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트 유적 인근
지상
쿵...
작은 돌멩이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금속 문을 때렸다.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조약돌이었지만, 적막한 적색 사암 절벽 사이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거 꽤 재밌는데? 지휘관도 한번 해볼래?
아, 맞다! 방법이 하나 더 있어. 입구에 대고 크게 외치는 거야. "열려라. 참깨!"
말을 마친 카무이가 또 다른 돌멩이를 집어 다음 문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금보다 훨씬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으흠, 찾았다.
좋아. 장난은 여기까지. 가자. 진짜 입구를 찾았어.
방금 건 탐색이었다고! 에제트는 침입자를 속이려고 입구를 일반 벽이랑 똑같이 만들어 놓거든. 그래서 두드릴 때 나는 소리로 금속판 두께를 가늠해야 진짜를 찾을 수 있어.
카무이는 문 앞으로 다가가 가장자리를 더듬더니 숨겨진 장치를 찾아냈다. 그런데 장치를 꾹 눌러보아도 굳게 닫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카무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장난기 어린 표정도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수상해. 입구를 찾아서 숨겨진 통신 장치를 누르면, 안쪽 멤버와 연결돼서 문을 열어줬거든...
하지만 지금은...
공중 정원이 접수한 응답 신호가 진짜고, 에제트에 생존자가 정말 존재한다면, 접선 인원이 여기서 우릴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텐데. 혹시 모르니까 내가 다시 확인해 볼게.
카무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번에는 주먹으로 금속판을 강하게 내리쳤다. 손끝에 전해지는 진동으로 금속의 두께가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측면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견되었다. 그건 닫혀 있을 땐 절대 틈이 없어야 할 접합부였고, 누군가 억지로 문을 연 흔적이 분명했다.
[player name], 물러서 있어.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카무이가 대검을 치켜들고 금속 문을 향해 내리꽂았다.
쾅... 쾅...
균열이 벌어지면서 공간이 드러났다. 문 안쪽에서는 희미한 빛만이 새어 나올 뿐, 죽은 듯한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신호에서 말했던 접선 요원이 대기하고 있다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알겠어.
카무이는 문 안쪽을 잠시 살피더니, 힘을 주어 틈을 벌렸다. 어느 정도 구조가 망가져 있던 터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눈앞에는 적막밖에 없었다.
카무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벽면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올리자, 통로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카무이가 조심스럽게 통로 안쪽으로 진입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은 없었다. 정말로 이곳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아니다... 외부 침입 흔적이 있었다면 이미 당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린 카무이는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건?!
벽면에 남은 움푹 팬 자국들을 발견한 카무이는 급히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전투 흔적인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야. 보아하니 최근에 남겨진 것 같아.
그리고 이건... 퍼니싱 반응이야.
경계를 더 높여야겠어. 단독 행동은 금물이야. [player name]. 만약을 대비해서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카무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다음 행동을 고민했다.
다른... 아, 맞다, 게시판!
입구 통로마다 긴급 연락용 게시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
여전히 안개 낀 듯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장치의 대략적인 위치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카무이는 게시판 앞으로 달려가 떨리는 마음으로 가동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화면이 켜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작동하는 것 같았다.
인증을 위해 식별 번호를 입력하십시오. 권한 확인 후 게시판이 개방됩니다.
카무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번호를 입력했다.
일치합니다. 식별 번호 [SUE-03], 멤버 [카무이]. 접근 권한이 확인됐습니다. 시스템을 개방합니다.
수송기에서 말했던 훈련생 시절에 사용하던 번호야. 다행히 필요한 권한 등급에 만족했어!
어쨌든... 지금으로선 [SU-0]가 내 번호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더 확실한 답을 고르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이지.
미확인 메시지 [1]건이 존재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알겠습니다. 메시지 내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카무이, 다행이야. 살아 있었구나. 상황이 급하니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회포는 만나서 풀자.
대행자의 기습을 받았어. 그래서 공중 정원과 연락한 뒤, 장치를 챙겨서 통신실로 후퇴하기로 했어.
네 상황은 대충 들었고, 여기 남겨둔 태양 에너지가 도움이 될 거야.
다들 지쳐가고 있어. 최대한 빨리 와 줘. 통신실에서 기다릴게.
그리고 꼭 조심하거라.
-라이프
라이프라...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건 신분밖에 없어. 저 사람은 발리콘 계획 이후 세계 정부에서 에제트를 관리하려고 파견한 군대의 대장이었어.
감정적으론... 구체적인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이름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든든하고 안심되는 느낌이 들었어!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지도?
물론, 상대가 진짜 "라이프" 본인이라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판단이야.
