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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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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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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곗바늘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반즈는 이 깊은 땅속에 묻혀있는 무거운 역사를 보았다. 거대한 나무의 나이테는 세월의 흐름을 새겼고, 흩날리던 모래는 돌이 되었다가, 다시 강물 깊은 곳에서 부서졌다.

세월은 오랜 흐름 끝에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시곗바늘은 다음 윤회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반즈는 거센 홍수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희미하게 보이는 한 줄기 빛을 잡으려 애썼다.

반즈는 시계판을 들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오므려 계속해서 돌아가던 시곗바늘을 멈추었다.

고정된 시계 판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순간의 광경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웅장하고 엄숙한 성당 안에서 금빛 눈동자를 가진 신이 왕관을 쓰고 성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경배를 받고 있었다.

신 옆에는 고개를 숙인 천사 시종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향기로운 수건과 성수를 들고 있었으며, 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필하고 있었다.

성좌 아래의 모두가 통곡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의 주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외부인을 개나 돼지처럼 천대한다며 호소했다. 신을 좇아 모든 걸 버리고 이곳까지 왔지만, 지금은 기본적인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 속에서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에 쥔 권력을 구름 아래 잿빛 변방을 향해 가리켰다.

"추기경"

가라. 내가 이 전쟁에서 너희를 승리로 이끌겠다.

4대 천사들이 너희의 칼이 되어, 빵과 좋은 술을 가져다줄 것이다.

시곗바늘이 조금씩 더 빨라지면서, 대륙 전역으로 분쟁과 정복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피가 퀴노아밭을 뒤덮었고, 부족민들의 시체는 길가에 무심히 버려져 있었다. 승리한 이들은 허물어진 성벽 옆에 기대어 모닥불 곁에 모여 승리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전쟁도 끝났는데, 너희는 이제 어느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추기경이 이 지역을 정리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천사들의 노예로 전락할 거야.

이 빠진 병사가 퉤하고 피 섞인 침을 뱉었다.

하긴. 배라도 채우고 피의 노예가 되면, 그래도 배부른 귀신은 되겠지.

병사는 길가에 쌓인 시체들을 여러 번 살펴본 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핏값을 다 갚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네.

우릴 너무 미워하지는 마. 우린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까.

어쩌면 우리는 곧 지옥에서 다시 만날지도 몰라.

역사는 다시 수 세기를 돌았다. 수십억 생명이 인간 세계를 거쳐 아케론 강에 빠지며, 끝없는 윤회를 반복했다.

지고천은 마침내 잿빛 변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성당이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지배력 앞에서, 누구도 추기경의 뜻과 결정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여전히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며, 강제로 혈액세를 징수했다. 모든 이들은 침묵 속에서 무감각하게 이를 감내했고, 삼계의 법칙은 거스를 수 없는 진리로 여겨졌다.

세상이 왜 이토록 비틀린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의 진실은 먼지 속에 묻혀, 영원한 침묵 속으로 잠겼다.

"부족민과 변방인은 본래부터 적대적이다"라는 말은 역사책의 한구석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각주가 되었고, 세월의 모래바람에 희미해진 흉터처럼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이 성환 대포를 쏘아 올렸다.

인간은 살아 있는 자의 뜨거운 피가 천사의 바위 같은 피부를 녹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항의 북소리가 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강철 군단은 성환 요새에 거대한 대포를 설치한 뒤, 칠흑 같은 포구를 하늘로 겨눴다. 환호 속에서 대포가 찬란하고 웅장한 빛줄기를 발사하자, 그 빛은 유성처럼 공중 보루를 관통했다.

오로라가 닿는 곳마다 만물이 무너져 내렸고, 닿을 수 없던 성당은 귀를 찢는 포효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먼지와 잔해들은 인간 세계 곳곳으로 흩뿌려졌다.

힘들게 모아온 금은보화를 움켜쥔 채, 천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빛의 포화 속에 선 추기경은 고온의 포탄에 맞아, 금색 뼈와 은색 몸 아래 봉인되어 있던 "신의 심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신의 심장은 신이 모든 영혼과 지혜를 담아두는 두 번째 중추였다. 긴 세월이 흐르며 감정과 감각이 조금씩 희미해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이 심장에 봉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추기경은 한때 무릎 꿇고 보호를 구하던 이들이 이제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점점 소멸해 가는 "신의 심장"에는 분노의 흔적조차 없었다.

