정부 부서들이 다들 제 코가 석 자라서 말이야. 나도 그 사람들까지 챙겨 줄 여력은 없을 것 같네.

괜찮아.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부딪혀 보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될 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마리스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연락처를 적은 뒤, 그 종이를 찢어서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내 연락처야. 언젠가는 너희가 다시 이 번호로 전화를 걸게 될 날이 있을 것 같구나.

벌써 그날이 기다려지네, 꼬마 친구들.

의무실

에제트

위에서 시찰 나왔다는 그 의원? 마리스를 찾는 거니?

의사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선 세 소년을 쳐다보았다.

오늘 오긴 왔어. 에제트 위문품이라면서 의료용품도 잔뜩 가져왔고.

근데 아직 포장도 뜯어보지 않았는데. 방금 훈련장에서 라이프랑 한바탕했다며? 출처도 확실하지 않아서 아직 입고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럼, 마리스 의원이 준 의료용품은 창고에서 하나도 나가지 않은 거네요?

당연하지. 방금 날 붙잡고 어찌나 별별 소리를 다 해대던지. 조금 전에 겨우 짬이 나기 시작했는데 너희가 또 찾아왔잖아. 이걸 정리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의사는 다시 몸을 돌려 마리스가 보낸 물자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카무이가 멀리서 보아도 박스들은 포장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럼, 방금 연락처는 왜 받은 거야?

보는 앞에서 버리면 들키기 쉽잖아. 기숙사에는 애들도 많아서 숨기기도 힘들고.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몰래 없앨게.

마리스가 아니면, 약은, 누가 둔 걸까.

세 소년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이게 그 물자인가?

의무실 문이 열리며 라이프가 들어왔다. 말을 다 마치고 나서야 그는 구석에 서 있는 세 소년을 발견했다.

카무이, 아사르, 카트레브. 너희가 의무실엔 웬일이냐?

너랑 똑같지, 뭐, 이 "선물"에 관해서 물어보러 왔더라.

자, 이거야. 그 의원이 보낸 건데, 어떻게 처리할까?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입고시켜서 사용해.

윗선에서 던져주는 적선 따위는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당장 먹고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지금 에제트는 물자 하나하나가 턱없이 부족해. 지가 알아서 갖다 바치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잖아.

알았어. 그건 그렇다 치고, 네 할당량까지 탈탈 털어서 가져간 그 특급 약품 말이야. 혹시 그거...

목소리 좀 낮춰!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라이프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큰 목소리로 서둘러 의사의 말을 덮으려고 했다.

방금 특급 약품이라고 하셨어요? 캐롤한테 준 약을 말씀하시는 거죠?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네. 난 방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냥 로렌과 조 녀석이 와서 약을 싹 쓸어갔다는 것밖에 몰라. 덤으로 영양제도 챙겨갔고...

미리 경고하는데, 시킨 사람 몫에서 그 영양제 깐다.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예외는 절대 없어.

뭘 그렇게 쳐다봐. 다시 말하지만 난 진짜 모르는 일이야.

할 일도 없이 의무실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훈련이 부족한가 보네? 아니면 너희 몫으로 로렌과 조가 가져간 약값을 대신 메워 주기라도 할래?

똑같은 핑계, 저번에도, 썼어.

야, 너희들 방금 라이프의 표정을 봤어? 매번 긴장하면 꼭 추가 훈련 핑계를 대면서 입막음하더라!

다음부터 그런 소리를 할 거면 목소리를 낮추든가 아니면 나한테서 떨어져서 말해. 괜히 불똥 튀는 건 질색이란 말이야.

너희 셋, 당장 훈련장으로 가서 세 시간 추가 훈련 실시한다! 어서 안 튀어가!

넵... 임무 완수하겠습니다!!

카무이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사르와 카트레브를 이끌고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의무실 문을 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라이프를 향해 소리쳤다.

훈련하면서 "라이프 대장님, 감사합니다!"라고 엄청 크게 외칠게요! 동네방네 다 들리게요!

?! 야, 카무이!! 당장 이리 안 와?! 주둥이를 꿰매버린 다음에 훈련장에 처넣어야 정신 차리지!

황금 태양 훈련장

에제트

마리스 의원의 방문에도 발리콘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래서 훈련장 안의 소년들은 여전히 고되고 지루한 훈련과 테스트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테스트인데, 아직도 3분의 2가 기준 미달이야!