고마워, [player name]. 하지만 괜찮아. 상황이 불확실한 만큼, 쉽게 흔들려선 안 되니까.
적어도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진 절대 방심하지 않을 거야. 네 안전은 내가 확실히 책임질게. 무슨 일이 있어도 위험에 빠지게 하진 않을 거야!
상대가 물건을 남겼다고 했으니, 그걸로 진위를 확인해 보면 되겠네.
남겨뒀다는 태양 에너지가... 찾았다. 여기 있어.
에제트의 게시판 하단에는 일반 캐비닛이 설치되어 있었다. 카무이는 그 안에서 메시지에 적힌 에너지를 찾아냈다.
이 에너지 병... 일단 아시모프가 준 임시 탐지기로 테스트해 볼게.
아주 조금만 덜어서... 시약지에 떨어뜨리고, 20초 대기...
나왔다! 금색이야. 안전 범위 안이야.
그래! 난 준비됐어, 연결을 시작해도 좋아.
연결이 완료되자 카무이는 소량의 태양 에너지를 가슴에 주입해 흡수했다. 그러자 코어가 회전하면서 에너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카무이는 그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가 전신의 회로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공중 정원의 복제 에너지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그건 훨씬 더 강력한 힘의 파동이었고, 어쩌면 이것이 카무이를 옥죄던 한계를 정말로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갑자기 수만 톤의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덮쳐왔다. 카무이는 벽을 짚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이 뇌를 파고들어, 의식의 바다를 미친 듯이 찢어헤치고 짓누르더니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고통이었다. 에테니언 기체 적합성 테스트 때도 수없이 겪었던 그 찢어지는 감각이었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견뎌내야만 파손된 의식의 바다를 지금의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고통은 그 어떤 때보다도 격렬했다. 카무이는 문득 발리콘 계획 훈련 기록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이것 또한 에제트에 있었을 때 그가 겪었던 일일까?
걱정하지... 마. 윽... 난 괜찮아. 지휘관.
전이랑... 비슷해. 의식의 바다가 복구되고 있는 것 같아. 단지 좀 더
으아악...
카무이는 말을 끝맺으려 했지만, 다시 한번 몰아친 격통이 말을 끊어버렸다.
카무이의 의식의 바다 가장자리를 떠돌던 파편들이 날카로운 바늘에 꿰뚫려 끌려 올라왔다. 그리고 마취 없는 수술처럼,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기억들이 억지로 기워져 원래의 형태를 찾아갔다.
카무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안개 너머, 단 한 번도 뚜렷하게 보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과 연관된 호칭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이목구비를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눈앞에 드러났다.
엄마... 아빠...
하지만 떠오른 것은 오직 얼굴뿐이었다.
붉은 머리의 "엄마"와 은색 눈동자의 "아빠"는 그곳에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 복구된 의식의 바다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끝자락이었다.
방금 막 떠올랐던 얼굴들이 다시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시야에는 다시 낡은 에제트의 유적과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 지휘관의 모습만 남게 됐다.
응.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견뎌낸 카무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에너지는 확실히 의식의 바다 복구에 효과가 있어.
방금 게시판의 내용에도 에제트 내부 암호 표식이 있었잖아, 그래서...
카무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뒷말을 삼켰다.
그렇다는 건, 이것이 적의 속임수가 아닌, 상대방도 정말 에제트 출신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믿어야 할까?
이건 분명 근거 없는 희망에 가까운 추론이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봤는데... 이번 판단은 네게 맡길게, [player name]. 내가 주관적인 감정에 휘둘려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말이야.
좋아. 네 판단을 믿을게.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고마워. 그럼, 같이 힘내보자!
남은 에너지도 마저 흡수하고 바로 이동하자.
흡수 간격이 짧아 이번엔 심각한 부작용이 없었다. 남은 에너지를 모두 받아들인 카무이는 지체 없이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게시판 정보가 사실이라면, 생존자들은 통신실에 있을 거야.
에제트 통로는 등급별로 나뉘어 있어서, 해당 등급 암호로만 열 수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통신실은 더 높은 등급 통로에 있어.
그러니까... 일단 총괄 권한이 있는 자료실로 가자! 거기서 통로를 열면 될 거야.
이쪽이야! 따라와, 지휘관!
응? 아닌데!
아니, 아니. 내 말은... 에제트에 지도 같은 건 없어!
잠깐만, 그때 그 말을 뭐라고 했더라?
"자기 집 안에서도 지도가 필요한 멍청이는 길치뿐이야. 에제트에 그런 바보는 필요 없어."
그래서 에제트엔 특정 규칙으로 된 표지판만 있고, 지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전 팩트 폭행이지? 나 어릴 때 표지판 규칙 배울 때도 맨날 저 소리 들으면서 혼났다니까.