"추기경"

왜일까?

추기경에게는 오직 의문만이 남아 있었다.

추기경은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생명을 지닌 존재였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추기경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같았다. 부족민이든 자신이 직접 데려온 잿빛 변방의 인간이든, 그들은 모두 생명의 물레에 얽힌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일 뿐이었다.

인간들이 안식을 찾고자 그에게 보호를 청하면, 그는 천사를 보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혈액세를 징수한 뒤, 인간을 다시 생사의 윤회 속으로 내몰곤 했다. 삼계는 그렇게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오늘 채석장에서 죽은 남자는 내일, 혹은 머지않아 어느 분만실에서 새 생명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랫동안 완벽히 지켜져 온 법칙에 인간들이 왜 갑자기 분노하며 반기를 드는지를 추기경은 헤아릴 수 없었다.

"추기경"

...

성당에 대한 인간들의 반격이 끝난 후, 추기경의 남은 몸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 아래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그에게 침을 뱉었고, 누군가는 못 본 척 지나쳤다. 하지만 추기경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추기경은 여전히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날들이 오랜 시간 이어진 뒤, 어느 날 강철 군단의 군인이 더러운 아이를 데리고 나무 틀 앞에 섰다.

잘 보아라. 저기 있는 자가 바로 그 고귀하신 "추기경"이다. 우리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장본인이지.

남성은 처형대 아래 놓인 돌멩이 하나를 주워 아이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던져! 그래서 인간의 참된 분노를 피부로 느끼게 해 주어라!

희미한 의식 속에서 추기경은 눈을 감고, 익숙한 고통을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돌의 충격은 끝내 닿지 않았다.

왜 던져야 해요?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피 묻은 돌을 내려놓았다.

이 남자가 잘못한 건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못에 박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잖아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반격할 힘도 없는 이를 더는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이 자식이!

화가 난 군인은 아이의 뺨을 내리쳤다.

어디 가서 이런 말 했다간 가만 안 둬. 알겠어?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래! 네가 한 그 말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잡혀갈 수 있다는 것도 몰라?!

분노에 휩싸인 아버지는 울먹이는 아이를 끌고 멀어져 갔다. 한편, 처형대에 남겨진 "추기경"이 다시 눈을 떴다.

"추기경"

분노로 가득한 그 말이 추기경의 빈껍데기 같은 몸속에서 메아리쳤다.

"추기경"

어려서 뭘 모른다고? 그럼...

내가 아이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대답을 들었을까?

신의 "심장"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인간"의 영혼은 떨고 있었다.

한때 추기경은 인간의 감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의식이 사라져 가는 지금, 그 감정을 알고 싶어졌다.

"추기경"

그렇다면... 네가 날 대신해서 살펴 봐.

이 대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봐줘.

추기경은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자신의 영혼 속 불씨를 하나의 "호박석"으로 변환시켰다.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였을 수도, 인간 세계를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무심히 그 "호박석"을 땅에 던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호박석은 부드럽고 가느다란 실에 감싸여, 하얀 고치가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고치 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눈을 뜨자마자, "신의 심장"에 잠재된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나서야 신의 분노가 풀리면서 그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분노는 "천재지변"이라는 형태로 뒤틀려,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앗아갔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천재지변"의 원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인간 세계를 떠돌면서, 이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 끝없는 비극의 시작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됐다.

내, 내가 "역병"의 근원이었던 거야?

모든 것을 응시하던 성자는 텅 빈 공간에 떠 있었다. 그 곁에는 반즈가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던 시간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얀 날개를 가진 천사 소녀가 반즈의 곁에 내려와, 낮고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늘이 무너질 때, 성체를 지키기 위해 제 의식 또한 고치 속에 봉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야 모든 기억을 당신께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기경이시여, 인간 세계에서 이 역병이 왜 끝없이 반복되는지 물으셨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엘이 시간의 실을 살짝 당기자, 수없이 많은 기억 조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야말로 역병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자신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음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모두가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약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당이 있었기에 세상은 가까스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심판해 공과가 상쇄되는 운명을 부여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외면한 채,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리며 끝없는 욕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악마는 그 틈을 타 얼마 남지 않은 영혼마저 빼앗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 세계의 고통은 깊어만 갔습니다.

인간과 악마가 끊임없이 싸우며 세상의 균형을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삼계의 법칙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천사 소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찬란한 성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성자 앞에 바쳤다.

