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의 준마가 안개 자욱한 숲을 지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나무집 앞에 멈춰 섰다.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반즈는 고삐를 살짝 당기며, 낡고 바랜 문 앞에 말을 천천히 세웠다.
여긴 내가 혼자 세운 보육원이자, 임시 거처야.
여기 아이들은 모두 내가 근처 마을에서 데려온 애들인데, 그들의 가족은 대부분 천재지변으로 세상을 떠났어.
반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옆에 있는 인간에게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너무 급하게 오느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게 있는데, 이 기회를 빌려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인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즈와 함께 좁은 정원으로 들어갔다.
"열차 탈취 사건" 발생 며칠 전
"열차 탈취 사건" 발생 며칠 전
이른 아침,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던 청년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더니,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일으켰고, 시선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익숙한 모습으로 쏠렸다.
회색 망토를 걸친 인간은 반즈의 차가운 몸을 녹이려는 듯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고마워. 넌 그...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질문이 바로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인간이 망토를 살짝 걷어 올리자, 흉터와 핏자국이 가득한 팔이 드러났다.
맞다... 성안의 아이들은!
인간의 대답은 청년의 조각난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는 극심한 통증에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산송장들 밖에... 없었다고?
반즈는 잠시 망설이다가, 인간의 대답을 반복했다.
그럼, 산 제물 의식을 하던 곳은...
인간은 앞으로 다가가 땅에 떨어져 있던 랜턴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제단 위의 불꽃은 모두 꺼져 있었고, 짙은 갈색 피와 진흙으로 뒤덮인 제단 위에 투박한 나무 조각상이 묻혀 있었다.
산양이 네 다리를 웅크린 채 제단 위에 엎드린 모양의 조각상이었는데, 목숨을 바치려는 제물 같았다.
내가 너무 늦었던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걸 막지 못했어.
어린 양처럼 힘없이 죽어선 안 됐는데...
반즈는 앞으로 나아가 조각상을 파낸 뒤, 받침대에 남아 있던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조각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가자. 여기엔 더 이상 단서가 없어.
그 사제는 도망쳤으니,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반즈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레이 레이븐, 당신이 날 구해줬으니, 당신과 함께하겠어.
하지만 출발하기 전,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어... 더 이상 아무도 이걸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길 떠나기 전, 함께 이 제단을 없앨 방법을 찾아보자.
인간이 팔을 흔들자, 어디선가 검은 까마귀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대장, 뭐 지시할 게 있는 거야?
헉, 이 큰 걸 폭파하려면 마력이 많이 들겠는데. 기사와 이제 막 피의 맹세를 맺었잖아. 좀 더 회복한 뒤에...
그만, 그만, 그만, 내 머리 찌르지 마, 분부대로 하면 되잖아!
까마귀는 하기 싫다며 투덜거리다, 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은발의 기사는 옆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역력했다.
그레이 레이븐,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넌 날 구해주고 계약까지 맺었어. 그리고 이 미친 신도들도 혐오하고 있는 게 분명해.
반즈는 맑은 눈빛으로 인간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관찰"이 아닌, 탐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우연이 이렇게 겹칠 수가 있지? 왜 날 선택한 거야?
반즈는 미리 그의 답을 예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별로 놀라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성당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으려고, 천재지변의 발원지인 이곳에 스스로 왔다는 거네.
...
반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목표는 천재지변을 끝낼 방법을 찾아서, 세상을 다시 안정시키는 거야.
성당의 재앙은 너무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어. 너 또한 이 세계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는 거라면...
너와 함께 이 세계를 구하는 길을 걷고 싶어.
회상이 끝나고 현재로 돌아왔다.
회상이 끝나고 현재로 돌아왔다.
긴 머리의 청년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환호하며 뛰어나왔다.
반즈 형, 다녀오셨어요!
반즈 형, 저번에 약속한 사탕 줘~
아이들은 앞에 서 있는 낯선 손님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일제히 반즈에게 달려들어 선물을 달라고 떠들어댔다.
반즈는 선물을 조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침착하게 여러 옷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하나씩 나누어줬다.