이건 진짜 에제트에만 있는 유일한 전통이야. 다른 기지엔 절대 없어!
원래는 그렇지 않았대. 예전엔 평범한 표지판을 썼다는데...
뭐, 내가 기억하는 한 난 항상 이 규칙대로 에제트에서 길을 찾았어.
봐봐. 이 기호가 자료실 표식이고, 옆에 있는 건 왼쪽 통로로 가라는 뜻이야.
가자!
카무이는 신이 나서 지휘관의 손을 잡아끌고 앞장섰다.
참, 지휘관도 모든 표식의 뜻을 한번 맞혀볼래?
맞히는 과정이 나름 재미있거든! 그리고 알아두면 지휘관도 여기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잖아.
짜잔! 마침 앞에 통로 표식이 세 개나 있네. 실전 학습하기에 딱 좋은 것 같은데.
힌트를 조금 줄게, 지휘관이 아는 코드 규칙으로 찍어보면 돼!
인간 지휘관은 세 통로의 표식을 유심히 살폈고, 익숙한 코드 규칙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player name]답네! 정확해. 아주 예리해!
정답이야. 마지막 배열이 상세 경로 안내거든. 봐, 이 기호는 이 통로가 맞다는 뜻이고, 뒤에 붙은 게 자료실 기호야.
그리고 맨 마지막 기호는 "통로 끝까지 가서 우회전하면 도착"이라는 뜻이야!
아, 이거! 이것은 자체 제작한 가장 특별한 기호야! 그걸 봤다는 건 말이지.
"이 길로 가면 외곽을 뱅뱅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뿐, 남는 건 헛고생뿐이니 낚여서 들어오는 바보가 되지 마라."라는 뜻이야.
맞아! 엄마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어, 딱 그런 성격이었어.
처음엔 눈 가리고 아무거나 막 그려서 정하려고 했대. 그래야 적이 절대 해독할 수 없다나? 예측불허의 비밀 무기라면서 말이야.
그 말이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리 아빠가 먼저 말렸대. 그리고 결국 설득당해서 코드 규칙을 따르기로 한 거야.
맞아! 우리 아빠의 이름이야.
남들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옛이야기를 꺼내자, 카무이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아직 기억 안 나는 게 더 많아. 그래도 본능적으로 느껴져. 그때 우린 분명 즐겁고 따뜻하게 살았을 거야.
어쩌면 에제트 특유의 제도 때문이겠지. 다른 군사 기지와 다르게, 에제트는 둔병제를 유지했거든.
수많은 작은 가족이 모여서 튼튼한 대가족을 이룬 셈이지. 아~ 어서 기억을 다 찾고 싶어.
지금은 희미한 잔상뿐이지만, 생각만 해도 이렇게 즐거운 걸 보면... 분명 그리운 나날들이었을 거야.
카무이는 걷는 내내 기억나는 조각들 또는 자신의 상상까지 섞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러다 자료실 문 앞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떠들었는지 의식했다.
지휘관,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그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리고 기억이 더 돌아오면... 조금씩 더 얘기해 줄게!
자, 일단 들어가자.
그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기쁨이었기에, 카무이는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소중한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신원 인증이 완료됐습니다. 권한이 확인됐습니다. 입구를 개방합니다. 어서 오세요.
둘은 순조롭게 자료실로 들어섰다. 켜져 있는 전자 스크린과 각종 기기가 이곳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로 개방 권한... 권한이 어디 있더라?
카무이는 중앙 제어실 콘솔의 전자 스크린을 능숙하게 넘겼다. 그러다 몇 번의 조작 끝에 통로 제어 경로를 찾아냈다.
경고합니다. 현재 사용 중인 계정 [SUE-03·카무이]는 최고 관리자의 권한이 없습니다. 조작을 수행하려면 최고 권한 계정으로 로그인하세요.
최고 권한 계정이라... 그럼, "리더"밖에 없겠네.
카무이는 망설임 없이 로그인 화면에서 [오딜리]를 선택하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계정 [오딜리]가 로그인됐습니다. 신분 등급은 리더입니다. 접근 권한이 승인되었습니다.
하하, 역시 이거였어. 엄마는 어딜 가나 항상 똑같은 비밀번호를 쓰셨거든.
카무이의 목소리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특별한 숫자는 그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어느 오후의 추억 속으로 그를 데려갔다.
근데 우리 가족이 다 그래! 나도 에제트에서 비밀번호 쓸 일 있으면 죄다 이 날짜로 했었거든.
맞아. 내가 몇 살 때더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3월 에제트 가족의 날이야.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다 같이 가족사진을 찍은 날이기도 하지!
그리고... 유일한 가족사진이기도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