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41 장로귀항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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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0 “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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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올라는 그 페이지를 넘겼다. 이 아이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는 대략적인 내용을 정리해 두었다. 이름, 대략적인 나이, 신체 기록, 그리고 추가로 날짜 하나를 기록했다.

리올라의 시선이 그 날짜에 2초 정도 머무르다가, 이내 파일을 덮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창백한 조명이 선발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췄다.

이중합 탑이 그들에게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기엔 한참 멀었지만, 모두가 이번 회의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상석은 비어 있었다.

이중합 탑이 사라지면서 남긴 균열 말인데. 유리안, 관측한 상황 좀 말해줄래?

구석에 기댄 유리안은 쇠약하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선형적으로 확장 중이야. 안쪽에서 흰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있고, 범위는 매일 넓어지고 있어.

어제 돌아왔을 땐 0.05%였는데, 안개가 신호를 엄청 강하게 차단해서 오늘은 아예 측정도 안 돼.

차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잠식"한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신호도 그렇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 그러다 언젠가는… 이 세계 전체가 저것에 집어삼켜질지도 몰라.

유감이지만 그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야.

리올라가 탁자 위의 단말기를 내려다보자, 그 안에는 도미니카가 남긴 회의록이 담겨 있었다.

이 단말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분이 마련한 대비책은 두 가지야.

한 번 더 같이 확인해 보자.

단말기 표면에서 희미한 빛이 투사되더니, 허공에 반투명한 사람의 형상이 맺혔다.

도미니카였다.

탁자 위에 놓인 크리스의 손 관절에 꾹 힘이 들어갔다.

익숙한 목소리가 단말기에서 흘러나왔다. 침착하고 흔들림 없으며, 모든 인간을 어깨에 짊어진 자의 목소리였다.

도미니카

이 기록을 열었다는 건, 내 첫 번째 대비책이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그럼, 난 탑 안에서 실종됐고, 내 실종이 승리를 가져오지도 못했을 거다.

투영 속의 도미니카가 잠시 멈췄다. 듣는 이들에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려는 듯했다.

도미니카

그렇다면 내 가설이 맞았다는 증명이고, 그것은 가장 처참하고, 우리가 가장 원치 않던 정답이겠지.

이중합 탑은 카오스 오염의 근원이 아니라 그저 표상에 불과하다. 이 세계의 힘만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으니, 반드시 다른 세계의 힘과 진정한 결속을 이뤄야만 한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다른 세계와 연합해야 하죠?" 투영 속에서 그 어느 선발 대원이 질문하는 게 들렸다.

도미니카

다른 세계에 공동 참전 요청을 보내는 거다.

문명의 종착지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위험한 곳은… 이중합 탑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른 세계를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최대한 널리 전해야 한다.

투영 속의 다른 사람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도미니카의 판단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님을 알았기에, 그들은 아직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도미니카

하지만 단순히 문명 선별이라는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힘이 없는 문명은 결국 우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뿐이다.

그들의 세계가 우리 세계처럼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 선별에 대항할 힘을 가져야만 해.

기진맥진한 이들에게 "힘"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절대 상처투성이인 그들의 기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모두의 시선이 니모 곁에 있는 정육면체로 모였다. 카오스 오염을 이용해 개발한 이중합 탑의 코어를 봉쇄하는 열쇠였다.

모두가 그 열쇠가 보여주었던 끔찍한 에너지를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도미니카

이중합 탑의 코어, 우리는 그 힘을 이용해야 한다.

이중합 탑 코어를 흡수한 뒤 그것을 기반으로 복제하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청사진을 생성한다. 난 이것을 "세피라"라 부르기로 했다.

크리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저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군.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투영 속 도미니카는 멈추지 않고 일기 예보라도 하듯 시종일관 평온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모두가 도미니카가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창밖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구체적인 풍경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주 먼 어딘가를 좇고 있었다.

도미니카

다른 세계와 연합해야 우리의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다.

투영이 찰나의 순간 정지했다. 이내 도미니카의 형상이 무언가 생각난 듯 살짝 고개를 돌렸다.

도미니카

부탁한다.

