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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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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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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고요한 한밤중,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잠에서 깬 남자아이가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에서 일어났다.

재난 이후, 세상은 낮과 밤의 구분이 사라졌다. 흐릿한 빛이 보육원 숙소를 비추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숨소리가 오가던 방 안은 섬뜩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몸을 일으킨 남자아이는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며 잠기운을 대충 훑어냈고, 비틀거리며 옆 침대를 확인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숙소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

주방에 사탕 훔치러 가면서 날 데려가지 않은 건가?

남자아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구석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고, 얇은 코트를 걸친 채 방을 나섰다.

보육원의 좁고 어두운 복도에 남자아이의 급한 발소리가 메아리쳤고, 그는 조금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한밤중에도 깨어 있을 양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겁났지만, 그보다도 친구들이 모인 비밀 파티에 자신만 늦을까 봐 더 불안했다.

??

윙윙... 윙윙...

안나? 존슨?

어딘가에서 얇은 날개가 진동하듯 윙윙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오자, 남자아이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낮은 진동이 밀려오더니, 보이지 않는 물결처럼 남자아이의 고막을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불편함을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자아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탓일까? 아니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걸까? 남자아이는 지나온 모든 방의 문이 열려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살짝 열려 있는 방문 뒤에는 텅 빈 침대들이 놓여 있었다.

??

윙윙윙윙... 윙윙윙윙...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귓가에 다가왔다.

그는 촛불을 들고 아무도 없는 주방과 거실을 지나 보육원의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아이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까치발을 든 채 무거운 참나무 문의 황동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아래로 당기니 손끝에 닿는 감촉이 생각했던 것보다 매끄러웠다. 매끄러운 감촉 때문인지 문은 평소보다 쉽게 열렸다.

남자아이는 반응할 틈도 없이, 문틈 너머로 모든 것을 보았다.

선혈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고, 그 기이한 붉은 빛이 정원 안의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비추고 있었다.

시체.

꽃이 만발한 정원에 시체들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살찐 흡혈 메뚜기가 아이의 목덜미를 갈라 길고 가는 입을 내밀어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빨아들였다.

천재지변.

참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재지변의 집행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좁은 문틈을 가로질러 떨고 있는 남자아이의 금색 눈동자에 두려움을 새겨 넣었다.

도망쳐!!

겁에 질린 남자아이는 벌벌 떨며 손에 든 촛대를 떨어뜨렸고, 타다 남은 촛농이 문짝에 모두 쏟아졌다. 그러자 뜨거운 불길이 순식간에 남자아이와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세상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냈다.

남자아이는 두 걸음 정도 뒷걸음질 치더니 본능적으로 메뚜기 떼가 없는 방향으로 달아났다.

반즈, 이리 와!!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리더니 익숙한 두 손이 남자아이를 짙은 어둠 속으로 거세게 잡아당겼다.

그 사람은 두 손을 내밀어 남자아이의 얼굴을 감쌌다. 마치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느끼려는 것만 같았다.

다친 데 없지? 다행이야. 겨우 찾았네.

반즈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멜비는 또 다른 여리고 무거운 아이를 그의 곁에 조심스레 눕혔다. 순간, 선명한 피 냄새가 날카롭게 코끝을 찔렀다.

멜비는 촛대를 들고 문 앞으로 다가가, 옆에 걸려 있던 커튼을 힘껏 잡아당겼다. 불길을 더욱 크게 번지게 하려는 의도였다.

침묵 속에 움직이는 멜비의 모습이 반즈의 마음에 낯선 불안을 일으켰다. 양어머니가 이렇게까지 엄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멜비 이모...

반즈는 이 이름을 꼭 불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즈, 어서 안나를 데리고 뒷문으로 도망쳐!

뭐 하려고요?!

안나는 과다 출혈로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였고, 반즈는 안나의 상처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물었다.

묻지 말고, 최대한 빨리 도망쳐!

멜비는 희미한 불빛의 촛대를 높이 들어 올려 달려드는 흡혈 메뚜기의 벌어진 입속으로 거칠게 찔러넣었다.

어서!

등 뒤에서 분노 섞인 양어머니의 마지막 외침이 들렸다. 남자아이는 망설임 없이 안나를 부축한 채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반즈가 등을 돌려 달아난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타다 끊어진 커튼 조각과 메뚜기들이 깨뜨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다가올 천재지변의 서막을 알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안나를 부축하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양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안... 안나, 뛸 수 있겠어?

윽...

옆에 있던 안나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반즈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배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지 마. 내가 지혈해 줄게!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소년은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천 조각을 만들어 상처를 동여맸다.

멜비 이모가 우리에게 약초 지식을 가르쳐 줬잖아, 조금만 버텨, 내가 곧 지혈할 약초를 구해올게.

잠, 잠깐만. 왜 피가 멈추질 않는 거지?

