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 이후, 세상에 "영겁의 대낮"이 찾아왔지만, 잿빛 변방은 끝없는 어둠에 휩싸였다.
추기경의 몰락에 지고천은 진노했고, 신의 징벌은 모든 영혼에게 평등하게 내려졌다. 지옥의 악마조차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지고천과의 대결에서 패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악마의 영주들은 저마다 영지에 틀어박혀, 이 동란 속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한때 생과 사가 넘실대던 아케론 강은 죽음 같은 정적에 잠겼다.
더는 죽은 자가 망각의 강으로 흘러들지 않았고, 새로운 영혼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영원한 정체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외로운 영혼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무거운 나무 관을 짊어진 채,
망설임 없이 아케론 강으로 들어가
물을 건너 강둑으로 향했다.
몰리간,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라 나와!
네티아는 아득한 수면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해!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잠시 후, 강가의 빽빽한 나무 그림자에서 한 작은 검은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그것은 핏빛 하늘 아래를 맴돌더니, 이내 강둑에 내려앉았다.
이 꼬맹이가 왜 이렇게 소란을 떠는 거야! 안 그래도 지금 지옥이 온통 난장판인데, 돌아오자마자 귀찮게 하네...
까마귀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티아에게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불평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너... 인간 세계에 한번 다녀오더니 어떻게 영주가 된 거야? 그것도 이런 난리통에?
한파엘의 영혼을 먹었어.
네티아는 냉정하게 결과만을 답했을 뿐, 더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몰리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혹시... 인간을 되살리는 방법을 알아?
지금 무슨 헛소리를...
몰리간은 그제야 네티아가 등에 짊어진 "물건"을 발견했다.
뭐야? 산송장이잖아! 산송장을 관에 넣어 지옥까지 데려오더니, 그걸 또 되살리겠다고?
제정신이야? 생사의 법칙이 무너지기 전에도, 심판을 무시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중죄였다고!
몰리간...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이야.
그녀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몰리간은 네티아의 이토록 간절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과거 한파엘의 부하들에게 모욕당하던 시절조차도, 이 마녀는 이토록 애절하게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분명 이 사람이, 삼계의 질서를 되돌릴 마지막 희망이 될 거야...
이번 한 번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날 믿어줄 수 없을까?
...
오랜 침묵 끝에, 늘 입이 거칠던 몰리간이 드물게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마 죽음의 군주뿐이겠지.
너도 알겠지만, 그는 지고천과의 대결에서 패한 뒤로 자취를 감췄고, 지옥은 혼돈에 잠겼어...
하지만 너라면 뭔가 수가 있겠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이 꼬맹이, 예나 지금이나 직감 하나는 무섭도록 정확하단 말이야.
동족을 잡아먹고 허둥지둥 즉위한 너 같은 짝퉁 군주와는 다르게, 우리 같은 진짜 악마의 영주들은 임명과 동시에 "죽음의 군주 호위"라는 직책도 함께 부여받았거든.
몰리간의 말투는 더없이 진지했고, 그 말에 담긴 경고의 의미는 명백했다.
우리 모두 유일한 아케인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알고 있어. 이 비법은 악마의 영주가 공간을 넘어, 순식간에 죽음의 군주 곁으로 갈 수 있게 해주지.
하지만 이 비법을 진짜로 쓰는 놈은 거의 없어. 왜냐하면...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의 군주의 자비일지, 분노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겠지.
까악, 심지어 난 마지막 결전 때 꽁무니까지 뺐단 말이야.
그래도 후회는 없어. 그건 라스트리스조차 돌아오지 못한 싸움이었으니까. 누군가는 남아서 이 전쟁의 뒤처리를 해야 했잖아?
몰리간은 수많은 동료가 소멸한 그 사투를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 재빨리 화제를 네티아에게 돌렸다.
네티아, 정말 죽음의 군주를 만나야 한다면, 내가 아케인 게이트를 열어줄 수는 있어...
다만 죽음의 군주를 만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해.
그리고 죽음의 군주가 일개 인간의 생사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잖아.
상관없어. 죽음의 군주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거니까.
몰리간... 부탁할게. 아케인 게이트를 열어줘.
까악, 이미 다 생각해 뒀나 보군. 그럼 나도 더는 안 말릴게.
몰리간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펼쳐진 양 날개 끝에서 칠흑 같은 깃털이 핏빛 하늘에 닿자, 화염과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균열을 만들어냈다.
어서 들어가. 지옥보다 더 깊은 어둠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네티아는 나무 관을 등에 짊어진 채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더 깊은 심연에 도달했다.
