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우주 연대기 / 침묵의 계시록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유리병 속의 눈

>

짙은 안개가 깔리자, 울창한 숲이 흰 연무 속에 잠겼다.

어느 고요한 밤, 백마 마을 주민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교외 숲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희미한 안개 속, 보따리를 품에 꼭 안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목을 움츠린 채 숲길을 내달렸다. 곧 거대한 나무 뒤로 몸을 숨기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안전하겠지?

값비싼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 하하...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데, 그 얼빠진 천사들이 따라올 리 없어.

잘 있어, 빈털터리들아. 이제 맘몬의 보물은 다 우리 거야!

여자는 크게 웃으며 보따리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표면에 정교한 해골 문양이 새겨진 금화는, 희미한 빛 속에서도 눈부신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기야, 보물창고 문을 여는 암호문... 기억하고 있지?

쉿.

여성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손으로 남성의 입을 막았다.

조심해.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몰라. 그 얘기는 나중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하얀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가슴속 피를 모조리 빨아들인 발톱이 뽑혀 나오자, 나무줄기에 더러운 핏자국이 튀었다. 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보물을… 훔친 자… 죽인다…

여자가 쓰러지자, 온몸이 창백한 천사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비웃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호화로운 차림의 남성

아!!!

남자는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죽은 아내의 손에서 금화를 낚아채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숲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사이, 고급 옷감은 나뭇가지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정성스레 마감된 코트도 피로 얼룩져, 순식간에 걸레 조각처럼 변했다.

숲속에는 천사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곧 잡힐 거라는 걸 직감했다.

누, 누가 좀 살려줘! 여기서 죽긴 싫어!

자비로운 추기경이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것일까. 앞쪽 멀지 않은 곳에서 날씬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구세주라도 본 것마냥,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 도와주세요! 천사가 저를 쫓아오고 있어요!

돈 드릴게요. 저 돈 많아요! 그냥 도와달라는 게 아닙니다, 확실히 보답할게요!

남성은 조건과 부탁을 한꺼번에 쏟아낸 후에야, 고개를 들어 상대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화려한 머리 장식 아래 반쯤 가려진 얼굴엔 알 수 없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마치 상품의 가치를 따져보듯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여성은 한밤중임에도 월산을 들고 있었고, 남성의 간절한 외침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산책 중 가벼운 담소를 나누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 그럼, 제게 어떤 조건을 제시할 건가요?

남성은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려는 듯, 더 많은 조건을 급하게 쏟아냈다.

저는 백마 마을 세무관입니다. 마을 재산 전부가 제 손에 달려 있어요!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양녀로 들이면 어떨까요? 그럼 나중에 세무관 자리를 물려받으실 수도 있어요!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왜,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이건 엄청난 기회예요! 만약 제가 죽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남성의 마지막 말에서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협상이라기보다는 벼랑 끝에 몰린 자의 위협에 가까웠다.

하지만 키 큰 여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숙여, 남성의 움켜쥔 손에서 피 묻은 금화를 강제로 빼앗아 갔다.

괜찮아요. 이미 더 좋은 걸 얻었거든요.

푹...

그새 따라붙은 천사가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고, 끈적한 피가 솟구쳤다.

그제야 여자는 월산을 들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천사의 썩은 머리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던 남자는 분노에 찬 눈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구해줄 수 있었으면서, 왜 자기를 버렸냐고 묻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그저,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걸 똑같이 했을 뿐인데요.

날씬한 형체는 난장판이 된 주변과는 무관하다는 듯, 월산을 우아하게 돌리며 말했다.

아버지, 절 잊으신 건 아니죠? 저예요. 예전에 길가에 버려 미끼로 삼으려 했지만, 끝내 죽지 못한 그 "엘리너" 말이에요.

!!

죽기 직전, 남자는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건 피뿐이었다.

남성은 십여 년 전, 아내와 함께 분노한 마을 주민들에게 쫓겨 허겁지겁 숲으로 도망쳤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 그들에겐 겨우 일곱 살 된 딸이 있었다. 남자는 아내와 상의 끝에, 마을 주민들이 어린아이에게까지는 손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딸을 미끼 삼아 길가에 남겨두었다.

그 뒤로 십여 년. 가끔 그 아이가 떠오르긴 했지만, 재난 이후 혼란스러운 잿빛 변방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러니 아버지, 이제 더는 마음 쓸 필요 없어요. "엘리너"는 당신들이 남긴 "선물"을 잘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당신들보다 훨씬 더 잘 살아갈 거예요.

