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인 퍼니싱이 폭발한 지 수년이 지났고, 지상의 문명은 거의 파괴되었다.
한때 지구의 밤은 별 보다 더 빛나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수많은 밤을 비추었던 문명의 상징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 땅과 바다는 이제 고개를 들고 바라본 우주보다 더 어두웠다.
그러나 이 칠흑 같은 심연 위에는 여전히 외로운 별이 존재했고, 어둠이 오지 않을 것처럼 하염없이 빛났다. 그것은 모든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구룡 야항선은 오늘 밤도 이 세상에서 표류한다.
나도 사실대로 말할게. 꼬마 아가씨. 이 보호 페인트는 세계 정부 쪽에서 쓰던 보급품이야. 이게 아무래도...
그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 네 개를 내밀었지만 눈앞의 소녀가 머뭇거리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됐네. 꼬마 아가씨의 성의를 봐서 내가 밑지는 거라고 생각하지. 이건 어때……
손가락 네 개에서 또 하나가 접히자 눈앞의 소녀는 기뻐했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났다. 물론 그 상인의 안타까운 표정에 숨겨져 있는 비웃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예! 약속 꼭 지켜!
유유는 상인의 물건을 건네받으려 했지만, 뚱뚱한 손이 먼저 빼앗아 갔다.
허…… 이 까짓 게 이 정도 한다고? 지금 장난해?
너…… 이 사기꾼. 또 뭘 하려는 거야!
유유는 그가 전에 자신을 속여 죽게 만들 뻔한 나쁜 놈임을 알아봤지만, 그는 전혀 유유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위에 세계 정부 마크는 다 그려진 건데 잘못 그렸네…… 하지만 등급은 괜찮아서 이정도 값어치는 있을 거야.
너……!
금만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다시 한 개의 손가락을 구부려 그 위에 그려진 마크를 긁었다. 그러자 안쪽 원래 마크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내가 당신이라면 빨리 팔았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수입 경로"를 누군가에게 들키게 될 것이고, 그 로봇들이 당신을 배에서 쫓아낼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니깐......
금만은 고개를 들어 야항선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 배의 모든 생사를 쥐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 상인의 눈은 금만이 천천히 표지를 긁는 것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하…… 사장님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럼 그 가격으로 거래하시죠…… 얼마나 사실 건가요?
전부, 있는 대로 다 줘.
저기! 분명히 제가 먼저 왔어요!! 사장님, 저 사람 말 듣지 마세요.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미안해. 꼬마 아가씨가 들은 대로 이 물건들은 전부 이 사람에게 팔았어. 이 사람한테 너에게 조금 줄 수 있냐고 물어봐……
옆에 있던 금만은 이제야 유유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그녀를 곁눈질했다.
장사는 가치를 가져오는 것이지 소꿉장난을 하는 게 아냐…… 그런데 너 같은 순진한 꼬마가 살아있을 줄이야. 마일리지가 아까워…… 흥, 곡님도 인자해지셨네.
그래서 아직도 황금시대에 빠져 있는 놈들이 너 같은 어린 소녀의 기억을 취하게 하는 좋은 술로 여기는 것일 수도……
하하, 그러고 보니 너한테 고마워해야 돼. 네 덕분에 그때 좋은 거래를 해서 창업 후의 첫 수익을 낼 수 있었어. 그러니 마음이 바뀌어서 기억을 팔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도 좋아…… 좋은 가격을 쳐줄게.
유유는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고 이 뚱뚱하고 교활한 장사꾼을 노려보았다.
섣불리 움직이지마. 주변에 경계 로봇들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힘들게 구해준 목숨을 버리지 말아야지.
그쪽이...... 함영 언니를 알아?
그러나 금만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돌아서서 부하들에게 방금 산 물건을 나르라고 지시했다.
이런,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밤은 집에 늦게 도착할 거야!
유유는 화가 잔뜩 났지만 여기서 금만과 따질 시간이 없었다. 작은 몸을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틈을 파고 들어, 물건을 사라는 소리를 따라 비집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나~ 왔~ 어~요……
유유는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야항선 거래장은 장사진을 이뤘다. 그 사기꾼이 아니었다면 집에 일찍 도착했을 것이었다.