도미니카의 투영이 사라졌다.

단말기는 탁자 위에 고요히 놓여 있었고, 표면의 희미한 빛도 서서히 꺼져갔다.

리올라는 침묵하며 단말기의 불빛이 꺼진 곳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니모, 세피라 관련해선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다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 좀 해줄래?

니모는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이중합 탑 안에서 열쇠로 코어를 봉인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고, 당시의 조작이 의식의 바다에 준 충격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중합 탑 코어를 흡수한 열쇠를 일종의 "기술 청사진"이라고 보면 돼. 우린 그걸 바탕으로 복제할 수 있고, 그렇게 탄생한 기술이 바로 "세피라 기술"이지.

최대한 많은 세피라 기술을 확보해야 더 많은 가능성에 적응할 수 있어.

하지만, 이중합 탑 코어가 "열쇠"에 흡수되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걸로 개발할 세피라 기술 역시 그에 맞는 그릇이 필요해.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알려진 그릇은… 의식의 바다뿐이지.

코어에 닿는 순간 확실히 느꼈어. 힘 일부는 받아들여졌지만, 나머지는 강하게 거부당했어.

세피라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의식의 바다만이, 그 힘의 일부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거야.

조화를 이루는… 의식의 바다?

헤가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되물었다.

맞아.

만들어낸 다음엔?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거지?

존재할지도 모르는 다른 세계에선… 그들 각자의 방식에 달렸겠지.

니모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니카는 코어를 흡수하더라도 니모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간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니모에게 이런 정보를 남길 이유가 없었다.

세피라 기술 개발에 성공한다면, 우린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현 계획"을 계속 추진해서 세피라를 퍼뜨리려면 저 균열 속으로 들어가야 해. 다시 안개 지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지.

모두가 기억하는 끔찍한 균열, 그것은 여전히 느리지만 조용히 확대되고 있었으며, 틈새로 흰 안개가 계속 흘러나왔는데, 마치 끝없이 피를 흘리는 상처처럼 보였다.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다시 침묵했다.

리올라는 책상 모서리에 앉아 눈앞의 얼굴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있어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고, 각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잃었는지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리올라는 "반드시 해내야만 해" 같은 말로 모두에게 강조하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겠어.

도미니카가 길은 열어뒀지만, 그 사람조차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말해주지 못했으니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도미니카는 이 일이 의미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거지.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 믿음을 증명했어.

리올라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다들 계속 나아갈 의향이 있는지 묻고 싶어.

크리스가 즉각적으로 받아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크리스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도미니카가 목숨까지 걸었는데, 우리가 여기 앉아서 뭐 하겠어? 당연히 해야지.

헤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안이 코를 훌쩍였다.

통신은 내가 맡을게. 현 계획의 신호 프로토콜을 해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할 수 있어.

결정된 거야, 리올라? 세피라 개발엔 임시로 쓸 의식의 바다 그릇이 필요해. 도미니카가 네 의식의 바다만이 그나마 버틸 내구성이 있다고는 했지만…

니모는 그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 나한테 맡겨.

좋아. 그럼, 필요한 데이터는 내가 수집해 올게.

선발 대원들이 하나둘씩 각자의 방식으로 결의를 다졌다.

리올라는 눈앞에서 매일 함께 지내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가, 이미 비어 있는 도미니카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모두를 향해 몸을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시작하자.

루시아, 왜 내려왔어?

다 나았어요. 저도 돕고 싶어요.

여기에 머무는 동안 굳이 무언가를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그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쉬고 있으면 돼.

"그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쉬고 있으면 돼… 그걸로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어." 리올라는 묵묵히 이 말을 마음속에 숨기며, 몸을 낮추어 루시아의 시선을 마주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했다.

그치만 다들 매일 돌아올 때마다 저를 보러 오시잖아요.

리올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예전에 루나가 곁에 있었을 때도, 집안일을 다 제가 했어요.

루시아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리올라는 알아들었다.

헤가가 실험 캡슐에서 급히 돌아오더니, 여전히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누워있어. 넘어지면 2차 손상이야. 이젠 남은 약도 없단 말이야.

