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태양 훈련장
에제트
텅 빈 훈련장 안, 십 대 소년들과 소녀들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치수가 훌쩍 큰 군복 차림이었다. 한눈에 봐도 제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옷자락과 바짓단을 어떻게든 걷어 올려보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에제트가 전장에서 이들을 거두었을 무렵, 기지에는 아이들에게 당장 내어줄 제복이 부족했다. 그 탓에 어른들의 옷을 대충 수선해 입혔던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드넓은 훈련장은 소름 돋을 만큼 고요했다. 한창 활기차게 떠들 나이건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한쪽에 켜진 퍼니싱 농도 표시 화면만이 그들이 어떤 참혹한 "훈련"을 견뎌내고 있는지 대변할 뿐이었다.
포기하면 안 돼. 오늘이 이번 주기의 마지막 훈련일이야. 버티기만 하면, 최강의 전사가 되는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거라고!
으윽...
그들 중, 왜소한 체격의 소녀 하나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들이 놀라 주위로 모여들었지만, 다들 제 몸을 짓누르는 고통조차 감당하기 버거워 쓰러진 소녀를 도울 여력 따윈 없었다.
캐롤?!!
으, 언니... 머리가 너무 아파, 힘이 없어.
캐롤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몸은 비정상적으로 펄펄 끓고 있었다.
캐롤, 물, 여기 물 좀 마셔.
하지만 물 몇 모금으로 바짝 갈라진 입술과 창백한 안색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현재 캐롤의 상태는 일반적인 보급품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안 되겠어. 캐롤의 상태론 더 이상 훈련을 버티지 못해. 내가 당장 라이프한테 다녀올게!
캐롤이 이 지경인데 그 악마 놈들을 찾아가겠다고?!
캐리는 캐롤을 품에 꽉 끌어안은 채, 사나운 눈빛으로 카무이를 노려보았다.
그놈들 눈에 얜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 덩어리일 뿐이야. 당장 가차 없이 처리해 버릴 거라고!!
하지만 캐롤의 상태가 심각해.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고! 이곳은 퍼니싱 농도가 너무 높잖아. 체내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카무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캐롤의 상태를 살피려 다가갔다.
난 그 악마들은 못 믿어! 캐롤이 이렇게 된 것도 다 그놈들 탓이잖아? 그 망할 놈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 빌어먹을 라이프!
그놈들이 에제트를 접수하고 나선 무슨 거창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더니, 매일 체력 단련에 이런 끔찍한 훈련까지 시키고 있잖아! 그놈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가 퍼니싱에 저항하게 만든답시고 말이야!
게다가 보급 물자도 갈수록 줄이고 있잖아. 그렇지 않았으면 캐롤이 왜 저렇게 앓아누웠겠어?!
그놈들은 우리가 여기서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써!! 캐롤을 넘기는 건 그냥 사지로 등을 떠미는 거랑 다름이 없다고.
어... 언니...
캐롤! 정신이 들어? 물, 물 좀 더 마실래.
머리가... 너무 아파. 언니.
가냘픈 캐롤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흐느꼈다.
나... 나 죽는 거야?
아니야! 걱정하지 마. 언니는 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절대...
캐리, 그래도 빨리 캐롤을 데려가서...
나더러 그 악마들을 어떻게 믿으란 거야?!
캐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그만 싸워.
캐리가 이성을 잃자 카트레브는 즉시 카무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도 방금 말했잖아, 캐리. 다들 자발적으로 발리콘 계획에 서명했고, 제 발로 태양 코로나 유전자를 접종받았다고.
아사르의 입가엔 항상 그렇듯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말투엔 일말의 상냥함조차 없었다.
애초에 에제트가 분쟁 지역에서 너희를 구해올 때, 철수 도중 침식체의 습격으로 병사 두 명이 목숨을 잃었어. 하지만 에제트는 전투력이라곤 전혀 없는 너희를 내버려두지 않았지.