삐삐~
아이치라는 이름의 역사형 로봇은 유유가 집에 돌아오자 거대한 몸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한 쌍의 주련을 유유 앞에서 들어올렸다.
오오! 이거 아이치가 쓴 거야!? 예쁘다…… 함영 언니가 가르쳐준 거야? 다음에 열릴 선상 월간 시장에 가져가서 팔 수 있을 정도야~
유유의 칭찬에 아이치는 몸을 흔들며 기뻐하는 것 같았다.
유유, 오늘 좀 늦게 들어왔네. 별일 없었지?
유유가 돌아오는 소리에 함영은 안방에서 걸어 나오며 유유를 걱정했다.
미안해요. 결국 함영 언니가 필요한 물건을 다 사지 못했어요.
그러나 함영은 유유의 머리를 그냥 쓰다듬었고, 그녀가 산 물건을 받아 한쪽에 놓았다.
괜찮아. 어차피 이후를 위해서…… 유유 널 위해서 준비하는 거니깐……
유유는 그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함영은 분명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함영 언니가 이렇게 예쁘게 입은 건 일하러 가려는 거예요? 무대 거기서 공연이 있어요?
유유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녀도 언젠가는 함영처럼 무대에 서서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야항선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날을 꿈꾸었다.
함영 언니, 저도 무대 쪽으로 데려가 줘요! 전에 언니가 가르쳐준 춤은 그럴듯하게 배웠어요. 어쩌면 조연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함영은 유유의 모습을 보고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네가 따라 한 모습은 춤이라기보다는 쿵후 서커스를 연습하고 있는 것 같아……
음…… 전 그런 우아한 동작을 못 하겠어요. 왜냐면 어릴 때부터 아빠가 무술을 가르쳐 줬거든요.
장난이야. 무용단에서도 널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
정말이요!? 그럼……
…… 그래도 안 돼. 이미 준비해놨어. 다음에 야항선이 구룡과 가장 가까워질 때, 넌 몰래 배에서 내려서 구룡으로 돌아갈 수 있어.
저, 정말이요?!
유유는 자신이 정말 이곳을 떠나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응…… 그러니까 지금 무대 같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말고 나중에 물건을 사고파는 일도 나한테 맡기면 돼. 그렇지 않으면 배에서 내릴 때 다른 사람이 알아볼 위험이 더 커질 수도 있어.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몰라.
유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알았어요. 그럼 화장이라도 제가 해드릴게요. 화장 받고 가요!
함영은 웃으며 화장대 앞에 앉았고, 유유는 불빛을 빌려 함영의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몇 번을 봐도 함영 언니는 정말 이쁜 것 같아……
그래... 하지만 로봇으로써의 난 "예쁜 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어. 그리고 유유가 크면 분명히 언니보다 훨씬 더 예쁠 거야.
유유는 퍼프를 든 손으로 함영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옅은 붉은 자국을 남겼다. 로봇의 신분을 들킬까 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유유는 함영이 무대에 오르기 전 그녀에게 화장을 해줬다.
하지만 지금의 전 많이 자랐고 많이 변했어요…… 구룡으로 돌아가면 엄마, 아빠가 절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유유 넌 그전과 똑같아.
변함이 없는 건 함영 언니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예뻐요.
유유는 세심하게 아이 라인을 그렸으나 함영의 눈빛에서 옅은 슬픔이 흘러나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로봇은 쉽게 자신의 가치를 ‘잊거나 변하지’ 않지……
함영 언니도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대륙에는 "기계 선현"이라는 로봇과 그의 신자들이 존재한다고 들었어. 그들은 로봇으로서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을 찾을 수 있다면 나도 가능할지 몰라……
그럼 함영 언니도 저와 같이 구룡으로 돌아가 제 엄마 아빠를 찾은 다음 우리 같이 그 "기계 선현"을 찾으러 가지 않을래요?
