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오스 우주 함선은 황금시대 중후반에 건조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다음 목표는 별들입니다!
"에덴 계획"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에덴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은하계 식민"이라는 화두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덴 계획의 발자취를 따라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를 그대로 우주로 옮겨놓기 위해, 역대 파오스 교장들은 막대한 노력과 자금을 쏟아부었다.
마침내 이 거대하고도 웅장한 우주 함선이 완성된 순간,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 우주 함선이 파오스의 학생들을 다음 전성기로 이끌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 거함은 모든 동력을 잃은 채 망망한 안개 속에 멈춰 서 있었다.
수많은 학생의 영광과 뜨거운 피가 깃든 파오스 우주 함선은 이제 고립무원의 거수처럼 끝없이 요동치는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여러 갈래의 균열이 공간을 찢어발겼고, 끝도 없이 몰려드는 이상 "생물"들이 틈새를 통해 우주 함선 갑판 위로 기어 올라왔다.
쾅——
엘리아나!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가!
화약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거두며 바네사가 뒤쪽 해치를 발로 걷어찼다.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발톱 몇 개가 문틈에 끼어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냈다.
엘리아나 교관은 묵직한 쇠 지렛대를 재빠르고 맹렬하게 내리쳤다.
캬아악——
잘려 나간 사지에서 끈적한 체액이 튀어 올랐고, 엘리아나는 그 틈을 타 문을 막고 총상을 입은 채 광적으로 울부짖는 괴물들을 문밖으로 격리했다.
퉤, 이 망할 괴물 자식들…
거대한 충돌음에 두꺼운 격리문마저 흔들렸고, 자물쇠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엘리아나는 돌아서서 단말기에 장착된 조명을 다시 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을 줄 알았던 의무실은 더 이상 흔적조차 없었고, 짙은 잿빛 안개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조명의 빛줄기는 둘 앞에 있는 아주 좁은 구역만을 비출 뿐이었고, 빛의 가장자리는 안개에 침식되어 흐릿했다.
여기도 괴물이 들어온 것 같아.
엘리아나는 의무실 곳곳에 널브러진 가구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니아, 우린 경계할 테니 넌 가서 혈청을 찾아. 오는 길에 혈청 상자 라벨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줬지? 서둘러.
네!
방호복을 입은 여학생이 난장판이 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철문 너머로 들려오는 충돌음이 빨라졌고, 거대한 심장이 그 뒤에서 미친 듯이 고동치는 듯했다. 공기 중엔 소독약 냄새와 부패 취가 섞인 악취가 감돌았고, 잿빛 안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손전등의 빛줄기 주위를 천천히 일렁였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니아는 다급히 물자 상자를 뒤지며 라벨을 꼼꼼하게 살폈다.
엘리아나, 10시 방향… 약장 뒤에!
날카로운 점사 소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울려 퍼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철제 약장 한 줄이 옆으로 육중하게 쓰러지며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을 냈다.
크아아악——!!!
뒤틀린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고, 날카로운 발톱이 합금 바닥을 긁으며 찢어질 듯한 파공음을 냈다.
!!!
니아! 돌아보지 말고, 어서 찾아!
엘리아나가 비수를 쥔 채 앞을 가로막았다.
아… 알겠습니다!
니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이 또 다른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총성과 비수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뒤엉켰고, 바네사와 엘리아나는 비좁은 공간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니아는 이를 악물었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니아는 마침내 그 상자를 발견했다.
찾… 찾았어요! 저쪽에 있어요!
혈청 상자는 다른 약장들과 함께 괴물의 발밑에 있었다.
어서! 가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틈을 타, 이를 악문 니아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을 끌어내어 상자를 겨냥해 무릎으로 미끄러지듯 약장 잔해 밑으로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금속 모서리가 방호복 표면을 찢었지만, 니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두 손으로 상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찾았어요!
상자를 내려놓고 잘 숨어 있어. 우리가 마무리할게!
니아가 안전 구역에 숨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네사가 맹렬한 화력망을 구축했고, 엘리아나는 높이 뛰어올라 날카로운 비수를 쥐고 뒤쪽에서 덮쳐오는 괴물의 눈구멍에 잔혹하고도 정확하게 꽂아 넣었다.
