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우주 연대기 / 침묵의 계시록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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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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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핏방울이 시들어 떨어지자, 무겁고 썩은 내 나는 살덩어리가 죽은 물로 변해 땅바닥에 흩어졌다.

숲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따스한 촛불은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비통함을 들어 주었고, 미련 가득한 영혼들을 해방의 저편으로 이끌어 주었다.

672번 카슨·델레, 잘 자. 내가 네 이야기를 기억해 줄게, 넌 결코 헛된 삶을 살지 않았어.

역병의 기사가 품에 안고 있던 랜턴의 불꽃이 점점 약해지더니, 잠든 아기가 눈을 감는 것처럼 조용히 사그라졌다.

그들은 이제 깊이 잠들었어.

그는 랜턴을 끈 뒤, 조용히 선고했다.

기사는 피로 얼룩진 숲을 바라보다가, 결국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난 그들을 위해 마지막 꿈을 엮어주었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 꿈을 잊지 않을 거야.

이렇게 하면, 그들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기억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될 거고.

생사의 법칙이 새로 세워지면, 그들은 아케론 강의 양수로 돌아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야.

기사가 가면을 벗자, 방금 안개 속에 퍼졌던 약초 냄새가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쿨럭...

은발의 청년은 랜턴을 내려놓자마자, 입을 막고 기침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곧장 그에게 다가간 뒤, 함께 나무 아래에 앉았다.

괜찮아. 난... 잠깐 쉬면 돼.

반즈는 평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빠졌던 호흡은 조금 진정되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쉰 듯 거칠었다.

최대한 통제해 볼게.

그는 물 반병을 단숨에 다 마셨지만, 가슴의 떨림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반즈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을 본 인간이 단호하게 말했다.

금색 눈동자에 잠깐 망설임이 스쳤지만, 이내 신뢰로 바뀌었다.

알았어. 하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꿈속에서 최선을 다해 널 지킬게. 그러니 너도 너 자신을 잘 지켜야 해.

약속한 뒤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인간은 나무줄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피, 불꽃 그리고 울부짖음. 꿈속에서 겪었던 모든 것이 인간의 온몸을 다시 휘감았다.

영혼은 전봇대에 걸린 연처럼, 몸을 웅크린 채 폭우 속에서 떨고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꼼짝할 수 없었다.

하늘을 뒤덮은 흡혈 메뚜기들이 시야를 가렸고, 태양은 붉게 물든 하늘 속에서 힘없이 떨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곳이 끔찍한 붉은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

도망쳐...

어서 도망쳐. 뛰어!!

인간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이들 몇 명이 손을 잡고 넓은 들판에서 맨발로 달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뛰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러자 흡혈 메뚜기 몇 마리가 피 냄새를 맡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지 말고, 어서 움직여!

친구들이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넘어진 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메뚜기들에 둘러싸인 아이는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인간이 아이의 손을 잡으러 달려갔다. 하지만 실체 없는 손끝은 아이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피가 흐르는 가슴에 스며들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

어린 몸이 순식간에 메뚜기들에게 갈기갈기 뜯겨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엔 앙상한 껍데기만 남았다.

살이 오른 흡혈 메뚜기들은 입을 다물고는 날개를 펼친 뒤,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다시 날아갔다.

울부짖음과 비명이 땅에 흐르는 혈액과 다시 섞였고, 이곳의 재난은 점점 심각해졌다.

??

우——웅——

하늘을 뒤덮은 붉은 빛 속에서 창백하고 거대한 손이 내려왔고, 요동치는 대지를 짓눌러 버렸다.

고통스러운 낮은 울음이 땅속으로부터 전해졌으며, 그 소리는 모든 생명체의 전율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온몸에서 하얀 빛을 발하는 거인이 산봉우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거인의 발걸음이 광야를 뒤흔들자, 나무와 산봉우리까지 휘청이며 산야 곳곳에서 울림이 퍼져나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이건 또 무슨 괴물이야!

살려줘! 흡혈 메뚜기에 거인까지, 온 세상이 다 미친 거잖아, 아아아아!

이때, 낯선 기억이 인간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관통당한 듯한 극심한 통증이 가슴에 밀려왔지만, 곧 따스한 하얀빛이 그 고통을 사라지게 했다.

인간은 정신을 되찾고 나서야, 자신이 조금 전에 의도치 않게 한 아이의 임종 기억을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악몽은 멈추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는 수많은 흡혈 메뚜기가 울부짖으며, 이 혈색 평원을 끝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주변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어떤 아이는 메뚜기에게 끌려갔고, 어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미안해. 내가... 막지 못했어...

들판 한가운데, 흰옷을 입은 여성이 피 웅덩이 속에 서 있었고, 그녀는 완전히 찌그러진 촛대를 손에 쥔 채, 아이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반복했다.