혼돈에 빠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성당으로 돌아와 성체와 합일하여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법질서가 붕괴한 지금, 성좌에 귀환하여 천사 부대를 재건하셔야만 세상은 질서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

눈을 깜빡이는 순간, 하늘과 땅이 뒤엎어질 만큼의 방대한 기억들이 반즈의 눈앞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밀밭에서 살과 피가 타는 냄새, 아기가 웃을 때 나는 젖내 그리고 세상 곳곳의 혼란스러운 "정보"들이 한꺼번에 반즈의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반즈는 방대한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추기경"의 위엄과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동시에 그의 영혼을 감싸안았다.

자신을 되찾기 위해, 반즈는 머리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뎠다. 그리고 고치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나섰다.

반즈는 고치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추기경"의 마지막 기록을 보았다.

성환 대포가 발사된 날로부터 10년 후

성환 대포가 발사된 날로부터 10년 후

호박석 속에서 깨어난 아이는 처음으로 고치에서 나와, 부드러운 봄풀 위에 맨발로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새하얀 비둘기 떼가 평원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이는 몇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이곳이 어떤 속박도 없는 순수한 세상임을 깨달았다. 처음 맛보는 자유 속에서 그의 호기심은 끝없이 피어났다.

아이는 달리며 순수한 기쁨으로 환호했다. 알 수 없는 말소리들을 연신 지르며, 이 순간의 자유로운 행복을 온몸으로 누렸다.

그때, 지나가던 한 여자가 불쑥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넌... 어디서 왔니? 근처 마을에서 길을 잃은 거야?

아이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낯선 여자의 물음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임은 느껴졌다.

아이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그가 근처 마을에서 길을 잃은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닦아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이 없다면, 우리 보육원에서 당분간 지내도 괜찮아.

여자는 남자아이의 손을 정성껏 닦아주면서, 쉬지 않고 계속 말을 건넸다.

...

말하지 못해도 괜찮아. 보육원에 도착하면 너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에게 돌봐주라고 할게.

낯선 곳이라 불안할 수 있지만, 걱정하지 마. 모두 너를 반갑게 맞아줄 친구들이야.

시간이 좀 지나면, 너도 그 아이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여자에게 손을 잡힌 아이는 어리둥절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귓가로 아직은 낯선 말들이 흘러들었다.

그날, 아이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손을 닦아주던 따뜻한 손길이 왠지 모르게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아이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까마득한 옛날, 그는 금빛 찬란한 궁전에서 살았고, 누군가가 항상 정성스레 그의 손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삶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그 손길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숲속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호박석"을 바라보았다.

<i>추기경은 마지막 시선 속의 이 광경을 기록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겼다.</i>

<i>신의 심장이 파괴되자, <phonetic=【추기경】>그</phonetic>는 자신의 모든 영혼과 지혜가 곧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남겨줄 수 있는 건, 잠들어 있는 기억뿐이었다.</i>

<i>그리고 <phonetic=【추기경】>아이</phonetic>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꼭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길 바랐다.</i>

<i><phonetic=【반즈】>그</phonetic>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이 세계의 이들이 <phonetic=【반즈】>그</phonetic>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i>

이제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남긴 선물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어떤 따뜻한 손길이 자신을 "집"으로 이끌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다 같이 난로 앞에 둘러앉았을 때, 처음으로 동료들 옆에서 잠들었을 때, 처음으로 몰래 사탕을 훔치러 갔을 때의 기억까지...

여러 가지 기억들이 뒤섞여 그의 눈앞에 따스한 그림처럼 펼쳐졌다.

반즈, 넌 나중에 정말 멋지고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난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여자아이가 웃으며 팔을 들어 보였다. 아이의 가느다란 팔에는 갓 꿰맨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다.

봐봐. 이 상처를 이렇게 잘 꿰매줬잖아.

네가 크고 나면, 보육원 아이들도 아플 때 봐줄 이가 없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난 네가 커서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수업이 끝난 후, 멜비는 의서를 덮고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보육원에 남아서 돕고 싶다고 했을 때 정말 감동했어. 하지만 넌 똑똑한 아이니까, 밖에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야.

다른 이들의 기억과 반즈가 겪어온 과거가 모두 실처럼 엮여 그의 곁을 감쌌다. 그 실들은 그가 손에 든 등불에 흡수되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반즈는 역사를 내려다봤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일생에 담긴 희로애락까지도 내려다보았다.

