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우주 연대기 / 침묵의 계시록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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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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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55><i>이야기는</i></size>

<size=55><i>수선화가 넘실거리는 평원에서 시작되었다.</i></size>

네티아는 꽃바다에 몸을 누인 채,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과 그 바람이 실어 나르는 향긋한 숨결을 만끽했다.

후우...

이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나른한 오후가 찾아오면, 꽃밭에 몸을 기대어 고요히 사색에 잠기곤 했다.

바람이 참 부드럽네. 여기 오면 꼭 봄이 다시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들어.

저녁 먹기 전까지... 여기서 조금만 더... 자야겠다.

네티아는 눈을 비비며 몸의 긴장을 풀고 잠을 청하려 했다.

목덜미를 스치는 풀잎의 산뜻한 감촉이 전해지자, 근심 없는 평온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겠지...

오늘 저녁은... 내가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미트파이일까...?

나직이 속삭이는 사이, 눈앞에 노릇하게 구워진 파이가 아른거렸다. 만족스러운 상상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목소리에 네티아는 화들짝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병실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꽃바다와 푸른 하늘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최면 유도에는 성공했으나 수면 단계까지 이르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보다... 상태가 좀 나아진 건가요?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워낙 희귀한 병이라 참고할 만한 사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선생님, 저희가 시도해 볼만한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엄마?

병상에 누워 있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대화를 나누던 두 어른은 순간 말을 멈췄다.

네티아,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치료하고 나서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어. 금방 나아질 거야.

어머니는 조심스레 몸을 낮춰, 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우리 딸.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다음번엔 꼭 예쁜 "꿈"을 꿀 수 있을 거야.

네...

소녀는 익숙한 듯 머리에 쓴 기기를 벗고 침대에서 내려와 어머니 곁에 섰다.

엄마, 오늘 집에 가면... 미트파이 해줄 거죠?

검사가 길어져서, 너무 배고파요.

그럼. 우리 딸이 먹고 싶다면 엄마가 당연히 해줘야지.

어머니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뒤, 다정하게 손을 맞잡았다.

그럼 선생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저희가 이곳에 왔던 일은...

걱정 마십시오. 따님이 "무몽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노의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의술과 양심을 믿으십시오. 네티아의 병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했겠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의사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딸의 손을 잡고 작은 진료소를 나섰다.

9월, 추수가 끝난 들판에 비가 내려 온통 진흙탕이었다. 네티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질퍽한 길을 조심스레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네티아는 학교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어머니에게 종알거렸다.

우리 학교의 건물이 너무 낡아요. 오늘 수업 중에 갑자기 비가 억수로 내리기 시작했는데, 지붕에서 비가 새더라고요.

비가 머리랑 책상 위로 자꾸 떨어져서, 책은 다 집어넣고 선생님이 칠판에 써주시는 것만 보면서 수업했다니까요.

딸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잡담이었지만, 어머니는 세상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듯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을 어귀의 작은 농가에 다다랐을 때, 소녀의 재잘거림도 마침 끝이 났다.

네티아, 엄마는 저녁 준비해야 하니까, 뒷산에 가서 땔감 좀 가져다줄래?

오늘 비가 와서 땅에 떨어진 건 다 젖었을 테니, 조금 멀더라도 산 위쪽으로 올라가 마른 가지를 좀 쳐오렴.

네!

네티아는 문가에 세워진 도끼를 들고 힘차게 대답했다.

아흔아홉... 백! 좋아, 다 했다!

소녀는 마지막 나뭇가지를 도끼로 뚝 잘라 바구니에 담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작은 마을은 모든 것이 아담했다. 네티아는 이 풍경을 좋아했지만, 어머니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기는 밀밭, 저기는 학교, 저기는... 진료소.

소녀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작은 마을을 눈에 담았다.

저쪽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 저 협곡을 따라가면 다음 마을이...

어라? 저 사람들은... 누구지?

나른하던 목소리가 순간 멎었고, 소녀의 시선이 협곡 안쪽에 박혔다. 말을 탄 완전무장한 무리가 마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퍼졌다. 하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마을과 거래하던 상단과도, 이웃 마을 치안관과도 달랐다.

무슨 일이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마을 쪽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니, 불과 얼마 전에 다녀왔던 허름한 진료소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이 습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안 돼, 엄마!

그들이 선한 의도로 온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끔찍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네티아는 무거운 바구니를 내던지고 집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산꼭대기에서 마을로 달려왔을 때, 길 위에는 부서진 잔해와 짓밟힌 음식물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네놈의 진료소에 어째서 "무몽증" 치료 기록이 있는 거냐! 이것이 바로 네놈이 악마와 내통했다는 증거다!

