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트
그날 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소년은 무기고 문 앞에 도착했다.
이따가 내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볼 테니까,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면, 넌 그때 들어와.
왜 내가 먼저 가면 안 되는데?
아사르는 입가를 씰룩이면서 카무이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넌 무기고에 들어갈 때마다 쓸데없이 이상한 소리를 꽥꽥 질러대잖아. 지금 우리는 몰래 들어가는 거라고. 너랑 무기고 경보 시스템 성능을 테스트할 시간이 없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널 보냈다간 무기고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어떻게 튀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알겠어?!
카무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사르는 저 표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카무이는 항상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 못 버티고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지금은 이런 걸 따질 시기가 아니었기에, 아사르는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문 앞을 잘 지키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들어와서 나한테 알려줘.
응? 잠깐만, 아사르. 저기 뭔가...
잠깐은 무슨!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 넌 망이나 잘 보고 있어, 난 지금 들어갈게!
그치만...
셋, 둘, 하나... 간다!!
"탁!!"
아사르가 들어간 지 몇 초 되지 않아, 칠흑 같던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갑작스러운 강한 빛에 적응할 새도 없이, 아사르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렸다.
불이 켜졌다고?! 들킨 건가?
아사르의 머릿속엔 이미 오딜리가 팔짱을 낀 채 그들 앞에 서서 자백을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무이 녀석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변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주도한 일이야! 카무이한테 무기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억지로 끌고 온 건 나라고.
벌을 내리려거든 나한테 해! 비겁하게 숨지 않을 테니까.
아사르에게 돌아온 건 숨 막히게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아, 아사르...
카무이가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비장한 표정의 아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고 안에는 둘만 있었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조명 스위치 쪽 형광 메모지에 "경보는 다 꺼뒀으니, 잊지 말고 불 켜고 들어와."라고 적혀 있길래 그대로 했어.
그래서 그냥...
불을 켰을 뿐인데, 아사르는 오딜리에게 들킨 줄 알고 그런 부끄러운 대사를 외쳐버린 것이다.
왜 방금 말해주지 않았어?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나보고...
"나중에 얘기해"라고 했잖아.
아사르는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몇 분 전 자신의 입을 꽉 막아놓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와서 무기나 고쳐.
응, 바로 갈게!
카무이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아도 은근히 묻어나는 아사르의 배려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 이후, 둘은 오늘 있었던 훈련장으로 함께 걸어갔다. 카무이의 부러진 대검은 아직도 그곳에 꽂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닥에 남겨진 건 균열 흔적뿐이었고, 부러진 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 대검 두 자루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와~ 예전 것보다 훨씬 새것이네. 세세한 부분도 개량됐어!
아사르는 검 자루에 메모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떼어냈다.
"잊지 말고 엄마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 돼."
딱 봐도 에우르디스의 말투였다.
하, 엄마, 아빠는 벌써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셨나 보네. 3일 뒤의 시련도 미리 준비해 놓은 거야.
문득 손을 써놓고 우유부단하며 현장에 숨어 카무이를 지켜보며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딜리와 에우르디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모든 건 그저 애들의 어설픈 장난에 불과했다. 모든 일이 그들의 통제 범위에 있었으니, 카무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도 없었다.
당연하지!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고.
카무이는 여전히 낙천적이었지만, 아사르는 그 말을 듣고 다른 생각에 잠겼다.
다 안다고... 흥, 그 속을 너무 잘 아니까 가끔은 오기가 생기는 거겠지.
오늘 훈련장에서 네가 말했던 그 일 말이지, 맞지?
너도 알고 있었어?
네가 여러 번 말했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게다가... 나도 요즘 엄마, 아빠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어.
금지 구역으로 가는 시련도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거겠지?
너까지 눈치챌 정도가 됐는데 우리한테 털어놓질 않네.
에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오늘 엄마의 태도를 보니까, 돌아가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몰라.
정 안 되면 내가 같이 가서 따져줄게! 그래도 안 알려주면 우리가 나서서 직접 조사하면 되고.