지고천이시여, 악마여...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한 명이라도 살아남게 해 주세요.

그들은... 정말 아무런 잘못도 없잖아요.

그녀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한 흡혈 메뚜기들은 다시 꿈틀거리며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메뚜기들이 거인의 몸에 달라붙자, 거인은 검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거인의 발 아래 서 있던 아이는 계속되는 이마의 통증을 감싸 쥐고, 이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귓가에 희미한 한숨 소리가 스쳤다.

이 모든 걸 수없이 지켜보고 나니, 이제는 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오늘 운 좋게 이 "피의 감옥"에서 도망쳤다 해도, 내일은 또 어떡해야 하지?

1년 뒤, 10년 뒤에도 계속 이렇게 절망 속에서 친구나 가족, 사랑하는 이들을 피 웅덩이 속에서 잃어야 하는 걸까?

개미나 벌레처럼 계속 잡아먹히고, 또 새로운 생명을 낳아 고통받게 만드는 것이 인간에게 정해진 미래인 거야?

<i>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일이 정말 성당이 인간 세계에 내린 심판이라면</i>

<i>신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건가요? 어떻게 그 죄를 갚아야 하나요?</i>

<i>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명확한 길이라도 밝혀주세요.</i>

<i>저는 기꺼이 달콤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i>

반즈가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쯤, 인간은 그의 곁에 기댄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몸을 살짝 흔들어 보았지만, 인간은 미간을 더 찌푸릴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본 기사는 방금 정신을 찾은 터라 더 이상 억지로 깨우지 않기로 했다. 그는 피의 맹세자에게 조심스럽게 외투를 덮어준 뒤 등을 들고 나무 아래를 떠났다.

...

숲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한 남자가 텅 빈 눈과 험악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위에는 그의 수많은 "동료"들이 걸려 있었다. 그들 또한 죽기 전에 모든 피를 빨려 말라비틀어진 모습이었다.

몸을 숙여 그 남자의 눈을 감겨준 반즈는 이어 그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검지를 대었다.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이 반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두컴컴한 어느 지하 의식 공간에서 수십 명의 부족민들이 모닥불 옆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함께 주문을 외고 있었다.

엄숙한 표정의 그 남자는 중앙에 서서 촛대를 높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강렬한 외침으로 부족민들의 중얼거림을 단번에 멈추게 했다.

시간이 됐다.

우리는 다시 몸을 심연에 담그고, 영혼을 "카르코사" 님의 창으로 단련할 것이다.

대답하라. 속죄의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가?

제단 위의 신도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좋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자!

사제는 땅에 묶여 있는 소녀 앞에 다가간 뒤,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땅에 묶여 있는 아이는 코와 입이 막힌 채,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고,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음 생에는 대지의 축복을 받길 바라마.

부족민들이 차례로 가운을 벗자, 그들의 상체에서 오각별 문양이 드러났다.

바로 지금, 제물을 바치겠다!

사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도들은 일제히 자기 목에 칼날을 겨눴었고, 주저 없이 기도를 그어, 숨통을 끊었다.

솨아...

피가 땅에 쏟아지며 제단 아래 어두운 수로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이상한 적갈색의 문양이 그려졌다.

수십 구의 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며, 새로운 "제물"이 되었다.

살아 있던 수많은 육체가 순식간에 죽음으로 변했다. 하지만 의식 현장은 여전히 고요했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묶여 있는 여자아이

?

묶여 있던 여자아이가 자신이 왜 죽지 않았는지 혼란스러워할 때, 고요한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가녀린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오슬란, 이번 의식도 실패한 것 같구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백발의 소녀가 산양 뼈 가면을 들어 올리자, 깨끗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성녀님, 혈액 속 마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제물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이 아이는 제가 신중히 고른 제물입니다. 마력 농도가 굉장히 높으니, 한 번 더 테스트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오슬란이라 불린 남자는 제단 아래 묶여 있는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아이는 "흑흑" 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됐어. 고성 안에 있는 그 많은 이방인을 죽였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를 일으켰잖아.

오슬란이 "성녀"라 불리는 카나리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슬픔 어린 표정으로 쓰러진 동료들의 눈꺼풀을 하나씩 감겨 주었다.

이방인의 더러운 피로 이 신성한 제단을 더럽혀선 안 돼.

알겠습니다.

성녀님, 이번에는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는 뼈 칼을 다시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번은 칼끝을 자신의 가슴에 겨눴다.

오슬란!

부족의 성녀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기억의 주인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성녀님,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고성이 함락된 이상, 그들이 이곳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전에 올바른 소환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

이방인의 피로 신성한 제단이 더럽혀진다면, 제가 산 제물이 되겠습니다.