엘리너는 금화 위에 묻은 핏자국을 꼼꼼히 닦아낸 뒤 품에 간직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끝없는 악몽을 안겨주던 이 숲을 경쾌한 발걸음으로 벗어났다.

이번만큼은, 그녀가 승자였다.

걷는 내내 엘리너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불러주던 자장가였다.

{226|153|170} 마왕, 이건 자업자득이야~ 엄마, 날 지켜봐 줘~ 난 지금 지옥 철도를 달리고 있어.{226|153|170}

빙글빙글 돌며 흩날리는 눈송이가 월산 위로 내려앉았다. 곧, 희미한 한기가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어머... 눈이 오네.

엘리너는 손을 들어 새하얀 눈송이를 받아냈다. 하지만 눈송이는 닿자마자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까먹을 뻔했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였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머나먼 하늘을 향해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아버지. 메리 크리스마스.

럭키 38 유흥 도시

수년 전

수년 전 럭키 38 유흥 도시

유흥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란스러웠다. 카드 테이블 주변은 항상 인파로 가득 차 있어서 어깨 부딪치는 일은 다반사였고, 서버들은 손님들의 끝없는 요구를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어린 엘리너는 샴페인과 안주가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사람들 틈을 조심스레 지나갔다. 그러곤 재빠르게 몸을 돌려 호화로운 룸 안으로 들어섰다.

트라우트 님, 주문하신 "은하의 눈물"입니다.

여기에 놔.

트라우트는 손에 든 카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양장 차림의 소녀는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님이 더 이상 지시할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조용히 방을 나가려 했다.

꼬르륵.

진한 음식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순간 엘리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에서 울린 소리가 트라우트의 시선을 끌었다.

...

손님의 시선을 느낀 엘리너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뺨을 모자챙 아래로 숨긴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트라우트 님…

괜찮아. 이 유흥 도시는 서버 대우가 썩 좋지 않나 보군.

뜻밖에도 손님은 그녀의 실례를 너그럽게 넘기고는, 시선을 맞은편 딜러에게로 돌렸다.

트라우트 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저도 당혹스럽네요. 저희 유흥 도시는 모든 직원을 존중하며,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고 있습니다.

엘리너, 오늘 근무 들어오기 전에 밥 안 먹었어?

노련한 딜러는 소녀에게 슬쩍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그게...

엘리너는 당황한 기색으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답을 찾으려는 듯, 짙은 갈색 카펫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명할 필요 없어.

트라우트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카드를 모은 후, 능숙하게 탑을 쌓아 올렸다.

카드 순서는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큰 순서대로, Jupiter, Metis, Themis...

소녀는 잔뜩 긴장했지만, 막힘없이 용어들을 술술 읊었다.

남자는 진귀한 광경을 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교육받은 적 있나?

...

엘리너는 자신이 다소 말이 많았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질문조차 대답할 수 없는 건가? 참... 이 유흥 도시는 규칙이 많군.

위축된 서버에게서 더는 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여유롭게 앉아 있는 딜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판은 이 서버를 임시 플레이어로 참여시키고 싶은데, 괜찮지?

물론입니다. 다만, 트라우트 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어졌어.

섞던 카드를 멈춘 트라우트는 정돈된 패를 소녀 앞으로 내밀었다.

어때, 해볼래?

트라우트 님, 저는...

맞은편 딜러의 시선이 엘리너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하지만 엘리너는 트라우트의 제안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트라우트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들었다.

…네, 해보고 싶습니다.

그날 밤이, 훗날 잿빛 변방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도박꾼 릴리스"의 이야기의 시작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유흥 도시의 성주가 길에서 데려온 거지, 그 "엘리너"는 단 한 번의 가르침만으로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 주었다.

불과 몇 주 만에, 엘리너는 뛰어난 재능으로 유흥 도시의 견고한 철칙을 뚫고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아주 낮은 확률 속에서, 엘리너는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행운아가 되었다.

한때 그녀를 무시하며 일부러 음식을 빼앗아 가던 서버들조차 이제는 달라졌다.

카드 판이 열릴 때마다 엘리너 곁에 둘러앉아, 그녀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ALL IN.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엘리너는 손에 쥔 칩을 다시 한번 전부 밀어 넣었다. 그러자 주변의 서버들까지 흥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엘리너를 따라갈래. 나도 올인!

