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했던 육탄전도, 서로를 물어뜯는 참혹한 광경도 없었다.
거대한 괴물은 간절히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알파를 품에 안았다.
키메라의 육체에 닿는 순간, 주위의 하얀 안개가 돌파구라도 찾은 듯 둘을 향해 거세게 밀려들었다.
윽…
의식의 바다가 갈가리 찢겼다가 재조합되는 기분이 들더니, 뿌연 안개 속에서 낯익은 풍경과 대화가 알파 기억 속으로 수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인 걸까?
대체… 누구의 기억인 거지?
누가… 웃고 있는 거지?
와~ 정말 예뻐요. 하나, 둘, 셋… 나이트 램프가 엄청 많아요.
루나가 보면 분명 좋아할 거예요. 저도——
영차——
얘야, 그렇게 해서는 닿지 않는단다.
저 나이트 램프들은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거든.
누… 누가 말하고 있는 거지?!
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도 익숙한 걸까?
루시아.
■■는 내일… 모두와 함께 멀리 여행을 떠날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란다.
누구지?
왜… 이 목소리만 들었는데 이렇게 슬픈 걸까?
의식의 바닷속에서 끈적한 기억 조각이 알파를 휘감으며 빠르게 휘돌았다. 알파는 암류 속에 내던져진 고독한 배처럼 힘겹게 환상 속을 헤쳐 나갔다.
너도 1기생이야?
난 루시아라고 해.
그녀의 기억인 건가? 저건… 누구지?
그녀는 또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걸까?
■■이 ■■에게 총구를 겨누다니, ■■■■ 않나?
그건 당신이 ■■■■를 습격한 것과는… ■■을 흐리지 마.
의식의 바다 위를 떠돌던 풍경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그녀는 지상의 건물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목격했다.
난… 윽…
알파는 수억 개의 이름 모를 순간들로 이루어진 미궁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루나, 벌써 짐을 챙기는 거야?
루시아, 동생을 잘 지켜주렴.
하지만 난 참여하기 싫어.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가고 싶단 말이야.
언니, 오늘 수확은 좀 어때?
언니… 너무 아파.
언니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 없이는 살 수도 없었던 바보 같은 동생은…
살아남았어. 이렇게 언니 눈앞에 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버리고 떠나려는 거야?
루시아…
잘못된 건… 여기서 끝내야만 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려면, 그에 맞설 힘이 필요해.
이제부터 내가 네 우리야.
…
난…
그녀는 텅 빈 대지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그녀의 척추를 가르며, 그 아래의 피와 살을 드러냈다.
시간은 그녀의 곁에서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승격 네트워크와 맞서 싸우는 자신을 보았다——
얼음 바다 위를 거니는 자신을 보았다——
폐허 속에 몸을 숨긴 자신을 보았다——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손에 쥔 장도는 점점 작아져 갔고, 그녀는 맨발인 채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즉, 표면을 꿰뚫고 거센 격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야만 했다.
희미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세월의 소성단과 겹쳤다.
아득히 먼 길 끝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흐릿한 "출발점"을 엿본 듯했다.
의식이 갑작스럽게 끊겼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만이 남았다.
그녀는 따스한…
따스한 품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나… 정말 예쁘기도 하지.
그녀는 눈을 뜰 수 없었고, 흐릿한 빛만 어렴풋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 이 아이 이름은 "루시아"로 하자.
부드러운 노랫소리에 실려, 알파는 안개 지역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