좋아. 일단 끝났어.
비수를 벨트에 꽂아 넣으며 엘리아나는 바닥에 쓰러진 괴물을 발로 차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 곧장 니아 곁으로 이동해 그녀의 방호복을 살폈다.
표면만 손상된 거라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거봐. 넌 할 수 있잖아. 적어도 전술 지원 수업은 합격이야. 나중에 파오스로 돌아가면 실습 학점을 더 받을 수 있겠는데?
방금처럼 눈이나 다른 약점을 정확히 노려 공격했다면, 지원 수업에서 80점은 충분히 받았을 거야. 우수한 성적도 머지않았어.
엘리아나는 혈청 상자의 밀봉 스티커를 확인하며 니아를 격려했다.
쳇… 아직도 점수 타령이야?
바네사가 한 손으로 탄창을 교체하며 힐끗 시선을 던졌다.
엘리아나, 더는 학교의 그 빌어먹을 점수 시스템을 잣대 삼아 지금을 재단하지 마.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에선 합격점을 받아 수료 시험을 마치고, 번듯하게 구조체 매칭 홀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이 망할 곳에서…
합격이라는 건, "다음은 네가 죽을 차례다"라는 걸 의미하니까.
니아의 몸이 흠칫 경직되자, 엘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희망 정도는 남겨둬야지.
미간을 찌푸린 바네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바닥에 놓인 상자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혈청 상태는 어때?
밀봉 스티커도 온전하고 상자 상태도 깨끗해. 유통기한이 아직 지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한 상자에 40개라… 그래도 부족해.
임시 안전 구역에는 적어도 50여 명의 중상자들이 혈청 주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어제 워렌이랑 나갔을 때 두 상자를 찾았거든. 며칠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쓸 순 있어, 앞으로…
앞으로라…
바네사는 엘리아나의 말을 되풀이하며, "앞으로"라는 단어를 힘주어 씹어 뱉었다.
바네사.
…
바네사는 팔을 치켜들며 엘리아나의 등 뒤로 불쑥 튀어나온 괴물의 팔을 쏘아 맞혔다.
창밖으로는 짙은 잿빛 안개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공간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뻗어 나갔다.
"앞으로".
바네사는 다시 한번 그 단어를 되뇌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엘리아나 역시 바네사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읽었다.
이곳이 지상이었더라면, 바네사는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모두를 이끌며 버텨낼 자신이 있었고, 전원을 생존시킬 확신마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우주 함선의 천장 돔은 더는 별빛을 머금지 못했고, 진득한 잿빛 안개와 고농도 퍼니싱이 사방을 빈틈없이 잠식하고 있었다.
통신 탑은 파괴되었고 전자기 신호는 완전히 끊겼다. 구역의 경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형 여과탑 외부 구역은 오직 인력에만 의존해 탐색해야 했다.
돌발적인 재난이 발생한 이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개로 가득 찬 이곳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고, 자기장이 교란되어 기계식 시계도 예전에 고장 나버렸다. 바네사는 가장 원시적인 방식인… 예전에 수집용으로 간직했던 장식용 모래시계 하나로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계산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들이…
한때 찬란한 위용을 자랑하던 긍지 높은 파오스 우주 함선이, 호박 속에 갇힌 벌레처럼 이곳에 박제되어 버린 지…
파오스 우주 함선이 습격받아 긴급 사출되었을 때만 해도, 모두가 그저 단순한 사고일 것이라 여겼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신탑이 마비되어 공중 정원과 즉시 교신할 수 없었지만, 파오스 우주 함선은 여전히 공중 정원의 위치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항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라 믿고 있었다.
지옥에서 온 듯한 균열이 하늘에 이유 없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파오스 우주 함선이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맹렬한 진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바네사가 눈을 떴을 때, 잿빛 안개와 함께 고농도 퍼니싱이 순식간에 파오스 우주 함선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날카로운 경보음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고, 파오스 우주 함선의 천장 돔에는 거대한 붉은색 경고가 연신 깜빡였다. 그리고 우주 함선의 실드는 연약한 종이 상자처럼 닿자마자 찢어져 버렸다.