어서 불어! 이 마을에 숨은 악마가 누구냐!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병입니다! 평범한 인간도 얼마든지 걸릴 수 있는 병이란 말입니다!

진료소 안은 책들과 의료 기구들이 난잡하게 뒤엉켜 어지러웠다. "악마토벌대" 대원 중 한 명이 손에 든 "죄증"을 흔들며, 노의사를 바닥에 짓누른 채 심문하고 있었다.

나리, 저희 마을에선 악마가 사람을 해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디 소상히 살펴주십시오...

노의사가 필사적으로 항변했지만, 거만한 "심판자"는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넘긴 상태였다.

물증 앞에서도 악마를 감싸? 뉘우칠 기미가 없군. 죽어라!

으아악!

읍!

벽 모퉁이에 숨어 있던 네티아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치료해 주던 의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하고, 시신은 무심하게 우물 속으로 던져졌다.

(의사 선생님...! 어쩌다... 저놈들은 대체 누구지...?)

네티아는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다음은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온몸을 옥죄었다.

모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 악마 놈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이 마을에 놈들에게 홀린 광신자가 또 숨어 있을지 몰라!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라! 두 번 다시 속지 마!

네!

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마을 곳곳으로 흩어져 수색을 계속했다.

(안 돼... 여기서 계속 숨어 있을 순 없어. 어떻게든 저들을 피해서... 집으로 가야 해...)

네티아는 도끼를 단단히 움켜쥐었고, 건물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익숙한 지리를 이용해 마을 변두리의 집으로 내달렸다.

운명의 여신이 그녀를 가엾이 여긴 것일까? 마을을 가로지르는 내내, 네티아는 기적처럼 순조롭게 악마토벌대의 눈을 피했다.

붉게 물든 밀밭을 지나고, 약탈당해 텅 비어버린 진료소를 넘어, 마침내 얼마 전 어머니와 헤어졌던 농가 앞마당에 도착했다.

네티아는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낯선 공포만이 가득했다.

엄마...?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불러보았지만, 익숙한 손길이 그녀를 옷장 안으로 재빨리 밀어 넣었다.

네티아! 악마토벌대가 들이닥쳤어, 어서 옷장 안으로 숨어!

엄마랑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알겠지?

어머니의 다급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남자가 문을 걷어차고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이, 마을 사람들 여럿이 너희 모녀가 그 악마 광신자 의사가 운영하던 진료소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증언했다.

네 딸은 어디 있느냐!

네티아는 옷장 틈새로 밖을 엿보았다. 외눈의 남자가 식탁 위의 미트파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 우리는 악마를 막으려고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는데, 너희는 여기 숨어서 보호나 받으며 악마가 내려준 음식이나 즐기고 있었다 이거지.

역겹기 짝이 없군. 지고천님의 말씀이 옳았어.너희 같은 광신자들이야말로 뼈에 붙은 종기 같은 놈들이다!

나리, 저희는 광신자가 아닙니다. 지고천께 맹세코, 저와 제 딸은 평생 악마와 손잡은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옷장을 가리려 했지만, 외눈의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늙은 의사 놈이랑 똑같군. 죽기 직전까지 발뺌이라니. 너희 광신자들은 다 똑같아.

이가 빠진 남자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 무릎 꿇고 떠는 여자의 가슴을 겨눴다.

우리를 바보로 아나? 악마의 도움 없이 너희가 이렇게 잘 먹고 살 수 있다고? 아니면 배고픔도 모르는 돼지 새끼들처럼 하루에 여덟 끼라도 먹는 거냐?

나리, 정말 오해입니다. 오늘 밤은 좀 특별해서...

변명은 집어치워! 지고천님께서 이단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만약 오늘 내가 마음이 약해져 너희를 살려두면, 너희는 분명 다른 마을로 도망가 악마를 도와 더 많은 무지렁이를 홀릴 것이다.

우두머리는 옆에 있던 이 빠진 남자에게 눈짓으로 무기를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미 결단을 내린 듯했다.

인간을 위해, 대의를 위해, 이 뿌리를 반드시 뽑아내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네티아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안 돼, 엄마를 다치게 둘 순 없어. 더는 숨어 있으면 안 돼!)

(하지만 내가 뭘... 저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바로 그때, 소녀는 자신이 줄곧 손에 쥐고 있던 것이 땔감을 하던 도끼였음을 깨달았다.

(...)

기회는 단 한 번, 두 남자가 눈치채지 못했을 때 기습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성인 남성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희들은 흩어져서 저 여자의 딸이 어디 숨었는지 찾아봐!

한 번도 누군가를 해쳐본 적 없는 네티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도끼를 높이 치켜들고, 반쯤 열린 옷장 문을 걷어차고 뛰쳐나왔다.