나도, 나도!

잠시 후 카드가 공개되자, 테이블 위에는 잘 익은 열매처럼 빛나는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놓여 있었다.

정말 대단해, 엘리너! 38 유흥 도시의 진짜 행운의 여신은 바로 너야!

군중 속에서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그마한 소녀는 서버들의 품에 안겨 뽀뽀 세례를 받았다. 오늘만큼은 진짜 행운의 여신 티케가 내려온다 해도, 이보다 성대한 환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오늘은 먼저 실례할게요.

카드 테이블 맞은편 딜러의 불쾌한 기색을 읽은 엘리너는, 조심스레 칩을 챙겨 자리를 비울 뜻을 전했다.

가지 마, 엘리너! 여기 있는 우리, 다 너만 믿고 있단 말이야!

맞아, 맞아. 좀만 더 있다가 가!

죄송해요. 정말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엘리너는 말할 때도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선배들의 심기를 건드려, 어렵게 쌓아 올린 호감이 말실수 하나로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근무 시간을 놓치면, 반장님께 혼나요…

아, 그럼 어서 가. 이러다 야간 근무 늦겠다. 우리도 네가 혼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서버들이 마침내 허락해 주자, 엘리너는 사면을 받은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던 딜러는 그녀가 떠나자 무표정하게 카드를 치웠다. 그리고 테이블 밑의 숨겨진 공간에서 특수 잉크로 처리된 새 카드를 꺼내어, 조용히 다시 테이블 위에 펼쳤다.

...엘리너, 요즘 너무 우쭐대는 것 같아.

불이 꺼진 로비에 지쳐 앉아 있던 딜러는 정성스레 말아 둔 향초에 불을 붙였다.

엘리너와 그 추종자들이 챙긴 돈은 전부 럭키 38 유흥 도시의 재산이야. 성주가 그냥 두고 보진 않을걸.

근데 그거 다 카드 테이블에서 정당하게 이겨서 딴 돈 아니야?

풋, 내가 이래서 너처럼 칼과 총만 휘두르는 애들을 아마추어라고 하는 거야.

길고 가느다란 손끝이 향초를 톡 튕기자, 바닐라 향이 담긴 재가 유리 재떨이 위로 떨어졌다.

럭키 38 유흥 도시에서는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카드 테이블을 열 수 있어. 왜인지 알아?

바보 같은 녀석, 그건 다 성주가 직원들한테 준 보수가 끝없는 게임으로 흘러 들어가길 바라서 그런 거야.

결국,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손님들만 시중들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뭐 "벌 만큼 벌고, 카드 테이블에서 떠난다."라는 말은 다 거짓이었어?

쉿.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마.

전에 트라우트 님께서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카드 기술을 전수해, 새로운 창문을 열어주셨지.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달콤한 선물이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어.

언젠가 이 건물이 모두 무너지는 날이 오면, 엘리너는 차라리 그 창문을 보지 않은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유리 재떨이 속 재가 완전히 타들어 가자, 딜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쳐 두었던 외투를 집어 걸쳤다.

머지않아 성주가 엘리너를 눈여겨보실 거야. 그땐, "행운"의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쿵.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서 엘리너는 문밖으로 밀려나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졌다.

선포한다. 하급 서버 엘리너는 내부 절도 및 카드 게임 중 부정행위 혐의로, 전 재산을 몰수하고 럭키 38 유흥 도시에서 영구적으로 추방한다.

아니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카드 테이블에서 정정당당하게 이겨서 얻은 돈이에요! 규칙을 어긴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흩날리는 하얀 눈 속에서, 그녀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오는 건 서버들의 낮은 속삭임뿐이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카드 테이블에서 갑자기 무슨 수로 그렇게 큰돈을 따나 했더니, 다 속임수였네.

퉤. 주워 온 기생충 주제에 감히 내부 절도를 하다니. 개를 주워 왔어도 고맙다고 꼬리를 흔들었겠다.

아니에요. 전 진짜 그런 적 없어요.

점점 힘을 잃어가는 목소리 속에서, 엘리너는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이 이곳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 심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거구의 사내가 다가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더니, 낮게 속삭였다.

적어도 체면은 지킬 수 있을 때 떠나.

...