새로운 훈련인가요? 아니면…
윽…
퍼니싱이 호흡기를 타고 들어가 내장을 침식시키자, 학생 A의 입가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난… 쿨럭…
학생 A는 자신의 목을 세게 긁어대며 다음 말을 미처 잇지 못하고, 썩어버린 나무 열매처럼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깨진 우주 함선 너머로 고농도 퍼니싱이 미친 듯이 밀려 들어왔고, 잿빛 안개가 살아있는 뱀처럼 바닥을 기어다녔다.
퍼… 퍼니싱!
혹, 혹시… 시뮬레이션 전장 같은 건가요?
공중 정원에서 태어나 갓 입학한 학생B는 퍼니싱을 실제로 겪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벌벌 떨며 허리춤의 무기를 뽑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경고합니다. 경고합니다. 퍼니싱 농도가 안전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방호복이나 안전 보호 마스크를 착용하십시오.
경고합니다. 경고합니다.
보… 보호 마스크…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말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경고합니다. 경고합니다. 퍼니싱 농도가 안전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방호복이나…
단말기는 무용지물이 된 안내 음성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고, 학생B는 무기를 꽉 쥔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안내등을 따라가! 소형 여과탑 쪽으로 이동한다——!
엘리아나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려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아비규환의 비명 속에 뒤섞여 거센 파도에 집어삼켜진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안내등을 따라가!! 우주 함선에 소형 여과탑이 있으니 당황하지 마.
쿨럭…
경고합니다. 경고합니다. 퍼니싱 오염이 감지되었습니다. 에어록을 곧 폐쇄합니다.
안 돼!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에어록을 폐쇄하게 둬선 안 돼!
문이 잠겨버리면, 수백 명의 학생들이 대강당 안에 갇혀 몰살당하고 말 터였다.
내가 어떻게든 열어볼 테니까…
하지만 엘리아나의 발걸음은 에어록 앞에서 뚝 멈춰버렸다.
전자 패널에 붉은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니 이미 퍼니싱에 침식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장치의 수동 개방 시스템은… 엘리아나는 허둥지둥 등 뒤의 하층 정비 파이프를 열어젖혔다.
쿨럭… 늦었어.
푸미르 교수님!
저 문의 전자 시스템은 이미 침식됐어. 누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맞물린 톱니바퀴를 고정해야 다시 열 수 있을 거야.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을 내뱉는 노교수의 안경 너머로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보였다.
이 시스템은 예전에 내가 설계한 것이니, 내가 가겠다.
엘리아나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푸미르 교수는 몸을 돌려 잿빛 안개를 뿜어내는 정비 파이프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농도 퍼니싱이 노인의 피부를 부식시켰고, 눈가에는 피눈물이 흐르게 했다. 노인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본능에 의지한 채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30초, 1분… 1분 35초가 지나자, 푸미르 교수는 생명을 상징하는 맞물린 톱니바퀴에 마침내 손을 뻗었다.
열려라… 제발!
푸미르 교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며 녹슨 톱니바퀴를 힘껏 돌렸다.
무거운 합금 해치가 굉음을 내며 열렸다.
문이 열렸어. 어서! 여길 빠져나가서 안내등을 따라 대피해!
푸미르 교수는 어렴풋이 엘리아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대피했는가?
마지막 숨결이 잦아들며, 좁디좁은 파이프 속에 쓰러진 푸미르 교수의 잿빛 눈동자에 비친 것은 더는 지구의 하늘이 아니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졌고, 생존자들은 우왕좌왕하며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우주 함선 전체가 이미 이 정체불명의 공간에 집어삼켜진 뒤였으니 더는 어디로 도망칠 수 있었겠는가?
기본 전술 가방에 간이 보호 마스크가 있어!
귀청이 터질 듯한 총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마치 늑대 무리에 쫓겨 흩어지던 어린 양들이 방향을 잡은 것처럼, 공포와 당혹, 혼란에 휩싸인 시선들이 일제히 총성이 울린 곳으로 향했다.