아무튼 절대 기죽지 마!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다고!
넌... 진짜, 여전하구나. 네가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겁쟁이 같잖아.
하지만 이런 널 보는 것도 나쁘진 않네.
미안해, 카무이.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해 사과할게.
그렇게 아사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의 응어리를 아직 완전히 풀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사과는 아사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괜찮아, 진심이야. 우린 가족이잖아. 이해 못 할 일은 없어.
아무리 친한 가족이라 해도 부딪힐 때가 있는 법이지. 터놓고 얘기하면 돼. 그리고... 난 꽤 자신 있거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해! 내 행동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을 거야. 다들 진심으로 감탄하게 할 거라고!
이번 시련은 나만 믿어! 내가 널 확실히 지키고 챙겨줄 테니까.
카무이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힘 조절에 실패했고, 숨이 턱 막히며 갑작스레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켁, 콜록콜록!!!??
바보냐?!
아사르는 황급히 다가가 카무이의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해주었다. 숨이 넘어가서 얼굴이 벌게진 주제에 카무이는 쿨럭거리면서도 실실 웃고 있었다.
진짜 구제 불능 바보 녀석이라고 아사르는 생각했다.
카무이, 넌 정말...
카무이, 넌 정말... 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든 거냐?! 진짜 인간의 뇌 구조가 맞긴 해?!
에제트의 금지 구역 밀림 속, 아사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실룩이며 카무이를 향해 달려가더니, 새까맣게 탄 취사도구를 잡으려던 카무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출생 파일이 상세하게 남아있지 않았다면, 어떤 비밀 유전자 개조 실험을 거쳐서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의심했을 거야.
어째서 네 사고방식은 정상적인 인간과 다른 거냐고?!
응? 내가 그랬어?
진짜 모르는 눈치네. 그렇다면 내가 친절하게 말해주지.
금지 구역에 들어온 첫날, 불 조절을 못 해서 잡은 물고기를 다 태워 먹었잖아. 넌 왜 굳이 그걸 꼬치에 꿰어놓고 쓸데없는 소리로 주절거린 건데?
쓸데없는 소리라니! 난 에제트 식당의 특선 생선구이를 상상하면서 묘사한 거라고! "원효대사의 해골물"이라는 말도 있잖아!
생선구이에 세뇌를 걸었더니, 정말로 식당에서 파는 그 맛이 나는 것 같았단 말이야. 그렇게 먹으니까 훨씬 맛있었다고!
네가 그 말을 하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요란하게 내지 않았어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럼, 다음 날, 닭 둥지에서 무사히 알을 훔쳐 왔으면서, 다 먹고 난 뒤에 왜 굳이 다시 가서 둥지에 조약돌을 채워 넣은 건데?
그건... 식재료는 구했지만, 암탉이 혼자 남겨지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뭔가 보상해 주고 싶었어.
그래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중에 조약돌이 달걀과 제일 비슷하게 생겨서 가져다준 거야! 그럼, 다음 알을 낳기 전까지 덜 외로울 거 아니야.
그 닭이 펄쩍펄쩍 뛰면서 널 끝까지 쪼아대는 바람에, 네 머리에 붙은 닭털을 내가 일일이 다 뽑아줘야 했잖아. 그러니 외롭지 않았겠지!
그리고 셋째 날!! 멀쩡한 새는 왜 건드려! 네가 그 새 흉내 내면서 같이 찍찍거리는 거 진짜 시끄러웠던 거 알아?!
그냥 평범한 새가 아니었다고! 물가에 사는 습성이 있는 새였단 말이야. 그날 네가 식물 가시에 긁혀서 빨리 물로 상처를 씻어야 했고, 식수도 보충해야 했잖아.
그래서 밑져야 본전으로 해본 건데, 다행히 흉내를 잘 내서 그 녀석이 날 동료로 착각하고 바로 깨끗한 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줬잖아!
동료로 착각한 게 아니라, 널 짝짓기 상대로 보고 하루 종일 쫓아다닌 거잖아. 그 새를 떼어내려고 우린 그날 새벽부터 도망쳐야 했다고!