유흥 도시 밖은 여전히 밝은 대낮이었지만, 매서운 추위가 온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엘리너는 눈 내리는 길 위를 헤매며, 몸을 뉠 수 있는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모두 럭키 38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차마 억누르지 못한 욕망과 흥분이 떠올라 있었고, 도시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마치 자신이 곧 다음 행운의 주인공이 될 것처럼.

부… 부인, 혹시 럭키 38 유흥 도시로 가시는 길인가요?

엘리너는 용기를 내어, 길가에서 비교적 온화해 보이는 중년 여성을 붙잡았다.

맞아요. 옷차림을 보니, 유흥 도시에서 일하는 서버인가 보네요?

맞, 맞습니다. 부인.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전 유흥 도시 안에 있는 게임 규칙은 전부 알고 있어요. 어떻게 베팅해야 많은 돈을 딸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고요.

부인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했지만, 엘리너는 자신을 다잡으며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저는 부인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단지… 혹여나 이기시면… 약소하게나마 나눠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여인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엘리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요.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해 봅시다.

마침내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여인은 곧장 방향을 틀었고, 엘리너는 그녀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 허겁지겁 따라갔다. 두 사람은 굽이진 길을 돌아 마을 깊숙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고 습한 골목에는 곰팡이와 썩어가는 유기물 냄새로 가득했다. 처음 마주하는 이 낯선 세계에 엘리너는 두려움을 느꼈다.

저기, 부인...

그 순간, 지금까지 차분하고 상냥하던 여자가 돌변하더니, 엘리너를 발로 거세게 차 넘어뜨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 너, 유흥 도시 애들과 짜고 내가 부정행위를 하도록 유도해서 한몫 챙기려는 거잖아.

그런 뻔한 수법으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여자는 망설임 없이 엘리너를 밟아댔다. 입안에 피 맛이 번지고, 갈비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 아니에요. 오해예요!

엘리너는 팔을 들어 필사적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뾰족한 하이힐 굽은 계속해서 그녀의 등을 찍어댔다.

아직도 발뺌하네? 어린 게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내가 가만두지 않...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폭발음과 함께 날아든 탄환이 그녀의 머리를 토마토처럼 짓이겨 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 깊숙한 곳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산탄총을 들고 있던 그는 휘파람을 불며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빙고. 도시 밖에서 온 실한 먹잇감 하나에, 유흥 도시에서 길 잃은 꼬맹이 하나라.

건달은 공포로 얼어붙은 엘리너를 쳐다보지도 않고, 죽은 여자의 소지품을 뒤지며 맘몬 코인을 찾는 데만 몰두했다.

아, 겨우 이 정도야. 내 귀한 총알만 아깝게 됐네.

30초쯤 지나자, 건달은 유일한 전리품인 블랙카드 한 장을 손에 쥔 채 일어섰다. 그러고는 가기 전에 시체를 한 번 더 걷어찼다.

차림새가 번지르르하길래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신용 포인트로 도박이나 하는 거지였네.

잠시만요!!

참혹한 광경을 마주한 순간, 엘리너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인식이 무너져 내렸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에 이끌려 건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꼬마야, 내가 널 구하려고 총을 쏜 것 같아?

엘리너는 눈을 크게 떴다.

아, 근데 네 말 듣고 보니 그렇네. 너, 의외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건달이 주머니에서 낡은 통신기를 꺼내더니, 엘리너가 보는 앞에서 빨간색 전송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서쪽 거리에서 시체 하나 발견했는데요.

용의자요? 잘은 못 봤는데, 유흥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꼬마 같…

엘리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골목에서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발바닥은 타는 듯 아팠고,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뒤에서 쫓아왔다. 피비린내와 악취가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윽!

정신없이 달리던 그녀는 결국 넘어져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유흥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 꼬마다!

등 뒤에서 잡으러 오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엘리너는 상처를 볼 틈도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내달렸다.

군중

잡아라! 저 아이를 잡아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아무 관심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그중 한 치안관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불과 몇 초 사이, 엘리너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다른 남자 뒤에 숨었다. 그 순간 날아든 총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 뭐… ?

군중

꺅! 사람이 죽었어!!!

?

뜨거운 액체가 뺨에 튀자, 엘리너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계속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붉은 얼룩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엘리너는 본능적으로 사과했지만, 상대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진흙탕 위에 고꾸라졌다.

제... 제가 한 게...

하지만 "범인"의 변명 따윈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군중은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엘리너는 눈앞의 세상이 더럽고 시끄럽게만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자, 그녀는 부모와 헤어졌던 숲속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도, 엘리너는 이를 악물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중

골목 안으로 들어갔어요. 어서 쫓아요!