반즈

안나... 멜비...

반즈는 모두가 자신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반즈

추기경, 이게 바로 네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 세계"인가?

반즈

이제 다 "봤어".

반즈는 수많은 생명의 실을 흡수하고 있는 등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사는 반즈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다급히 물었다.

추기경님?

삼십 년 전의 계획에서 우리엘은 성자가 호박석에 담긴 기억을 깨우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렇게만 하면 추기경이 인간의 육체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엘은 하나의 몸에 두 명의 기억이 공존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상황이 그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추기경님, 절대 죄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엘은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30년 전, 그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 추기경님을 인간 세계로 내몰았습니다.

그동안 지고천께서는 그 일에 분노하시어 수많은 형벌을 내려, 그들이 뉘우치길 바랐습니다.

법칙은 끝없이 무너질 수 없고, 삼계는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좌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추기경님께서 머뭇거리신다면, 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분명 같은 짓을 반복할 것입니다.

반즈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만물을 내려다보던 반신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반즈

어떤 존재도 결말이 정해져서는 안 돼.

인간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 결정하게 두어야 해.

반즈의 어조는 여전히 차분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우리엘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 아무리 추기경님이라 하셔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지고천님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반즈

너희는 인간의 운명을 제어하려 했었지. 그런데 성공한 적이 있었어?

반즈는 굳어진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위엄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반즈

30년 동안 인간들은 너희가 부여한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수많은 천사를 죽였어.

하지만 너희들은 멈추기는커녕, 새롭게 태어난 인간들에게 더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었지. 그래서 너희들이 얻은 게 뭔 줄 알아?

전쟁, 너희가 얻은 건 끝없는 전쟁뿐이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야.

누군가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선의를 품고 미래를 꿈꿔.

너희가 나를 이용해 이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 한다면, 난 몇 번이고 "싫다."라고 대답할 거야.

인간이 원하는 건 누군가가 위에서 군림하는 권리가 아닌...

모두가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야.

우리엘, 양쪽 모두를 위해 이제 이 고통을 끝내자.

반즈의 금빛 눈동자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엘은 그 눈빛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30년 전, 그녀를 수없는 밤낮 동안 공포에 떨게 하면서도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심판의 눈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눈빛의 주인이 다시 우리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모든 공포가 되살아났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릎 꿇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흔들리는 다리를 오른손으로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거절당한 뒤, 우리엘은 오히려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됐다.

당신은 성자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저... 추기경님의 기억을 훔친 추악한 인간일 뿐입니다.

"호박석" 속 기억만 저에게 넘겨주면, 저도 할 수 있겠죠. 아니, 반드시 당신보다 더 잘 해낼 겁니다!

"고치" 안의 공간이 갑자기 좁아졌다. 우리엘은 높이 날아오르더니 수많은 실을 조종해 반즈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윽!

땅이 크게 흔들렸다. 우리엘은 실의 끝을 움켜쥐고, 반대편에 연결된 "호박석"을 힘껏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30년 전, 추기경님께서 불씨 같은 걸 만들어내지 마셔야 했어요. 인간은 본래 추악한 존재고, 추기경님의 소중한 기억도 더럽히고 낭비됐잖아요!

우리엘이 검은 날개를 펼치자, 몸에서 복잡한 금색 문양들이 떠올랐다.

지고천 님의 판단이 역시 옳았어요. 인간에게 아무리 낙원을 내어줘도, 결국 그들은 이기심과 추악함으로 유토피아를 황무지로 만들 뿐입니다.

아무리 고귀한 신자일지라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물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요.

하지만 성좌를 계속 비워둘 수는 없죠. 우리가 지고천님의 위대한 뜻을 이어가야만 해요.

됐어요. 제가 새로운 신이 되어, 이 뒤집힌 세상의 법칙을 바로잡으면 돼요.

인간은 앞으로 달려가, 은발 청년을 감싸고 있던 실을 필사적으로 끊어냈다. 하지만 더 많은 하얀 실이 순식간에 몰려와 반즈를 다시 휘감았다.

반즈

그레이 레이븐, 물... 물러서.

반즈는 끝까지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방대한 정보를 동시에 흡수하느라, 의식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반즈

그녀에게 기억을 넘길 순 없어. 내가 "호박석" 속 정보를 직접 흡수할 거야.

실들이 그의 몸을 파고들며 선명한 핏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놓지 않으려 온몸으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반즈

그건 너에게 맡길게.