그리고 오늘, 취사도구가 탔으면 예비용으로 바꾸면 되지.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숯덩이는 왜 긁어모으는 건데?
응? 이번 끼니는 식재료가 좀 부족하다고 했잖아. 혹시 숯덩이 맛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먹어보려고 했지! 그럼, 낭비하지 않아도 되잖아.
카무이는 아사르가 방심한 틈을 타 다른 손으로 새까맣게 탄 육포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사르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꽤 괜찮아. 우린 진짜 천재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사르는 자포자기한 듯, 겉으로만 웃는 소름 끼치는 표정을 지었다.
요 며칠 나랑 죽이 꽤 잘 맞았던 걸 봐서, 이런 건 굳이 따지지 않을게.
하지만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될 거야, 카무이.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혼자 돌아다니면서 멍청한 짓 좀 그만해.
너도 눈치챘겠지만, 요 이틀간 금지 구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알아. 다행히 종점에 거의 다 온 것 같아. 출구만 찾으면 빨리 돌아가자.
설마 방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위험한 일이 잦아진 뒤로 며칠 동안 얌전하더니, 왜 오늘 갑자기 또 발작하는 거야.
그건... 에이. 중요하지 않아. 네가 며칠 내내 굳은 표정으로 기분도 안 좋아 보였는데. 좀 어때? 방금 그렇게 잔소리를 한바탕 쏟아내니까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았어?
네가 요 며칠처럼 야수들이 습격할 때마다 앞장서서 설치지만 않으면, 내 기분은 알아서 좋아질 거야!
난 네 보급병이 아니라고. 날 얕보지 마. 나도 너보다 약하지 않으니까.
당연하지, 당연하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제일 잘 알지! 기습당했을 때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난 진짜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 큰일 날 뻔했어!
알면 됐어. 강가로 가서 그 시커먼 손이나 씻고 물통을 채워 와. 우린 계속 앞으로 가야 하니까.
바로 그때, 갑자기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카무이도 예리하게 이상을 눈치챘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멀지 않은 풀숲을 응시했다.
이상했다. 쥐 죽은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기에 둘은 오히려 그 안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서 무기를 들어, 전투 준비.
알겠어.
둘은 경계하며 앞쪽 풀숲을 주시했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분명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가 이어지다가,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야생 늑대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다행이다. 이 근처에 흔한 종이네. 게다가 한 마리뿐이라 겁낼 필요 없어. 쟤들 습성상 우리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조용히 해. 일단 다른 곳으로 피해서 저 녀석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아사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게도 비교적 다루기 쉬운 야수를 만난 셈이라, 팽팽했던 긴장을 풀고 무기를 든 채 뒷걸음질 쳤다.
잠깐... 아니야!! 아사르! 움직이지 마!!
카무이가 먼저 뒤쪽에 숨어 있던 기척을 눈치채고, 기습당하기 직전의 아사르를 재빨리 끌어당겼다.
늑대 무리야. 게다가 저 녀석들... 우릴 포위할 속셈인 것 같아!
수가 너무 많잖아. 젠장,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던 늑대는 도망치지 않고 대담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주변의 늑대 무리는 그 우두머리의 행동을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우두머리인가 봐. 이제 어떡할래? 쟤부터 처리할까? 아니면 제일 뚫기 쉬운 곳으로 돌파할까?
내가 늑대 무리를 좀 더 자세히 볼 테니까, 넌 저 녀석을 마크해.
알았어. 나한테 맡겨.
둘은 등을 맞댄 채,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 무리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우두머리 늑대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카무이도 기세에 밀리지 않고 무기를 꽉 쥐며 맞설 준비를 했다.
아우!!
갑자기 우두머리 늑대가 맹렬하게 달려들었지만, 예상과 달리 카무이에게 향하지 않았다. 녀석은 방향을 틀어 아사르를 기습했고, 늑대 무리의 약점을 찾느라 집중하고 있던 아사르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아사르!! 어서 피해!!
