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대 출항 1일 차.
저 다 이해했어요.
다들 돌아오면, 깜짝 놀라게 해줄 거예요.
…
모든 문은 굳게 닫힌 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아이가 부릴 수 있는 "반항"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선발대 출항 2일 차.
일찍 일어난 루시아는 선발대가 떠난 방향을 향해 몇 분간 멍하니 서 있다가, 오늘도 다들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마침내 인정했다.
루시아는 바보 개구리를 안고 다시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먼저 민들레에 물을 세 번 주고, 자기 식량에서 작은 조각을 떼어내 잘게 부순 뒤 흙 위에 뿌렸다.
잠시 망설이던 루시아는 마침내, 리올라가 빨간 상자에서 꺼내주어 소중히 간직해오던 사탕 한 알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사탕을 물에 녹인 뒤 그 물 역시 흙에 부었다.
루시아는 영양가 있는 것을 흙에 넣어주면 비료가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 배운 적이 있어서 이 방면으로는 꽤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끝낸 루시아는 만족스러운 듯 화단 옆에 쭈그려 앉아 푸른 잎사귀 몇 장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러면 꽃이 빨리 피겠지.
선발대 출항 3일 차.
아침이 되자 알람이 울렸다.
루시아는 있는 힘껏 정수 장치로 달려가 물탱크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어른들이 옆에 준비해 둔 필터를 끼워 넣었다.
"임무"를 마친 루시아는 두 번째로 빠른 속도로 복도에 있는 작은 화단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타다닥. 맨발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리더니… 복도 모퉁이에서 돌연 멈춰 섰다.
!
으아아앙…
루시아는 아끼던 물건을 빼앗긴 아이라면 누구나 터뜨릴 법한 비명을 질렀다.
비틀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화단으로 향하다가, 넘어질 뻔한 기세를 몰아 아예 가장 가까운 민들레 무더기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루시아는 누렇게 시들어버린 잎사귀들을 만져보려 떨리는 손을 뻗었지만, 혹시나 자신의 손길에 완전히 죽어버릴까 봐 두려워 차마 닿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
선발대 출항 7일 차.
이른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루시아는 요란한 "발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난 루시아가 들려오는 발소리가 결코 선발대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단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루시아는 바로 일어나 역장 차단막을 제어하는 조작 콘솔로 달려가 중요한 손잡이를 노려보았다.
(역장 차단막에 문제가 생겼어. 역장 에너지가 벌써 부족해진 건가? 하지만 경보는 울리지 않았는데.)
(돌려야 할까?)
손잡이를 돌린다는 것은 에너지를 줄인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루시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왼쪽으로 두 칸 돌렸다.
밖에서 들려오던 괴성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듣고 나서야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발대 출항 20일 차.
선발대는 아직 승전보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카오스 오염이 낳은 "괴물"들은 눈에 띄게 진화하여 인간의 마지막 남은 성역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루시아는 다시 창고로 가 온몸을 이용해 무기 거치대에서 장비를 떼어냈다.
크리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가르쳐준 대로, 루시아는 전원을 켜고 괴물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루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적을 죽였다.
하지만 동시에 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루시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뼛속까지 나쁜 놈들이라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쓰러뜨리면 될 일이었으니까.
괴물은 울부짖으며 문턱까지 다가왔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파편화된 음절들은 루시아에게 익숙한 단어들을 조합해 냈다.
엄마가 딸을 부르는 듯, 루나가 언니를 부르는 듯, 리올라가 어린 알파를 부르는 듯, 크리스가 아내와 딸을 부르는 듯했다.
안 돼요… 당신들이어선 안 되잖아요.
하지만 지금, 익숙한 것들에서 비롯된 공포가 루시아의 심장을 잔인하게 옭아매었다. 희미한 따스함을 품은 그 부름 앞에서, 루시아는 더 이상 괴물이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쓰러뜨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안 돼요. 싫어요!
다른 괴물 몇 마리가 기어오르며 다가오자, 루시아는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하고 기다시피 위층으로 달아나 계단실의 방화문을 굳게 잠갔다.
루시아는 바보 개구리를 가방에 넣은 뒤, 공포에 질린 채 화단의 인공조명 아래로 달려가 리올라의 커피잔이자… 곧 꽃을 피울 민들레 다섯 송이가 심어진 그 잔을 품에 안았다.
루시아는 미친 듯이 달려 모든 선발 대원의 방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고, 익숙함과 안도감을 주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크리스의 방이었다. 크리스가 죽은 뒤로는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뛰어 들어간 루시아는 늘 어수선하던 방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0.5 초쯤 멈칫했다.
바닥에는 루시아에게 남긴 쪽지 한 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 생일 파티 전에 쓰인 글이었다.
…
루시아는 크리스의 방에서 쪽지와 무장 부품 한 세트를 챙겼다.
유리안의 방에서는 통신 단말기를 하나 챙겼다.
헤가의 의료용 테이블에서는 주사제를 하나 집어 들었다.