이 나쁜 놈들아, 당장 우리 엄마를 놓아줘!

하지만 소녀가 휘두른 도끼는 허공을 갈랐다.

저항할 틈도 없이, 거친 손길이 네티아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이내 복부를 향한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네티아는 식탁 아래로 나뒹굴었고, 손에 쥔 도끼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낯선 남자

대장 말이 맞았군요. 여기 계집애 하나가 숨어 있었습니다.

문 뒤에 숨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제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네티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고, 단정한 얼굴을 두 남자 앞에 들이밀었다.

이 꼬마가 그 의사가 숨겨왔던 "무몽증 환자"로군. 어린 계집애가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서, 타고난 악마의 씨앗일 줄이야.

둘 다 잡았다. 끌고 가서 성당의 심판을 받게 하라!

안 돼요! 제발, 제 딸은 정말 악마가 아니에요!

나리, 마을에 가서 물어보세요. 저희는 누구도 해친 적이 없어요. 모두가 오랫동안 봐 와서 안단 말입니다...

외눈의 남자는 여자의 애원을 끝까지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그녀를 걷어찼다.

닥쳐!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지금 당장 지고천님을 뵙게 해주마.

나리, 제발 자비를... 이 아이는 아직... 아직 어리단 말입니다.

애원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여자의 등에 날카로운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히히히, 악마의 씨앗을 상대할 땐 이래야지...

이가 빠져 바람 새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냉소를 흘렸다. 이내, 아직 온기가 남은 몸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가 그의 손을 물들였다.

시끄럽게 굴어서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네.

이 미친놈이! 위에서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했잖아!

격분한 "대장"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이 빠진 틈새로 피가 흘러나왔다.

아, 잘못했습니다. 대장!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됐다, 일단 이 아이를 데리고 가, 더는 사고 치지 말고.

네.

방금 사람을 죽인 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대화를 나누며 뒷일을 정리했다.

바닥에 엎드린 네티아는 멍한 눈으로, 쓰러진 어머니의 몸 아래로 번져가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왜 "정의"와 "보호"를 내세우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우리 엄마는... 단 한 번도 누구를 해친 적이 없어. 그런데 왜... 근거도 없는 추측만으로 엄마를 죽인 거야...?

남자들은 잠시 침묵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에야, 무릎 꿇은 소녀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잘 들어라, 꼬마야. 너희들이 진짜 악마든 광신자든, 솔직히 관심 없어. 내게 필요한 건 "용의자를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는 결과뿐이다.

예전에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악마에게 홀린 광신자 하나를 놓아준 적이 있거든. 결과가 어땠는지 아나? 그놈은 다른 마을로 도망쳐서,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어.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코앞의 소녀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걸까. 우두머리는 태연히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아 말을 이었다.

후회했지. 너희 같은 것들에게 더 많은 사람을 해칠 기회를 줬다는 걸! 그때 뿌리를 뽑지 않은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날 이후로 맹세했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악마와 손잡은 자는 모조리 베어 없애겠다고!

근데 그런 건 왜 묻지? 하하, 어차피 곧 죽을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이 빠진 남자 그 특유의 빈정거림은 끝을 맺지 못했다.

붉은 섬광과 함께, "대장"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네티아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는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연약해 보이던 시골 소녀가 순식간에 도끼를 되찾아, 단숨에 성인 남자의 목을 베어내고 말았다.

젠장, 움직이지 마!

먼저 정신을 차린 남자가 리볼버를 뽑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네티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던 그의 팔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툭.

잘려 나간 머리카락과 함께 남자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나뭇가지 하나가 툭 부러진 것처럼 너무나도 가벼워 보였다.

크악!

이어진 일격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단 한마디의 애원조차 내뱉을 틈이 없었다.

히익...!

모든 것을 지켜본 이 빠진 남자는 마침내 웃음을 잃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땅에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빌기 시작했다.

잠깐, 꼬마 아가씨, 내 말 좀 들어봐! 난 저놈들이랑은 달라!

그래, 난 억지로 한 거라고! 방금 네 엄마를 죽인 건 고의가 아니었어. 나도 집에 딸이 있는데, 저놈들이 내가 일 처리를 제대로 안 하면 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단 말이야.

"더 많은 사람을 해칠 기회를 줄 수 없다."라고 했었나?

도끼를 든 소녀는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넋 나간 눈으로 바닥을 보며,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갈 뿐이었다.

좋은 가르침이었어. 잘 배웠으니, 이제... 그대로 돌려줄게.

으아아아아아악!!!