네티아가 도착한 곳은 끝없는 팬더모니엄이었다. 계단 하나하나는 더 깊은 지하로 향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영혼을 해탈의 저편으로 인도하는 듯했다.
그곳에서 네티아는 수많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모든 거울 속의 그녀는 똑같이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꽤나 인상적인 "첫인사 선물"이군. 하하... 새로운 악마의 영주여, 네가 뭘 원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저승의 단 하나뿐인 군주, 나이아히츠가 긴 계단 끝에서 나타나 복도를 따라 내려왔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떤 거울에도 비치지 않고, 오직 네티아의 눈에만 보였다.
이는 지고천의 숙청을 피해 영혼을 이 무한 회랑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모든 거울은 그녀의 분신이었고, 언젠가 이 속박을 부수고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내가 그레이 레이븐을 죽이라 명했을 때, 넌 "인간 세계"에 숨어버렸지. 난 널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파엘에게 그 사명을 맡겼지만, 넌 쓸데없는 감정에 빠져 복수를 핑계로 그의 영혼을 삼켰지... 너의 행동은 이미 지옥 전체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네가 네 영혼이 어떤 꼴인지도 모르고 있는 게 가여워, 내 앞에 설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네티아... 지금의 너는 거래의 대가로 내놓을 게 뭐가 있지?
군주, 네티아가 그때 한파엘의 영혼을 먹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몰리간의 변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이아히츠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손짓 한 번에 몰리간을 거울 속에 가둬 버렸다.
?
까마귀는 순식간에 거울 속에"박혀"버렸고, 그 뒤로는 어떤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는 당신의 낫이 되어, 이 세상의 생명을 거두고 "고난"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 영혼들은 당신의 "복수"를 위한 초석이자, "부활"로 향하는 계단이 될 것입니다.
네티아는 무거운 관을 짊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지금 추기경은 몰락했고, 성당의 앞잡이들은 오합지졸로 전락했습니다. 지옥의 악마들까지 막심한 피해를 입은 이 상황에서, 한파엘의 사명을 이어받을 자로 저만큼 적합한 이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어떤 명령이든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모든 목적을... 제가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겠습니다. 죽음의 군주시여.
그렇게까지 해서 이 인간을 살리고 싶은 거냐... 네티아, 인간의 수명은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하고, 앞으로 너를 기다리는 것은 영생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나?
나이아히츠는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그 요청을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됐다. 어차피 너는 우리가 삼대 율법을 뒤엎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네 소원은 들어주마.
단, 이번만큼은 너에게 사명을 피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
저 시끄러운 새가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으니, 너를 감시하는 책임 또한 저놈에게 맡기도록 하지.
죽음의 군주는 등을 돌려 또 다른 긴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은 끝없이 이어진 반사의 회랑 속에서 점차 흐려졌다.
몰리간, 네 "기억"은 내가 거두었다. 오늘부터 넌 내 "눈"이 되어, 그녀의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네티아, 너에게는 "
아케론 강으로 가라. 대가는 치렀으니, 네 소원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네티아는 관을 등에 멘 채,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몰리간을 안고서, 세차게 물결치는 강가로 다시 돌아왔다.
이곳에 오기까지, 그녀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잃었다. 이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몰리간을 내려놓고, 그녀는 관 뚜껑을 열어 두 눈을 꼭 감은 인간을 품에 안았다.
그레이 레이븐... 미안, 너와 함께 갈 수 없어. 난 여기에 남아야만 해.
네티아는 손바닥을 그어, 핏방울 하나를 인간의 가슴에 난 구멍 속으로 떨어뜨렸다.
피의 맹세의 힘이 즉시 발휘되었고, 네티아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대신할 새로운 혈육이 돋아났다. 그 살은 인간의 몸에 난 구멍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내 이기심 때문에... 이토록 무거운 운명을 너에게 짊어지게 해서 정말 미안해...
인간의 몸이 따스한 강물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이윽고 얼굴을 스치는 물방울이 죽음의 한기를 부드럽게 녹여 내렸다.
그래도 제발 부탁이야...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너 자신"만큼은 잊지 말아 줘.
나를 잊어도 괜찮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도 상관없어.
꿈을 꾸지 않는 마녀는 인간의 몸을 거센 물살에 맡겼다. 세찬 파도가 곧 인간을 집어삼켜 생사의 윤회 속으로 데려갔다.
네티아는 강가에 우두커니 서서, 인간이 강물에 실려 떠내려가다 눈부신 혼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다시 눈을 뜨면, 네 이름과 사명을 기억해. 그러면 날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게 될 거야.
네티아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기다릴게...!
피의 맹세의 끝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게...!
그레이 레이븐
처음에는 하늘을 뒤덮는 홍수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맹렬한 화염이 혼돈을 가르며 인간을 심연에서 끌어냈다.