이래서는 안 돼. 이런 결과로는...

교관은 기록표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정부의 그 탐욕스러운 메뚜기 떼들이 고작 이따위 성적에 만족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더 추가 훈련한다! 딱 한 시간 뒤에 6차 테스트를 진행하겠다.

교관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훈련생들을 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모질게 추가 훈련을 지시했다.

교관님, 여기서 한 시간을 더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예요. 다들 체력이 바닥나서, 계속 테스트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카무이는 억지로 힘을 쥐어짜 내 교관 앞에 나섰다. 이렇게 무식한 훈련은 아이들에게 고통만 줄 뿐, 교관이 원하는 목표치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테스트 항목들은 전부 처음 해 보는 것들이잖아요. 바깥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실외 이동 전술 훈련을 제대로 받아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요.

이 상태로 계속 밀어붙여 봤자 애들 기운만 빠지고 시간만 낭비할 뿐이에요.

...

제가 라이프가 짠 발리콘 훈련 계획표를 본 적이 있는데, "이동 전술"이나 "실전 훈련" 같은 건 중후반기에 태양 코로나 유전자가 안정된 다음에나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벌써 테스트하는 거예요?

카무이의 추궁에 교관은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카무이조차 눈치챈 문제를, 줄곧 아이들의 훈련을 책임져 온 교관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너희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모든 훈련 일정은 실제 전장 상황에 맞추어서 변하는 거야.

너희는 전사다. 전사는 그저 명령에 복종하면 돼. 이런 기본적인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하나?

잔말 말고 계속 훈련해!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각자 알아서 책임져.

기지 중앙 제어실

에제트

늦은 밤

다행이다. 여기 비밀번호를 아직 까먹지 않았어.

쉿... 목소리 낮춰.

아사르는 주변을 경계하더니 조심스럽게 중앙 제어실 스크린을 켰다.

이동 장치가 켜진 적이 있어. 근데 에제트는 전혀 움직이질 않았어.

그냥 기초 기능 점검일 거야. 에제트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본 거겠지.

두 소년은 말없이 눈을 맞추고는 중앙 제어실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순찰 보고서, 다 썼어.

우리를 본 사람, 하나도 없어.

카트레브가 대충 휘갈겨 쓴 보고서를 펄럭이며 복도 반대편에서 합류했다.

창고, 물자, 변동 있어.

카트레브는 몰래 찍어 둔 물자 사진을 카무이와 아사르에게 전송했다.

물자를 편대 인원수에 맞춰서 나눠 놨네. 설마...

고요하던 공간에 갑자기 카무이의 통신기에서 긴급 호출음이 울렸다.

대원

카무이! 우리가 순찰을 돌다가 수상한 병사를 하나 잡았는데, 숙소에서 물건을 훔치려고 했어.

도망 못 가게 숙소에 붙잡아 놨으니까, 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

뭐라고?! 도둑질하는 병사가 있다고?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의아함을 안은 채, 세 소년은 지체 없이 숙소로 뛰어갔다.

대원 숙소 휴게실

에제트

잠깐, 이 사람... 최근 새로 기지에 들어온 병사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사르는 그 병사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을 살폈다. 식량, 구급약, 신분증 그리고... 아직 뜯지 않은 편지 한 통이 있었다.

대원

오늘은 우리 셋이 기지 내부 순찰을 하는 날이었는데, 숙소에서 딱 잡았어. 글쎄 우리 사물함을 뒤지고 있더라고!

그런데 왜 라이프한테 데려가지 않은 거야?

이것 때문이겠지.

가방을 꼼꼼하게 뒤져 본 아사르는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는 도망치려던 병사의 가방 맨 밑에서 발견한 정보 카드 한 장을 카무이 쪽으로 내밀었다.

달렌의 정보 카드잖아? 며칠 전에 잃어버렸다고 하더니, 네가 훔쳐 간 거였어?

훈련생 숙소에는 왜 몰래 들어온 거야?

때, 때리지 마!! 다 말할게.

최근 위에서 자꾸 압박을 주잖아. 에제트가 이주 작전을 시작했으니 다른 분쟁 지역으로 지원을 가라고. 나, 난 거기에 가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려고...

이 정보 카드는 너희 물자를 좀 훔칠 수 있을까 해서...

