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세계는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다. 비록 죽음의 기운을 풍기겠지만, 죽음이 없으면 새로운 탄생도 없는 법이다."</i>
또 남은 게 뭐가 있지? 또… 누가 남았더라?
행복해진 유일한 루시아를 복원한 뒤, 알파는 어린양을 데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생명의 나무를 응시했다.
알파의 왼쪽 눈은 이미 하나의 "고리"로 수축해 있었다. 금홍색이 검은색을 감싸고 있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
내가 짊어질 불행이 또 누구에게 남아 있을까?
상처투성이인 손 몇 개가 나무 아래에서 뻗어 나왔다. 도움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밀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알파는 그 손들을 모두 맞잡았다.
두려워하지 마. 전부 내게 맡겨.
알파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모든 고난과 불행을 짊어지려 했다.
안개를 뚫고 나아가, 각자가 힘겨운 선택에 직면했던 그 순간에 도달했다.
첫 번째는 단연코 알파가 결코 놓을 수 없는 루나였다.
별하늘이 수놓아진 형언할 수 없는 터널 속에서 한 소녀가 미세한 불안감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소녀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 시도의 절망을 번번이 맛보면서도, 원한으로 가득 찬 길에 거듭 발을 내디디며 이 세계를 위해 무언가를 해내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누구도 소녀를 지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소녀 역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
결국 지쳐버린 소녀는 문득 2161년 1월 5일 밤, 퍼니싱 폭발 후 16일째 되던 날로 돌아가, 아직 피해를 보지 않고 함락되지도 않은 거리를 배회하기에 이르렀다.
…
루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수화기에 바짝 귀를 대고 어머니의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똑똑히 들으려 애썼다.
고작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행복은 벌써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잘 자렴.
어머니는 전화기 너머의 "낯선 사람"에게 다정하게 당부하고는 루나의 전화를 끊었다.
…
수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루나는 슬픔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꾹 참았다.
가자.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따르릉…
하지만 공중전화 부스에서 날카롭게 울리는 벨 소리가 상심한 루나를 자꾸만 불러 세웠다.
!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 우주의 힘에 이끌려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루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루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화받았다.
여…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의 존재가 인간처럼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려던 찰나, 루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언… 언니.
루나는 절대 울 생각이 없었는데, 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쉬움, 서러움, 슬픔이 순식간에 전화 부스를 가득 채웠다.
무서워하지 마, 루나. 내가 여기 있잖아.
알파의 목소리는 루나의 등을 다독이듯 가볍게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기억나? 아주 오래된 예전에 우리 같이 기러기 사냥하러 갔을 때 말이야.
흐흑… 기억나.
잘 생각해 봐, 그때 내가 뭐라고 했지?
언니가 그랬잖아. 우리가 살아가려면…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그게 우주의 보존 법칙이라고…
그래, 다 기억하고 있구나. 참 잘했어.
지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들려오는 알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행복과 불행은 같은 저울 위에 있어서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해.
이제 내가 저울의 반대편이 될 생각이야. 내가 거기서 버티고 있으면 너흰 하려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싫어. 언니도 전화 끊을 거야?
아니. 하지만 넌 전화를 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특별히 당부할 말이 있어.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안개 지역을 거둬들이고 내 힘으로 승격 네트워크를 교란할 거야.
그날은 그리 머지않아 올 거고, 넌 분명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그때가 오면 모든 건 네 뜻대로 해. 만약 그 기회를 틈타 승격 네트워크를 역으로 지배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명심해.
수화기 반대편의 알파 역시 수화기에 바짝 다가갔다.
이 전화 부스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진짜야.
그리고… 내가 네 귀결점이라는 것도.
이 세계 누군가는 다신 네 전화를 못 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언제든 네 전화를 받아줄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걸어. 반드시 대답할 테니까.
…
기억할 수 있지, 루나?
기억할게, 언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진지해진 루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스스로 전화를 끊었다.
루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뚜뚜 소리를 듣는 알파는 나무 아래서 안도감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장 큰 걱정거리를 마음 한구석에 내려놓고 나서야, 알파는 어깨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알파는 눈앞의 "안개"를 헤치며, 고난에 빠진 다음 사람의 손을 잡아 이끌려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어딘가에서 낯익은 남성의 실루엣이 알파의 눈에 들어왔다.
알파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선물했던 민들레 씨앗을 떠올렸지만, 동시에 다른 경로에서 그가 초래했던 수많은 고난도 함께 떠올렸다.
그는 참으로 복잡한 죽음을 앞둔 자였다.