그 후 체질 평가 때 기지 측에서도 분명 경고했잖아. 캐롤은 몸이 약해 전투 훈련을 버틸 수 없으니, 비전투 수용 기지로 보내는 게 낫겠다고 말이야.
그런데도 자매끼리 떨어지기 싫다고 우기면서 동의서까지 쓰고 남은 건, 다름 아닌 너희 둘이야.
...
그 뒤... 전투가 끝나고 에제트가 세계 정부 군대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잖아. 발리콘 계획에 대해 전부 공지했고, 원치 않는 사람은 다른 기지로 이송해 주겠다고도 똑똑히 말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자원해서 훈련 동의서에 서명했어. 근데 그 동의서에 적혀 있던 물자 보장이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지켜진 적 있어?!
훈련 강도는 미친 듯이 올라가는데 보급은 갈수록 쥐꼬리만 해지잖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라이프 그 녀석들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그럼, 당장 훈련을 때려치우고 에제트를 떠나. 아무도 붙잡지 않을 거야.
...
물자가 부족한 건 너희만이 아니야. 카무이가 자기 몫의 배급 물자 대부분을 몰래 너희에게 퍼주고 있잖아.
아사르!
아직도 숨기려는 거야? 계속 그렇게 해서 개죽음이라도 당하겠다는 거야? 같잖은 "착한 일"을 한답시고 언제까지 자기희생만 할 건데?
일부러 언성을 높인 아사르는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똑똑히 듣기를 바랐다.
이 아이들은 분명 강해지고 생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기로 했지만, 막상 훈련이 시작되자 가혹한 조건과 퍼니싱 면역 훈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몰래 자신들을 훈련하는 카무이 일행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무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
캐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품에 안은 캐롤을 넋 나간 듯 바라보며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어, 언니... 울지 마. 캐롤은 이제 안 아파, 진짜야.
미안해. 카무이.
알아. 너희 탓이 아니란 건 다 안다고. 난 그냥...
캐롤의 상태가 너무 악화됐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두려워서 그랬어. 미안해.
캐롤은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꾹 삼킨 채, 자신을 안고 우는 언니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언니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무언가를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제트가 너희를 구해주고, 물자도 내어주고, 강해지도록 도와줬건만, 정작 너희는...
아사르... 이제 그만해.
아사르는 여전히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카무이의 눈짓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아사르는 더 이상 자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뒤에 선 카트레브 쪽으로 성큼성큼 물러났다.
괜찮아. 너무 자책하지 마. 네 맘 다 알아. 캐롤이 저렇게 아프니까 이성을 잃었던 거잖아.
이거 받아. 캐롤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카무이가 캐리의 손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건넸다.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캐리는 고개를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어떻게... 태양 에너지를 갖고 있어?!
카무이!!
아사르의 얼굴에서 항상 띠고 있던 온화한 미소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꾸며내던 다정한 모습 따윈 집어치운 채, 아사르는 카무이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걸 줘버리면 넌 어떡해! 네가 하도 무식하게 훈련하니까, 라이프 쪽에서 특별히 빼내서 챙겨준 거잖아. 태양 코로나 유전자 부작용 좀 줄이라고 준 약이라고!
나도 알아. 괜찮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추가 훈련을 신청해서 다시 채우면 돼.
착한 척도 정도껏 해! 위에서 매일 태양 에너지 잔량을 검사하는데, 진짜 걸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그렇다고 캐롤이 죽어가는데 그냥 내버려둘 순 없잖아. 이건 우리의 책임이라고!
에제트에 남기로 한 이상 우린 다 같은 가족이야. 내 가족이 아픈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너?! 카무이, 내가 널 못 때릴 줄 알아?
아사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카무이, 아사르. 둘 다, 싸우지 마.
카트레브, 이 손 놔! 자꾸 끼어들면 너도 가만 안 둬!!
아사르는, 날 못 이겨. 그러니까 놓지 않을 거야.
날 이긴다고 해도, 절대 안 놔.
셋은 팽팽하게 대치했고, 아사르와 카무이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만 싸워. 우리는 이 에너지를 받지 않을 거야.
