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진동 속에서, 성벽 위로 하얀 먼지가 흩날렸다.
맹렬한 불길과 유황, 그리고 피비린내가 공기 속에 뒤섞여, 천사, 산송장, 악마, 인간을 비롯한 전장의 모든 존재가 고통에 휩싸였다.
천사뿐만 아니라 산송장도 있습니다. 게다가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정보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만으로는 이 보루를 공략할 수 없습니다.
무너진 성벽의 틈새에 "박혀" 있던 살덩어리들이 강철의 속박을 찢어내고, 마치 깨어난 구더기처럼 인간을 향해 꿈틀대며 기어갔다.
이 보루는 다음 전투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거점이니, 어떻게든 점령해야 한다! 인간이 성당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는 다 이번 전투에 달려있다! 자, 모두 나를 따라라!
대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려는 순간, 누군가 손을 들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의 뒤편에는 새 부리형 가면을 쓴 청년과, 월산을 든 여성이 있었다.
당신들은...
알겠습니다. 그레이 레이븐 님~
응. 나한테 맡겨.
릴리스는 그레이 레이븐의 명령에 따라 천사 무리가 있는 곳으로 곧장 뛰어들었고, 반즈는 망자들의 대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생명체의 기운에 자극을 받았는지, 망자의 썩어버린 눈구멍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목구멍에서 쉬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기이한 각도로 비튼 채 일행을 향해 몰려들었다.
720번 듀본, 용감한 노예. 721번 아카디, 친구를 배신한 죄인...
반즈는 피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망자들에게 용서와 영원한 안식을 기원해 주었다.
등불 속 불꽃이 순간 활활 타올랐다. 그것은 길들여지면서도, 정확한 죽음이었다.
777번 불쌍한 이름 없는 자, 운명에 휘둘린 자, 너희를 용서하겠어. 잘 자라.
숫자는 계속 늘어났으며, 쓰러진 산송장들이 겹겹이 쌓여 중앙 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살... 살!
너희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야?
눈앞의 천사를 베어버린 "기근"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성벽을 향해 카드 한 장을 날렸다.
윽... 죽어...!
카드가 박힌 공간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성벽에 달라붙어 있던 기괴한 "천사" 몇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천사 세 마리가 높은 곳에서 내리꽂히듯 날아왔다. 갈라진 입에서 침을 흘린 채, 연약해 보이는 릴리스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었다.
피와 살, 학살이다!
인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릴리스는 허공에 우산 끝으로 보이지 않는 은빛 선을 세 갈래 그어냈다. 그 선은 정확히 맨 앞의 천사 머리 위로 내려꽂혔다.
둔탁한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지자, 천사의 몸속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몸체가 공중에서 순간 굳어지더니, 잘 익은 과일처럼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피와 살, 죽어라!
응?
옆에 있는 또 다른 천사는 동료의 죽음에 격분한 듯, 눈앞의 목표를 포기하고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해 왔다. 거대한 몸뚱이가 일으킨 바람은 숨이 막힐 만큼 역겨웠다.
펑!
총성이 울리자, 릴리스를 향해 달려들던 천사가 그대로 쓰러졌다. 총성이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전쟁의 기사라 불리는 키 큰 남성이 무너진 성벽 틈에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강철 군단이 있었다.
미안, 근처에 대피시켜야 할 평민들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알겠어. 터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진압 작전 시작해!
알겠습니다. 와타나베 님!
모두 나를 따라 공격하라!
그레이 레이븐 님,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기근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인간을 재촉했다.
그렇게 그레이 레이븐은 기사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탑으로 향했다.
전장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감지한 천사들은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항군의 심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듯, 그레이 레이븐을 향해 몰려들었다.
피의 맹세자! 피와 살!
천사들은 계속해서 외치며 서로의 몸을 포개어 쌓아갔고, 점차 또 다른 하얀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인 같기도 하고,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가시 같기도 했다.
이... 이게 뭐야?!
저리 꺼져!
붉은 섬광과 함께, 죽음의 기사가 창을 높이 들어 올려 천사들의 중합체를 단번에 부숴버렸다.
벌레 같은 것들. 길 막지 마!
악마 손에 든 칼날과 불꽃은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이 되어, 그레이 레이븐과 천사 무리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죽음의 기사 몸속에서 끝없이 치솟는 통증은 더 이상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정신을 또렷이 차리고, 흥분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레이 레이븐, 탑 아래의 놈들은 다 해치웠어!
어떤 적이 달려 들어오든,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어떻든, 그레이 레이븐은 그저 탑과 저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향해 나아갔다.
"시체의 산과 피바다"로 이루어진 긴 계단을 지나, 그레이 레이븐은 보루 중앙에 있는 탑 정상에 도착했다. 아래에서 들려오던 전투 소리도 점점 잦아들었고, 머지않아 이 전투는 끝을 맞이할 것 같았다.
오셨군요. 그레이 레이븐 님.
탑 정상은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릴리스는 회백색 깃발을 꺼내 그레이 레이븐에게 건넸다.
당신만의 명예와 승리를 만끽하시죠.
<size=40>여기까지 걸어온 길은 죄악과 선혈로 뒤덮였고, 한탄과 분노로 가득했다.</size>
<size=40>그레이 레이븐은 이 깃발로 선언할 것이고, 인간 또한 이 깃발로 선언할 것이다.</size>
<size=40>마지막 항거가 곧 시작될 것이다. 영겁의 대낮을 향해 던질 더러운 피와 심연만큼 깊은 집념을 준비하라.</size>
<size=40>그리고 외쳐라, 찾아내라.——</size>
자유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