그가 더는 비명을 지를 수 없게 될 때까지, 네티아는 수없이, 몇 번이고, 묵직한 도끼날을 그의 몸에 내리찍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짧은 1분이었을지도, 어쩌면 영원처럼 느껴지는 30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지쳐버린 소녀가 이가 빠진 도끼를 내려놓았을 때, 하늘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네티아는 긴 숨을 내쉬었다. 세 구의 시신이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어머니가 쓰러진 자리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엄마, 제가... 부족했어요.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분명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마침내 소녀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의 핏자국 위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소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직 온기가 남은 어머니의 손을 꽉 붙잡았다. 곧 사라질 그 마지막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싶었다.

이제... 전 어떻게 해야 해요?

네티아...

품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지만, 그 주인을 결코 헷갈릴 리 없었다.

엄마!?

놀란 네티아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간신히 눈을 떴을 뿐, 온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네티아... 저 사람들 말 듣지 마. 넌 절대 악마가 아니야...

피로 물든 손이 딸의 뺨을 어루만지다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얼굴에는 눈물 같은 핏자국이 남았다.

엄마는 다 알고 있었어. 네가 늘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남들처럼 꿈꾸는 걸 무척 부러워했다는 걸...

하지만 "꿈을 꾸지 못하는 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란다.

넌 순수하고 마음씨가 착해. 그게 바로 우리와 악마의 가장 큰 차이야.

엄마...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은 따뜻한 슬픔이 되어 네티아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그럼 엄마,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제 마음이 악마가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냥... 너답게 살면 된단다.

어머니는 힘겹게 마지막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들려줬던 전설 기억하니?

"모든 선한 영혼은 마지막에 수선화 평원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난다"고.

네티아, 이별은 두렵지 않아. 엄마는 거기서 계속 널 기다릴게...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꼭 행복하게 살겠다고 약속해 줘.

엄... 마?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어머니의 몸을 흔들었지만, 감긴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엄마...! 엄마!!!

심판관

죄인 네티아. 악마토벌대원 다수를 살해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할 것이다!

천둥 같은 망치 소리와 함께, 네티아의 영혼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수천 겹의 감옥으로 추락했다.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한 영혼에는, 심판정의 이름으로 "악마"라는 족쇄가 채워졌다.

네티아는 차가운 강물 속에서 번쩍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끝없이 펼쳐진 핏빛 하늘뿐이었다.

이곳에는 푸른 하늘도, 흰 구름도, 푸른 잔디와 향기로운 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강가의 악마

어이, 일어나! 거기 널브러져 있지 말고! 남들 일하는 데 방해되잖아!

네티아는 낯선 악마에게 머리채를 잡혀 물 밖으로 끌려 나왔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강변에 내동댕이쳐졌다.

네티아, 다수 살해죄, 악마로 판정... 오, 보기엔 여리여리하더니, 깡다구가 보통이 아니잖아?

악마는 "카론"에게 받은 판결문을 읽으며, 그녀의 생을 가볍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저기,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어딜 가긴. 여긴 지옥이야. 이제부터 뭘 하든 네 마음이야.

강가의 악마는 손에 든 노를 휘저어, 아케론 강에서 떠오르는 "태아"들을 무심하게 건져 올렸다.

단, 하나만 빼고. 지상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여기 온 이상,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을 거다. 네가 전에 뭘 믿었든, 지고천과 성당과는 영원한 작별이라고.

네티아는 한동안 지옥을 정처 없이 떠돌았지만, 어딜 가든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배척당했다.

지옥에서 악마들이 어울리는 방식이란, 생전의 죄악과 자신을 옭아맨 악몽을 고백하며 유대를 쌓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티아에게는 그 두 가지 모두 없었다.

푸하하! 그러니까, 생전에 꿈을 꾼 적이 없어서, 인간들에게 악마로 몰릴까 봐 매일 아침 가짜 꿈 얘기를 지어냈다고?

참 웃기는군, 죽음의 군주여! 넌 아마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씨앗"이었겠지. 지상에 있다 한들 드림캐처 따위로는 어림도 없겠네.

시끌벅적한 술집 안, 술 취한 악마들은 네티아의 고백에 또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좁은 공간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다음에는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기괴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편이 낫겠다고 속으로 후회했다.

사장님, 이 정도면 제 진심을 믿어주실 수 있겠지요?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욱 묵직하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애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내 영지에 정직함밖에 내세울 게 없는 폐물은 필요 없다.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참회나 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

물론, 성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천사 놈들에게 머리통이 날아갈 테지만 말이야.

한, 한파엘 영주님!

방금까지 웃어대던 술집 주인은 그의 등장에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물론입니다, 군주님. 분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이 소녀는 어찌할까요?

네티아는 두려움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으로 하얀 가면의 거대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지옥에서 군주는 곧 법이었고, 그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 타버린 담뱃재를 털어내듯 네티아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눈에 거슬리는군.

