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항선의 가장 높은 누각. 가면을 쓴 구조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오늘 밤 진짜 주인이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익숙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위엄이 넘치는 여성이 어두운 전당에서 걸어 나왔다. 가면을 쓴 구조체는 고개를 더 숙였다.
카이사이, 고개를 들어라.
명령을 들은 카이사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여성의 뒤로 물러났다.
"곡" 님, 현재 야항선 주민들은 투사 화면이 있는 광장에 모였습니다. 혹시 별도로 더 준비해야 할 게 있나요?
필요 없다. 난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언니와 달리 이 녀석들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
야항선에서 이 인간들은 "의지"를 소유할 필요가 없다. "규칙"에 복종하면 되고 그것이 저 인간들의 모든 "가치"다.
전 이것이 이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서 님께서 이미 저희에게 답을 알려줬습니다.
카이사이, 넌 내가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인간으로서 인간을 미워하고, 인간을 미워하면서도 "왕"의 책임을 지며, 이 외로운 배 위에서 구룡의 영광을 계속 이어갔다.
소인은…… "곡"님이 야항선의 주인이 되기에 제일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곡"은 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보고 웃음을 지었지만 그녀 내심 생각은 알 수 없었다.
결국 난 그녀의 신분과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거짓의 왕은 이 거짓 세상과 걸맞은걸.
카이사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카이사이, 영상 재생 시스템을 작동시켜. 내가 처음 이 신분으로 무대에 오를 거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지. 곧 기나긴 밤이 시작될 테니.
구룡 야항선 인원 탑승 규칙:
첫째: 모든 인원은 반드시 "항쇄"라는 감시 기구를 착용해야 하며 "항쇄"를 착용하지 않거나 훼손하려는 자는 죽는다!
둘째: 모든 인원은 반드시 각종 수단을 통해 곤충 코인을 벌어 탑승 "마일리지"로 교환해야 한다. "마일리지"가 0이 된 자는 모두 죽는다!
셋째: 구룡 야항선은 모든 재난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바다를 항해할 것이다. 몰래 야항선을 떠나거나 야항선에 오른 자는 모두 죽는다!
넷째: 누구든지 구조체가 된 후, 구룡의 아이로 뽑히게 될 경우, 야항선 영구 체류권을 획득하게 되고 구룡의 미래를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다섯째: 위의 규칙 외에 구룡의 이름으로 모든 자유가 주어진다.
적막한 방 안에 여러 개의 허상이 서서히 겹쳐지면서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형체를 만들어 냈다.
응답 유효, 비밀 코드 검증 성공, 사전 설정 범용화 협력 화면 로딩————
관리 담당자 로그인. 비리야 님, 어서 오십시오.
평소와 똑같은 화서의 대답에 비리야라고 불리는 구조체는 보기 드문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를 "비리야"라고 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걸로 충분해. 다른 사람의 이해 따위 필요 없어.
화서의 그림자는 반짝였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첫날과 비교해보니, 비리야 님께서 승선 규칙을 발표한 후 30분마다 진행한 시뮬레이션 연산에서 야항선 실제 탑승 인원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본 기체는 왜 비리야 님이 그렇게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비리야는 야항선 곳곳에 설치된 감시기를 켰다. 감시기는 선상 사람들의 생활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있었다.
화서, 넌 아직 인간이라는 생물의 본성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인간을 알아야 인간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어.
야항선에 오르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소수의 일반 시민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곡의 통치에 적응하지 못한 하층 시민들이야. 그들에게는 가혹해 보이지만 지극히 자유로운 규칙이 오히려 기회야.
그들은 이런 정책을 반가워하고 "마일리지"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며 훌륭한 구조체를 만들어 낼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난 반드시 너의 몸이 되기에 적합한 구조체를 찾아낼 거야.
나의 몸……
화서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는 비리야는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이 형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끝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나도 한때 인간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손으로 가장 완벽한 몸을 너에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그건 내가 한때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로봇이었어. 하지만 내 희망에 불과했지. 내가 너만을 위해 제작된 로봇이라 하더라도 그 논리 시스템은 여전히 게슈탈트와 같은 근원을 가진 화서의 의식에 적합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으로 난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의 논리 모드만이 완벽한 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
화서의 형체가 다시 반짝였다. 그의 자아와 감정은 끊임없는 연산과 사고 속에서 자라났다.
저는 그 로봇의 결말이 궁금합니다.
화서가 로봇에게 관심을 갖자 비리야는 의아했다.
그 로봇은 의외로 쓸데없는 인간의 감정이 생겼어…… 심지어 실험 중에 자기만의 생각이 생겼고, 본래의 "가치"를 잃은 불량품이라고 할 수 있어. 이 야항선에는 그런 불량품은 필요가 없어.
비리야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로봇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인간의 눈빛과 같았다. 그 로봇의 생각도 자신이 부여한 거였지만, 가장 싫어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구룡성에 남겨진 그것은 이미 퍼니싱에 의해 침식되어 새로운 침식체가 되었고, 인간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을 거다.
소멸…… 사망…… 파괴…… 존재의 "가치"…… 그렇다면 화서라는 제가...... 만들어진 가치는 무엇인가요?
비리야는 허상을 향해 걸어갔고, 화서와 마주보는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졌다.
너의 존재 자체에 가치가 있어…… 넌 유일하게 완벽한 존재야. 너를 제외한 모든 건 중요하지 않아. 이 세상과 야항선은 너의 완벽함을 위해 존재하는 요람일 뿐이야.
화서의 허상이 또 한 번 반짝였고 비리야의 기대 섞인 얼굴을 비추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난 너를 위해 집중적으로 확장 시스템을 연구해 언젠가 나타날 너의 몸을 위한 준비를 할 거야.
그래서 난 네가 "곡"의 업무를 잠시 대신했으면 해. 내가 곡의 외형을 본떠 제작한 로봇을 네가 원격으로 제어하고 야항선의 각종 업무를 관리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너도 인간이란 게 얼마나 추한 건지 좀 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야.
비리야는 화서의 반짝이는 허상을 바라보다가 더 안쪽에 위치한 연구실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