"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아래를 보니, 아사르의 다리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건 아사르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무이?!!
아사르는 시야를 가리던 팔을 치우고, 자기 앞을 가로막은 채 늑대의 공격을 막아낸 카무이를 보았다. 늑대는 흉하게 입을 벌려 카무이의 팔을 꽉 물고 놔주지 않았고, 카무이 역시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윽?!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뼈에 닿을 정도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카무이의 신경을 덮쳤지만, 그는 늑대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 꿋꿋이 버텼다.
이성을 잃은 짐승은 야성을 완전히 드러내, 이빨이 통하지 않자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들고 눈앞의 인간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 카무이는 옆에 있던 대검을 들어 올려 막아내며, 마침내 늑대를 뿌리칠 기회를 잡았다.
늑대는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지며 쿵...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투지에 불타올랐고, 흉측한 입에는 카무이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 빌어먹을 늑대가!!
카무이!!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있어, 내가 상대할 테니까!! 크아아.!!
완전히 격분한 아사르는 우두머리 늑대를 향해 돌진했다. 기습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힘으로 늑대 한 마리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카무이는 아사르가 걱정되어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사르는 공격할 기회를 엿보는 주변의 늑대 무리를 주시하며,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태세를 갖췄다.
흥... 자신이 있으면 덤벼 봐!
또 기습할 생각은 말고, 아사르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늑대 몇 마리가 간을 보다가 덤벼들었지만, 방금 상대한 우두머리 늑대보다 훨씬 힘이 약해 카무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늑대 무리는 당분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고, 혹여 다시 덤벼든다 해도 카무이는 아사르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줄 자신이 있었다.
한편, 아사르는 갈수록 이성을 잃고 폭주하듯 맹공을 퍼부었다.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자, 카무이도 타이밍을 맞춰 합세해 아사르가 우두머리 늑대를 해치우는 것을 도왔다.
인간과 짐승 모두 이성을 잃은 듯 서로 으르렁거리며 난투를 벌였다. 마침내 피가 풀밭을 붉게 물들였을 때, 둘은 힘을 합쳐 우두머리 늑대의 숨통을 끊었다.
아우...
녀석이 쥐어짜듯 마지막으로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자, 신호를 받은 늑대 무리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은 카무이는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걸 직감했다.
후우, 아사르, 너...
윽?!
전투의 긴장감에서 벗어나자, 카무이는 그제야 팔의 상처가 얼마나 끔찍하게 아픈지 깨달았다. 그는 한 손으로 무기를 바닥에 꽂아 세운 뒤, 조심스레 크게 다친 다른 쪽 팔을 살폈다.
움직이지 마!!
아사르는 다급히 카무이를 말리며 달려가서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끔찍한 상처를 뚫어져라 보던 아사르는 들고 있던 무기를 내팽개치고 서둘러 약을 찾아 카무이를 치료해 주었다.
카무이는 더 이상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사실 조금씩 철이 들면서부터 그는 아파도 소리를 내지 않고 참는 법을 배웠다. 남들이 걱정하는 게 싫었기에, 가끔 장난칠 때를 제외하곤 꾹 참아왔다.
더구나 지금 아사르가 더 이상 자극을 견디지 못할 상태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밀림은 다시 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으로 소란스러워졌고, 그 사이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카무이는 눈앞에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는 아사르를 보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사르? 걱정하지 마. 봐봐. 우리가 저 녀석들을 쓰러뜨렸잖아.
겁먹지 마. 이제 괜찮을 거야.
아사르가 마지막 붕대를 끊어 묶었을 때, 카무이의 말은 오히려 불씨가 되어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형국이 되면서 아사르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괜찮을 거라고? 말은 참 쉽게 하네!!
방금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 늑대의 이빨이 네 머리통을 날려버렸을 거라고!!
그리고 손으로 막긴 왜 막아? 그럴 땐 남을 신경 쓰지 말고 너부터 피했어야지!! 뼈라도 다쳐서 팔이 잘리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모든 말이 카무이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정작 기세가 꺾이며 무너져 내리는 건 아사르 본인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런 상처를 본 게 언제인지 알아?
