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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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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프리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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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주둔지

지상

체구가 작은 은발의 대행자는 썩은 나무뿌리 곁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손바닥을 응시했다.

손바닥 안에는 작고 날카로운 지오드들이 조용히 퍼져나가더니, 호흡에 맞춰 점차 흩어졌다.

아! 루, 루나 아가씨! 이건!

승격 네트워크에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나도 확실하진 않아.

눈을 감은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 안에서 통제를 잃고 떠도는 퍼니싱을 느꼈다.

또 다른 힘이 승격 네트워크를 계속 간섭하고 있어. 난 지금 더 많은 걸 볼 수 없고, 퍼니싱이 요동치는 근원도 확인하기 힘들어.

또, 또 다른 힘이요? 설마… 새로운 대행자라도 나타난 거예요?

라미아는 잔뜩 긴장한 채 품에 안고 있던 기괴한 나뭇가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날 나타났던 그 「공간」과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그 「공간」이라면…

루나가 고개를 들자, 라미아도 덩달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그날 갑자기 나타났던 균열을 말하는 건가요?

라미아는 그날의 끔찍한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중 정원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나는 걱정하는 내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경로를 바꿨고, 공중 정원이 급속도로 추락하는 방향을 향해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공중 정원의 녀석들은 정말 우리의 도움을 원하긴 할까요?

공중 정원이 정말 추락해서 그 방대한 정보가 적조에 잠식된다면, 우리한테도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기게 돼. 그저 각자 필요한 걸 취하는 것뿐이야.

아, 아… 아쉽네요.

왜 그래?

승격 네트워크가… 요동치고 있어…

루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자, 승격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던 롤랑과 라미아 역시 이변을 눈치채고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공중 정원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마크가 새겨진 함선이 금방이라도 지상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낮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파오스 우주 함선? 저게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파오스 우주 함선만이 아니야.

하늘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갈라지며, 짙은 어둠의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고, 잿빛 안개와 짙은 퍼니싱을 휘감은 채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파오스 우주 함선의 엔진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지만, 이런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절대적인 인력 앞에서 이 거대한 우주 함선은 거센 바람에 휩쓸린 벌레처럼 속절없이 그 낯선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그러니까 그 공간 뒤에 있는 "힘"이 흘러나와서 승격 네트워크에 충격을 줬다는 거네요.

하지만, 대체 어떤 공간이길래 그 너머에는 퍼니싱이 득실거리는 걸까요?

라미아는 제법 그럴싸하게 루나를 도와 결과를 분석해 내려 애썼다.

이중합 탑.

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에서 보았던 허구의 기억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루나 아가씨, 다녀왔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롤랑이 야영지로 서둘러 돌아왔다.

공중 정원의 추락은 멈췄지만, 다음 움직임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파오스 우주 함선이 실종된 건 사실이더군요. 공중 정원 측에서 행방을 쫓고자 집행 소대와 정비 부대를 대거 파견했지만, 아직 새로운 소식은 없습니다.

그리고 야영지 외곽에서 예전에 본·네거트 씨를 따르던… 혹사와 마주쳤습니다만.

롤랑은 "성별"을 구분하는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결국 생략하기로 했다.

혹사는 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악의가 없다는 걸 대놓고 보여주려는 것 같더군요. 제가 가서 쫓아낼까요?

내버려둬.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임무를 마친 롤랑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잠시 눈을 붙이려 하다가, 야영지 안에 과묵한 수호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나저나, 알파 씨는 어디로 갔습니까?

뭔가를 본 것 같다면서, 잠깐 다녀오겠다고 루나 아가씨한테 말했는데, 루나 아가씨도 처음엔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언니가 이상 징후를 발견했어. 어쩌면 그 "공간"과 관련된 단서일지도 몰라, 그래서 직접 쫓아간 거야.

흑…

하지만 지금 밖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렇게 단독 행동을 하다간…

내가 언니의 기체를 업그레이드해 줬어.

셀레네를 물리친 후, 대행자의 권한을 되찾은 루나는 승격 네트워크 안의 힘을 "인도"해 알파의 기체를 재구성해 주었다.

처음엔 알파조차도 이 뜬금없는 "선물"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새 기체라고? 난 필요 없어.

네 힘을 낭비하지 마.

이건 낭비가 아니야. 언니.

루나는 단호한 손길로 알파를 만류했다.

이건… 미래야.

루나는 그때 전화 통화에서 들었던 내용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알파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최상의 상태에 도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전 기체보다는 나을 거야.

이중합 탑이 강림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통증은 매 순간 루나에게 이 모든 것을 경계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은발의 대행자는 알파가 떠나간 방향을 멀리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언니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어.

언니라면 분명 자신만의 길을 찾아낼 거야.

매서운 모래바람이 인적 없는 끝자락에서 과거 찬란했던 폐허의 윤곽을 그려냈다.

파오스…

기체를 교체한 뒤, 알파는 왼쪽 눈에 어떤 기묘한 힘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동공을 가득 채우며, 기존에 들끓던 퍼니싱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시야처럼, 언제나 "최초의 자신"을 상징하는 붉은 동공에 새겨져 있었다.