니모의 방도 더 이상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신이 가져다준 단열 패드가 책상 위에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루시아가 접어둔 그 모양 그대로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패드 위에는 자그마한 투명 키링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주황색과 흰색이 섞인 부드러운 털 뭉치가 들어 있었다. 고양이 털인 듯했다.
그 외에 니모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으로 선발대에 합류했던 니모는 떠날 때도 빈손으로 떠나간 것이다.
"쓸모없는 물건들"을 몽땅 가방에 쓸어 담은 루시아는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두의 짐을 짊어지고 달리는 동안, 루시아는 비로소 진심을 숨기는 데 서툴면서도 애써 숨기려 했던 어른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숙인 루시아는 커피잔 속 민들레가 이미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고 밝은 노란색 꽃 몇 송이.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속임수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어른들이었다.
다들 여기 있고 꽃도 아직 시들지 않았어요. 우린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요.
루시아는 놈들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물러갈 때까지 이를 악문 채 문 너머의 진동에 맞서 버텼다.
선발대 출항 30일 차.
밥… 먹고 싶어요. 물도 마시고 싶어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눈앞에 적힌 음식을 갈구하는 글자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마치 다리라도 달린 듯 주위를 한 바퀴 어슬렁거리다 루시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도망가 버렸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제가 빈 소원마저 도망치는 건가요?
루시아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망친 글자를 쫓아가려 애썼다.
허공에 뜬 듯 위태롭게 휘청이는 발걸음 아래로, 그동안 루시아가 적어 내려간 수많은 소원이 밟혔다.
아빠 엄마가 보고 싶다.
루나가 보고 싶다.
아빠 엄마의 아이이고 싶다. 루나의 언니이고 싶다.
바보 개구리가 보고 싶다.
리올라가 보고 싶다.
헤가, 유리안, 니모, 크리스가 보고 싶다.
그리고…
글귀의 내용이 점차 변해 갔다. 더 이상 어린아이의 소박한 소원이 아닌, 어딘가 "거창한" 염원이 더해졌다.
"성공"하고 싶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다.
연구 개발이 순조롭기를, 무사히 귀항할 수 있기를.
…
붉은색 글씨들이 빽빽하게 벽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든 소원의 끝을 지나온 루시아는 결국 꼭대기 층의 대문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활기 넘치는 글자들은 문틈 사이로 달아나 버렸고, 루시아는 글자들을 붙잡지 못했다.
…
기진맥진한 루시아는 문에 기댄 채 서서히 주저앉았다.
하지만 글자들이 도망치는 소리에 괴물들이 이끌린 것인지, 곧바로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심지어 문손잡이까지 기어 올라와 손잡이를 꾹 눌러보는 괴물도 있었다.
열지 마요.
루시아는 문을 온몸으로 막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무섭지 않아요. 저는 아주 용감하니까요. 코드네임 "알파"라는 작은 영웅은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세계는 점차 한 덩어리의 카오스, 한 조각의 허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도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온 세계에 작고 평범한 여자아이 단 한 명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똑똑.
?
문에서 갑자기 일정한 간격의 진동이 두 번 전해졌다. 소리와 화면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가장 직접적인 전달 방식만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것 같았다.
번쩍 고개를 든 루시아는 그제야 세계에 남은 것이 자신과 기대고 있는 문짝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개 지역을 떠도는 한 척의 작은 배와도 같았다.
…
이날, 이 세계에서 작디작은 루시아는 바닥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문명의 폐허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
멀리서 점점이 빛나는 희미한 빛은 폐허 속에 어렴풋이 드러난 길과 같았고, 그것은 바로 선발대가 남긴 발자취였다.
루시아는 가방을 메고 커피잔 민들레를 아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처음엔 발자국을 더듬거리다 이내 걸음마를 배우듯 빛의 흔적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루시아는 최근 통제되지 않는 근육 경련이 잦아졌기 때문에 다리 근육을 섬세하게 통제해야 했다.
저는…
저는… 반드시…
이 세계에 신은 없었기에, 루시아는 자신에게 조금만 더 노력하라고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대를 통제하는 근육마저 엉망이 되어, 이제는 혼잣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꼭… 선발대를 찾아야 해요. 앗!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루시아는 넘어지고 말았다.
커피잔이 깨지며 흙투성이가 된 민들레 몇 송이가 굴러 나와 바닥에 흩어졌다. 그 충격에 하얀 솜털마저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
흩어지는 솜털을 바라보며, 루시아는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다섯 명의 선발 대원마저 모두 목숨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루시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더 이상 죽지 말고, 흩어지지 마요.
오랫동안 간직해 온 기원이 산산조각 나 사라져 버린 듯, 가엾은 희망마저 단숨에 박살 나버린 기분이었다.
루시아는 엎드린 채 손으로 그 솜털 조각들을 쓸어모으려 애썼다.
하지만 얄궂게도 야속한 바람이 때맞춰 불어왔다.