2초 정도 고민한 끝에 알파는 본·네거트의 고난 속으로 발을 들였다.
"다소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생활용품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방 구석구석엔 옅은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자주 쓰는 곳만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
루시아.
소파에 앉은 본·네거트는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지 않은 채,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눈을 치켜떠 알파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알파는 자신을 보는 순간 본·네거트의 눈가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방금 날 부른 게 네 의식 속의 니모였나?
그럴지도. 나도 종종 내가 누군지 헷갈리니까.
이 꼴이 되는 게 당시 네 목표였나?
한때 난 오직 죽음만을 꿈꿨다.
지난번에 여기서 너와 대화했던 이는 누구지?
"지난번"이란 건 없다. 오직 "마지막"만 있을 뿐이지. 여기서 나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이는 7일 후 네 등 뒤에 있는 침대에서 깨어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다.
본·네거트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자, 알파 역시 그 점을 알아차렸다.
알파는 더 이상 환자와 안부를 나누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 침대를 바라보았다.
…
침대 위에는 상처를 입고 혼수상태에 빠진 지휘관이 누워 있었다. 복부의 상처는 살이 밖으로 뒤집혀 있어 차마 눈뜨고 보기 끔찍할 정도였다.
알파는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리더니 부드러운 침대 가장자리에 아주 가볍게, 천천히 걸터앉았다.
이 인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시공간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공교롭게도 나 역시 마찬가지란 거다.
…
그렇게 서둘러 따지지 마. 내가 상처를 제대로 처치하기도 전에 네가 와버린 거니까.
알았어. 내가 하지.
알파는 상처를 처치할 구급 도구를 집어 들었다. 이 모든 과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에 있을 때, [player name]도 조심스레 그녀의 상처를 꿰매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알파도 치료법을 배웠다.
알파는 신중하게 지휘관의 상처를 꿰매고 말끔히 처치했다.
본·네거트 역시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달칵.
알파가 지휘관의 상처를 다 처리하고 바늘과 실을 구급상자에 도로 넣자, 달칵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너한테 "지금" 상황은 어떻지?
이중합 탑은 망가졌고 특정 시점으로 통하는 확실한 출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넌… 아니. 루시아는 이중합 탑 코어를 흡수한 "열쇠"를 지닌 채 탑 안을 지키고 있지만, 안개 지역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지.
자비로운 자도 이곳 상황을 눈치챘어. 하지만 그녀는 우리 문명에 속하지 않으니, 그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는 장담할 수 없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본·네거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진 말을 바꾸며 시선도 한결 누그러졌다.
아니지. 보아하니 자비로운 자가 분명 널 도와준 것 같군.
본·네거트는 눈앞의 "루시아"에게 일어난 변화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맞아. 자비로운 자에게 감사하고 있고 조만간 그녀를 찾아갈 생각이야. 내가 "문 너머"와 맞서 싸워야 할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직 그녀의 엄호가 필요하거든.
좋아.
축하한다. 루시아.
방금 내게 질문을 던진 게 니모인지 트라우트인지 더 이상 캐묻지 않겠어.
네가 부른 이름이 "어느" 루시아인지 궁금할 뿐이야.
알파가 조용히 본·네거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본·네거트가 입을 열기까지 30초가 넘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라면 루시아는 한 명뿐이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니모는 내게 많은 걸 알려줬지만, 네 얘기만큼은 끝까지 얼버무리려 했지.
너 역시 그의 "후회" 중 일부였을 테니까. 그 녀석은 널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세계에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겠지.
니모도 이 세계의 두 루시아를 유심히 지켜봤지만, 그 누구도 넌 아닌 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적조를 배양하던 온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도 널 떠봤던 거다.
하지만 그때 넌 명백히 아직 운명에 따라잡히지 않았고, 똑같은 "출발점"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네게 무슨 돌발 상황이 생겼던 거겠지.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는 일이야. 난 시간이 얼마 없어. 이중합 탑과 관련된 일로 바빠. 귀항해야만 하거든.
맞아. 넌 귀항에 미치도록 집착하고 있지. 미래에 이중합 탑이 사라져 두 번 다시 강림하지 않는다고 해도, 넌 끊임없이 1호 영점 에너지 원자로를 가동하며 수없이 "출발점"을 찾아 헤맸을 거야.
어떻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와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난 내 판단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네 시야는 나보다 높은 곳에 있겠구나.
더 이상 모든 걸 지켜볼 필요가 없어졌는지, 피로에 지친 본·네거트는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어 하는 듯했다.