그다음에 인간은 졸졸 흐르는 물살 속에서 한 자루의 철창을 붙잡았다. 하지만 차가워야 할 철창은 오히려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그 철창을 잡는 순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가 머릿속에서 강렬히 울려 퍼졌다.
피의 맹세
귓가에 풍령 소리 같은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멜로디는 금빛 실처럼 엮이며 산산조각 난 꿈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의식을 깊은 잠에서 깨워 현실의 온기를 되찾게 했다.
까악!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주변에서 모래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풍경 속, 까마귀 한 마리가 어깨에 앉아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인간은 자욱한 모래 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룻밤밖에 자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한 기분이었다.
꿈속에서 아주 익숙한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았다. 비통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애원하던 모습만이 아련하게 남았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 시끄러워서 깼나?
익숙한 그림자가 바닥에 흩어진 마른 풀과 돌멩이를 넘어, 천천히 그늘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인간 곁에 조용히 몸을 낮췄다.
인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고개를 저어 꿈속의 슬픔을 털어냈다.
...
모래언덕 위에 서 있던 마녀는 거대한 바위의 그늘 속으로 천천히 몸을 감췄다. 보고 없이도, 그녀는 까마귀의 눈을 통해 몰리간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멈춰 있던 운명의 톱니바퀴가 마침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서둘러, 체스판 위의 모든 말을 무대에 올려야 했다.
우리의 적은 영원이 아니라, 시간이야.
이 세계는 누구 한 사람의 뜻대로 돌아가선 안 돼. 지고천... 그는 체스판 밖에 너무 오래 숨어 있었어. 그 때문에 우린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흑막을 잊어버리고 말았지.
혼란 속에서 죽은 수많은 생명들, 아케론 강에 갇힌 영혼들... 모두가 율법으로 얽힌 이 세계에서 생명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보여줄 뿐이야. 잡초처럼 죽거나, 성당의 앞잡이들에게 수탈당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없지.
난 모든 영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도록 만들 거야. 죽음도, 성당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레이 레이븐, 이번만큼은 죽음이 널 데려가기 전에, 내가 널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게.
그리고 넌, 이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될 거야.
찬란한 빛 한 줄기가 네티아의 손바닥에서 터져 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회색 깃털로 흩어졌다. 깃털이 모두 땅으로 떨어지자, 네티아의 모습 또한 이 깃털의 빗속에 사라졌다.
와타나베?!
넌... 누구야?
밸러드...
거래 하나 할까?
원하는 게 뭐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마녀 하이타, 성당은 네 놀이터가 아니라고.
그럼 어쩌라고?
음... 내가 도와줄게.
오슬란, 언급했던 "인간"이란, 누구를 말하는 거지?
전쟁에 억지로 휘말린 인간들을 말하는 거다. 구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 종족의 성전을 조작했지만, 그들이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길 원한 건 아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사랑과 증오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며, 의식을 유도할 수도 있으니까.
원한이든 신앙이든,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있단 말이지.
맘몬의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 있고, 황금 율법도 머지않아 무너지게 될 거야. 난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아. 그리고 이는 너희의 목적과도 같지 않나?
그러니 이걸 "협력"이라 생각하지 말고, 단순히 선행 투자용 판돈이라 여겨.
난 이 판돈이 네 손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는 날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거짓말이지?
네티아는 지옥이 내린 사명을 철저히 수행했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수많은 영혼에게 부고를 전하고, "죽음의 군주"가 부활할 계단을 쌓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모두를 속이며,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 치밀한 복선을 깔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마녀는 소원을 이뤘다.
모든 실이 조여드는 순간, 그녀는 "인형"의 몸통을 낚아채며, 달콤한 승리의 열매를 자신의 손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레이 레이븐, 내가 널 위해 준비한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어?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모든 일이 이렇게 될 거란 걸...
"추기경"과 "죽음의 군주"의 권능을 동시에 거머쥔 네티아가 천천히 제단 아래로 내려섰다. 방금까지 혈전을 벌이던 천사와 악마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성당의 폐허 위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무수한 작은 "행성"들이 기포처럼 네티아의 주변을 떠다녔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흐르는 세계에 단 한 순간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온 대륙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권능을 얻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자신이 직접 탄생시킨 "피의 맹세자"와, 그 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네 명의 기사만을 향해 있었다.
어쨌든, 너희에게는 고맙다고 해야겠어. 내 계획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된 건, 너희가 열심히 해준 덕이 크니까.
분명 나한테 화내고 싶을 거야. "네가 감히 우리와의 계약을 이용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분노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어. 너희의 진심과 열정에 진정한 구원의 길을 제공할 테니까... 난 이 세계를 다시 만들 거야.