네 과거 따위엔 관심 없다. 허나 지금 네 나약함은 역겹기 짝이 없군.

내 영지에 폐물을 둘 생각은 없다. 끌어내라.

아악!

네티아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한파엘이 묵인하자, 어린 악마 몇이 유리병을 들고 다가왔고, 그중 하나가 사악하게 웃으며 네티아의 머리를 내리쳤다.

어린 악마들

꺼져! 다시는 눈에 띄지 마!

쾅! 뒤통수를 강타하는 고통과 함께, 네티아는 어린 악마들에게 붙들려 한파엘의 영지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고난이 넘치는 지옥에서 그나마 편리한 점이 있다면, 군주가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눈엣가시를 순식간에 영지 밖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티아는 꼴사납게 내던져졌지만, 개의치 않는 듯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숲에서 일어섰다.

한파엘의 영지에서도... 날 받아주지 않는구나.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지...

까하하! 이 꼬맹이 좀 봐라, 어디가 악마 같다는 거냐!

나무 위에서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티아가 고개를 들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검은 새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지옥의 법칙은 약육강식이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비굴하게 굴어서야, 어떻게 남에게 존중받길 바라나?

차라리 지상으로 돌아가서 천사 놈들한테 머리나 물어뜯기지 그래? 그러면 네 그 불쌍한 머리가 좀 맑아질지도 모르지!

처음 보는 까마귀는 쉴 새 없이 신랄하게 지껄여댔지만, 네티아는 그 말속에서 다른 의미를 포착했다.

한파엘의 영지 안에서 일어난 일을 봤어?

하하, 멍청하긴. 난 "천리안"이라 불리는 몰리간이다. 이까짓 지옥 바닥에서 내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몰리간이라 불리는 까마귀 악마가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나도 한때는 잘나가는 악마의 영주였어. 근데 한파엘, 그 비둘기 같은 놈이 비겁한 수를 써서 날 끌어내리고 이 숲에 처박아 버렸지.

그 후로 난 여기서, 그 자식이 매일 누구와 원한을 쌓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을 마친 몰리간은 날갯짓으로 네티아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네 판결문은 읽어봤다. 다수 살해라, 보통 놈이 저지를 죄는 아니지. 다른 놈들은 널 우습게 봤을지 몰라도, 난 알아. 넌 타고난 복수자라는 걸.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아무런 수단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어. 널 무시한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지 않나?

나한테 뭘 원하지?

뭘까? 네게 세상을 뒤흔들 힘이라도 있나? 아니면 대단한 명성이라도? 웃기지 마. 난 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마음에 든 거야.

난 한파엘이 죽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처럼 보잘것없는 꼬마라면, 그 비둘기 같은 놈도 경계를 풀고 방심하겠지. 그렇게 몰래 접근하는 거야.

하지만 실패하면, 넌 내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겠지. 난 그저 쓰기 좋은 체스 말일 뿐이니까.

소녀의 지적에, 몰리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당연하지! 이게 바로 악마의 방식이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대놓고 이용하는 거야. 바닥에 주저앉아 누가 자비를 베풀어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이 정도 위험도 감수 못 하겠다면, 평생 구석에 처박혀서 유리병으로 머리나 얻어맞는 화풀이 인형으로 살든가!

하지만 약속하지. 네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이제 이 지옥 바닥에서 누구도 우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다.

...

순간, 수많은 장면이 네티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친구들 앞에서 조심스레 "꿈"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내던 모습, 어머니가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순간, 천사에게 끌려 심판정에 섰을 때 보았던 거대한 천칭... 모든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과거의 모든 선택이 차가운 올가미가 되어 소녀의 목을 조여왔다.

이러면 내가... 정말 "악마"가 되는 걸까?

네티아는 나지막이 마지막 질문을 내뱉었다.

그건 네가 정하는 거다. 난 그저 네가 바라는 모습으로 이끌어줄 뿐이야.

좋아.

소녀는 결심을 굳히고 까마귀를 품에 안았다.

몰리간... 네 힘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줘.

이제 이 나약함을 떨쳐내고, 완전히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거야.

아주 좋아, 마침 그 말을 기다렸거든.

까마귀의 몸에서 갑자기 찬란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네티아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불꽃이 그녀의 가슴 속 텅 빈 구멍을 채우며, 몸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듯했다.

내 선물을 받아라! 악마에겐 심장이 없지. 네 텅 빈 가슴이야말로 마력을 담기에 완벽한 그릇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유성처럼, 맹렬하게 불타오르며 하늘의 절반을 밝혔다.