캐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카무이, 네 마음은 알겠지만, 태양 에너지를 받아서 네가 처벌이라도 받게 되면... 그건 나도 캐롤도 원치 않아.
네 입으로 우린 가족이라며. 우리 살자고 널 위험에 빠뜨리는 짓은 못 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캐리의 거절로 일촉즉발의 대치는 일단락됐지만, 쓰러진 캐롤을 어찌할지는 여전히 막막한 문제였다.
캐롤 몸 상태론 훈련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 당분간 기숙사에 숨겨야 해.
하지만 단말기에 매일 훈련 기록을 남겨야 하잖아.
내가 캐롤의 단말기로 대신 훈련할게. 라이프도 그렇게 깐깐하게 검사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넌 네 훈련량만으로도 이미 한계치를 초과했잖아?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다 버텨낼 테니까. 잊었어? 나 카무이야.
카무이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기어코 하겠다면 혼자서 다 떠안으려고 하지 말고 나도 끼워줘.
나도, 할래.
셋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자, 그들만의 작은 계획이 세워졌다.
어머, 정말 우애가 깊은 꼬마 친구들이네.
훈련장의 퍼니싱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낯선 여자가 무장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에제트의 현직 관리 책임자이자 파오스에서 퇴역한 세계 정부의 장교인 라이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한참 미숙한 애송이들에 불과합니다. 마리스 의원님께서 굳이 신경 쓰실 만한 녀석들이 아닙니다.
라이프는 카무이를 매섭게 쏘아보며 셋에게 당장 꺼지라는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라이프 장교, 그렇게 말하면 너무 매정하잖아.
마리스 의원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리며 곁에 선 라이프를 힐끗 쳐다봤다.
이 아이들은 발리콘 계획의 핵심 자원인걸. 세계 정부가 이 프로젝트에 투자한 인력과 자본이 얼만데, 당연히 각별히 신경 써야지.
어찌 됐든... 인간의 미래를 짊어질 희망 중 하나잖아? 윗선에서 굳이 날 파견해서 시찰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안 그래?
마리스는 유유히 걸음을 옮겨 캐리와 캐롤 앞까지 다가가서야 멈춰 섰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수척해진 캐롤을 살피더니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곤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얘 상태 좀 봐. 열이 이렇게 펄펄 끓다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어.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아야 할 나이인데... 정 안 되겠으면 구조 기지로 보내야지.
이런 꼬마들에게 성인 기준치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를 주입하고 훈련까지 시키시다니... 정말 지독하시네.
라이프 장교. 아무리 목표 달성이 중요해도 그렇지, 이렇게 연약한 애들을 고문하면서 양심에 찔리지도 않아?
마리스의 다정한 위로에도, 캐리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말없이 캐롤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자애롭게 미소 짓는 마리스의 온몸에서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 것이다.
마리스의 모습은 마치 웃는 낯을 한 독사 같았다.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채 그들을 정확히 겨누고서, 당장이라도 눈앞의 먹잇감을 단숨에 물어 죽일 것만 같았다.
지금 같은 시국에 밥을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스스로 계획에 지원해 동의서까지 썼으니, 그 책임도 본인들이 지는 게 마땅하죠.
마리스 의원님, 이 일은 의원님께서 관여하실 문제가 아닐 텐데요.
라이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두 소녀와 마리스 사이를 은근슬쩍 가로막았다.
하아... 여전히 그 알량한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건가? 보급 물자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기어코 이 에제트를 끌어안고 가겠다고?
에제트는 파오스 사관 학교 소속입니다. 의원님께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실 곳이 아닙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에제트 군사 기지, 파오스 사관 학교 소속으로 유구한 역사에 탄탄한 기반...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의 영광이잖아? 파오스 본대와 연락이 닿는다 해도, 뭐가 달라지나? 그쪽도 자기들 코가 석 자인 마당에.
게다가... 이 기지의 엘리트 전투력은 얼마 전 전투에서 이미... 아, 맞다. 당신이 이끄는 지원군이 너무 늦는 바람에 제때 구조하지 못했던 그 전투 말이야.
