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오스 우주 함선
안개 지역
이쪽 방향인데…
여과탑이 닿는 안전 구역의 경계에 서서 총자루에 손을 얹은 채,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녹색 신호 두 개가 나타날 법한 곳을 응시했다.
식별 번호의 신호 표시를 몇 번이고 대조해 봤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바네사 지휘관님, 저쪽은…
정말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과 루시아일까요?
난 안 믿어.
바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총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장전된 총알로 저 "녹색 신호" 두 개를 안전 구역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지 가늠하는 듯했다.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마침 아는 얼굴을 만나 회포를 푼다고? 이런 전개는 공중 정원의 삼류 인터넷 소설에도 안 나오겠다.
하지만 만에 하나 진짜 그레이 레이븐 소대라면요? 만약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나타난 거라면, 저희는…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그 표정은 치워. 만약이란 건 없으니까.
바네사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가늘게 뜬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욱한 잿빛 안개만이 비쳤다.
어떻게든 저 둘의 정체를 확인하겠지만, 내가 사격 명령을 내렸을 때 1초라도 주저한다면 네 머리부터 날려버리겠어.
알겠습니다.
병사는 겁에 질려 입을 굳게 다문 채, 방금 하던 화제를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가운데, 바네사는 차분하게 안전 구역 외곽을 응시하며 예상하던 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지면을 울리며 둘의 고막을 자극했다. 바네사는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총구를 움직였다.
아니야.
바네사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발소리가… 하나뿐이잖아.
바네사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정적을 찢어발겼고, 짙은 안개 속에서 매서운 칼의 울림이 터져 나왔다.
검을 쓰는 구조체라니… 설마 정말 루시아 대장님인가요!
캬아악——!
무언가가 거칠게 잘려 나가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검게 그을린 침식체의 신체 일부가 포물선을 그리며 우주 함선 갑판 위로 털썩 떨어졌다.
루시아가 아닌 거 같아. 넌 물러서!
바네사가 병사에게 날카롭게 소리치며 사격 자세를 취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바네사는 한계까지 당겨진 활처럼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고,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개가 칼날에 흩어지며, 반대편에 한 "구조체"의 형체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심연처럼 고요한 눈동자를 지녔고, 검고 붉은 기체는 잿빛 안개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넌 누구야?!
바네사는 맞은편 구조체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흔들림 없이 총구를 겨누었다.
…
대답해, 아니면 꺼지던가.
이 잿빛 안개에 예기치 않게 휩쓸려 들어온 구조체인 걸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런 공간에서 혼자 이토록 오래 버틴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21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지옥 같은 곳에 갇힌 파오스 우주 함선에는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았다면 괴물이거나 그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는 또 다른 변수를 감당할 여력조차 없었다.
…
상대가 계속 침묵하자 바네사는 눈빛을 싸늘하게 가라앉히고는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알파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
알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경고다. 두 번은 없어.
바, 바네사 교관님…
니아가 반대편에서 급히 달려오자 살벌했던 대치 상황이 잠시 누그러졌다.
이리 와.
바네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니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니아를 보호했다.
내 명령 없이 안전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여긴 왜 온 거야!
레이나 교관님이 저더러 이쪽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니아는 방호복을 입고 뛴 탓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레이나 교관 말을 정확히 전하려 애쓰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
홀로그램 지도에서 방금 그 "녹색 신호" 두 개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대요. 아무래도 안전 구역으로 진입하려는 것 같다고…
…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바네사는 구조체 병사에게 알파를 감시하라고 신호하고는, 니아가 가리킨 쪽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잿빛 안개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누구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나와!
너희랑 똑같은 방식으로 들어왔겠지.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나와!
안개 속에서 천천히 나타난 두 그림자는 바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과 대장 루시아였다.
…
바네사는 총구를 거두지 않았고, 안전 구역으로 가는 길도 내어주지 않았다.
네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player name](이)라는 걸 누가 증명하지?
저,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장 루시아, 기체 번호 BPL-01, 기체 모델 서염이 증명하겠습니다.
그건 공중 정원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라 비밀이랄 것도 없어.
그리고…
쳇… 그 대단하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 수석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정보는 누구나 조회할 수 있어. 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여기서 꺼져.
바네사는 총을 든 채 서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 입 닥쳐.
바네사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려, 다른 쪽에 선 알파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젯거리는 너뿐이네.
수고할 것 없어. 나도 너희와 같이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알파는 더 머무를 생각이 없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뭐야? 저 여자와도 아는 사이야?
지휘관은 급한 대로 알파의 신분을 대충 둘러댔다. 바네사는 반신반의했고, 알파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사람들을 지나쳐 지휘관 쪽을 응시했다.
내가 여기서 떠나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인데?
안개 지역 상황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지상에서는 알파와 적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적과 목표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파는 곁에 선 루시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잠자코 지휘관 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지휘관은 다시 바네사에게 고개를 돌려, 알파를 데려갈 그럴싸한 명분을 짜내려 애썼다.
저 여자의 신분에 문제가 없다는 걸 뭘로 보장하지?
…
너에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고 치자.
저 여자가 무슨 사고라도 치면 너까지 같이 처리해 버릴 줄 알아.
바네사는 총을 거두고 몸을 돌려 안전 구역으로 돌아갔다.
이곳은 원래 파오스 우주 함선 중앙 광장이었다. 하지만 소형 여과탑이 가까운 데다 공간도 넉넉해, 지금은 임시 "안전 구역"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안개 지역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물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고, 임시로 세운 금속 엄폐물들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파오스 우주 함선이 안개 지역에 갇힌 지도 벌써 21일이나 지났다.