반즈는 마술 같은 손놀림으로 한쪽 주머니를 비우면 다음 주머니에서 새로운 선물이 나왔다. 그렇게 사탕은 크리스마스의 리본처럼 그의 몸에서 끊임없이 나왔다.
들어와. 애들이 말을 잘 들어서 낯선 이를 귀찮게 하지 않아.
아이들을 돌보던 반즈가 고개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인간에게 한마디 건넸다.
반즈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흥분한 아이들을 달랜 뒤 침대에 재우고 나니, 시계 판의 시침이 또 한 바퀴 돌아가 있었다.
반즈의 안내에 따라, 지하의 비밀 작업실로 들어간 피의 맹세자는 문을 열자마자 벽 한쪽에 빼곡히 채워진 지도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실은 탐정 사무소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벽에는 흡혈 메뚜기 재난 자료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조사 보고서들도 있었다.
조사 파일은 시간 순서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망 원인은 모두 빨간색으로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단서 판 외에 양쪽 벽에는 큰 벽장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고, 격자 형태의 서랍마다 손 글씨로 약재 이름이 적힌 라벨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은발의 의사는 머리를 묶으면서 태연하게 벽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약재 서랍 몇 개를 열었다.
맞아. 여기 편하게 앉아.
인간이 부드러운 의자에 앉자, 반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약초차 한 잔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혀끝에서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혼견국화, 실버 바질과 수면개자리는 모두 진정 효과가 있어.
반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구석에 있던 메모판을 가져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몇 년 전부터, 흡혈 메뚜기 재난의 기원을 비밀리에 조사해 왔어.
흡혈 메뚜기 재난은 몇 년에 한 번씩 일어나는 천재지변인데, 최근 방혈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어. 망자의 사망 상태를 보면, 흡혈 메뚜기의 침식을 겪은 것 같아.
난 이 사건들을 "방혈 연쇄 살인 사건"으로 명명하고 조사를 시작했어. 그 결과, 방혈 살인은 일종의 의식적인 제사 수법이며, 부족민의 신앙과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지.
난 망자들과 부족민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얼마 전 그 고성에 잠입한 거야. 하지만 의식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 발생하고 말았어.
하지만, 현장에서 조사할 가치가 있는 단서들을 발견했어.
반즈는 의식 제단에서 발견한 산양 모양의 나뭇조각상을 꺼냈다. 그것을 뒤집어 빛에 비춰보자, 받침대에 뒤틀린 오각별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오각별 중앙에는 점 모양의 표식이 깊게 새겨져 있었는데, 받침대에 구멍을 뚫으려고 시도했던 것 같았다.
이 문양은 서고에 기록된 고대 부족 유민들이 가지고 있던 "옛 인장"과 매우 비슷해.
책에는 이게 신탁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부족민은 신탁에 따른 의식을 통해 신과 소통할 수 있었대.
그리고 고성 안의 신도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던데...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제사 의식을 반복적으로 거행하는 게, 그들이 말하는 의식 "절차"인 것 같아.
살인 사건의 발생 시간에 따라, 순서대로 이 장소들을 연결해 보면...
반즈는 검지를 내밀어, 지도 위의 사건 발생 지점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별 모양이 그려졌다.
이렇게 거대한 오각별 모양이 나오거든.
그 별 모양의 중심에는 홀로 떨어진 마을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다.
인간은 그 마을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도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아.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 원주민들이든,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든, 분명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모든 걸 철저히 계획했을 거야.
만약 우리가 먼저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면, 차기 흡혈 메뚜기 재난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인간이 막 일어서려던 찰나, 반즈가 손짓으로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레이 레이븐, 출발하기 전에 먼저 말할 게 있어.
단서 판을 벽 구석에 밀어 넣은 뒤, 반즈는 살짝 몸을 기울여 인간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
우리가 계약을 맺을 때... 네가 본 그 꿈 말이야, 실은 내가 어릴 때부터 계속 꿔왔던 악몽이야.
맞아, 몇 번을 깨어났든,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악몽 속에서 난 항상 같은 시간에 갇혀 있었어.