네티아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 위로 기이한 룬이 서서히 떠올랐다. 마치 검은 넝쿨이 몸속에 뿌리내려 빠르게 가지를 뻗는 듯했다.

몰리간, 이게... 뭐야?

네티아는 곧 마주할 미지의 힘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미 물러설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이건 작은 마법진일 뿐이야. 한 번 쓰면 영원히 사라지니, 평생 이 흉한 자국을 달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돼.

"침식"은 계속되었다. 네티아의 몸은 점차 악마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모습으로 빚어지고 있었다.

이 위대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라. 지금이 바로 네가 "악마의 영주"로 거듭나는 시작점이니까.

그 말은 크지 않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네티아의 영혼을 두드려 깊고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몰리간

네티아, 너는 내 도움으로 진정한 악마가 될 것이다. 고통은 멈추지 않고 재앙 또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네 앞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고통과, 결코 멈추지 않을 악의뿐이다.

그리고 난 너를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너는 이 모든 상처를 몇 번이고 넘어서고, 운명이 내리는 모든 시련을 이겨낼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너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고난 그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파엘의 영지

수개월 후

수개월 후 한파엘의 영지

밤낮없이 소란한 술집은 여전히 귀가 먹먹한 웃음소리로 들끓었다. 악마들은 술을 퍼마시며 저마다의 욕망과 환락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군주 한파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부하들이 바친 영혼을 세고 있었다.

아흔아홉... 백.

마지막 "영혼의 병"이 나무 상자 속으로 던져졌다. 한파엘은 수많은 피로 얼룩진 생명을 마치 땔감을 던져 넣듯 무심하게 다루었다.

목표를 달성한 것을 확인하자, 한파엘은 팔을 번쩍 들어 외쳤다.

동포들이여, 환호하라! 성당은 우리가 생사의 법칙을 어기고 영혼을 거두는 것을 금했지만, 마침내 그 철칙을 속일 방법을 찾아냈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 심어둔 "악마 광신자"들이 제 역할을 해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신분으로 위장해 재앙을 퍼뜨릴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가 직접 손쓰지 않아도, 저 인간들은 모두 우리가 기르는 양 떼가 될 것이다!

한파엘 영주님 만세!!!

굉장해, 바로 이거야! 수 세기 동안 신선한 영혼을 맛보지 못해 목구멍이 타들어 갈 지경이라고!

먹고 싶다, 먹고 싶어! 한파엘 영주님, 어서 "영혼의 병"을 내려주십시오!

피를 끓게 하는 소식에 악마들이 들끓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파엘의 지혜와 결단력을 소리 높여 찬양했다.

몇천 년이었나? 아니면 몇만 년이었나? 우리 악마들은 지고천이 세운 규칙에 얽매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반격의 기회가 왔다!

인간 세계의 위장자들이 있으니, 천사들은 두 번 다시 우리의 꼬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저들의 신앙을 잠식하여, 인간 세계를 우리의 목장으로 만들 것이다!

나, 한파엘은 이 자리에서 악마의 영주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너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반드시 너희 손에 쥐여주겠다!

흥, 당당하신 악마의 영주께서 이제 부하들을 구슬리려 거짓말까지 하는 신세가 되셨나?

술집 문이 열리자, 눈보라를 뒤집어쓴 네티아가 안으로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냐, 감히 한파엘 영주님을 의심하다니!

그 어린 악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보이지 않는 기압에 으깨진 토마토처럼 터져 버렸다. 붉은 피가 벽 한쪽을 흥건히 적셨다.

...!!

잡음은 사라졌으니, 계속 얘기를 나눌까? 한파엘 영주?

네티아는 충격에 얼어붙은 악마들을 아랑곳 않고, 한파엘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어디서 굴러먹던 꼬맹이냐? 감히 내 영지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고작 몇 달 지났다고, 벌써 내 얼굴을 잊으셨지?

소녀는 어깨에 쌓인 서리를 털어내며, "단아하고 기품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네티아. 오늘 너희에게 끔찍한 진실 하나를 알려주러 왔다. 한파엘이 말하는 "인간의 손을 빌려 영혼을 수확한다"는 얘기, 전부 거짓말이다.

그의 진짜 목적은 성당과 결탁해 "악마가 율법을 어긴다"는 증거를 만들고, 그걸 빌미로 성당이 지옥을 침공하게 하여 "죽음의 군주"를 해치려는 것이다!

그 말에 술집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진짜야? 천계와 전쟁이라니... 난 싫어...

어이, 나 저 애 알아... 전에 우리가 쫓아냈던 그 꼬마잖아...

