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0시간 뒤면 야항선은 정박합니다. 잠시 정박해 있을 이 항구에 거래 시장이 있는데 과거 여느 시장보다 구룡과 가깝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곡"의 생체공학 로봇을 원격 제어해 직접 거래 시장에 가서 관리할 예정입니다. 이번 거래 시장은 그전 시민들이 반영한 수요에 따라 단속 등급을 B에서 C로 조정할 겁니다……
하지만 비리야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화서의 데이터 조정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의 구룡과 가깝기도 하고 이번 해안 구역에 침식체들이 출몰할 수도 있으니 만일을 대비해 카이사이를 호위병으로 데려가.
화서의 허상이 깜박거렸다. 그가 "의혹"을 표현하는 사고형식인 것 같았다.
침식체의 습격 위험이 감지되면 이번 거래 시장을 일시 폐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주민들이 다칠 겁니다.
비리야는 인상을 쓰며 조정 작업을 멈췄다.
화서, 나를 대신해서 야항선을 관리하는 동안 인간에게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은데…… 흥미로운 변화지만 거기에 너무 빠져있는 것 같아.
야항선의 주민들도 구룡의 백성인걸. 왕이 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줬으니 그들도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는 체커가 되어야 해.
이 야항선의 존재 가치는 오직 너만을 위한 거야…… 화서, 너만을 위한 몸을 갖기 위해선 많은 거래가 필요해. 그래야만 너에게 가장 적합한 구조체를 더 빠르게 선택해서 네 몸으로 쓸 수 있어. 보잘것없는 리스크 때문에 야항선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어.
몇 년의 시간을 겪어 의식 이관 장치는 완성되어 가고 있어. 난 곧 이 슬픈 "벽"을 허물고…… 너에게 닿을 수 있고, 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몸이 있어야…… 존재의 가치가 주어지나요?
화서가 뜻밖의 질문을 하자 비리야는 잠시 침묵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네 사고방식은 인간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그동안 인간을 너무 많이 접하게 해서 그런지, 아니면 네가 곡의 몸으로 오랜 시간 동안 행동하면서 생각마저 그 녀석과 점점 닮아가는 건지......
비리야는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생체공학 로봇을 보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거래가 끝나면 네가 인간과 접촉하는 걸 줄여야겠어.
화서의 허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비리야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거리에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행인들은 놀라서 사방으로 피했고, 눈치가 빠른 녀석은 그것이 선상 경비를 맡고 있는 역사 로봇임을 알아봤다. 아무도 그의 길을 막지 않았다.
이 로봇은 평범한 역사 로봇이 아니었다. 아이치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이었고 그는 품에 어린 인간 소녀를 안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치는 인기척 없는 골목에서 걸음을 멈췄고, 주위 안전 상황을 확인한 다음 품에 안긴 소녀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유유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지만, 모두 심각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입은 피해보다 그 잔혹한 말이 주는 고통이 천 배나 더 강력했다.
함영 언니……
소녀는 멍하니 자신이 왔던 거리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소녀가 집처럼 여겼던 곳이고 그 집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힘들지만 즐겁게 살았던 흔적, 작고 붐비는 공간에는 세 사람의 즐거운 모습이 가득했다.
소녀는 이 길을 수없이 걸어봤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소녀를 기다렸던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는 다시 어릴 때처럼 혼자서 도망쳐야 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삐……
아이치는 어떻게 소녀를 위로할지 몰라 가슴의 수납공간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유유에게 건넸다.
그가 건넨 것은 유유와 함께 야항선에서 웃음과 눈물겨운 세월을 보낸 판다 인형이었다. 몇 년 전보다 더 낡아 보였고 심지어 오늘은 큰 구멍까지 뚫렸는데 함영이 직접 나서서 수선해 줬다.
삐삐!
유유는 벌써 인형을 안고 잠들 나이가 지났지만 아이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저장된 기억 속에서는 유유가 슬플 때 이 인형을 안으면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유유는 "선생님"이라는 판다 인형을 쓰다듬었다. 그 위에 삐뚤삐뚤 꿰맨 흔적은 함영이 남긴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잘하는 함영이 유일하게 못하는 일이 바느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바늘땀에 남겨진 "혈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과 거의 똑같이 만들어진 함영의 몸은 바늘에 찔리면 피를 흘리는 것마저 인간과 똑같았다.