바네사는 간이 보호 마스크만 쓴 채로 파오스 기념비 아래 서 있었다.
엘리아나, 지금 당장 소대원들을 데리고 우주 함선의 소형 여과탑을 가동해.
알겠어!
움직일 수 있는 구조체는 당장 부상자들을 데리고 여과탑 구역으로 이동한다.
네!
나머지는 보호 마스크를 쓰고, 30초 안에 가장 가까운 탈출 캡슐로 가서 예비 방호복을 챙겨.
명령이 하나둘씩 떨어지자, 사람들은 마침내 중심을 잡은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간이 보호 마스크를 착용하고 예비 방호복을 찾아 입었다. 희미하게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주 함선 한쪽에 있던 소형 여과탑이 천천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퍼니싱 검사기에 희미한 푸른색 안전등이 켜지면서, 바네사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다, 다행이에요! 여과탑이 가동됐어요!
숨 돌릴 틈도 없이 공간에 무수한 균열이 나타나더니 이상 "생물"들이 쏟아져 나와 우주 함선 내의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쳐왔다.
됐어. 방호복도 문제없고 혈청도 쓸 수 있어. 이제 가자.
바네사… 바네사?
바네사의 시선을 따라가던 엘리아나는 멀지 않은 광장에 낭자한 혈흔과… 시체들을 다시 마주했다.
전쟁이 갑작스럽게 발발한 탓에, 당시 파오스 우주 함선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휘관들이 여럿 탑승해 있었으나 스며드는 퍼니싱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과 교전하기도 전에 파오스 우주 함선은 이미 참담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제때 대처했어.
하, 누가 행동이 굼뜬 녀석들을 동정한대?
기본 전술 가방에 간이 보호 마스크가 지급됐으니, 경보가 울리자마자 바로 보호 마스크를 쓸 생각을 했어야지.
…
바네사는 시선을 거두었다.
이게 바로 전쟁이야. 전장은 그리 자비로운 곳이 아니니까.
네 말이 맞아. 전장은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지.
그래도 괜찮아. 내가 필요한 건 전부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분명 다들 무사히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엘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돌아가자. 부상자들이 혈청을 기다리고 있어. 아직 안 쓴 의료용품도 몇 개 찾았으니 같이 챙겨 가자.
니아, 예비 붕대들 챙겨서 나갈 준비 해. 니아?
저… 여기 있어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니아가 자세를 똑바로 고쳐 섰다.
한눈팔지 마.
한눈팔다 저 괴물들한테 잡히더라도, 내가 구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
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한 바네사는 의무실에 어지럽게 널린 가구를 피해 몸을 비키며 엘리아나에게 해치를 열라는 눈짓을 보냈다.
갑자기 요란한 연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해치 근처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괴물들을 격퇴한 바네사는 탄창을 교체하는 틈을 타 개머리판을 휘둘러 뒤에서 습격해 오는 적을 가격하며, 의료 물자를 한가득 짊어진 니아가 선실을 빠져나갈 수 있게 엄호했다.
어딘가 좀 이상해. 의무실 쪽은 그나마 여과탑 범위가 닿는 가장자리인데… 어째서 괴물이 이렇게나 많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여긴 뭔가 수상해…
구석을 타고 다가오는 괴물을 쏴버린 바네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전술 가방에 남은 탄창을 매만졌다.
탄약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튼, 서둘러 돌아가자.
둔탁한 굉음과 함께 엘리아나의 등 뒤 선실 벽이 고농도 퍼니싱에 부식되며 들쭉날쭉한 구멍이 뚫렸다.
젠장… 「균열」이잖아!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엘리아나는 뒤늦게 반응한 니아를 단숨에 밀쳐내고 「균열」 안쪽을 향해 재빨리 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짙은 안개가 먼저 뿜어져 나오며 괴물의 포효가 귓가를 울렸다.
니아! 도망쳐!
두 개의 총구가 촘촘한 화력망을 구축했지만, 막 형태를 갖춰가는 균열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엘리아나! 뒤쪽을 조심해!