리올라가 헤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걷게 둬. 계속 누워만 있는 것도 좋진 않잖아.

헤가는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안색은 좀 창백해 보이지만, 제법 안정감 있게 서 있었다.

뛰지 마. 무거운 거 들지도 말고. 어지러우면 당장 멈춰.

네.

누구 짓이야?

루시아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에 응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음 날 출발 전 크리스가 장비를 챙기는 시간은 절반으로 단축되었다. 복귀한 뒤 그는 새로 가져온 부품을 제자리에 정돈해 두었다.

누가 내 물건을 건드렸어?

이내 중심부의 난장판은 건드리지 않은 채 외곽만 깔끔해졌고, 케이블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유리안은 다시 단말기 앞에 엎드렸다. 잠시 후 자신의 발치에 있던 빈 껍데기 하나를 쓰레기 더미 쪽으로 슬쩍 차 보냈다.

한 번은 루시아가 한 손으로 도구를 정리하는 헤가를 본 적이 있었는데, 헤가의 왼편으로 다가가서는 기구들을 하나씩 건네주기 시작했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하지만 루시아는 자리를 뜨지 않고 헤가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헤가가 다음 도구가 필요할 때면 루시아가 건네주었고, 필요 없을 때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날 이후로 헤가는 더 이상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니모는 돌아와서 그걸 봤을 때, 잠깐 멈칫했지만, 깔고 앉진 않았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담요의 위치가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앉았다가 다시 놓아둔 모양이었다.

개어 놓은 형태 또한 루시아의 방식과는 달랐다.

맛이 참 이상해…

리올라는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의무실

크리스는 왼쪽 침대, 니모는 오른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둘 다 기체의 일부를 분해한 채, 내부의 손상된 구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크리스의 왼팔 관절은 또다시 산산조각 났고, 니모의 흉강 안쪽에는 길고 깊은 균열이 생겨 있었다. 한 번 용접했던 곳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옆 침대에는 유리안이 누워 있었다.

의무실에서 외상이 없는 유일한 "부상자"로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개조된 눈동자는 평소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잃고, 벽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 침대를 바삐 오가던 헤가는 오른손에 도구를 쥔 채 크리스의 관절 부위를 정비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헤가 곁에 있는 공구함 앞에 쪼그려 앉아, 크기가 제각각인 기구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쓰읍… 통각 시스템 좀 꺼주면 안 돼?

안 돼.

왜? 아악——잠깐만!

네 의식의 바다가 비틀렸어. 근데 안정제는 저번에 다 썼단 말이야. 여기서 통각 시스템까지 끄면 편차율이 더 올라가.

참아.

크리스는 얼굴 근육이 일그러진 채 이를 악물었으며 침대 모서리를 꽉 움켜쥔 손은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이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한 루시아는 크리스의 침대 앞으로 가, 접어둔 천 한 장을 건넸다.

뭔데?

루나한테 주사 맞을 때 수건을 물고 있으라고 했더니 좀 낫다고 하더라고요.

크리스는 천 조각과 눈앞의 진지한 작은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네 동생과 같은 줄 알아.

그는 계속 불평불만을 늘어놓다가… 결국 이를 꽉 물었다.

크리스를 처리한 후, 헤가는 니모에게로 향했다. 그의 흉부 균열은 크리스의 관절 손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용접에는 정밀함이 필요했고, 용접 부위가 핵심 영역에 가까워 통각을 차단할 수도 없었다.

청년의 손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고,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촘촘한 땀방울이 이마의 생체모사 피부를 덮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채로,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 마디도 뱉지 않았다.

도구를 건네며 곁에 서 있던 루시아가 힐끔 니모를 쳐다보았다.

처치가 끝나자, 루시아는 니모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 천 조각을 내밀었다.

이걸 물고 계셔도 돼요.

필요 없어.

많이 아픈데 티 안 내면 더 아파요.

이미 다 끝났어.

그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지친 듯 한숨을 쉬며 천을 받아 옆에 놓았다.

리올라는 문 밖에서 문틀에 기대어 전체 과정을 지켜보았다. 헤가가 니모의 침대 옆에서 일어설 때까지,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은 어때?