특급 위험 임무에서 실려 온 부상자들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날 밤을 넘기지도 못했다고!!
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어떡하라고?!!
내가 널 이번 시련에 끌어들인 거잖아!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무슨 낯으로 설명해!!
그렇게 된다면... 난 어떻게 살아, 무슨 면목으로 널 보겠냐고.
아사르는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아사르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는 카무이도 그 사람들처럼 다시는 웃고 떠들며 자기 곁에서 장난치지 못하고, 묘비에 새겨진 차가운 글귀로 변해버릴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에제트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함부로 떠난다는 말해선 안 돼. 카무이, 명심해. 네가 다른 사람들을 아끼는 만큼, 너 자신도 소중히 여겨.
넌 우리 에제트 사람이야. 네가 우릴 버리고 먼저 가버린다면, 아무도 널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 말을 꼭 기억해... 네가 정말 날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땐 그렇게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그냥 녀석이 널 향해 덮치는 걸 보고, 무조건 널 지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미안해. 걱정하게 만들어서. 그래도 고마워, 아사르.
날 진짜 가족으로 인정해 줘서 고마워.
카무이는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진심 어린 감사이자,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기쁨이었다.
그럼, 똑똑히 기억해.
제발 몸 좀 사려.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굴지 마.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너, 그리고 엄마, 아빠도... 그 어떤 사고도 당하면 안 돼.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은 카무이는 왠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출발하기 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그 일을 말하는 거야?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꽤 위험한 일일지도 몰라. 이번에 우리에게 내린 처벌 내용이 왜 후보자 평가 내용과 맞물려 있는지 알아?
내가 몰래 그들의 계획서를 봤는데, 그들이 준비 중인 "그 일"이 시작되면 에제트의 관리 권한을 우리에게 넘기기 시작할 거야.
단순히 바빠서 그런 거라면 절대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그 일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네가 그때 최근 훈련이 좀 이상하다고 했던 게, 두 분이 우리를 상대로 능력 평가를 시작했다는 거였구나. 맞지?
맞아. 난 평가 결과가 불합격이면 이 일이 좀 미뤄질 줄 알았어. 하지만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안 해주잖아.
심지어... 사망 위험 동의서에 서명한 것까지 봤어. 그 며칠 동안 내 감정이 너무 불안정해서 혹시 가족의 날에 말해주지 않을까 싶어 일단 기다려봤는데, 그 결과는...
엄마, 아빠가 처음으로 가족의 날에 결석한 것도 그 일 때문이었구나.
그 며칠 동안 내가 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어. 게다가 나한테 찾아오는 건 너뿐이라 감정 조절을 못 했던 것 같아. 내 잘못이야, 사실 너와 별 상관도 없는 일인데.
누가 상관없대! 조금 전까지 우린 가족이라고 해놓고, 이럴 때 날 빼놓으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 그래도 단서는 꽤 많이 알아냈잖아. 전에 말했던 것처럼 돌아가서 해결하자.
안심해! 나 카무이가 있잖아.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너 진짜... 알았으니까 든든한 카무이는 상처나 좀 보여주는 게 어때? 약 바르게 가만히 좀 있어.
아사르의 감정이 조금씩 진정되자, 둘은 함께 카무이의 상처 치료를 마쳤다.
네 상처는 에제트로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는 게 좋겠어. 지금 바로 엄마한테 연락해서 시련 조기 종료를 요청할게. 벌을 더 받아도 상관없어.
그럼, 나도 끼워줘. 무슨 결과가 나오든 같이 책임지자.
둘은 오딜리에게 통신을 걸었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의아해하며 에우르디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상해. 설마 에제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사르가 초조해하며 에제트의 긴급 통신망을 가동하려던 찰나, 오딜리에게서 먼저 통신이 걸려 왔다. 둘은 다급히 통신을 받았다.
아사르, 카무이!! 지금 당장 시련을 중단하고, 최대한 빨리 에제트로 돌아와.