어느새 짙은 안개 속에 잠복해 있던 괴물이 발톱을 드러내더니…
커억!
날카로운 발톱이 순식간에 엘리아나의 어깨를 꿰뚫었다.
엘리아나 교관님!
엘리아나가 고통에 비틀거리자, 니아는 몸을 돌려 엘리아나를 부축하려 했다.
일단 받아!
엘리아나는 이미 어떤 상황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괴물의 차가운 발톱이 견갑골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엘리아나는 자신의 삶이 끝나는 소리를 들었다. 기계 괴물이 방호복을 꿰뚫었고, 퍼니싱이 찢어진 틈을 타고 스며들어 피와 살을 갉아먹고 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망… 어서 해치 쪽으로 가! 이 괴물들이 안전 구역으로 들어오게 해선 안 돼!
들고 있던 총을 니아의 품에 강제로 떠넘긴 엘리아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저편에 있는 콘솔을 향해 뛰었다.
노이즈가 가득한 대형 스크린 위로 손끝을 타고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엘리아나는 혀를 세게 깨물며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엘리아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을 막아! 총알이 얼마 없어서 오래 버티기 힘들어!
바네사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꽃을 뿜어냈다.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섰다간 괴물들이 이 통로를 타고 안전 구역까지 들이닥칠 터였기에, 바네사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시스템… 시스템이 말을 듣지 않아!
퍼니싱 농도가 짙어지면서 엘리아나의 시야도 흐릿해졌다. 요란한 총성과 니아의 절박한 목소리는 마치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지금 엘리아나에게 들리는 유일한 소리는 급격하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뿐이었다.
수동 제어 레버를 찾아봐!
바네사가 한 손으로 탄창을 분리하고 허리춤의 전술 가방을 더듬었다.
가방 안에는 이제 마지막 탄창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안 돼. 화력이 부족해.
바네사가 니아를 향해 소리쳤다.
니아! 사격해!
붉은 총구의 화염이 하얀 안개를 갈랐다. 니아는 품에 있던 총을 쥔 채 손가락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쏴! 안 그러면 우린 여기서 다 죽는다고!
엘리아나의 온기가 남아 있는 총은 델 듯이 뜨거웠다. 니아의 뺨을 타고 흐르는 액체 역시 불길처럼 뜨겁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피인지 아니면 눈물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니아는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총알들이 엮어낸 화력망이 덤벼드는 괴물들의 경로를 다시 한번 간신히 틀어막았다.
엘리아나!
문안으로 들이닥치는 괴물을 걷어찬 바네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의 엘리아나를 향해 외쳤다.
알겠어!
엘리아나의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고, 심화된 퍼니싱 침식으로 인해 방호복 안의 피부마저 하나둘 짓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듬다시피 하여 "긴급 수동 폐쇄"라 적힌 레버를 찾아냈다.
긴급 폐쇄… 가동… 준비…
엘리아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레버를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문 위에서 붉은 비상등이 긴박하게 회전했고, 목숨을 재촉하듯 날카로운 전자음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멍청아! 총알이 다 떨어졌잖아!
바네사는 니아의 손에서 총알이 바닥난 총을 거칠게 낚아채듯 빼앗고는, 니아의 멱살을 잡아 문 안쪽으로 던지듯 밀쳐냈다.
엘리아나, 넌 상태가 어때…
엘리아나의 방호복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확인한 바네사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켜냈다.
쿨럭…
엘리아나는 차가운 콘솔에 등을 기댄 채,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입가에선 핏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물자를 챙기고… 어서 가.
엘리아나 교관님?
니아… 앞으로 뛰어.
여길 빠져나가면… 네 전술 지원 수업에… 높은 점수를 줄게.
엘리아나는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가빠지는 와중에도 남은 힘을 다해 전술 가방을 벗어 바네사에게 던졌다.
…
바네사…
엘리아나는 금이 가고 흐릿해진 보호 마스크 너머로, 바네사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엘리아나가 힘없이 입을 벌리자 끈적한 피가 입에서 왈칵 쏟아지면서,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잠꼬대나 다름없는 소리였지만 바네사의 귓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입술을 꽉 깨문 바네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내달렸다.