식량과 의약품, 혈청은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으나 보충할 길은 없었다. 공기 중에는 부패한 냄새가 감돌았고, 부상자와 학생, 교관들이 곳곳에 앉거나 선 채로 지휘관 일행이 들어오는 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89명, 그중 부상자는 33명이야.
통신 탑을 지키는 제5탐색대를 제외하면 생존자는 이게 전부야.
지휘실 문을 닫자, 바네사는 어깨의 힘을 살짝 풀며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별로야. 왜 맨날 똑같은 대화만 반복하는 것 같지.
어쨌든,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도 벌써 21…
모래시계 마지막 모래알이 멎은 듯 서서히 떨어져 내리자, 바네사는 손을 뻗어 모래시계를 뒤집고는 다시금 끝없는 순환을 시작하는 모래를 지켜보았다.
22일째야.
바네사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파오스 우주 함선이 공격받자 자가 방어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우주 함선이 따로 사출됐고
그 뒤로도 지상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공격이 한동안 이어졌지. 반격을 시도해 봤지만 적을 포착할 수가 없어서 포기했어.
처음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통신 탑에 문제가 생겨 연락은 끊겼지만, 공중 정원 순항 신호는 계속 잡혔으니까… 그러다 우주 함선이 영문도 모른 채 이딴 곳으로 끌려온 거야.
맞아. 파오스는 이 공간에 의해 의도적으로 "포획"됐어.
이상 인력을 감지한 순간 엔진 출력을 높여서 파오스의 제어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그리고 거센 진동이 일어난 직후 우주 함선이 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온 거야.
가장 이상한 녀석들이라면 바로 너희 셋이지.
침식체인지 뭔지는 몰라도 거대한 놈 하나가 우주 함선을 쫓고 있어. 자주 나타나진 않고, 가끔 심한 "진동"이 울린 뒤에나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
그래서 일단 코드네임을 "키메라"로 부르기로 했어.
그래. 아주 기괴한 뿔이 달린 거구인데, 「균열」도 그놈이 만든 게 아닌가 싶어.
하지만 공격을 감행할 병력이 없어서 지금 이 안전 구역을 지키는 게 고작이야.
바네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주 함선에 부상자가 많아.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너희 셋은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너희가 들어온 통로로 나가는 게 가능할까?
저와 지휘관님… 그리고 이 구조체는 파오스 지상 옛터에서 함께 휩쓸려 들어왔습니다.
파오스의 지상 옛터라고?
…
알파는 지휘관의 "거짓말"을 굳이 폭로하지 않았다.
잿빛 안개가 자욱해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갑판 위였다.
이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휘관은 곁에 있어야 할 구조체부터 찾았다.
지휘관님, 전 여기 있어요.
지휘관님, 여기가 파오스 우주 함선인 것 같은데, 단순히 우주 함선 그 자체만은 아닌 것 같아요.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관 방호복의 퍼니싱 정화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한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파오스 우주 함선에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 공간은… 안개 지역일 가능성이 높아요.
이중합 탑이 강림하지도 않았는데, "안개 지역"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리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제가 안개 지역에 들어갔을 때와는 좀 달라 보입니다.
당시 안개 지역은 끝없는 잿빛 안개로 가득 차 있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루시아는 그 속에서 갈 곳을 잃은 채 헛되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수많은 "균열"이 서로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했고, 수천 마리의 이형 괴물들이 그 균열을 따라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자욱한 잿빛 안개 너머로도 우주 함선 위 기념비는 이정표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너무나 고요했다. 괴물들의 소리와 혈흔을 제외하면, 이곳은 거대한 무덤처럼 적막했다.
그들은 정말 살아있을까?
윽…
마인드 표식 너머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자, 루시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지휘관님. 안개 지역 때문인 것 같아요.
기억나지 않아요. 안개 지역에 나타난 변화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엔 이중합 탑이 강림하지 않았으니까요.
뒤를 돌아봐도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기에 남은 선택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지휘관님, 우리…
파오스 우주 함선이 실종되었을 때는 개교 기념일이었기에 우주 함선 내에는 경험 많은 지휘관이 많았다. 이런 고농도 퍼니싱 환경에 갑자기 놓였다면 그들은 분명 즉시 소형 여과탑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어렴풋이 인간들의 그림자가 보이자,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안개 지역"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꽤 잘 어울리는군.
바네사는 단말기에서 파오스 우주 함선의 항행 기록을 호출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들어온 파오스 지상 옛터 근처에 "안개 지역"과 연결된 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하나의 단서라도 있는 게 여기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지.
저 빌어먹을 균열에서 괴물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일단 현재 안전 구역을 사수하며 방법을…
위잉——
아무런 전조 없이 함체 곳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진동이 터져 나왔고, 합금 선실 벽은 비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윽…
알파는 눈에 띄지 않게 반걸음 물러나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
이것 역시 안개 지역에 들어온 뒤 겪었던 의식의 바다의 진동이었다. 혹시 "키메라"의 소행일까?
또 시작이야. 레이나! 예비 제7탐색대를 이끌고 안전 구역 주위를 순찰해! 안전 구역에 균열이 생기는지 감시하고! 엘리아나한테도…
무언가 깨달은 듯 바네사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알겠어!
레이나는 문밖에서 대답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너도 놀고 있지만 말고, 이 구조체 둘을 데리고 가서 상황을 살펴봐.
바네사가 전술 레이더 홀로그램 투영을 띄워 적이 가장 많은 곳을 파악하려던 찰나…
수많은 붉은 "적군" 사이에 또 다른 녹색 광점이 포착되었다.
이런 젠장, 네 번째 파오스 신호라고?
잠깐, 그 사람의 신호 위치가…
바네사가 경악하며 고개를 들었다.
신호 위치가… 어떻게 "키메라"와 겹칠 수가 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