그리고 실시간 위치 추적 켜두는 거 잊지 마. 내가 지금 금지 구역으로 데리러 가는 중이니까.
엄마!! 무슨 일이야?!
오딜리의 말투는 평소보다 훨씬 다급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급하게 이동하는 도중에 통화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어!! 아무튼 빨리 돌아와.
그리고 명심해. 오는 길에 이상한 기계를 마주치면 무조건 피해!! 싸우려 들지 말고, 에제트로 돌아오는 걸 최우선으로 해.
아사르, 여기 좀 봐!!
절반쯤 돌아왔을 때, 카무이와 아사르는 오딜리가 왜 그토록 다급하게 그들을 불렀는지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도중에 지나친 외곽 도시들은 대부분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성안의 사람들은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심지어 몇몇 도시는 이미 혼란스러운 폐허로 변해 있었다. 처음엔 또 어느 국가 간에 대규모 전쟁이 터진 줄 알았지만, 이런 곳에는 군대도, 생존자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 그들은 한 도시를 지나가다가 보급품을 찾기 위해 조심스레 잠입했고, 수색 도중 카무이가 이 끔찍한 참상을 발견했다. 이곳은 습격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온갖 금속 기계에 꿰뚫린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고, 눈을 감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들은 자연스레 에제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전쟁이나 재난일 리가 없었다.
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들려왔고, 카무이와 아사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야외 공터에서 흑발의 소년이 쇠 파이프를 쥔 채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앞에는 눈을 붉게 번뜩이는 기괴한 기계가 괴물 같은 자태로 서 있었다.
소년은 처참한 시체 몇 구를 등 뒤에 두고 있었는데, 아마도 저 기괴한 기계의 손에 죽은 듯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비통함과 분노만큼은 역력했다. 소년은 이성을 잃은 채 죽은 이들의 복수를 하려 덤벼들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어 금세 기계에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기계는 살육의 칼날을 눈앞의 소년에게 휘둘렀다.
안 돼!!!
카무이는 소리치며 소년을 구하기 위해 뛰쳐나가려 했다.
멍청아!! 미쳤어?!
아사르가 재빨리 카무이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다시 벽 뒤로 숨겼다.
오는 길에 상황을 다 봤잖아. 저게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엄마가 한 말을 잊었어? 지금은 우리가 안전하게 에제트로 돌아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저 녀석은 에제트 사람도 아니잖아! 내 코가 석 자인데 왜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거야?!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다시 카무이의 신경을 자극했고, 카무이는 아사르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뛰쳐나갔다.
하지만 저 녀석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잖아!
아사르, 에제트가 구해준 사람들을 생각해 봐. 우린 그냥 똑같은 일을 하는 것뿐이야.
넌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난 저 소년을 구하고 올게!!
카무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흑발 소년은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듯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격렬해지자,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앞으로 돌진했다. 힘은 부족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카무이를 도우려 했다.
카무이... 구제 불능, 바보 자식!!
아사르 역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못하고 무기를 들어 전투에 합류했다.
다행히 이상 로봇은 더 나타나지 않았고, 셋이 힘을 합치자 얼마 뒤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동하느라 체력을 꽤 소모한 데다 격렬한 전투까지 치른 카무이와 아사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마워.
흑발 소년은 체력을 보충할 물을 찾아와 둘에게 건네며 감사를 표했다.
아사르는 자신들의 발목을 잡은 이 짐 덩이에게 좋은 표정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이 건넨 물병을 낚아채듯 받아 든 뒤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반면 카무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천만에, 천만에! 안녕, 난 카무이고, 이쪽은 우리 형 아사르야!
아사르는 웬일로 카무이의 호칭에 반박하지 않고, 묵묵히 물만 마셨다.
참, 넌 이름이 뭐야?
카트레브.
카트레브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카무이는 카트레브의 얼굴이 피와 진흙투성이인 것을 보고 남은 물로 닦아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카트레브, 근처에 다른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 우리가 같이 찾아줄게.
눈빛이 어두워진 카트레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죽었어...