달리던 중, 엘리너는 시야가 점점 흐릿하고 촉촉해지는 걸 느꼈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닦아냈다.

피가... 아닌데?

어두운 골목 속,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내가 울고 있어...?

...왜?

엘리너는 부모에게 버려졌던 그날조차 울지 않았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왜...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엘리너는 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쏟았다. 지금껏 간신히 붙잡고 있던 감정의 끈이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오열했다.

흑…흑… 으아아아아아아——!!!

대체 왜! 지고천, 이 정도 벌로는 부족해?...

운명은 대체… 언제까지 날 이렇게 가지고 놀 작정이야!!!

가슴을 찢는 절규가 어두운 골목에 울려 퍼졌다.

눈발은 여전히 흩날리며 엘리너의 발자국과 핏자국을 덮어갔다. 차가운 눈만이 이 도시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댕...

멀지 않은 곳에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직한 울림이 도시 전체를 감쌌다.

매일 하는 기도가 시작됐고, 엘리너의 쉰 흐느낌은 종소리에 삼켜졌다.

잿빛 변방은 약육강식의 땅이다. 힘과 권세를 가진 자는 언제든 다시 카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지만, 약자는 올인해도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다.

배고픔에 지친 엘리너는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는, 이 숲의 약육강식 법칙에 대해 생각했다. 왜 나는 언제나 짓밟히기만 할까? 왜 내 몫은 매번 남들이 빼앗아 가는 걸까?

살게 놔두지 않으려는 거라면...

성당의 경문에 따르면, 눈은 지고천이 인간 세상에 내리는 심판이라 했다.

엘리너는 그 모든 심판이 자신을 향하도록,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다.

난 반드시 테이블 위에 올라설 거야. 그리고 그 누구보다 더 잘 살아갈 거야.

엘리너는 낮게 중얼거리며,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성당 카드 게임" 위

현재 시점

현재 시점 "성당 카드 게임" 위

딜러는 금빛으로 장식된 카드 테이블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화를 들어 올려, "연금의 진" 중앙에 올려놓았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 전리품은 외부의 그 어떤 간섭도 닿지 않는 이 진 속에 보관된다. 설령 지고천이 친히 내려온다 해도, 이 진을 풀 수 없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잿빛 변방의 사람들은 이 악마의 진법을 통해 도박의 공정성을 지켜왔다.

릴리스? 성당을 조롱하기 딱 좋은 가명이군.

카드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천사"는 이 도발적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라파엘 부인께서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계시는 건, 제가 가져온 "판돈"뿐이잖아요.

상대는 푹신한 방석에 몸을 기댄 채 샴페인 잔을 흔들며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이 대천사가 자신이 낸 제안을 결코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맞아. 네가 "맘몬의 보물창고" 열쇠를 가져왔으니, 지금처럼 맘몬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 상황에서는, 내 맞은편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이제 조건을 얘기해 봐. 뭘 원해.

많은 걸 바라진 않아요. 백마 마을을 제 아버지께 주셨다면, 전 그 다섯 배를 받고 싶네요.

흰 드레스를 입은 릴리스는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야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지역 전체의 세무사가 되고 싶습니다.

꿈은 크네.

라파엘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조건이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인지, 하찮은 것인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하지만 너도 성당 카드 게임의 규칙은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게임에서 지면, 영혼은 천사의 것이 된다."

릴리스는 신이 난 듯, 샴페인이 묻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전 패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랍니다.

라파엘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딜러가 "연금의 진"의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조건이 성립되면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대천사는 테이블 위에 나뉜 카드를 들어 무심히 훑어본 뒤 결정을 내렸다.

배팅.

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릴리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라파엘을 정면으로 몰아붙였다.

오, 억지로 강하게 나올 필요는 없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줄 거야.

라파엘 부인, 전 이런 게임을 일곱 살 때부터 해왔어요.

과장된 웃음을 터뜨린 릴리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잿빛 변방에서 저보다 뛰어난 카드 플레이어는 없어요.

그렇겠지. 명성이 자자한,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전설의 "도박꾼 릴리스"를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

라파엘 부인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이번 라운드의 승리자는 릴리스입니다.

게임 결과가 나오자, 릴리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 말이 맞죠?"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음 판.