미안하다, 루시아.
우리가 널 코드네임 알파라는 꼬마 영웅이 아니라 무력한 아이로 취급했던 건 사실이야. 아무리 널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지.
네 차례가 아니었는데, 네 차례가 와버렸어.
넌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잘 해냈다.
아쉬움을 깊숙이 눌러 담은 본·네거트는 마침내 평온한 낯빛으로 알파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너의 후회는 겹겹이 쌓여 있어서 네가 사과하고 보상해야 할 이는 셀 수 없이 많아.
사람들은 본·네거트를 용서할 방법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모든 면에서 죽음이 마땅한 자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알파의 권한 밖이었기에, 본·네거트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듯했다.
고개를 돌린 알파는 더 이상 본·네거트를 보지 않고 침대에 누운 지휘관의 손바닥을 살며시 쥐여주었다. 둘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 동작 덕분에, 지휘관은 꿈속에서도 고통으로 잔뜩 구겨졌던 미간을 조금 폈다.
그러자 알파의 마음도 한결 나아졌다.
내 사람은 내가 데려갈게.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 차원의 섭리를 무너뜨려선 안 돼. 그러지 않으면 네가 선택한 가장 높은 차원의 세계마저 영향받아 걷잡을 수 없는 변화가 생길 거다.
난 무조건 열흘을 더 버틴 뒤에 움직여야 한다. 이 "운명"의 맥락을 사수하는 게 내 마지막 임무가 되겠지.
가능하다면, 내 고양이도 데려가라.
본·네거트가 구석에 있던 몸집이 거대한 치즈 고양이를 발로 밀어냈다.
너한텐 이미 흰 고양이랑 회색 고양이가 있잖아. 성격을 아주 둥글둥글하게 잘 키워놨으니, 내 고양이와 매일 싸우지는 않을 거다.
넌 어쩔 셈이지? 본·네거트? 어딜 가야 하고, 어딜 가고 싶지?
알파는 두 번 다시 본·네거트를 "니모"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권력 따윈 다 내려놓고, 의식의 바닷속 불필요한 잡음도 잘라버린 채, 온전한 인간이나 구조체로 살아가 볼 생각은 안 해봤어?
본·네거트의 고통을 대신 덜어주는 것은 포기했지만, 알파는 여전히 그에게 돌아갈 길을 알려주었다.
…
본·네거트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알파와 그녀 등 뒤 침대에 누워 있는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알파는 본·네거트가 흔들렸다고 느꼈다.
하지만 본·네거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남은 건 내 생명뿐이다.
이게 내가 자유롭게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지.
이 목숨마저 다 쓰고 나면, 그땐 너희가 "결국 이렇게 끝났다"라고 심판해 줘.
결국 이렇게 끝났다.
자살 유행병 환자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행사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파의 눈에는 생명의 나무의 맥락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조력에 나서며 이 모든 것을 안정시키려 애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알파는 이런 부류의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불행한 운명을 하나씩 끌어와 다듬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희생자들의 손이 하나둘 형체를 잃고 알파의 어깨에서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간 뒤에야, 알파는 비로소 안개 지역을 휘젓는 것을 멈추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어린양은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고 알파의 품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어쩌면 수많은 이의 일생을 겪어냈거나 아니면 우주가 탄생하고 적멸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거쳤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까마득하게 긴 시간이었다.
네가 불행을 껴안고… 희생을 바치는 그 과정에서 티끌만 한 만족감이라도 느꼈어?
아마도.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알파가 눈을 깜빡였다. 한 번의 호흡이 한 찰나였고, 세속의 감정은 더 이상 알파를 흔들 수 없었다.
어린양이 알파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감정이란 곧 대가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떨쳐내고 나니… 더 많은 걸 깨달았어.
어린양을 쓰다듬으며 알파는 생명의 나무가 지닌 본질이 바로 의식의 바다라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 문명이 사력을 다해 찾아낸 바른길이었고, 지금도 「왕관」의 수호 아래 나날이 무성해지고 있었다.
알파는 나무 아래서 이미 완벽한 탈바꿈을 이루었다. 비단 눈뿐만 아니라, 알파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더 이상, 이 우주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후…
알파가 어린양을 안아 올리고 부드러운 털에 뺨을 비볐다.
알파는 어린양에게 자신이 맨 먼저 [자비]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원리였다.
알고 보니 [자비]가 이 나무를 이루는 원형이었어. 가지 하나하나, 열매 하나하나 모두 [자비]에서 뻗어 나온 거였지.