그들은 마침내 눈앞의 소녀가 과거 비참하게 쫓겨났던 "네티아"임을 알아봤다. 불과 몇 달 만에 "상급 악마"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는 그녀가 비범한 자질을 지녔거나, 다른 악마의 영주의 총애를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의 영주는 한파엘의 죄를 알기에, 이 소녀를 집행자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 고발은 따져볼 가치가 있었다.

오? 누가 시켰는지, 무슨 이득을 챙겼기에 이런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총알받이로 쓰이는 체스 말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 들어 본 적 있나?

네티아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파엘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그녀의 고발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지옥의 규칙은 알겠지. 만약 네가 내 손에 패하고, 아무도 널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나는 네 영혼을 먹어 치울 것이다.

꼬마야, 묻겠다. 감히 "진리의 입"의 시험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

못할 게 뭐가 있겠어? 오늘 당신의 비열한 거짓말을 만천하에 폭로해 줄 테니.

하지만 반대로, 지옥의 규칙에 따라 악마의 영주가 약자에게 패배하면, 그의 소원 하나를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데, 한파엘, 감당할 수 있겠어?

바라던 바다.

그럼 한파엘, 죽음의 군주의 마법의 펫이 이 심판을 증명할 수 있도록, "가르먼"을 소환하지.

"진리의 입"은 죽음의 군주가 창조한, 오직 악마의 영주만이 쓸 수 있는 마법진이다. 이 마법진을 통해 소환된 "가르먼"은 혀로 거짓을 감별하고, 거짓을 고한 자의 팔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모든 악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파엘이 "진리의 입"을 소환했다. 네티아는 지옥견의 거대한 입속으로 팔을 집어넣으며, 엄숙한 진위 판별 의식을 시작했다.

누가 거짓을 고하든, 오늘 둘 중 하나는 지옥에서 명예가 실추될 터였다.

꼬마야,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해 보아라.

맹세컨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다.

은발의 소녀는 악마견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팔을 뻗은 채, 소리 높여 외쳤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 내 가족은 짐승만도 못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나도 똑같이 피에는 피로 갚아줬을 뿐인데, 어리석은 심판관들은 저를 지옥으로 보냈지.

내 가족을 죽인 자가 누구든, 난 그 개돼지 같은 놈들을 증오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심판관들 역시 증오한다. 그리고 성당의 그 망할 놈들을 영원히 저주하고 경멸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증언에서 내가 성당을 조금이라도 편들거나 인간 세계에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단 말이다!

그녀의 발언은 악마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의로 악마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성당의 판결이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첫 발언을 마친 "네티아"는 목을 가다듬고, 결정적인 증언을 이어 나갔다.

몇 년 전, 한 이름 없는 마을에 악마토벌대가 들이닥쳐 그곳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의 어머니를 죽였고, 난 그들을 죽였지. 그 대가로 난 성당에 의해 극형을 선고받고 지옥에 떨어져 악마가 되었어.

그들은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이렇게 말했었지. "이것들이 진짜 악마 광신자인지는 상관없다.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예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근에야 깨달았어.

이 모든 것이 한파엘의 음모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천사 무리와 결탁하여, "악마가 율법을 어긴다"는 허위 증거를 조작해, 지옥을 침공할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해!

헛소리! "가르먼", 이 모든 건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더 들을 것 없다. 당장 저 계집의 오른팔을 삼켜라!

터무니없는 "증언"에 분노로 핏발이 선 한파엘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죽음의 군주의 애견은 나른하게 하품만 할 뿐, 명령을 따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네티아의 주장에 암묵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셈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가르먼", 왜 반응이 없는 거냐?

한파엘은 이성을 잃고 지옥견에게 소리쳤지만, 죽음의 군주의 애견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 한파엘은 모든 것이 네티아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았다. 군중 앞에서 "진리의 입"을 소환하도록 내몰린 이 상황이야말로, 그녀가 파놓은 치밀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자, 내 증언은 여기까지다. "가르먼"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어.

소녀는 천천히 지옥견의 입에서 팔을 빼냈다. 하얀 손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마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듯 깨끗했다.

술집의 악마들도 한파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무언의 심문과 동요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파엘, 이제 당신의 차례야. "진리의 입"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해봐.

"나는 악마 광신자를 조직하는 일에서 어떠한 사적인 이익도 취하지 않았으며, 나의 모든 언행은 오직 수많은 악마와 지옥을 위함이었다"라고 말해.

어서 말해봐, 어렵지 않잖아.

...

한파엘은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의 이례적인 침묵 속에서 어딘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어이, 영주님 말이야... 설마...

글쎄. 나도 군주님이 정말 성당과 내통했을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저 소녀가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건... "인간들을 광신자로 위장시키는 데"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럼 왜 그렇게 뻔뻔하게 "율법을 뒤엎겠다"고 말한 거야...?