안 돼요. 엘리아나 교관님이 아직 밖에 있잖아요!
문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왔다.
엘리아나는 이미 죽었어.
바네사는 필사적으로 니아를 붙잡아 눌렀다.
아니요. 직 살아있어요! 저기! 아직 움직이잖아요! 아직 살릴 수 있어요!
니아는 목이 터지라 비명을 지르며 바네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가벼운 부상이에요! 저한테 약이 있어요! 붕대도 있고 또 혈청도 있는데…
니아는 문이 닫히며 점점 좁아지는 틈새를 두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엘리아나 교관님… 정신 차려요! 저 좀 봐봐요!
엘리아나는 이미 죽었다고!
니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굽어본 바네사는 니아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엘리아나는 죽었다고!
아니요. 아직 살아 있어요!
우리한텐 혈청도 있고 다른 약도 있잖아요. 교관님을…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
쾅…
육중한 합금 문이 거침없는 기세로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그러자 잿빛 안개와 괴물의 포효로 가득했던 지옥은 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교관님…
엘리아나… 교관님…
무거운 문이 생과 사의 마지막 틈새마저 완전히 갈라놓자, 니아는 넋을 잃은 채 철문을 응시했다.
뒤늦은 눈물이 눈시울을 타고 왈칵 쏟아져 내렸고, 공포에 짓눌려 있던 비통함이 둑이 무너지듯 터져 나왔다.
니아는 힘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시선은 한쪽에 놓인 혈청 상자에서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 상자만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방금 전의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
바네사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는 굳게 닫힌 문을 묵묵히 마주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이런 전쟁에 이미 익숙해졌어야 했다. 또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는 황망한 죽음에도 이미 익숙해졌어야 했다.
쩍쩍 갈라진 입가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고, 비릿한 냄새가 입안에 감돌았다. 바네사는 입술을 축인 뒤 엘리아나가 던져준 전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실컷 울었어?
…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뒤에는 깊은 허망함이 밀려왔다. 니아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도록 내버려둔 채, 문 위에서 여전히 깜빡이는 경고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컷 울었으면 일어나서 혈청 팩을 챙겨.
그녀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마.
바네사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오스 우주 함선
안개 지역
원래라면 넓었을 갑판 곳곳에 수집해 온 물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소형 여과탑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었기에, 그들은 모든 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레이나 교관님, 제, 제3탐색대가 주, 주방에서 비축용 통조림을 몇 통 찾아 복귀했습니다.
갓 입학한 학생D는 아직 학생에서 병사로 신분이 바뀐 것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더듬거리며 교관에게 보고했다.
통조림 개수는 몇 개지? 종류는? 손상된 건 없고?
잘, 잘 모르겠습니다.
됐어, 일단 물자 창고에 갖다 놓고, 엘리아나를 찾아서 분류하는 법을 배워.
하, 하지만 엘리아나 교관님은 바네사 교관님과 혈청을 찾으러 나가지 않았습니까?
아차, 깜빡했네.
잠깐… 아직도 안 돌아온 거야? 나간 지 꽤 됐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레이나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책상 위 모래시계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문이 삐걱 열리며 바네사가 무거운 물자 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기록해 둬. 미개봉 혈청 1상자, 미개봉 붕대 5개, 자질구레한 약품 몇 개를 의무실에서 챙겨왔어.
바네사… 혈청이잖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중상자 다섯이 당장 혈청이 없어서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레이나는 서둘러 수첩을 펼쳐 새로 들어온 물자를 기록하고는 다른 쪽에서 대기 중이던 의료팀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탐색대는?
제1, 제6탐색대는 구조체가 대장을 맡아 안개 깊숙이 들어갔어. 갑판 반대편으로 향했다가 하필이면 괴물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모양이야. 그래서 한 명밖에 돌아오지 못했어. "균열"이 너무 많아서 엔진실까지는 전진하지 못했다더군.