네티아는 손목을 들어 올려, 인간 세계에 남아있던 수백, 수천 개의 "혼돈의 균열"을 모두 손아귀로 거두어들였다.
난 삼계를 연결하고, 율법을 무너뜨릴 거야. 모든 인간을 성당의 속박에서 벗어난 악마로 바꾸고, 남은 천사들은 아케론 강으로 보내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거야.
이제부터 영혼들 사이에 우열은 없어. 윤회에 "심판" 또한 존재하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우주 전체가 격렬히 요동쳤다. 네티아의 두 손이 마치 "하늘"과 "땅"처럼 중앙을 향해 동시에 압박해 들어갔다.
지표면의 모든 사물은 이 강한 압력에 짓눌리고 일그러지더니, 곧 하나의 "평면"으로 변해갈 것만 같았다.
지표면에 남아있던 악마 대군과 인간들 역시 이 기묘한 힘에 이끌려, 네티아가 자신의 즉위식을 위해 준비한 성당의 폐허로 천천히 떠올랐다.
걱정할 거 없어. 아프진 않을 거야. 그냥 가벼운 꿈을 꾸듯, 깨어나는 순간 영생을 얻게 될 테니까.
오직 그런 몸만이,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거야...
네티아는 두 손을 모으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반드시 지고천을 쓰러뜨려야 해.
쾅!
기묘한 중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맞이한 것은 허무의 공간이었다.
삼계는 네티아에 의해 하나의 "혼돈"으로 뒤엉켰다가, 이내 하나의 "밤"으로 압축되었다.
이곳은 그녀가 창조한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모두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녕, "새로운 시대"에 온 걸 환영해.
네티아가 가볍게 숨을 내쉬자,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압에 휩쓸려, 모두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죽음"과 "전쟁"이 없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그 순간, 베라가 가장 먼저 쌍날 검을 뽑아 들고 힘껏 땅에 꽂았다. 이어 검자루를 꽉 움켜쥔 채 외쳤다.
잠꼬대는 꿈속에서나 해! 생사의 법칙은 네 멋대로 농락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렇게 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보냈는데, 그들을 어떻게 인도할지는 생각해 봤어?
그래, 그 천사 놈들은 개돼지보다 못했지. 그럼 너는 뭘 했는데? 네가 한 짓은 결국 이 모든 골칫거리를 지옥, 그리고 악마들에게 전부 떠넘긴 것뿐이잖아!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자신이 믿는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은... 결코 악마가 되길 원치 않아!
네가 그들의 선택권을 빼앗을 자격은 없어!
와타나베도 곧바로 네티아를 향해 권총을 겨눴지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회색 깃털로 이루어진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평범한 공격으로는 통하지 않아요!
후방에 있던 릴리스는 월산을 펼쳐 차단막을 치며, 네티아에게 중상을 입은 반즈를 보호하는 동시에 인간을 향해 외쳤다.
그레이 레이븐 님, 여긴 저희가 막을 테니, 어서...
미안하지만, 널 보내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와서 판을 뒤엎는 그런 뻔한 연극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거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티아는 맑은 발소리와 함께 모두의 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쉿, 네 기사여, 모두 잠시 쉬도록 해.
딸랑... 풍령 소리가 울려 퍼지자, 온 세상이 순간 멈췄다.
수많은 악마와 천사는 물론, 네 명의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정교한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네티아는 한 발로 가볍게 땅을 딛고 있었다. 상반신은 공중에 떠오른 채, 인간의 손을 붙잡아 끝없는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레이 레이븐, 너에게만큼은 내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꼭 들려주고 싶었어.
인간의 몸은 네티아에게 이끌렸고, 둘은 수백 개의 "행성" 사이를 함께 떠다녔다.
과연 어떤 세상이... 모두에게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 봤어.
천사, 악마, 인간.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어. 그리고 이 끝없는 갈등의 뿌리는 바로 지고천이 만든 규칙에 있지.
네티아는 인간의 몸을 자기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모두를 악마로 만들고, 지고천을 향해 원정을 떠나는 것.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내린 답이야.
모두의 입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면, 그들은 비로소 진짜 적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거야.
휙! 네티아는 허공에 칠흑 같은 날개를 펼쳐, 품 안의 인간을 끌어안았다.
그레이 레이븐... 너라면, 내 이상을 이해해 줄 거지?
우리 함께 모든 고통을 없애고, 이 세상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거야...
한때 우리가 겪었던 그 고난은... 이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닥치지 않을 거야...
네티아 팔에 힘을 주어, 영혼까지 옭아매려는 듯 인간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하듯 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