상처를 막으려 하면 할수록, 피는 오히려 끊임없이 솟구쳐 나왔다.

안나의 몸이 순식간에 무겁게 늘어지자, 반즈는 다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웠다.

안나, 여기서 자면 안 돼. 어서 일어나!

하지만 안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

손바닥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흡혈 메뚜기의 날갯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대한 흡혈 메뚜기 한 마리가 두 아이 곁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교하고 복잡한 겹눈으로 그곳의 유일한 생존자인 남자아이를 노려보았다.

메뚜기는 다리로 남자아이의 목덜미를 꽉 잡고는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

윽...

하지만 몇 초 후, 인간을 쫓는 게 지겨워졌다는 듯, 남자아이를 땅에 내던졌다.

쿨럭쿨럭!!

마른 낙엽이 깔린 숲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남자아이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눈앞으로 번져오는 맹렬한 불길을 목격했다.

메마른 숲을 뚫고 치솟은 불길이 하늘을 찔렀고, 보육원에서 터져 나온 화염은 창공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빽빽하게 몰려든 메뚜기들이 불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윽!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남자아이의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자라났다.

이 메뚜기들은 어째서 무자비하게 그녀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일까? 천재지변은 왜 이토록 잔인하게 예고도 없이 닥쳐오는 걸까? 그의 곁에서 아무도 해친 적 없는 사람들을 왜 잠식하는 걸까?

반즈는 이 어처구니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멜비 이모... 안나!!

이 모든 것이 반즈의 어린 마음속에 집착의 씨앗을 심게 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일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는 반드시 이 재난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고 싶었다.

하... 하아...

그는 낙엽이 깔린 숲속에서 바람이 이끄는 방향에 따라 내달렸다. 돌멩이들이 그의 연약한 발바닥에 상처를 냈고, 얼룩진 핏자국은 길게 이어져 그의 기억 속에 스며들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생존자인 그는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달려야만 했다.

반즈가 여덟 살이 된 해, 그의 끝없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축축하고 어두운 악몽에서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자, 머리 위의 태양은 가차 없이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반즈는 따갑게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방금 떠올랐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음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금이... 몇 시지?

그가 중얼거리며 회중시계를 열자, 시곗바늘은 마침 알맞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출발한다면, 다음 역까지 세 시간 정도 걸릴 터였다.

햇빛을 받으며 무심코 고개를 젖힌 반즈는 크게 하품하고는, 여유롭게 주둔지 근처에 쌓아둔 짐을 짊어졌다.

반즈는 리볼버의 탄창을 빼내고 검지를 써서 실린더를 가볍게 돌렸다. 다시 탄창을 밀어 넣자, 쇳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장전음이 울렸다.

좋아, 무기도 멀쩡하네.

은발의 청년은 리볼버를 총집에 넣고, 야수 퇴치용으로 피워두었던 모닥불을 꺼버린 뒤, 약초 향이 밴 새 부리형 가면을 쓰고 다시 길을 떠났다.

"흡혈 메뚜기 재난"이 세상을 뒤흔든 지 십 년이 넘은 지금, 반즈는 여전히 고독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남긴 핏빛 발자취를 따라 걷던 그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기름먹인 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며, 치료용 바늘과 실이 든 주머니를 매단 채, 짙은 안개를 밝히는 랜턴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초를 채운 가면을 쓰게 되었다.

"역병의 의사"가 말없이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의사는 정교한 손놀림으로 메스를 다루며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곤 했지만, 때로는 그들의 영혼이 서서히 스러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역병의 의사는 더 많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지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 들었어? 고성에 사는 미치광이들이 또 옆 마을에서 아이들을 납치했대.

그날, 길 한복판을 걷고 있던 역병의 의사는 지나가던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알지, 그놈들은 숲속에 사는 부족민들인데, 애들을 잡아다가 산 제물로 바치려는 거야!

천사는 대체 왜 그 미치광이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우리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만 괴롭히는 거야?

이 말을 들은 반즈는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산 제물?

산 제물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그 미치광이들은 날마다 성에 틀어박혀서 섬뜩한 흑마법을 연구한다고 들었어. 난 그놈들이 천재지변과 흡혈 메뚜기 재난을 불러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어!

반즈의 미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길을 가던 부부와 작별한 뒤, 반즈는 발길을 돌려 그들이 언급한 고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족민들의 악행을 저지하는 것, 아득한 진실을 찾는 것...

그중 어떤 것을 위하든, 그는 반드시 직접 확인하러 가야만 했다.

도착한 것 같은데...

가면을 쓴 청년의 발걸음이 음산한 고성 앞에서 멈췄다. 정원 둘레에는 백골들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는데, 마치 울타리이자 경고의 표식과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백골들은 인간의 대퇴골이었다.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미치광이일 것 같으니, 최악의 사태도 각오해야겠는걸.