부상자가 많은 데다 일손까지 턱없이 부족해. 그 와중에 일부는 안전 구역 외곽에 남아 저 괴물들이 들이닥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젠장, 다음 개교 기념일 땐 무조건 규칙을 하나 추가해야겠어. 모든 지휘관은 대원을 최소한 두 명은 데리고 복귀해야 한다고…
아차, 이야기가 잠시 샜네. 제2탐색대는 통신 탑을 고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중간에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서 둘만 돌아왔어. 그래서 엘리아나와 워렌이 이끌던 제5탐색대를 보내서 수색하고 있어.
제3, 제4탐색대는 식당에 가서 먹을 걸 좀 챙겨왔는데 아직 등록을 못 했어. 참, 엘리아나는 어딨어?
…
바네사의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레이나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해. 예비 약장 생체 인식 권한을 가진 이가 이제 엘리아나 하나뿐이거든. 후방 지원 쪽에서 권한이 필요해서 그녀를 찾더라고. 탐색대에서 돌아온 부상자 둘한테 맞힐 주사제도 필요하고, 그리고 또…
레이나는 단말기 페이지를 넘기며 급하게 주의 사항을 찾았다.
내 정신 좀 봐. 게다가 의료 캡슐 약액도 거의 바닥났어. 어느 창고에 재고가 있는지 물어봐야 탐색대를 보내서 가져올 수 있잖아.
또 방금 복귀한 제3탐색대 학생 녀석들이 물자 분류도 할 줄 모르고 정서적으로도 좀 불안정해서 엘리아나가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바쁘게 메모를 읊어대던 레이나는 새하얗게 질린 니아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엘리아나, 엘리아나…"
레이나는 후방 지원 총괄 담당자가 처리해야 할 복잡한 항목들을 빠르게 늘어놓을 뿐이었지만, 엘리아나라는 이름은 녹슨 쇠톱처럼 니아의 신경을 사정없이 갉아대고 있었다.
교… 교관님…
이를 꽉 깨문 니아가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왜 그래? 피곤해서 그래? 하긴, 이런 임무는 처음일 테니까…
엘리아나 방이 바로 저 뒤에 있으니까, 넌 먼저 가서 좀 쉬어. 걔는 뭐라고 안 할 거야.
바네사, 넌 왜 계속 꿀 먹은 벙어리야. 엘리아나는? 옮겨야 할 무거운 물자가 더 남기라도 했어? 제3탐색대 보고 다녀오라고 할게.
엘리아나는 죽었어.
뭐? 후방 지원 창고로 바로 갔다고?
엘리아나는 죽었다고, 돌아올 수 없다고.
엘리아나가 죽다니…
바네사의 말을 되짚던 레이나의 움직임이 돌연 멈춰 섰다.
균열이 갑자기 열렸고, 우린 미처 대비하지 못했어. 그녀는 어깨를 관통당한 데다 퍼니싱에 침식돼서 결국 생명 징후가 사라졌어.
전사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을 등록해. 엘리아나는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그럴 리가… 의무실은 함선 한가운데 있잖아? 그리고 여태껏 "균열"이 함선 안에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 빌어먹을 이유가 뭔진 우리가 밝혀내야 해.
바네사의 눈빛에는 슬픔 따윈 묻어나지 않았다. 오직 억눌린 채 차갑게 가라앉은 절대적인 냉정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전사자 명단에 녀석 이름을 올려.
그리고… 니아.
…
후방 지원 창고로 가서 제3탐색대 녀석들에게 엘리아나가 알려준 방식 그대로 물자 분류하는 법을 가르쳐 줘.
알, 알겠습니다!
엘리아나가 바네사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니아는 마치 새로운 힘이라도 얻은 듯 비틀거리면서도 벽을 짚고 일어섰다.
하… 하지만…
레이나는 손에 단말기를 든 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엘리아나가…
…
레이나의 손에서 단말기를 낚아챈 바네사가 "전사자 명단" 파일철을 열었다.
성명, 사진, 파오스 학번… 빈칸으로 된 한 줄 한 줄이 이번 사태로 희생된 목숨 하나하나를 의미하고 있었다.
푸미르·레지, 기계 동역학 교수.