그러자 솜털들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
…
하얀 솜털 낙하산들이 저 앞으로 계속 흩날려 가자, 루시아는 울음을 터뜨리며 일어났다. 평소라면 코웃음 쳤을 법한 유치원 첫날 우는 아이처럼, 울며불며 자신이 의지하던 어른들을 뒤쫓아 갔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고, 끈적이는 눈물 자국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루시아는 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발걸음이 만들어낸 빛의 길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어른들의 마지막 발자국이 사라질 즈음, 루시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힘없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아앙… 흑…
역시나 루시아의 손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민들레 씨앗들은 모조리 날아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 아래에서 유독 부드럽고 매끄러운 리본 끈 하나가 만져졌다.
아직 마르지 않은 혈흔이 손바닥을 붉게 적시자, 루시아의 두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리본 끈을 집어 들어 눈앞으로 가져가 자세히 살폈다.
피로 얼룩진, 연두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리올라의 부드러운 머리끈이었다.
머리끈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루시아는 계속 앞으로 기어갔고,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체 잔해에 손이 닿았다. 그것은 여성 구조체의 잔해였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잔해가 나타났다.
루시아는 선발대의 숭고한 죽음을 고스란히 담아두고 싶었지만, 그들은 흩어진 민들레 씨앗처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
눈물마저 안개 지역에 침식당해 바짝 말라버려,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올라의 머리끈을 쥔 채 그 자리에 한참을 얼어붙어 있던 루시아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올라를 응시했다.
전… 모두의 대화도 들었고… 자료도 봤어요.
전사들이… 빛으로 변해… 영웅 Ω, 영웅 Ψ, 영웅 Χ가 되어… 아주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는 걸… 알아요.
루시아는 눈앞의 잔해를 향해 리올라가 들려주었던 그 "동화"를 띄엄띄엄 속삭였다.
당신들은… "세피라"를 전달해야 했고
그리고 그 세피라는… 기체 안에 있는 거잖아요, 맞죠?
주검은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대답할 뿐 어떠한 격려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영웅 알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예전에 말했었죠.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굳게 마음먹었다.
영웅 알파도 당신들처럼… 끊임없이 날아서… 이 우주를 훤히 밝힐 거라고 말했어요.
자욱한 안개 지역을 응시하던 루시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다리 반대편에는 닫혀가는 균열이 보였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루시아는 시체 조각들을 밀며 그 꿈의 다리 위로 더듬더듬 올라섰다.
다리는 이상하리만치 낯익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지만, 웬일인지 루시아를 격렬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절 밀어내지 마세요.
루시아는 다리의 절규를 듣지 못한 채 잔해들을 아래로 밀어 넣었다.
당신들 말대로… 세피라를 "다른 세계"로 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인간은 모두 힘을 합쳐서 마침내 악당을 무찌르겠죠.
하지만 당신들은… 이 임무를 끝내지 못한 것 같아요.
저도 틀렸어요. 더는 루나를 찾을 방법이 없어요.
…
그럼, 제가 당신들의 임무를 넘겨받을게요.
모든 잔해를 밀어 넣은 뒤, 루시아는 선발 대원들의 유품을 짊어지고 다리를 기어올라 균열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멀리 날아간 민들레
코드네임 알파라는 작은 영웅도…
이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출발할게요!
루시아가 힘차게 뛰어내렸다.
허무의 굴레는 끝이 없었고, 추락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듯했다.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추락하면서도 자신의 추억과 어른들의 유품을 꽉 끌어안았지만, 안개 지역은 쉴 새 없이 그것들을 앗아가려 했다.
니모의 고양이 털 키링이 맨 먼저 뜯겨나갔고, 곧이어 크리스의 쪽지가 허공으로 흩어졌으며, 리올라의 머리끈마저 갈가리 찢겼다.
루시아는 이제 그 무엇도 온전히 쥘 수 없었다.
핏빛 세계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사이, 안개 지역을 떠도는 파편들이 뺨과 한쪽 눈을 베고 지나갔다. 그렇게 온몸은 금세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살갗마저 벗겨져 나갈 즈음, 이를 꽉 깨문 루시아는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된 모든 것들을 차라리 안개 속으로 내던져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뽑혀 나가고,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잿빛으로 바래면서 루시아는 본연의 색채를 잃어 갔다.
살점마저 침식당해 뼈와 근육으로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되자, 아예 유품을 입으로 꽉 물었다.
자신을 포함한 그 무엇도 다 버릴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을 바쳐 별하늘을 밝히고, 모든 선발 대원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전하려 했던 희망을 이어가고 싶었다.
루시아는 안개 지역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또 다른 세계로 곤두박질칠 참이었다.
…
수술대 특유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루시아는 이미 안개 지역에 모든 것을 침식당한 뒤였다. 소중했던 기억들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고, 그 포근함에 루시아는 다시 엉엉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루시아는 폐부를 힘껏 부풀리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