크리스의 관절은 재건했지만, 예비 부품을 긁어모아도 이제 겨우 한 세트 남았어. 니모의 균열 용접재도 한 번 더 쓸 분량만 있어. 그게 마지막이야.

오늘 같은 손상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땐 복구를 장담할 수 없어.

리올라는 대꾸 없이 유리안을 쳐다보았다.

쟤는?

의식의 바다 폭주. "뇌의 과부하 상태"야.

유리안, 또 20시간 넘게 연속으로 중계기를 보고 있었던 거야?

침대에서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 안개 말이야… 균열에서 스며나오는 안개는 신호 간섭이 너무 심했어. 중계가 되지 않으면 외출한 사람들은 연락이 끊기고, 오늘은 다섯, 여섯 명이 나 대신 여기 누워 있었을 거야…

게다가 교란 신호만 있는 게 아니야.

중계 중에 느낄 수 있었던 건, 그 안개가 모든 구조체의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안개 속에 어떤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어. 이전과 같은 일반 카오스 오염 침식체는 아닌 것 같아…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크리스와 니모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런 놈들한테 당한 거라고.

의무실에는 한동안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루시아는 공구함 옆에 웅크리고 앉아 사용한 기구들을 정성껏 닦으며 정해진 순서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짓은 더없이 조심스러웠으나, 정적만이 감도는 공간에서 금속이 맞부딪치는 달그락 소리는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크리스는 여전히 입에 천을 문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꼬맹이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마.

유리안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루시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듯 계속 장비를 닦았지만, 손놀림이 조금 느려졌다.

리올라는 루시아 곁으로 가 조용히 몸을 숙였다.

루시아, 언니들을 참 많이 도와줬구나.

나머진 헤가에게 맡기고, 가서 좀 쉴래?

루시아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헤가한테로 돌렸고, 헤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시아. 잠깐만… 너에게 줄 게 있어. 맨날 화단만 멍하니 쳐다보길래 말이야. 니모가 너라면 요긴하게 쓸 거라고 하더라.

그냥 그 민들레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거야. 지금 이 세상에서 꽃은 아주 드물거든.

신경 쓰지 마. 자, 받아. 꼬마야, 너한테 주려고 가져온 민들레 씨앗이야.

루시아는 영문도 모른 채 씨앗을 받아 들었으나, 이내 소중한 보물이라도 얻은 듯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고맙습니다.

루시아가 기척을 죽인 채 조심스레 자리를 떴다. 금속 바닥을 울리던 발소리마저 이내 멀어지더니, 의무실에는 오직 어른들만의 무거운 침묵이 남았다.

헤가, "현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면 균열 쪽으로 몇 번 더 가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예상 사상자 수가 묻고 싶은 거야?

응.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크리스 예비 부품은 이제 한 세트 남았고, 니모 용접 재료도 한 번 분량이 마지막이야.

하지만 이것도 오늘 기준으로 말하는 거야.

의무실 안에는 길고 길게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는 일부러 가볍게 입에서 천을 떼어냈지만, 상처가 찢어지는 통증 때문에 소리를 냈다; 니모의 시선은 천장에서 내려와 리올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리안은 몸을 웅크린 채 풀고, 지친 듯 눈을 감았다.

리올라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가슴을 후벼파는 듯 리올라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몸을 돌려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저녁

루시아는 애지중지하던 민들레 씨앗을 빈 화단에 심은 뒤, 화단 앞에서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빨리 꽃이 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생명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들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루시아는 또 한 번 리올라의 실험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실험실 밖 책상 위에는 며칠 전 분류해 둔 폐기 원고들이 여전히 파일철에 꽂힌 채 남아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가 궁금했던 것일까? 루시아는 무심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적힌 건 대부분 아는 글자였지만, 이어놓으니 완전히 다른 언어가 되어버렸다. "세계 감소 계수", "세피라 수용 한계점", "현 계획 신호 프로토콜" 등등.