오슬란은 여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강한 책임감에 이끌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성녀님, 부족 최후의 "불씨"로서 이 위대한 사명을 완수해 주십시오.

...

고개를 든 백발의 성녀는 오슬란을 바라보지 않고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너희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나아갈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카르코사"와 연결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게.

하루가는... 반드시 이 땅에서 번영을 되찾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오슬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뼈 칼을 자기 가슴에 꽂았다.

오슬란은 그대로 쓰러지면서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피만은 뚜렷이 보였다. 적갈색 액체는 그대로 땅 위에 새겨진 문양의 홈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제단 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시야 끝을 스쳐 지나가며 기억의 주인이 쓰러졌다. 그러자 불꽃이 잠시 격렬하게 일렁였다.

카나리의 목소리

불꽃이야! 오슬란의 피에 제단이 반응하고 있어!

오슬론은 카나리의 기쁜 외침이 들렸지만, 이제는 그녀의 표정을 살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슬란의 신체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오슬란

(다행입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의 열쇠를 찾아냈습니다.)

기억이 끝나기 직전, 바닥에 묶인 아이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기억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이 세계를 향한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

673번 오슬란, 광기로 가득 찬 기억이었다.

안식하거라. 나에겐 네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지만, 너의 삶은 이미 끝났으니, 아케론 강의 카론이 네 죄악의 무게를 심판할 것이다.

등불을 치우고 일어선 악마 기사는 나무에 매달린 마른 시체들이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신도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전에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죽은 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목에는 직접 그은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 자결할 때 하나의 영혼을 공유한 것처럼, 칼자국의 위치와 깊이까지 똑같았다.

반즈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성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월영 벨라돈나, 은맥 양귀비, 섬망 박하... 모두 흥분을 유발하고 환각을 일으키기 쉬운 약초들이잖아.

설마 이 부족 내부에 약초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이라도 있는 걸까? 지나가던 농부가 말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은데.

정신이 이상했던 신도들, 반복해서 맡았던 약초 냄새 그리고 고성의 비밀 통로에서 갑자기 나타난 소녀까지...

반즈는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연결 지었다.

바스락... 그때 뒤에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순간, 반즈는 리볼버를 들고 돌아섰다. 총구가 향한 방향에서 짙은 안개를 헤치며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은 반즈가 전에 마주쳤던 백발의 여자아이였다.

역병의 기사... 이렇게 강한 힘을 얻게 될 줄은 몰랐네.

카나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종적이고 다정한 미소를 반즈에게 지어 보였다.

진작 널 처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리볼버의 실린더가 회전하며 총알이 장전되었다. 반즈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적대감으로 카나리를 맞이했다.

네 목적은 "카르코사"가 되어 천재지변을 불러오는 건가?

아니, "카르코사"와 천재지변은 처음부터 아무런 관련이 없어.

카나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몸에서 강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카르코사"와 천재지변을 연결 짓는 건, 너희 같은 이방인들이 만든 망상에 불과해.

"카르코사"가 얼마나 신성한 존재인데, 너희 같은 더러운 피의 소유자가 이해하거나 닿지는 못할 거야.

그럼, "카르코사"의 정체는 대체...

바로 무고한 피로 물든 이 땅 그 자체야.

카나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산양 머리뼈 너머, 그녀의 눈에서 처음으로 노골적인 살기가 드러났다.

여기 서 있기 전까지 너희는 과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몇 세기 전, 부족민들도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애원했었지. 제발 손대지 말아 달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만큼은 살려 달라고 말이야.

그런데 몇 세기가 지나, 법칙이 무너지고 천재지변이 닥쳐 너희가 사냥당하는 쪽이 되니까, 그제야 이 모든 게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된 건가?

하하하,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이기적이군!

광기 어린 소녀는 머리 위에 얹은 머리뼈를 잡고,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회색빛 안개 기둥이 솟아오르더니, 총을 든 반즈를 덮쳤다.

독초 냄새를 풍기는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해 반즈를 휘감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회오리의 중심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며, 기사가 들고 있던 등불이 모든 흑마법의 연기를 흡수했다.

너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걸 살육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기사는 손에 든 총검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나도 칼로 맞설 수밖에.

내가 바라던 바다!

카나리는 몸을 낮추고, 손가락을 구부린 뒤,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반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즈는 몸을 날려 피한 뒤, 총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돌진하는 날카로운 발톱을 막았다. 하지만 카나리는 그의 방어를 피해, 안개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레이 레이븐!

망설이는 사이, 반즈는 카나리의 목표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안개 속으로 몇 발의 총알을 쏘았지만, 소용없었다.

슈슉.

짙은 안개 속에서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게 들렸다.

안개가 곧 걷히며 공기가 맑아졌고, 나무 아래 기대어 잠들어 있던 사람도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