함영은 유유의 환상이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유와 함께 대지를 여행하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설에 불과해, 몇 년, 몇 십 년이 걸릴지 몰라……
윽, 그럼 엄마, 아빠가 날 못 알아보는 건 둘째치고 유유는 그때 할머니가 돼있겠네요…… 자, 거의 완성됐어요!
유유는 립 펜슬을 꺼내 주홍색 물감을 찍어 함영에게 화사한 입술을 그려주었다. 그 입술은 몇 번 움직이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유가 구조체가 된다면…… 몇 년이 지나도 네 부모가 널 찾을 때까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거야.
구조체……? 저도 구조체가 될 수 있나요?
유유는 전에 장터에서 사람의 몸을 로봇으로 개조한 구조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을 "구룡파"라고 불렀다. 곡님을 도와 야항선을 관리하는 왼팔 오른팔이며 매우 대단했다.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모아둔 돈도 대부분 네 개조를 위한 거야. 모든 개조에 필요한 부품도 준비했으니까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하지만……
유유는 이 이야기를 하는 함영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유유, 그렇게 서둘러 결정할 필요 없어.
화장을 마친 함영은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가 유유를 등진 채 한참 동안 침묵한 뒤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난 네가…… 잘 고려했으면 좋겠어.
중앙무대 옆에서 함영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관람석을 머뭇거리며 바라보았다.
그 아이에게 구조체 개조 일은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모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왜……
이봐, 함영! 넌 무용단의 간판이야. 손님들은 모두 너를 보러 온 거라고! 수심에 찬 얼굴로 손님들을 모두 쫓아내려는 거야?
이를 의식한 함영은 미소를 지었고,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뭘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 괜찮으면 됐어…… 난 또 누구한테 괴롭힘 당한 줄 알았잖아. 너에게 광팬들이 많으니깐.
대장은 함영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에 그 금만이라는 돈 많은 녀석이 또 왔었어…… 널 찾으려고 지명까지 했어.
네, 알겠어요. 공연 끝난 후에 찾아간다고…… 전해주세요.
알았어~ 참, 이번에는 왜 네 여동생이 안 보이지…… 전에 보니까 예쁘장하더라. 우리 무용단도 마침 검무 공연을 할 사람이 필요한데……
아니요…… 그 애는 더 이상……
대장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멀리서 관객들의 큰 환호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큰 징 소리가 울린 후 점차 멈추었다. 그들은 새로운 무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자자! 다들 준비하고, 일 시작해!
대장이 소리치자 함영과 같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준비를 했다.
유유……
야항선의 가장 화려한 무대에 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등장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가장 뜨거운 박수는 자연스럽게 춤 솜씨와 외모가 뛰어난 함영에게로 향했다.
함영은 그야말로 "눈보다 피부가 하얗고 아침 구름보다 맑으며,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내가 이렇게 오래 모은 돈이 전혀 아깝지가 않네!
그는 옆에 낯설어 보이는 녀석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춤 공연을 볼 때 갓을 쓰고 있어서 매우 이상했다.
이봐요, 거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난 "요람"이라고 해.
"요람"이라고 자칭하는 도도한 남자는 물끄러미 무대 위 춤추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여인이 함영인가?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그녀는 요 몇 년 동안 무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용수야. 말하자면 길지만 밤새도록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어...
남자는 옆에서 떠드는 관객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장치를 꺼내 귀에 꽂았다.
그의 입이 열리면서 옆 사람이 보기에 무의미한 문구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신호가 인파를 뚫고 무대 위로 전해졌다.
윽……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함영의 머릿속에 그대로 형성되었고, 춤을 추던 그녀는 순간 균형을 잃었지만 이내 균형을 잃은 움직임을 이용해 과장된 공중제비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나의 특정 코드가 외부로부터 간섭받고 있는 건가?)
뜻하지 않은 연출에 관객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지만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러 사람의 모습이 가려졌다.
좋아! 좋아! 이봐, 아까 그 동작 봤어…… 응? 어디 갔지?
사람들이 무대에 매료되어 있는 동안 그 남자는 관객들 사이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래…… 바로 "그 물건"이야. 우리가 찾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