에제트가 이주 작전을 시작했다고?

라이프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위에서 군령 초안이 벌써 내려왔는데...

무슨 군령 초안?! 똑바로 말 안 해!

내 가방 안에 있는 그 편지...

아사르가 가방에서 꺼낸 편지를 뜯었다.

에제트 이주 작전 군령 초안?

너희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 세계 정부에서 계속 "훈련 성과를 내놔라.", "침식체한테 점령당한 지역으로 지원을 가라"고 에제트를 압박했잖아. 그래서 발리콘 계획 테스트 지표도 바뀐 건데... 전혀 눈치를 못 챘어?

내가 위에서 에제트를 보내려는 곳의 상황을 몰래 알아봤는데... 너무 심각해서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더라고!

엘리트 부대도 벌써 몇 개나 전멸을 당했는데, 우리 같은 일반 부대가 거길 무슨 수로 이기냐고?

군령 초안에는 훈련생들을 먼저 투입해서 발리콘 계획의 성과를 테스트한다고 적혀 있지만, 기지 이주 작전이면 우리도 다 같이 따라가야 하잖아. 우리 병사들까지 죄다 사지로 몰아넣을지 누가 알겠어.

너희한테는 일부러 숨겼겠지만 나는 다 안다고! 요새 조가 앞장서서 매일 라이프를 찾아가서 싸우잖아. 어서 결정을 내리라고.

병사의 폭로에 숙소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쩐지 요즘 훈련이 너무 빡세다고 했어. 역시 속셈이 있었네!!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어차피 먼저 죽으러 가는 건 그 병사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우리한테 미리 말하면 우리도 다 도망을 갈 텐데, 그러면 그 사람들이 위에 뭐라고 보고하겠어?

하지만 나는... 아저씨들이 꼭 그런 사람들은 아닐 것 같은데.

아이들의 의견이 분분해지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셋에게 쏠렸다. 이미 카무이 일행을 리더로 여기고 있었기에, 누군가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들이 이끌어 주는 편이 가장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들 진정해. 내가 방법을 한 번 찾아볼게.

3일 뒤, 같은 숙소에 소년들이 다시 모였다.

라이프한테 직접 가서 물어봤는데,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

"시간을 좀 더 줘. 너희가 원하는 결과를 줄 테니까."

그렇게만 말했어.

카트레브는? 어제 자료실 쪽으로 가는 것을 봤는데, 뭐 좀 알아낸 게 있어?

자료실, 비밀번호, 바뀌었어.

아사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쥔 자료를 카무이와 카트레브에게 전송했다.

"에제트 이주 작전 군령 확인, 1차 지원 목표 지점..."

"발리콘 계획 태양 코로나 유전자 테스트 성적 명단."

"발리콘 계획 훈련생 전장 지원 우선 투입, 프로젝트 성과 정기 모니터링."

이거 확실한 정보 맞아? 위조된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세계 정부의 도장이 찍혀 있잖아. 그리고 기지 안에서 정보도 좀 모아 봤는데... 내용은 거의 비슷했어.

자료실은 굳게 잠겼고, 라이프는 대답도 안 해 주는데, 이 파일을 순순히 너한테 주었을 리는 없고... 아사르.

너 마리스 의원을 만났니? 연락처는 분명히 없앴다고 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느냐는 거야.

그들은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해. 그냥 나가서 죽으라고 보내는 거잖아! 발리콘 계획이니 태양 코로나 유전자니 하는 건 믿지도 않는다고!

달렌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아사르의 단말기에 띄워진 파일을 가리켰다.

이것 좀 봐. "소모품"! 우리를 이렇게 부른다고!

이주 작전 군령에 공식 직인까지 찍혔으면 이미 정식으로 공포된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냥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해?

라이프한테 가자! 가서 당장 따져 묻자고!

소용없어. 카무이가 직접 가서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어. 그 사람들은 애초에 세계 정부에서 파견한 군인들이란 사실을 잊지 마.

전쟁 앞에서 사람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일은 하루이틀 일어난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에제트를 집으로 여기고, 그 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하지는 않아.

이런 잔혹한 전쟁 통에 저 외부인들이 우리한테 얼마나 자비를 베풀어 줄지, 거기에 무모하게 기대를 걸 수는 없어.

아사르의 뼈아픈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버림받았던 그 과거를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