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잿빛 변방의 마족들은 "영겁의 대낮"과 정반대되는 이 시대를 "꿈이 없는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밤의 군주 네티아는 직접 성당을 무너뜨리고, 오랜 기간 인간 세계를 억압한 대천사를 몰락시켰다.
그리고 마족들은 영원히 꿈을 잃은 대가로 영생불사의 특별한 영예를 얻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지금 어둠의 지배자 곁에 있는 피의 맹세자는 한때 "천계의 네 기사"와 가깝게 지내던 전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마족들이 네 기사의 이름을 들을 때면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등장은 파멸과 부고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마계의 지배자님, 축하 인사드리옵니다. 마지막 "추교구"를 격파하면서, 저희는 사실상 잿빛 변방 전체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바벨탑" 건설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니, 머지않아 지고천도 마계의 지배자님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겁니다.
시시한 아부로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마. 그레이 레이븐은 어디 있지?
네티아의 늘씬한 그림자가 웅장한 마전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전의 마족들이 전율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레이 레이븐 님께서는 네 기사들과 함께 연옥으로 가셔서 마귀들과 협상 중이십니다. 현재 "맘몬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연옥도 우리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시종 악마가 네티아를 다시 자극하기도 전에, "피의 맹세자"가 마전에 들어섰다.
그레이 레이븐이 나타나면 오늘은 마계의 지배자가 마전에서 화를 내지 않을 것이기에, 네티아 아래에 있던 마족들은 그제야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 레이븐, 널 찾고 있었잖아.
인간이 온 것을 본 네티아는 그 자리의 마족들에게 낯선 미소를 지었다.
방금 재미있는 도구를 하나 얻었는데, 함께 보고 싶었거든.
쿨럭, 오늘 회의는 끝났어. 모두 물러가.
네티아의 명을 받은 마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우르르 빠져나갔다.
거대한 전당에 피의 맹세자와 마계의 지배자 둘만이 남았지만, 네티아는 서두르지 않고 인간을 이끌고 맑게 빛나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나이아히츠의 유물을 찾았어. 이건 그분의 영혼을 담고 있는 진정한 "태초의 거울"이야.
전설에 따르면, 생사의 법칙이 바로 이 거울 안의 무한한 공간에서 잉태되었대. 그래서 이 거울 앞에서 비법을 시전하면 자신의 모든 윤회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난 내 존재의 "근원"을 알고 싶어.
그건 이미 아주 자세히 봤어.
거울 앞에 선 네티아는 손을 들어 거울 속 "자신"을 향해 뻗었다.
예전에 지옥의 마족들은 날 "천생의 악마"라고 불렀어. 하지만 내가 꿈 없이 태어난 게 내 의지가 아니었다는 걸 그들은 몰랐어.
그래서 난 내 천성이 마녀가 아니라는 것과 내 영혼도 사실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증거를 얻고 싶어.
내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건 모두 내가 자발적으로 내린 선택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으니까.
네티아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레이 레이븐, 너 내 이런 집착을 이해할 수 있어?
그럼, 됐어.
네티아는 인간의 손을 잡고 함께 비법을 시전했다.
쨍그랑... 눈앞의 거울이 순식간에 깨지며 파편이 흩날렸다.
끝없는 복도가 둘 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나이아히츠가 수십 년간 숨어 있던 "거울 회랑"이었다.
새로운 마계의 지배자와 인간이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회랑으로 들어서자, 동시에 수많은 낯선 장면들이 거울 위에 나타났다.
네티아가 고개를 들자, 자신의 모습과 거울 속 장면들이 어지럽게 겹쳐 보였다.
우리 사이에서 정말로 생명이 잉태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
이건 분명 지고천님이 내리신 자비야. 그분이 종족과 영혼 사이의 장벽을 깨고 우리의 사랑을 이어주신 거야.
하지만 난 이 아이가 성당과 지옥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 그러니 인간 세계에 남아서, 인간의 모습으로 네 곁에 있게 해줘.
물처럼 맑은 거울 위에서 네티아는 마침내 처음으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보게 됐다. 그리고 그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머니 곁에 서서, 그들이 안고 있는 작은 아기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장면은 꿈같이 아름다운 장면이어야 했다. 하지만 왜...
미안하구나, 네티아. 네가 갓 태어났을 때, 난 네 곁을 떠나야만 했단다.
이건 너와 네 어머니가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너도 지옥으로 돌아와 네 정체성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우리는 네가 어떤 편견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라.
아니야.
이게 진실일 리 없어!
비통한 외침과 함께 주문이 풀리자, 방금 전까지 둘 앞에 서 있던 거울 회랑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네티아에게 달려간 인간은 그녀의 힘 없는 몸을 부축하며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레이 레이븐... 다 봤어?
네티아는 엉뚱한 대답을 하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인간과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건가?
이 비밀은 절대 그 어떤 악마도 알아선 안 돼. 만약 공개되면, 그들은 더 이상 내가 지옥을 위해 싸운다고 믿지 않을 거야.
인간이 네티아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이 말이 왜인지 가슴 속에서 무거운 슬픔으로 맺혀버렸다.
그레이 레이븐... 역시 너만이 영원히 내 곁에 있구나.
역시 내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오직 네 존재만 필요해.
인간의 약속을 받아낸 네티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천천히 일어섰다.
맞아. 흔들려선 안 돼. 우리는 계속해야만 해.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이 위대한 과업을 말이야.
수십 년의 전쟁 끝에, 마침내 목표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어.
수은거울 앞으로 간 네티아가 검지를 들어 올리자, 손끝에서 터져 나온 보라색 빛줄기가 그 존재하지 말아야 했을 거울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네티아는 땅에 흩어진 파편들을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끽끽 소리 나는 유리를 밟으며 계속해서 마전 아래로 걸어갔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고천을 무너뜨려야 해.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바칠 수 있어.
인간은 아무 말 없이 이 어둠의 지배자 뒤를 따라, 그녀와 함께 먼 곳을 향해 걸어갔다.
마전 밖에는 구름처럼 거대한 악마들이 집결해 있었고, 시야가 닿는 곳마다 밤하늘의 별처럼 깃발과 감시탑이 펼쳐져 있었다.
네티아가 마전 밖으로 나오자 악마들이 팔을 휘두르며 흥분된 목소리로 환호했고, 그 북적거리는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마계의 지배자님! 마계의 지배자님! 마계의 지배자! 그레이 레이븐님! 그레이 레이븐님! 그레이 레이븐님!
네 기사께서 저희를 보호하시어 백전백승하게 하시고, 완벽한 승리를 이루리!
모든 영광이 지옥에 있기를!
네티아는 높은 단상에 서서 인간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