보육원 식구들은 다 여기에 있어.
저것들이 쳐들어와서 다 죽였고, 지금은 나만 남았어.
말주변이 없었지만 결코 냉정하지는 못했던 카트레브는 참혹하게 죽은 동료들이 떠오른 듯 손을 떨고 있었다.
카무이는 카트레브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러자 손바닥을 통해 온기가 전해졌다.
유감이야.
그 말을 들은 아사르도 더 이상 카트레브를 나무라지 않고, 묵묵히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모르겠어...
카트레브는 버림받은 고아로 줄곧 이 보육원에서만 살았고,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깥세상은 카트레브가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곳이었다.
그럼... 우리와 같이 집에 갈래? 에제트라는 곳이야.
우리가 널 지켜줄게. 앞으로 우리가 네 가족이 되어줄게.
카무이!!
아사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카무이를 말리려 했다.
아사르, 이게 에제트의 원칙이잖아. 너도 잘 알잖아.
갈 곳 없는 사람이라도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에제트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됐다. 됐어. 내가 널 어떻게 말리겠냐. 데려가서 네가 직접 엄마한테 설명해.
그 말은 곧 암묵적인 동의였다.
카트레브, 챙겨갈 거 있으면 빨리 짐 싸. 바로 출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린 카트레브는 보잘것없는 짐을 챙겼다.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 그리고 자기 이름이 적힌 명찰 하나만 챙긴 뒤 카무이와 아사르 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카트레브는 둘과 살짝 거리를 둔 채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카무이를 향했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아사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번갈아 보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아사르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가자, 카무이.
?
...
기묘하고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제발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라고 말해 줘.
저기... 아사르, 카트레브는 앞이 잘 보일 걸. 전에 이런 증상을 본 적이 있어. 안면인식장애라고 하던가...
둘의 목소리 정도는 카트레브도 구분할 수 있었기에, 자신이 옷자락을 잡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손을 뗐다.
응.
장님일 리는 없으니, 방금 그 대답은 후자를 긍정한 것이 분명했다.
아사르는 이 답답한 녀석에게 또 한 번 도발당한 기분이 들었다.
카무이...
네가 주워 온 이 멍청한 강아지를 당장 네 쪽으로 끌고 가. 지금 당장!!!
에이, 화내지 마. 친해지려는 스킨십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안 그래? 형...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너도 같이 패버린다!!
소년들이 간신히 되찾은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주변에서 또다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로운 기괴한 기계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 수가 꽤 됐다.
젠장... 끝도 없잖아!
세 사람은 즉시 전투태세를 다시 갖췄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들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흩어져서 처리하자. 내가 셋 둘 하나 세면 동시에 덤비는 거야. 빨리 끝내자고.
셋... 둘... 하나...
공격!!
세 소년이 동시에 공격하려 했지만, 적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기괴한 기계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거치적거리지 말고, 다 비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무이와 아사르는 단번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카트레브를 멀찍이 물러나게 한 뒤, 망설임 없이 전투에 합류했다.
젠장! 이쪽 놈들은 역시 상대하기 까다롭네. 너희들, 괜찮니?
우린 괜찮아. 엄마, 근처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설명할 시간 없다. 급하니까 너희 셋 다 날 따라와. 최대한 빨리 에제트로 돌아가야 해.
이 세계는 이미 완전히 뒤집혔어.
에제트에 가까워질수록 카무이는 오딜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인간 거주지는 하나같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카무이는 에제트로 돌아오던 그날을 영원히 기억했다. 날씨는 기이할 정도로 이상했고, 보기 드문 일식이 일어나 대낮임에도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한때 눈부신 금빛을 내뿜던 태양은 그가 오는 길에 보았던, 잔혹하고 살육에 미친 기계 괴물들처럼 검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나중에야 카무이는 그날 재앙이 강림한 후, 세상이 이토록 처참하게 몰락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 세상에 죽음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고, 타락한 태양이 하늘을 좀먹었다.
"2160년 12월 25일, 퍼니싱 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