라파엘 부인은 릴리스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판을 이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게임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몇 차례의 대결 끝에, 라파엘 부인과 릴리스의 손에는 마지막 카드 한 장씩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치 생사가 걸린 게임이 아니라 소소한 여흥이라도 즐기듯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 판이 시작되었고, 릴리스는 손에 든 카드를 가볍게 던지듯 펼치며 웃음을 흘렸다.

오호?

그녀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트 A가 손에 있었으니, 이보다 완벽한 패가 또 있을까.

죄송해요. 라파엘 부인, 제가 이겨버렸네요.

전리품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복부에서 낯선 격통이 밀려왔다. 릴리스는 숨을 삼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아랫배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릴리스는 카드를 든 자세 그대로, 총을 쏜 딜러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대천사가 약속을 뒤집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귀의 연금의 진은 지고천조차 풀 수 없는 결계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금화는 영영 꺼내지 못하게 된다.

전, 천사들이 "맘몬의 열쇠"를 더 원하는 줄 알았는데...

"맘몬의 열쇠"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 진 속에 들어 있는 건 애초부터 진짜가 아닌, 미리 준비해 둔 대체품이야.

사라지지 않은 화약 냄새 속에서 라파엘 부인은 천천히 일어나, 익숙한 금화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올렸다.

며칠 전 우연히 "어떤 경로"를 통해 맘몬의 마력이 깃든 대체품을 손에 넣게 됐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늘 네가 마침 찾아왔네?

연금의 진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금의 왕 술식까지는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나 봐.

감히 이런…!

릴리스의 아름다운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번졌다. 패배 때문은 아니었다. 신성한 카드 테이블에서조차 부정을 저지른 천사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성당 카드 게임 자체가 함정이었군요. 천사들은 스스로 정한 규칙조차 지키지 않습니까—!

너희 같은 인간들에게, 굳이 규칙을 지켜야 해?

라파엘 부인은 차갑게 반문하며 맘몬의 열쇠를 챙기고, 문가로 향했다.

부인은 모자챙을 살짝 당긴 뒤,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꼼짝도 못 하는 릴리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착각하지 마. 맘몬의 보물은 처음부터 성당의 것이었어. 넌 처음부터 나와 조건을 논할 자격조차 없었다고.

이...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인간이 그녀의 입을 거칠게 막아버렸다.

깔끔하게 처리해.

라파엘의 명령이 떨어지자, 날카로운 가위가 순식간에 릴리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딜러는 주인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아는 듯, 릴리스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피만 흘러나오고 아무런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윽!

하지만 릴리스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가슴 속 분노를 토해내려 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름 없는 들개처럼 어딘가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읍읍읍!

릴리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멀어져 가는 라파엘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가장 사악한 저주가 맴돌고 있었다.

으악!

릴리스가 딜러의 손바닥을 물어뜯자, 살점이 뜯겨 나갔다. 고통을 못 이긴 딜러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아버렸다.

죽기 전까지도 입을 다물 줄을 모르네. 미친개 같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딜러는 눈에 보이는 묵직한 꽃병을 집어 들어, 릴리스의 뒤통수를 그대로 내리쳤다.

이번엔 더 이상 저항이 없었다. 의식이 빠르게 끊긴 릴리스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기 직전, 릴리스는 다시 한번 꿈속에서 부모님을 만났다.

숲속에 버려졌던 그날처럼, 하늘에는 굵은 눈송이가 흩날렸다. 그녀는 손에 금화 하나를 꼭 쥐고, 맨발로 끝없는 눈길을 걸어갔다.

어머니는 떠나기 전, 릴리스에게 마지막 금화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버렸다는 말 하지 마.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네 손에 달린 거야."

얼마나 걸었을까. 거대한 나무 앞에 도착한 릴리스는, 나무뿌리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나무줄기에는 두 시신이 서로 기대어 있었고, 맞잡은 손바닥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두 분 다 참 안타깝긴 하지만...

그녀는 몸을 숙여,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살며시 털어주었다.

금화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삶이, 정말로 의미가 있었나요?

...

시신이 대답할 리 없었다. 릴리스는 무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치의 눈더미를 힘없이 걷어찼다.

결국 저도, 당신들처럼 되고 말았네요.

아직 살아 계셨다면, 분명 절 비웃으셨겠죠.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릴리스는 두 팔을 벌리고, 우아하게 스텝을 밟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흥흥흥~

숲속에 은은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곧 다가올 죽음을 노래했다.