난 어릴 적에 보육원으로 가기 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어. 양어머니와 주변 사람들 말로는, 내가 혼자 떠돌다가 때마침 외출했던 양어머니에게 발견되어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랬어.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날 받아줬던 보육원은 천재를 겪었고, 그때 살아서 탈출한 건 나 혼자뿐이었지.
하지만 그 후로 난 자꾸 천재지변이 일어난 그날의 일이 반복되는 꿈속에서 천사의 추궁을 받곤 했어.
가끔은 다른 꿈을 꾸기도 했지만, 결국 천재지변이나 심판과 관련된 장면들이었어.
반즈는 차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그의 말투를 통해 이게 그가 가장 언급하기 싫은 기억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너와 계약을 맺은 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깊은 잠 속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조각난 또 다른 기억들이 떠오른 거야.
어쩌면, 나도 너의 꿈을 엿본 것 같아.
전부 조각난 상태라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어.
그건...
인간은 반즈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은발의 악마는 더는 피하지 않고, 손끝을 들어 영혼을 읽기 시작했다.
...
반즈의 손끝에서 희미한 흰색 빛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인간의 미간에 스며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반즈가 다시 금빛을 띈 눈을 뜨고 말했다.
기억이 보이기는 하지만, 워낙 산산조각이라 하나로 정리할 수가 없어.
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
잠깐만.
인간은 다시 일어나려던 동작을 멈췄다.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 넌 모든 기억을 잃었는데...
왜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당에 맞서는 길을 택한 거야?
천재지변이 해결되면, 같이 네 기억을 찾으러 가자.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난 뒤, 반즈는 인간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악마가 된 이상, 이제 나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가지게 됐잖아.
반즈가 가볍게 하품하자, 나른한 기운이 목소리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차분하고 진지했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악몽을 계속 꾼다면, 나도 견디기 힘들 거야.
그럼, 이렇게 하자. 모든 게 끝나면 난 악몽을 끝낼 방법을 찾고, 넌 과거의 기억을 찾아보는 거야.
반즈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은 무의식적으로 반쯤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하... 잠깐만, 갑자기 좀 졸리네.
너무 많은 기억을 본... 대가인 것 같아.
우린... 일단... 푹 쉬고 보자.
반즈는 부드러운 흰 올빼미 모양의 쿠션을 인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몸을 돌려 눕더니, 눈을 감았다.
침대는 너한테 양보할게, 잘... 자...
테이블 옆에 놓인 약초 찻주전자가 두 번 보글거린 뒤, 적정 온도에 맞춰 자동으로 꺼졌다.
그 후, 등불 빛이 조금씩 어두워지더니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반즈가 잠에 드는 것을 본 인간은 담요를 조용히 덮어준 뒤,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누었다.
꿈 없는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방을 비출 즈음에 둘은 새로운 여정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며칠째 숲 사이에 자욱하게 깔린 짙은 안개는 걷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신조티크군으로 가는 산길은 무거운 안개 속에 잠겨 있었고, 시야가 좋지 않아서 둘은 매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몰리간은 두 마리 말을 따라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지루했는지 하늘을 몇 바퀴 돈 뒤, 인간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온몸의 깃털을 다 걸고 장담하는데, 이 안개 속에는 분명 뭔가 있어.
깍. 부족민의 은신처일지도 몰라. 이렇게 으스스한 곳에는 너희 둘만 이 안개를 뚫고 들어올 수 있을 거야.
짙은 안개 속 시야는 거대한 나무들에 가로막혀 있었고, 하늘 높이 솟은 고목들은 숲의 말 없는 초병처럼 산길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그 부족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희가 몰라서 그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거인까지 소환할 수 있대!
거인?
잿빛 변방의 역사를 연구해 온 반즈는 흥미를 느꼈다.
그래. 거인! 천 년 전, 추기경이 아직 하늘에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야.