파오스 우주 함선이 "이상 공간"에 진입한 직후 희생됨. 우주 함선 구조를 꿰뚫고 있던 교수는 수동 조작 레버를 당겼다.
그의 희생 덕분에 우주 함선에 남은 다른 생존자들은 30초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리나, 지휘관 전공 학생.
"이상 공간" 탐색 중 희생됨.
"키메라"를 가장 먼저 발견했으며, "이상 공간"의 괴물과 맨 먼저 맞서 싸웠다.
오슨, 기계 동역학 전공 학생.
"이상 공간" 탐지 중 희생됨.
그는 이 공간의 규칙을 알아내고 우주 함선의 구체적인 위치를 갑판 위에 균열이 열릴 때까지 파악하려 시도했다.
…
단말기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고,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빛이 침묵에 잠긴 바네사의 눈동자에 맺혔다. 손끝이 움직이자 가벼운 타자음이 적막한 방 안을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엘리아나·리옹,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 후방 지원부 부장.
파오스 우주 함선 내 의료 캡슐 외부에서 희생됨. 안전 구역과 인접한 범위에 균열이 열림.
안전 구역의 다른 부상자들을 지키기 위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수동으로 문을 폐쇄했으며, 퍼니싱에 침식되어 전사함.
시스템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리더니 생존을 나타내던 초록색 글자가 삭막한 잿빛으로 변했다. 뒤이어 그 기록은 점점 두꺼워지는 파일철 속에 자동으로 저장되었다.
자, 다들 정신 차리고 어서 움직여.
권한 없으면 약장을 다 때려 부수고, 물자 분류할 줄 모르면 한데 쑤셔 박아.
바네사가 엘리아나 전술 가방을 책상 위로 툭 던지자, 안에서 자그마한 저장 장치가 굴러떨어졌다.
이건…
저장 장치를 단말기에 꽂자, 엘리아나의 유언이 아닌 우주 함선의 평면도가 나타났다. 거기엔 각 창고의 위치와 보관된 물자의 종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
질질 짜지 마. 차라리 그 힘을 아껴뒀다가 의료 캡슐에서 약액이나 좀 가져와.
하… 하지만, 엘리아나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바네사는 단말기를 닫고는 레이나에게 되던졌다.
전원 경계 태세를 갖추게 하고 부상자들은 한곳에 모아. 지금부터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여과탑 안의 안전 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통신 탑 쪽은…
위잉——
우주 함선 스피커에서 약한 백색 소음이 흘러나왔다.
저기——여보세요——내 말 들려?!
통신 탑?!
통신 탑 수리 완료! 제5탐 색대 임무 완수! 엘리아나! 내 말 들려?!
헤헤, 내 이럴 줄 알았어. 네 방식이 통할 줄 알았다고!
통신 탑이… 고쳐졌군.
바네사가 단말기의 통신 버튼을 힘껏 내리쳤다.
여긴 지휘실, 바네사다. 제5탐색대는 통신 탑을 사수하고, 즉시 외부로 구조 신호를 보내.
어? 바네사? 네가 웬일이냐?
그리고 통신 탑 전술 레이더를 켜고 내 단말기에 홀로그램 지도를 동기화해.
알… 알겠어!
다음 순간 전술 레이더 홀로그램 투영이 펼쳐지자 "이상 침입자"를 알리는 붉은 점들이 지형도를 새까맣게 뒤덮었다.
미치겠네.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저 균열이——
바네사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우주 함선이 또다시 원인 모를 굉음을 내며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통신 탑!
보… 보고합니다! 통신 탑 감지 결과, 공간에 이상 파동이…
잠깐… 이게 대체 뭐지?!
갑판 반대편에서 수많은 시뻘건 점들 사이로, 초록색으로 표시된 "파오스 인증" 식별 번호가 달린 신호 두 개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누가 저기까지 튀어간 거야? 조금 전에 내 명령 없인 안전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바네사가 미간을 찌푸린 채 초록색 점 두 개를 확대하여 단말기에서 둘의 식별 신호를 추출했다.
…
[player name]… 그리고 루시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