알파는 원인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답을 추적할 때가 아니었다.

!!!

날카로운 검광이 스쳐 지나가며, 흉측하게 변이한 침식체와 함께 벽에 걸려 있던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표식까지 두 동강이 났다.

"파오스"라는 세 글자에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파오스 출신의 유명한 지휘관에 대해 자주 들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알파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길을 가로막은 부서진 벽돌과 고철을 걷어차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알파는 기이한 기운을 풍기는 "레븐쉬"가 이곳에 있다고 확신했다.

레븐쉬는 이미 죽었다. 혹사라 불리는 승격자가 그녀를 속일 이유는 없으니, 이곳에 나타난 "레븐쉬"는 그 기괴한 힘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기괴한 힘은 이미 루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든, 이 육체에 기생한 잔재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끌어내어 하나씩 베어 부술 것이다.

휘두른 칼을 거두며 칼집에 꽂는 마찰음이 긴 복도에 울려 퍼졌고, 알파는 길을 열며 뚜렷한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휘관님, 이곳이 파오스인가요?

부서진 벽돌과 바스러진 자갈을 밟으며, 프리즘 광장 건너편에서 두 그림자가 정적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의 파오스는… 이런 모습이었군요.

양옆의 침식체들을 처리한 루시아는 호기심을 품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지상 옛터가 지금 이런 꼴로 변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낡고 부서진 모습이 지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폐허 같았다. 사방에 흩어진 프리즘 조각들과 꿋꿋하게 솟아 있는 프리즘 탑만이 이곳이 한때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셨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휘관님도 지상의 파오스 옛터엔 와보신 적이 없으신 거예요?

황금시대 중후반 무렵,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는 자체 우주 함선 건설을 준비하며 우주 함선 내부에 지상의 파오스 건물들을 일대일 비율로 재현해 놓았다.

하비·모란, 파오스 우주 함선 시대를 직접 열어젖힌 철혈의 교장이었다. 학교 강당에 서 있던 그는 의기양양했고, 눈빛은 그 어떤 항성보다 눈부시게 빛났다.

파오스는 결코 평범한 학교에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표는 지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는 성간의 것이며, 우주의 것입니다!

산업용 로봇들이 우주 함선의 메인 용골 위를 분주히 오갔고,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는 자신들의 모든 저력을 쏟아부어 이 거대한 강철 괴수를 주조해 냈다.

메인 엔진 배열이 동시에 점화되자, 푸른 꼬리 불꽃이 하늘을 찢어발겼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그것이 파오스의 미래이자, 인간의 미래라고 굳게 믿었다.

2160년, 퍼니싱이 발발했다. 강당 맨 위에 서서 파오스 우주 함선의 건조를 진두지휘하던 그 몽상가는 끝내 자신의 우주 함선이 출항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뒤 전술 지휘과 과장이었던 엘리스터·반스가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교장직을 이어받았다.

인간은 우리 파오스의 힘이 필요합니다.

파오스는 반드시 전장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환호도 꽃다발도 없이 침묵만이 감도는 전장뿐이었다. 엘리스터·반스는 조금 부서진 강당에 서서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오스는 인간 문명이 심연을 향해 뻗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입니다.

문명의 숨결이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는 한, 파오스의 힘은 결코 이대로 꺼지지 않을 겁니다.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 학생 전원이 전장으로 총출동했다.

목숨을 건 혈투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저격이 이어졌고, 생기 넘치던 학생들은 최전선에서 날아온 사망자 명단의 이름 석 자로 축약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도시의 여과탑을 지켜냈고, 민간인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목숨은 지켜내지 못했다.

인간이 면역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는 사상자가 절반을 넘어서며 궤멸 직전 상태에 놓이게 됐다.

면역 시대 중기, 침식체들이 대대적으로 침공해 왔다. 엘리스터 교장은 자원 배급표와 전술 결정서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상 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엘리스터 교장은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매 전투마다 최상의 결과를 계산해 냈고, 인간이 승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게 엘리스터 교장은 포화나 굉음도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오직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단말기의 둔탁한 소리만이 그의 죽음을 전할 뿐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당시 파오스 군사 학교 총교관이었던 아서·하이드리히가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교장직을 물려받았다. 아서는 말없이 낡고 빛바랜 교관 코트를 엘리스터 교장의 시신 위에 덮어주었다.

한때 수천 명이 운집할 만큼 거대했던 파오스 강당은 이제 옷깃이 스치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적막하게 변했다. 엘리스터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강당 아래 서 있는 학생들은 고작 십수 명에 불과했다.

온전한 방어 진형 하나조차 채우지 못하는 숫자였다. 누군가는 팔이 잘려 빈 소매가 덜렁거렸고, 누군가는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를 이마에 감은 채 마비된 듯 비통한 눈빛만을 띠고 있었다.

이 전쟁은 꽤 길어지겠지만, 파오스는… 여기서 멈춰 설 수 없습니다.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전 파오스의 마지막 불씨를 지켜내야만 합니다.

이제 파오스 우주 함선이 출항할 때입니다.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 교장의 최종 권한을 발동한 아서는 학내에 남은 모든 자원을 강제 징발하여 우주 함선에 쏟아부었다.