그때 죄다 희생됐잖아. 내 말이 틀렸어?
...
마리스는 앞을 가로막은 라이프를 지나쳐 그 뒤에 숨은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어리고, 약하고, 겁 많은... 아직 깃털조차 다 자라지 않은 새끼 새들에 불과해서 조금만 힘을 주면, 그 가련한 날개를 단숨에 꺾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맨 앞으로 뛰쳐나온 저 세 소년은 뭔가 달랐다.
녀석들은 마리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저런 하룻강아지 같은 오기는 마리스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뻔한 것이었다.
나름 영리한 아이들이었고, 마리스는 영리한 아이들을 주무르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무이 일행을 바라보며 기필코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에제트를 해산시키고, 이... 태양 코로나 유전자와 적합한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생각했다.
"황금 태양"이라... 참으로 매혹적인 칭호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 라이프.
윗선에서 발리콘 계획에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잘 알잖아. 황금시대부터 공들여 온 이 거대한 계획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에 걸맞은 성과를 못 내면 뒷감당하기 힘들걸.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마리스는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며 검지로 라이프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해? 꽉 막힌 길인 줄 뻔히 알면서 굳이 머리를 박고 깨질 필요는 없잖아?
지금이라도 자진해서 에제트 해산 신청을 올리면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 그리고 당신과 저 아이들 모두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갈 수 있게 손써줄 테니 걱정 마.
장담하는데, 지금 당장 목숨을 걸고 앞날에 도박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현명하고 남는 장사일 거야.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에제트 해산은 절대 안 돼! 훈련에 실패하든 전장에서 죽든,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에제트뿐이라고!
아무리 세계 정부라 한들, 뚜렷한 근거도 없이 에제트를 강제로 해산시킬 명분은 없을 텐데.
맞다. 해산, 못 해.
마리스는 제 앞을 막아선 세 소년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어머, 의리가 대단한 꼬마 친구들이네. 익히 들어서 나도 잘 알아. 에제트 사람들이 기지를 제집처럼 여기고, 유대감이 일반 군대보다 훨씬 끈끈하다는걸.
걱정 마. 너희들을 다 같은 곳으로 묶어서 보내줄 테니까...
절대 안 돼!
닥쳐!! 너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라이프는 카무이가 더 대꾸하려는 걸 강제로 끊고, 입 다물라는 듯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장 돌아가! 오늘 훈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이프는 아이들에게 더는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억지로 마리스와의 대화 주도권을 끌어왔다.
마리스 의원님... 챙겨주시려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등을 떠밀며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뒤, 라이프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리스를 돌아보았다.
제안은 고려해 보겠습니다만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세계 정부 내에서 의원님의 입김이 세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이 아이들은 이런 식의 훈련을 전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윗선에 좋게 말씀해 주셔서 할당된 훈련량을 좀 줄여 주시거나, 막혀 있는 물자 보급만이라도 빨리 처리되게 도와주신다면 에제트 식구들 모두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라이프의 완곡한 거절에 마리스는 조금 전까지 아이들 앞에서 짓고 있던 가식적인 미소를 싹 거두었다.
라이프, 끝내 거절하겠다는 건가?
과거 전장을 휩쓸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인이 이딴 시궁창에 틀어박혀 애송이들과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당신의 그 대단한 야망과 맹렬하게 좇던 공훈, 명예는 다 어쩌고... 고작 그 사고 하나 때문에 자존심까지 모조리 다 타버린 건가?!
그 일과는 무관합니다, 마리스 의원님.
중요한 건... 에제트가 아직 제 관할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세계 정부로 돌아가셔서 다른 길을 알아보시죠.
제 발로 시궁창에 기어들어 간 한심한 겁쟁이 같네.
밟으면 터질 하찮은 개미 떼 주제에 감히 태양이라도 되어 보겠다는 거야?