한파엘은 차마 그 증언을 할 수 없었다. 그의 금고를 가득 채운 금화와 나무 상자 속 "영혼의 병"들이야말로, 소수의 인간을 악마 광신자로 만든 진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마 광신자"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일부 "영혼의 병"을 하급 악마들에게 나눠준 것 또한, 자신은 막후에 숨으려는 치밀한 계산의 일부였다.

상대를 너무 얕보았다. 눈앞의 소녀가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진리의 입"마저 속일 계책을 품고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이번 승부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굴욕적인 패배로 막을 내렸다.

내가 졌다... 꼬마야. 규칙은 지키겠다.

남은 체면이라도 지키려는 듯, 한파엘은 자신의 손을 "진리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 오만함에 패했음을 인정한다. 탐욕이 나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지만, 죽음의 군주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다. 지옥을 배반하려는 마음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가르먼"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마치 자신의 탐욕에 잠식당한 악마의 영주의 마지막 참회를 지켜보는 듯했다.

말해라, 무슨 소원을 빌겠느냐?

...

좋아. 이 룬만 있으면 내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네 성대를 빌려 직접 말할 수 있지.

이건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고대의 비급이니, 실수로라도 함부로 쓰지 않게 조심해라!

내 성대를 빌려 말한다고? 이해가 안 돼... 그게 무슨 소용이야?

네티아는 손바닥의 "흉한" 검은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몰리간은 "바보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너희 인간들은 서고에 안 가나? 고작 몇 세기 지났다고 "진리의 입" 전설조차 모르는 거냐?

아니, 오히려 좋아. 모두가 이 비급의 존재를 알면 곤란하니까.

아무튼 닥치고 따라와. 앞으로 몇 달, 넌 "대악마"가 되기 위해 꽤 고생하게 될 거야.

가녀린 소녀는 손의 침을 천천히 닦아내고, 패배한 악마의 영주에게 연민 어린 시선을 보냈다.

네 부하들을 데리고 이 차원에서 꺼져라. 아케론의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변방에서 영원히 떠돌아라.

네티아는 검지를 뻗어 핏빛 하늘 저 너머를 가리켰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엔 네 영주 자리도, 목숨도, 보장 못 한다.

그날 밤 이후, 또다시 긴 세월이 흘렀다. 네티아는 마침내 무명의 악마에서 벗어나, 이름을 떨치는 대마녀로 성장했다.

네티아는 인간 시절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심장마저 잃었지만, 모든 악마가 우러러보는 만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지옥의 백성들은 네티아를 언급할 때면, 두려움에 떨며 그녀를 "타고난 악마", "태어날 때부터 꿈이 없는 마녀"라 불렀다.

네티아는 그 칭호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꺼이 자신의 왕관으로 받아들였다.

대재앙 1년 전, 화염성월 4일. 달이 높이 뜬 그날 밤, 영혼 수확자 네티아는 거대한 낫을 든 채 창문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서 한 인간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 인간은 그녀의 암살 대상이었다. 늘 그랬듯 침대맡에서 가볍게 낫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꿈속을 헤매는 영혼을 손쉽게 거둘 수 있었다.

인간의 꿈은 천차만별이었으나, 결국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꿈속에서 그 허약한 신념을 무너뜨리면, 대부분 제 발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네티아는 죽음의 군주가 내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레이 레이븐... 강철 군단의 총사령관.

그녀가 읊조리는 이름에는 망설임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어째서... 너의 꿈은 꽃바다인 거지?

그녀는 인간의 꿈속에서, 어머니가 몇 번이고 들려주던 풍경을 보았다.

그 꿈속에서는 풀이 무성하고, 꽃이 만발했으며, 꽃잎은 비단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꽃가지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인간의 뒷모습이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네티아는 한 걸음 다가가 말을 걸려다, 이내 멈춰 섰다.

설령 말을 건넨다 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티아는 인간을 "이해"한 적도, 그들과 직접 마주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어떤 신분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몸을 돌렸고, 올 때처럼 소리 없이 그 꿈에서 걸어 나왔다.

단 한 번도 꿈을 꿔본 적 없던 소녀는, 마침내 한 인간의 꿈속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그려왔던 거짓된 풍경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 거짓이 현실이 된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결코 품어서는 안 될 의문 하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내가... 너와 같은 "인간"이 되려 한다면...

나도 이런 장면을 꿈꿀 수 있을까?

악마의 몸을 지닌 소녀의 마음속에 다시금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다. 그녀는 낫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창문을 짚은 채 안에 있는 인간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너와 같은 "인간"이 되도록 노력할게.

그레이 레이븐, 이제부터 네가 하는 모든 걸 따라 해보겠어.

그러면 언젠가... 같은 꿈속에서 만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