당시 학교 내에는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는 지상에 남아 인류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며 그를 "겁쟁이", "파오스의 존엄을 저버린 역적"이라 매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서는 우주 함선의 출항을 묵묵히 밀어붙였다.

면역 시대 중후기, 파오스 우주 함선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파오스는 인간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전장은…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아서는 지상에 서서 파오스 우주 함선의 출항을 배웅했다.

기류가 흙먼지와 잔해를 휩쓸어 올리는 가운데, 이 강철 괴수는 수많은 사망자 명부와 파오스의 마지막 불씨를 싣고 석양의 잔광을 가르며 공중 정원에 합류했다.

발밑의 깨진 벽돌은 당시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전성기를 아직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파오스 옛터는 적조와 침식체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였다.

시간이 흘러 지상의 대부분이 함락되면서,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이 황금시대의 폐허를 계속 지키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신임 교장은 남은 병력을 모두 철수시켰고, 그렇게 지상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의 옛터는 전쟁의 불길 속에 완전히 버려졌다.

폐허 속 바닥에 깨져 흩어진 유리 조각들이 자잘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희미한 "기억"이 지휘관의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프리즘·기념 광장"

낯선 계단에 발길을 내디딘 알파는 장검을 쥐고 있었지만 아직 칼을 뽑지는 않았다. 그녀는 왠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이 폐허의 어느 부분이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알파는 이런 "이상 징후"를 확실하게 감지했다.

하지만 알파는 무엇 때문에 이 장소에 이토록 미묘한 동요를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그 "힘"의 영향인 걸까?

옆에 있는 깨진 거울에 알파의 모습이 비치자, 등 뒤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파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몽롱한 와중에 누군가 뒤에서 알파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거울 조각 뒤에 있던 침식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알파

칼을 거둔 알파가 무심한 눈으로 광장 반대편 회랑을 바라보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침식체들이 거울 뒤에서 어른거리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알파

쓰레기들, 고작 이 정도 수작이냐?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침식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회랑의 마지막 걸음을 내디딘 알파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쪽 거울을 쳐다보았다.

저쪽엔…

예전에 연단이 하나 있었던가?

그러니 너희가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알파는 파오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광장에 서서 고개를 든 채…

알파의 귓가에 수많은 사람이 작게 카운트다운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5——4——3——

누구야?!

알파는 경계하며 손을 들어 알 수 없는 환영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이 간 거울 속에는 여전히 그녀 혼자뿐이었다.

무슨 소리죠?!

회랑의 양옆에서 침식체 몇 마리가 울부짖으며 튀어나왔다.

저 녀석들이 낸 소리였을까요?

루시아가 갑작스레 나타난 침식체들을 깔끔하게 처리한 뒤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하지만 이곳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침식체 몇 마리만 드문드문 마주쳤을 뿐, 이곳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침식체 몇 마리만 드문드문 마주쳤을 뿐, 이곳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누군가가 먼저 발을 들인 걸까? 아니면…

지휘관님, 저 앞에…

프리즘 광장 전방에 온갖 풍파를 겪고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오스 기념비의 받침대가 보였다.

우주 함선은 기념비의 상단부만 가져갔을 뿐, 하단부는 옮기지 않았다.

파오스에서 지휘관을 지도했던 교관의 말에 따르면, 이 기념비는 언젠가 파오스의 학도들이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는 뜻을 상징한다고 했다.

지휘관님!

흥.

칼을 빼든 루시아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눈앞까지 날아온 장검을 막아냈다.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라면,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 같은데.

왜 알파가 파오스에 나타난 걸까? 설마 알파도 무슨 정보를 들은 건가?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울렸다. 회랑 옆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파오스 교표가 어색한 대치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매서운 돌풍에 휩쓸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파오스 교표가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든 듯, 알파는 입술을 굳게 다물곤 맞부딪힌 칼날의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섰다.

지휘관님, 뒤로 물러나세요.

루시아는 지휘관을 보호하며 마찬가지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자, 양측은 그럭저럭 안전해 보이는 거리를 유지했다.

파오스 교표가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알파가 공격을 포기했을 리는 만무했다.

알파의 시선을 따라 프리즘 광장으로 눈길을 돌려보니, 언제부터인지 잿빛 안개가 소리 없이 지면을 뒤덮고 있었다. 광장의 구석에는 어렴풋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나타난 건가?

알파는 더 이상 둘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요 며칠 의식의 바다를 끊임없이 떠돌던 "꿈"이 잿빛 안개를 타고 눈앞으로 밀려들자, 루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단순한 안개가 아니라, 퍼니싱입니다. 지휘관님. 일단 피…

루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짙은 잿빛 안개가 순식간에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살아 있는 것처럼 둘을 꽁꽁 에워쌌다.

루시아

지휘관님!

시커먼 틈새가 조용히 열리며, 둘의 마지막 외침은 다른 공간 속으로 집어삼켜졌다.

잠시 후 잿빛 안개가 소리 없이 걷혔다. 무너진 잔해들만이 모든 것을 목격한 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