로봇은 어디까지나 로봇일 뿐이야. 그들의 존재 가치는 그저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야.
함영 언니랑 아이치도 그런 건가……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는 건 정해진 프로그램 때문이었어?
유유는 판다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위에는 함영의 온도가 남아 있는 듯했다.
"선생님"…… 유유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이…… 바보 제자야! ]
유유는 판다 인형의 두 손을 잡고서는 앞뒤로 자신을 향해 연속 펀치를 날리며 목소리를 낮추어 예전에 봤던 애니메이션 속 인형 소리를 흉내 내며 혼잣말했다. 그것은 과거 함영과 함께 자주 하던 소꿉놀이였다.
선…… 선생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엇을 믿고 싶냐는 거야!]
유유는 판다 인형의 다리를 잡고 자신을 향해 날아 차기를 시전했다.
[로봇이면 어때? 함영은 네 편이잖아.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어!]
하지만…… 난 그들을 막을 수 없어……
[이 멍청이야! 머리 이리 내밀어. 내 주먹맛 좀 봐라!]
인형의 부드러운 주먹이 유유의 뺨을 때렸다.
[울기만 하면 어떡해. 약자가 중요한 것을 지키려면 변해야 해!! 넌 강해질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
그래. 함영 언니가 그랬어. 나도 구조체가 될 수 있다고…… 구조체가 되면 함영 언니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야.
구조체가 되고 싶다는 유유의 말을 들은 아이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함영이 준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유유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원래 계획대로 구룡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니…… 우리는 약속했어. 난 함영 언니랑 같이 구룡으로 돌아갈 거야. 나 혼자 돌아갈 수 없어.
아이치, 구조체로 개조될 방법 알고 있지? 거짓말하면 안 돼!
유유의 질문에 아이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끝내 숨기기 어려웠고 아이치는 거대한 팔을 들어 시장의 한 대형 상점을 가리켰다.
"금만당" 가게 내부. 가게 사장인 금만은 눈앞에 서있는 불청객을 보고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함영이 잡혀간 긴급 상황에서 네 이 멍청이 로봇은 어린 소녀를 나한테 데려온 거야?
삐……
함영 언니가 구조체 개조를 돕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는데...... 혹시 그쪽인가?
"도움"이 아니라 "유료 서비스"란다.
그럼 구조체로 개조하려면 얼마가 필요하지?
금만은 곁눈질로 유유를 흘겨보며 두 손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사실 개조의 디자인과 재료는 함영이 다 준비했어...... 하지만 개조 수술의 비용이 좀 비싸. 돈 있니? 없으면 빨리 꺼져.
함영이 준비한 개조 비용은 모두 그녀 손에 있기 때문에 유유는 당연히 그 큰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돈 없으면 빨리 꺼져. 여기서 멍하니 서 있으면 뭐해? 야, 저기, 손님 배웅.
금만은 옆에 있던 어린 점원을 불렀고, 그 마른 소년은 웃으면서 유유에게 손을 내밀며 그녀를 밖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미안해요, 꼬마 아가씨. 우리 사장님은 이득 없는 장사는 절대 안 해요. 이만 돌아가세요.
유유는 화내지 않았고 떠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무언가 결심한 듯 금만과 시선을 마주쳤다.
돈은 없지만…… 유유에게는 팔 수 있는 것이 있어. 그때 당신이 말했었잖아…… 과거의 기억을 팔라고.
일부러 경멸한 척을 하던 금만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게 변했다. 평소처럼 거만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야? 구룡성의 기억이 사라지면, 넌 부모의 모습, 과거 생활의 기억을 다 잃어버리는 거야.
아빠, 엄마께서 말씀하셨어. "유유야, 넌 가치의 유무를 계산하기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행동하는 거야." 과거의 기억이 내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힘을 사용할 시기가 된 거야.