표지를 넘기자 생소한 그리스 문자들이 파일을 구분하는 식별자로 쓰이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 문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소리 내어 읽어보려는 듯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오…

그건 그렇게 읽는 게 아니야.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파일철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어느새 다가온 리올라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저… 함부로 뒤진 건…

알아. 괜찮아. 어차피 이젠 다른 사람들도 읽을 줄 몰라.

리올라는 루시아를 곁으로 이끌어 앉힌 뒤, 파일철을 건네받아 가볍게 훑어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루시아는 솔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자는 오메가라고 해. 그리스 알파벳의 제일 마지막 글자지.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속으로 오메가라는 발음을 되뇌었다. 평소 말수가 적던 아이의 눈동자가 그 순간만큼은 형용할 수 없는 동경으로 반짝였다.

리올라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어차피 네가 볼만한 건 아니니까.

리올라는 파일철을 덮어 한쪽에 밀어두었다. 그러고는 표지에 적힌 세 글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루시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신, 호기심에 대한 대가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까?

별이 무엇인지 아니?

하늘에 매달린 랜턴 말인가요? 아주 오래전에 엄마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하나, 둘, 셋… 나이트 램프가 엄청 많아요.

동심 가득한 표현에 리올라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으나, 이내 콧날이 시큰해졌다.

늘 씩씩한 척만 하던 이 아이도 결국엔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리올라는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맞아. 하늘에는 아주 많은 별이 떠 있단다. 네 어머니가 말씀하신 램프들 말이야.

하지만 별들은 다 아주 외로워. 각자 빛을 내긴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비춰줄 수가 없거든.

그래서 모든 별은 이 넓은 밤하늘 아래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하곤 하지.

모처럼 어른의 무릎에 기대어 동화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었기에, 루시아는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어떤 사람들이 말했어. "아니야. 이래선 안 돼. 별과 별은 서로를 볼 수 있어야 해."라고 말이야.

만약 누군가 한 별의 빛을 다른 별에 전해주고, 또 그다음 별에 차례로 전해준다면…

결국엔 밤하늘 전체가 밝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걸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거죠?

스스로 빛이 된 거야.

어느 한 별에서 출발해 다음 별로 날아가, 그곳에 첫 번째 별의 불씨를 심었지. 그러고는 또다시 그다음 별을 향해 날아갔어.

다음 별로 날아가려면 얼마나 멀리 날아야 해요? 여기서 우리 집만큼 멀어요?

그것보다 훨씬, 훨씬 더 멀 거야.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가버리면, 그 별빛은 어떻게 집에 돌아가요?

어쩌면…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겠지.

루시아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으나, 수긍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다음 질문을 건넸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잠시 생각에 잠긴 리올라는 예전에 루시아에게 해주었던 대답이 떠올랐다.

전사. 그 사람들도 전사였어.

루시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뻗어 한쪽은 검지를 펴고 한쪽은 주먹을 쥔 채, 맞닿았던 양손을 천천히 벌리며 거리를 넓혀 갔다.

너무 멀어요. 이러면 아주 멀리 가버리는 거잖아요.

맞아. 그렇게 먼 곳으로 갔지만,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지도 몰라. 출발은 했지만, 다른 행성에 닿지 못했을 수도 있고.

출발했지만 우주에서 길을 잃었을 수도… 아니면 우주를 밝히는 데 끝내 실패했을 수도 있지.

그래도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네요.

이렇게 크고 캄캄한 우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빛을 전하기 위해 아무리 멀어도 다른 별을 향해 계속 나아갔잖아요.

거대한 어둠 속을 뚫고 가는 빛이라니, 진짜 멋있어요. 루나도 이 얘길 들었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예요.

전 그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리올라는 입술을 달싹거렸고, 마음속으론 수많은 상념이 교차했다.

하지만 루시아의 두 눈을 들여다본 순간, 그 어떤 의심도, 위로도 없는 일곱 살 꼬마 특유의 맹목적인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

리올라는 아이의 기대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 진짜 영웅일지도 모르겠다.

그 영웅들의 이름은 뭐예요?

리올라가 잠시 멈칫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이야기라 등장인물들의 이름 따위는 생각해 둔 적도 없었다. 심지어 영웅이라 불리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리올라는 그저 그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루시아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이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바로 이 연구를 위해 지금까지 죽을힘을 다해 싸워 온 거야."