알파의 눈에 분홍 머리 여성의 그림자가 비쳤다.
이제 그녀를 찾아가야 해. 아니. 그녀가 날 기다리고 있어.
어린양이 알파를 살짝 밀쳤다.
나머지…
알파가 손을 뻗어 다른 모든 열매를 쓸어내렸다.
열매의 본질은 인간 문명의 정수를 농축한 정보야.
다 자란
문명의 수준은 정보 엔트로피 양의 차이에 있으니까. 충분하고 넉넉한 정보는 쉽게 걸러지거나 흡수되지 않아.
식탁 위에 반 잔의 우유만 있다면, 넌 그걸 별로 영양가 없는 아침 식사라고 여기겠지.
하지만 식탁 위에 바다 전체가 차려져 있다면, 넌 이렇게 말할걸.
맞아.
내가 안정시키고 모두가 힘을 모은 덕분에 상황이 나아지고 있어. 우주의 선별에 맞설 열매들이 생겨나고 있지.
이것 봐, [자비], [기본], [왕국], [이해], [아름다움]… 이렇게 많은 열매가 조금씩 여물어가고 있잖아.
나뭇잎이야. 나뭇잎들이 노력하고 있거든.
알파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들을 가리키자, 연녹색, 갈색, 거무스름한 잎사귀들이 섞여 있었다.
공중 정원의 "생명의 나무 계획", 엘리시온에 숨겨진 "해영 기체 정보"… 설령 거짓일지라도 북극 항로 연합의 "통합 기술", 카헤티의 "새싹", 에제트의 "태양 코로나 유전자"…
인간은 줄곧 이 거대한 줄기를 따라 걸어온 거잖아?
나뭇잎이 충분해야 영양분을 흡수해서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어.
알파는 세계의 기원을 응시했지만, 어린양의 눈은 알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격 네트워크는 강력한 저장 장치를 대행자로 선택해 모든 부정적인 정보를 빨아들이고, 우주의 선별에 대항하지.
본·네거트가 아쉬움을, 루나가 원한을 대변하듯… 루나.
눈에 루나의 모습이 비치자, 알파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루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어. 증오 속에서 사랑과 이해의 실마리를 더듬어 찾아냈지. 그래서 승격 네트워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야.
알파는 너그러운 손길로 어린양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 나무에 달린 이상 틀린 건 없어. 모두 나무를 이루는 한 부분일 뿐이야.
승격 네트워크는 단지 같은 씨앗에서 자라난 거대한 나무의 또 다른 한 면일 뿐이야. 음지에서 양지로 나아갈 기회가 있다면, 그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
넌 공중 정원 소속이잖아. 공중 정원의 "생명의 나무 계획"은 긍정적인 열매를 모두 먹어 치우고 긍정적인 정보로 우주의 선별에 맞서기를 원해. 그래서 네가 본능적으로 승격 네트워크가 가는 방향을 거부하는 거야.
사실, 모두가 결승점으로 향하는 하나의 맥락을 찾고 있을 뿐이야. 그게 다지.
알파가 손가락을 뻗어 공중 정원에 있는 "의식 아카이브"를 가리켰다.
내 시야를 인간과 공유할게. 그럼, 앞으로 사람들은 이 나무의 맥락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거야.
반칙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알파는 입술을 어린양의 코끝에 가볍게 맞추었다.
이건 널 향한 내 편애야. 그리고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알파는 수많은 세피라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한 입 한 입, 열매를 먹고 또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관」마저 집어삼켰다. 껍질, 과육, 씨앗까지 모조리 삼켜버렸다.
어쩌면 인간이 지어낸 어떤 창세기 신화에도 이런 열매가 등장할지 모른다.
포식을 마친 뒤 알파는 만족스러운 듯 손등으로 입을 닦아내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이제 이 나무를 완벽히 꿰뚫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알파는 손을 내밀어 오래전부터 나무뿌리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문"을 열었다.
때가 됐어. 자, 이제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볼까?
하지만 어린양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
알파는 질문을 한 어린양을 바라보면서도 문을 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있을지도? 하지만 그건 모두…
!
문은 이미 열렸다.
문 너머엔 넓은 바다도, 별이 빛나는 우주도 없었다.
오직 어린양만이 문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알파는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졌다. 누군가 알파가 무수한 윤회와 수렴 속에서 잃어버린 감정을 찾아 돌려준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어린양이 돌아서서 떠나갔고, 알파가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털끝 하나 스치지 못했다.
안 돼, 잠깐만…
순간 두려움과 다급함을 되찾은 알파는 문 너머의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