그럼, 어디 한번 똑똑히 지켜보겠어. 당신들 목숨을 남김없이 다 태우고 나서, 이 캄캄한 세상을 과연 몇 분 몇 초나 비출 수 있는지 말이야.
마리스는 세계 정부의 시찰 임무를 마저 수행하기 위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물러나는 모습을 확인한 라이프는 그제야 간신히 한시름을 덜었다.
라이프...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카무이가 유령처럼 불쑥 고개를 내밀었고, 그 뒤로 아사르와 카트레브가 슬그머니 따라 나왔다.
분명 꺼지라고 했을 텐데?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그냥...
말해, 무슨 일인데?
캐롤이 지금 많이 아파서 그러는데. 우리가 그 아이의 훈련량을 나눠서 채우고 싶어.
카무이는 뒷짐을 진 채로 라이프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네 훈련량만 해도 이미 남들 두 배가 훌쩍 넘는데, 거기다 남의 몫까지 떠맡겠다고?
나도, 할래.
나도 도울게.
저... 저도요!
대문이 삐걱 열리며 소년 한 명이 고개를 내밀더니, 뒤이어 다른 아이들까지 줄줄이 훈련장으로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맞아요! 캐롤 훈련량은 우리가 다 같이 채우면 돼요. 그리고 당분간 캐롤 임무까지 저희가 대신 나갈게요!
그러니까 제발 캐롤더러 좀 쉬게 해주세요!
봇물 터지듯 간절한 외침들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동료인 캐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두려움을 떨치고 나선 것이다. 사방에서 재잘대는 소년 소녀들의 목소리에 라이프는 골치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시끄러워!! 다들 쓸데없이 힘만 남아도나 보지?
보아하니 오늘 훈련할 정신머리들이 아니군. 전부 휴게실에서 벽 보고 반성이나 하면서 근신해라.
그리고 벌칙으로 오늘 식량 배급은 취소다. 부족한 물자가 있으면 창고 문을 열어둘 테니 알아서들 챙겨.
이 모든 소동의 원흉은 캐롤이니까, 너희보다 며칠 더 근신을 명한다. 기간은 일단 일주일이다.
그래야 너희 같은 핏덩이들이 걔 아프단 핑계로 말대꾸 안 하고 훈련에 전념할 테니까.
쩌렁쩌렁한 라이프의 고함에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으나, 명령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뭐지? 왜 뜬금없이 근신하라는 거야?
멍청이야, 말귀를 못 알아먹어? 부족한 거 알아서 챙기라는 게 자유행동을 허락해 준 거나 다름없는 거잖아.
그럼, 사탕을 맘껏 집어와도 되는 거야? 이거 완전 간식 자유 이용권이네?
이 식충이 같은 자식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캐롤을 살릴 약과 영양제를 빼 올 수 있게 됐잖아!
잔말 말고 썩 안 꺼지냐?! 꾸물거리면 전부 남겨서 뼈 빠지게 추가 훈련이다!
라이프의 무시무시한 호통에 아이들은 썰물 빠지듯 앞다투어 훈련실을 벗어났고, 드넓은 공간에는 라이프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라이프는 마리스가 이곳을 찾은 진짜 목적을 곱씹어 보았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세계 정부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발리콘 계획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획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에제트 기지에 섣불리 손을 뻗을 리가 없다. 설마...
너희들은 왜 아직도 안 가고 버티고 있지? 진짜 남아서 추가 훈련이라도 받을 셈이냐?
라이프는 등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세 녀석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쫓아냈다.
카트레브가 냉큼 카무이와 아사르의 손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말수가 적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기에 편히 쉴 기회를 걷어차고 굳이 훈련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마워!! 라이프!! 역시 라이프가 최고야!!
카무이가 목청껏 소리쳤다. 우렁찬 외침이 텅 빈 훈련장에 쩌렁쩌렁 메아리치는 바람에, 라이프는 본의 아니게 낯간지러운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연거푸 들어야만 했다. 그는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이래서 카무이 저 녀석이 제일 피곤하다니까. 낯부끄럽게 저런 소리나 해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