루시아가 상상하던 칠흑 같은 밤하늘을 한 줄기 빛이 불현듯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러고는 이야기 속 희미하던 형상이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어, 어때?

그녀가 머뭇거리며 그 문자를 읽었을 때, 아이의 얼굴에 그토록 동경 어린 반짝임이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멋있어요. 영웅 오메가!

그래. 영웅 오메가!

그래서 영웅 오메가는 어떻게 됐어요?

다른 행성에 빛을 전하려고 우주 깊숙한 곳까지 날아갔지만, 결국 다른 행성을 찾진 못했어.

너무 멀리 온 탓에 빛이 다 소진되어, 그대로 우주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지.

어떻게…

하지만 영웅이 한 명뿐인 건 아니야. 그 뒤를 이을 영웅들이 아주 많았거든.

영웅 푸사이, 영웅 카이, 영웅 파이… 영웅들이 하나씩 출발했어.

영웅 푸사이, 영웅 카이, 영웅 파이…

어린 루시아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접으며 영웅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한 바퀴를 돌고 또 돌았지만 결국 어느 손가락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영웅들이 엄청 많네요, 그럼 제일 마지막 영웅의 이름은 뭐예요?

다들 하나둘씩 출발했다는 건… 마지막 영웅도 결국 실패했다는 뜻인가요?

마지막 영웅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첫 글자였어.

알파? 알파는 어떤 영웅이에요?

글쎄…

리올라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어린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어린 루시아의 머릿결은 가냘프고도 부드러웠다.

리올라는 루시아를 바라보며 아주 먼 훗날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알파는 다른 영웅들이랑 좀 달랐어. 아직 어렸었거든. 모두의 꼬마 영웅이었지.

루시아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꼬마 영웅이요? 제일 작으면 하나도 안 멋있을 텐데…

아니야… 그녀는 다른 영웅들의 희망이자 빛이었거든.

그녀가 이 행성에 존재하기에, 다른 영웅들도 보금자리를 얻고 돌아갈 곳이 생기는 거거든…

하지만 그렇게 작은데 어떻게 빛을 전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작지만, 다른 영웅들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을 때까지 차츰차츰 자랄 거야.

꼬마 알파, 영웅들의 영웅이지.

우리 모두의 유일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꼬마 영웅.

아득히 먼, 그들이 걸어갈 길만큼이나 머나먼 미래였지만… 그녀는 그런 미래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하기 아주 오래전, 도미니카가 관측소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보며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이 밤하늘의 모든 별빛이 서로 닿을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우리는 결국, 우주 전체를 밝히게 될 거야."

그때 누군가는 또 허풍이라며 웃었지만… 지금 그 말을 하던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루시아.

네?

오메가… 감마, 베타, 그리고 알파, 넌 그 영웅들에게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어.

루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제 가서 자. 내일 또 얘기해 줄게.

리올라는 바닥에 앉은 루시아를 일으켜 세웠다.

루시아는 리올라를 따라 돌아가다, 몇 걸음 못 가 선반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

리올라 언니.

응?

그 영웅들은 마지막에 별하늘을 환하게 밝혔나요?

리올라가 멈칫하자, 그 틈을 타 어지러운 기억 조각들이 밀려왔다.

찢긴 문, 높이 솟은 거대한 탑, 실종된 리더…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

아직은 그러지 못했어… 지금도 날아가고 있거든.

성공할 거예요.

뭐라고?

분명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거예요.

알파… 알파.

루시아는 속으로 이 자랑스러운 이름을 끝도 없이 되뇌었다.

어쩌면 언젠가 자신도 모두의 자랑이 되어, 그 마지막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루시아는 가슴 벅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리올라는 루시아를 눕힌 뒤 단열 담요 곁에 잠시 앉아,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관측 플랫폼으로 걸어 나갔다.

잿빛 하늘, 그곳을 가로지르는 균열, 소리 없이 새어 나오는 하얀 안개.

리올라는 니모가 평소 서 있던 그 자리에 서서, 서서히 갉아 먹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