사람들은 죽기 전,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고 말한다. 만약 자신의 인생이 끝없는 눈보라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래도 한번 보고 싶긴 하네.

춤추다 지친 그녀는 팔을 내려놓고 눈밭에 쓰러졌다. 창백한 달빛이 떠 있는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잿빛 변방에서, 재난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현실 속의 달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릴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 릴리스의 등 뒤에 있던 커다란 나무는 사라졌고, 대신 회색 망토를 두른 인물이 눈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릴리스는 이 인간을 본 적이 없었고, 왜 꿈속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상대가 오히려 한 수 위를 두었다. 이런 흐름은 릴리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음... 간단히 얘기하자면, 천사한테 속았거든요.

릴리스는 품위 있는 미소를 지으며, 티 나지 않게 대화의 흐름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전 평생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왜 라파엘 님이 저에게 이런 판결을 내리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성당 카드 게임"에서 라파엘 님의 속임수를 밝혀서, 저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요?

거짓말은 릴리스에게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색 망토를 두른 그림자는 침묵에 잠겼다. 릴리스의 말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는 곧 죽을 테고, 이 비밀은 아마 무덤까지 가져가게 될 거예요. 다시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겠죠. 하하하...

뜻밖에도, 상대는 릴리스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어떻게요? 설마 추기경의 잔해처럼, "팍"하고 관에서 벌떡 일어나게 하려는 건 아니죠?

릴리스는 혼자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터무니없는 상상이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가 없이요?

전설 속, 지옥 열차를 몰고 다니며 사람들을 붙잡아 아케론강에 던져버린다는 그 악마 말인가요?

하하.

릴리스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이번은 흥분해서 나온 웃음이었다.

릴리스는 인간이 자신의 말을 크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이 제시한 "조건"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한때 릴리스는 운명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아직 아케론강에서 끌어올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역시,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카드 테이블 깊숙이 숨겨진 패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눈밭에서 일어선 릴리스는 고개를 들고 인간 앞에 섰다.

그럼, 시작하시죠.

오라!

인간은 몸을 숙여, 피로 얼룩진 그녀의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상처에서 붉은 실들이 솟구쳐 나와, 매끄럽고 화려한 천으로 엮이며 두 사람을 감쌌다.

…아파, 이건 너무 아프잖아요!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 속에서도 릴리스는 웃으며, 오히려 인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저기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으면, 어떡하려고요.

인간은 릴리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붉은 심연의 깊은 곳을 계속 탐색해 나갈 뿐이었다.

그레이 레이븐이다.

혼돈이 뒤엉킨 붉은 빛의 중심에서, 인간은 35그램에 불과한 영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마력의 거센 물결이 그녀의 육신을 다시 빚어냈다.

아아아!

하늘 가득 몰아치는 눈보라가 그녀의 비명을 거센 바람 속에 묻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릴리스는 꺾이지 않고, 끝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온 삼계가 이 외침을 듣게 하고, 자신이 거짓된 껍데기에 속아 쓰러진 들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녀는 잿빛 변방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승부사이자, 세기의 도박꾼이며, 온 세상을 속일 수 있는 사기꾼 릴리스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지옥에서 돌아왔다.

이제 그 누구도 릴리스의 입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릴리스의 가슴에서 손을 거두었다. 새롭게 태어난 기사는 월산을 짚으며, 눈 덮인 설원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속 깊은 곳에서 끝없는 갈증이 울부짖으며, 그녀에게 눈앞의 모든 것을 삼키라고 재촉했다.

이제, 이 악마의 가슴속에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식욕"의 뿌리가 내려졌다.

월산이 가볍게 돌아가자, 공중에 붉은 원이 피어올랐고, 흩날리는 얼음 결정들이 그녀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승자는 모든 걸 차지하고, 패자는 모든 걸 잃죠. 내기의 결말은 언제나 이 두 가지뿐이에요.

피의 맹세자님, 전부를 걸 각오가 되셨나요?

가라! 내 너에게 세상을 속이고 뒤집을 수 있는 <color=#ff4e4eff>힘</color>을 주었으니,

손에 쥔 카드로 모든 시간의 단면을 갈라라.

<size=55>모든 천사가 거짓으로 빚어진 꿀을 삼키게 될 때까지,</size>

<size=55>녹지 않는 폭설은 그들의 이빨을 맹렬히 두드릴 것이다.</s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