반즈는 꺼지지 않는 생명의 등불을 품에 "안고", 인간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즈

융합이 거의 끝나갈 때쯤, 피의 맹세자로서 나와의 계약을 끊어줘.

내가 바라던 결말은 아니지만, 한때 인간에게 구원받았던 생명이 마지막에 인간을 위해 끝을 맺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

인간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반즈

괜찮아. 우리에겐 또 다른 30년이 있어. 생사란 원래 이렇게 돌고 도는 거잖아.

반즈의 영혼을 연료 삼아 불씨가 계속 타오르며, 기억의 실을 그의 가슴 속으로 엮어 넣었다.

반즈의 영혼이 "인간"의 모습에서 조금씩 벗어나, "신의 심장"이라는 껍데기 속에 갇히고 있었다.

반즈

한때 생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던 "추기경"이었던 난 이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해.

뼈 칼을 뽑아 든 인간은 반즈를 감싸고 있는 실을 계속해서 잘라냈다.

흰 실이 계속 몸을 휘감고 있는데도 인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묵묵히 반즈를 옭아매는 실들을 하나씩 끊어낼 뿐이었다.

반즈

왜?

금빛 눈동자의 광채가 조금씩 흐려지며 모든 고난에 대한 의문이 그 눈빛에서 흘러나왔다.

반즈

모든 재난이 처음부터 나 하나로 인해 시작됐다는 걸, 너도 직접 봤잖아.

인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면서도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반즈

...

그 순간, 반즈는 잠깐 망설였다.

반즈는 자신의 의지로 "호박석" 속 정보와의 융합을 억제하려 했고, 그의 무의식도 이에 반응했다.

고치에서 짜인 껍데기는 신이 되기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둔 지점에서 멈췄고, 그 힘은 실을 따라 "호박석" 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우리엘은 광기 어린 기쁨의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성관을 높이 들어 올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넣은 권력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있다니. 하지만 잘 됐어요. 그 힘은 제가 기꺼이 가져가겠습니다!

자, 이제 이 자리에서 제가 즉위하겠습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바보 같은 천사 놈아!

인간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로봇 까마귀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갑자기 날아올랐다. 그리고 우리엘이 높이 들고 있던 성관을 낚아챘다.

악마?! 대체 언제 침입한 거죠?!

우리엘이 다급히 실들을 쏘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몰리간은 유연하게 피해냈다.

몰리간은 단숨에 돔의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기이한 붉은 마법진을 소환하여, 그 안에 성관을 올려두었다.

악마의 힘이 스며들자, 성관을 감싸고 있던 빛의 결계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러자 틈새로 성관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힘은... 악마의 영주?

그레이 레이븐, 서둘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인간은 주저하지 않고 혈총을 꺼내 들어, 연속으로 몇 발을 쏘아 높이 매달린 성관을 산산조각 냈다.

아아악!!!

우리엘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혈탄에 맞은 성관은 별빛처럼 부서져 고치실 위로 흩어졌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실의 끝에 연결된 "호박석"도 순간적으로 갈라지더니, 수많은 어두운 결정 조각으로 부서졌다.

추기경님의 성관을 감히... 이 벌레 같은 것들이...

우리엘은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듯 실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성관의 힘을 잃은 "고치"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모두를 떨어뜨릴 뻔했다.

"고치" 안에선 모든 색깔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생기 없는 하얀 빛으로 뒤덮여갔다.

우리엘, 이제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성관이 부서졌으니, 이 기억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해!

반즈는 부식되어 썩은 실을 찢어낸 뒤 우리엘 밑에 섰다. 그리고 권총을 들어, 공중에서 몸부림치는 그림자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우리엘은 점점 광기에 휩싸여 더 많은 천사를 소환했다. 고치 바닥에서는 하얀 "살아있는 고기"들이 끊임없이 솟아올라, 벌레알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이젠 상관없어요. 당신만 죽이면 돼요. 어떤 결말이든 어리석은 인간이 성좌를 차지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까악. 공간이 곧 무너질 거야. 오래 있으면 위험해!

몰리간이 인간의 어깨 위로 날아와, 색이 점점 바래지면서 부식되어 가는 돔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거야.

반즈는 다시 가면을 쓰고, 손에 든 리볼버를 장전했다.

그레이 레이븐, 내게 힘을 빌려줘.

이제 이 모든 일을 끝낼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