유유는 두렵지 않아…… 함영 언니와 언젠가는 구룡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어. 구조체가 되더라도 아빠와 엄마는 반드시 날 찾을 거야. 그리고 함영 언니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더 많이 만들면 되니까.
가격을 부풀려 거래하는 악랄한 장사꾼인 금만이지만, 이렇게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이 인형도 더할게. 이게 내 전부야. 그러니까 제발……
유유는 마지막으로 판다 인형을 만져보고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소녀가 과거에게 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이 인형이 몇 푼이나 한다고...... 게다가 엄청 낡았잖아.
좋아. 이번 거래는 우리 "금만당"에서 받아주지…… 개조 수술 준비해.
네???
금만은 어린 점원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유유에게만 억지웃음을 보였다.
우리가 개조를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조체 개조가 100%로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수술 중에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돼도 수술 비용을 전부 지불해야 해. 알고 있겠지?
알겠어…… 조금만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볼 거야!
그럼... 따라와.
유유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치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으며 앞으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과거 때문에 눈물을 보이기 보다 소녀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었다.
과연 저 아이가 무사히 개조를 완료할 수 있을까?
무슨 일 있으세요? 사장님, 이 여자애가 걱정되세요?
난 네놈의 기술이 걱정돼서 말이야.
안심하세요. 아시잖아요. 저 예전에 구룡 부희파의 멤버였거든요.
허, 그래, 알았어……
하지만 정말 개조하면서 이 여자애의 과거 구룡에 대한 기억을 지우실 겁니까? 야항선에 오르기 전의 모든 것, 부모, 친구, 과거의 기억, 심지어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릴 겁니다.
당연하지. 그건 계약이자, 내가 받아야 할 보수야.
정말 그런 기억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이 배에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거든…… 하지만 중독자처럼 남의 기억을 엿보는 놈들에게 팔기보다는 앞길이 창창한 그 무희에게 파는 게 훨씬 이득일 거야.
역시 사장님. 현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기억에 얽매이지 않는 것도 이 어린 소녀에게 잘된 일이겠지…… 수술 시작해.
저한테 맡기세요!
거대한 울림소리에 한 소녀가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늘 야항선 위에서 가볍게 흔들리며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과는 달리 현재 소녀의 몸 아래의 모든 것이 진동하고 있었다.
윽……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느껴본 적 없었던 의식이 분리되는 느낌이 온몸을 가득 채웠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게 내 몸인가?
소녀는 합금 재질로 만들어진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게 분명했다.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들려왔고 거대한 몸뚱이가 소녀 앞의 벽을 뚫고 들어와 겨우 소녀 앞에서 멈추었다.
아이치!
아이치라는 이름의 역사 로봇이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섰고, 그의 거대한 팔 한쪽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곧 이어서 뚫린 구멍으로 본체가 일그러진 로봇이 나타났다. 소녀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은근히 위험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삐……
아이치는 힘겹게 일어나 소녀를 지키려 했다. 소녀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치의 거대한 몸을 살짝 들어 안전한 엄폐물 뒤에 내려놨다.
이제 괜찮아. 지금부터 내가 상대할게!
스읍——!!!!
야항선에 왜 이런 것들이 있지?
아이치는 데이터 단말기를 투사했고, 그 위의 날짜를 확인해 보니 오늘이 벌써 소녀가 구조체로 개조된 3일째였다.
앗! 함영 언니!
오늘이 바로 야항선이 정박해 거래를 하는 날이고, 나쁜 놈들이 함영에게 나쁜 일을 시키는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서둘러 거래 시장에 가야 해…… 아이치,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침식체들은 소녀와 로봇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여러 마리의 침식체가 소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발차기에 날아갔다. 그럼에도 그 침식체들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들에게 주먹과 발차기는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앗!
소녀는 침대 옆에 놓인 거대한 칼을 들었다. 칼의 길이가 소녀의 키보다 더 컸지만 왠지 손에 익었다.
비켜!
스읍——!!!!
소녀의 손에 든 칼은 참살의 선풍으로 변했고, 그 속에 말려든 침식체는 크고 작은 조각으로 변했다.
소녀는 자신이 많은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을 감지했고 자신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단지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과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