전설에 따르면, 부족의 성녀는 영혼을 불러 하얀 거인을 소환할 수 있었다고 해. 그리고 그 거인은 산과 강, 골짜기까지 모조리 짓밟을 수 있어서 삼계 어디에서도 그들에게 감히 맞서려는 이가 없었대.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누가 알겠어? 부족민들은 수 세기 동안 그들의 일부만 세상에 드러났을 뿐이잖아.
게다가 정말 그런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면, 지금 그들의 후손들이 숲속에서 야인으로 살아갈 리 없잖아!
좋은 질문인데, 그건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야.
몰리간은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떨면서 가슴을 폈다.
어떤 이들은 고대 부족이 단지 전설일 뿐이라고 말해. 실제로는 역사 속에 존재한 적 없고, 지금의 부족민들은 그 이름을 빌려 쓰고 있다는 거지.
또 다른 이들은 몇 세기 전, 먼 곳에서 이 잿빛 변방으로 온 인간들이 추기경의 명령으로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고 해.
그 후로 살아남은 부족민들은 숲으로 도망쳤고, 이제 인간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하지.
하지만 진실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 지금 인간들은 천사들에게 멸망할 위기에 처했는데, 과거에 서로 싸우고 죽였던 역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인간은 까마귀가 들려준 이야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즈는 생각에 잠긴 듯,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신앙과 전설은 대부분 마음속 소원에서부터 비롯된 거야. 예를 들어, 그저께 우리가 무너뜨린 그 부족민 교단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야만, 전설 속 신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잖아.
현실이 버거울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희망을 얻으려고 하는 법이지.
셋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하는 말발굽 소리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 울려 퍼졌다.
반즈는 여전히 침착하게 고삐를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니, 제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그러다 결국 같은 무리를 학살하는 미치광이로 변해버린 거지.
반즈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맞다. 내가 그 고성에 침입했을 때, 신도들이 뭐라 외치던데... "카르코사 님을 방해하지 마라"였나?
그들을 주도하는 자가 카르코사일지도 몰라.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 도망친 그 사제 말이야.
말을 타고 가던 은발의 기사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뭔가를 느끼고는 얼굴에 쓰고 있던 새 부리 모양의 가면을 단단히 고정했다.
안개 속에서 약초 연기 냄새가 나. 어서 입과 코를 막아!
몰리간도 "까악"하고 울며, 다급히 말 등에 있는 가방 뒤로 숨어들었다.
조심해. 이 약초 연기는 고성 안에서도 나타났었는데, 혼란을 일으키고, 환각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있어.
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날카롭게 울면서 미친 듯이 앞발을 들어 발길질했고, 그러는 바람에 둘은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물체가 그들 앞에 떨어졌다. 썩은 것 같은 잿빛의 마른 나무 조각이 습기 가득한 숲길을 가로막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얼굴은 창백하고 사지는 말라 있었다. 그 "어떤 물체"는 바로 고성에서 봤던 그 검은 로브 차림의 사제였다.
사제의 시체는 피가 다 빠져 있었는데, 과거 연쇄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는 숨이 끊긴 채 앙상하게 말라 있었으며, 창백한 눈동자는 하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
기사가 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겨누었고, 인간도 그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쪽을 봐.
인간은 시체가 떨어진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았다. 나무줄기에 약재처럼 빽빽하게 매달린 "사의(蓑衣)를 거친 고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진 숲속의 거목 위에 어느새 수많은 마른 시체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마치 파리 떼처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놀랄 틈도 없이 사방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썩은 냄새와 뼈가 부딪히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둘을 감쌌다.
크흠... 크흠...
몰려오는 산송장들이 앞길과 뒤쪽 길을 막자, 핏빛 살로 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역병의 기사는 오른손을 펼치자, 손 위에 칠흑 같은 랜턴이 나타났다.
피의 맹세자는 말에서 내려 무기를 꺼내 든 뒤, 기사의 옆에 섰다.
부패 정도를 보니까, 산송장으로 변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악마 기사는 랜턴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며, 핏줄처럼 이어진 마력을 불꽃 속에 섬세하게 엮어 넣었고, 산송장들을 최후의 길로 이끄는 촛불을 켜주었다.
조심하면서 가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