반즈는 총집에서 무기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안전장치를 해제한 뒤, 총구를 오른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서둘러야겠어... 어서 끝내버리자.

반즈는 곧바로 고성의 낡은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뭐야?

어두운 입구엔 누더기를 걸친 몇몇 부족민들이 바닥에 둘러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문이 갑자기 열리자,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얘는 누구지?

왜 날 쳐다보는데? 오늘은 내가 경비를 서는 날이 아니라고!

그럼, 죽여도 되겠네.

그중 대담한 부족민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바닥에 있던 무기를 집어 든 뒤 반즈에게 덤벼들었다.

감히 "카르코사"님의 의식을 방해하다니, 네 피로 그 죗값을 치러라!

바치자. 제물로 바치자!

반즈는 몸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내리치려는 나무 막대기를 피했고, 이어 몸을 돌려 그 신도의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그러자 그 신도는 눈동자가 뒤집히며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의미 없는 저항은 그만.

반즈는 차분하게 칠흑같이 검은 총구를 눈이 충혈된 신도들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그들의 광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마! 구원의 길을 걷기 위해선 이 정도의 시련은 견뎌내야 해... 이게 바로 우리에게 내려진 시련이다!

저놈을 산 제물로 바치자!

벌써 정신이 나간 건가? 어쩌면 약초 연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공기 중에 떠도는 이상한 연기를 예리하게 감지해 낸 반즈는 한 손으로 가면을 꽉 잡은 채, 흥분한 신도들 사이를 헤치고 돌진했다.

극도로 흥분한 신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반즈를 막으려 했지만, 뒤통수 한 대씩 맞고는 단체로 의식을 잃은 채 땅에 쓰러졌다.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끝까지 저항하는 건 구석에 몰린 마지막 신도뿐이었다. 반즈가 다가오는 걸 본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카르코사 님, 저를 지켜주소서...

말을 마치자마자, 그 부족민은 스스로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가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생명이 다한 듯 바닥에 쓰러졌다.

역병 의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이 황당한 "자진 제물" 행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

반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낮춰 벽난로의 불을 끈 다음, 그 아래에서 새까맣게 탄 약초 덩어리를 꺼냈다.

월영 벨라돈나, 은맥 양귀비, 섬망 박하... 모두 흥분을 유발하고 환각을 일으키기 쉬운 약초들이잖아.

설마 이 부족 내부에 약초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이라도 있는 걸까? 지나가던 농부가 말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은데.

탁...

그때, 등 뒤에서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반즈는 재빨리 몸을 돌렸고, 곧바로 총을 꺼내 들었다. 숨겨진 문 뒤에 산양 머리뼈를 쓴 백발의 소녀가 양손이 묶인 채 기어 나오고 있었다.

살... 살려주세요.

소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두 눈에 깃든 공포만은 선명했다. 그건 광기에 잠식된 신도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반즈는 총을 거두고 그녀에게 다가가 묶여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그동안 뭐라도 먹었어?

이틀 전에 잡혀 왔는데, 아직은 괜찮아요. 그런데 그들이 방금 탄쿤과 사시비를 데려갔어요...

그들은 분명 탄쿤과 사시비를 의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할 거예요. 제... 제발 구해주세요.

반즈는 소녀의 몸 상태를 재빨리 살폈다. 몸은 많이 쇠약해 있었지만, 당장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소녀를 벽에 기대게 안치한 뒤, 가지고 있던 약과 음식을 건네주었다.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어디서 거행하는지 알려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간단한 지도를 그려 보였다.

반즈는 소녀가 그려준 지도를 재빠르게 머릿속에 새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있는 신도들은 모두 묶어놨어.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일어날 수 있으면 어서 도망가.

네...

소녀는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가, 반즈가 멀리 걸어갔을 때쯤 힘을 모아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저는 카나리라고 합니다, 하루가 부족의 카나리입니다.

언젠가는 꼭 이 은혜를 갚을게요.

먼발치에 서 있던 반즈는 카나리의 약속을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가면을 고쳐 썼다.

새 부리 모양의 가면을 쓴 역병의 의사는 등불을 높이 들고 음산한 고성의 어둠 속에서 질주했다.

길가에 흩어진 의식 도구들과 핏자국 묻은 뼈들이 섬뜩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의식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시체의 썩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로, 음습한 벽 모퉁이마다 무언가가 숨을 죽이고 잠복해 있는 것 같았다.

반즈는 조심스레 총을 꺼내 들고, 앞에 드리운 짙은 어둠 속을 겨냥했다.

끼히힉!

다음 모퉁이에서 피와 살이 뒤틀린 산송장이 튀어나와 반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즈는 순식간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불꽃 같은 총알이 산송장의 머리를 꿰뚫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런 썩은 시체 같으니!

시체 썩는 악취를 따라가며 반즈는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산송장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릴 때마다 시체들이 차례로 벽에 처박혔다.

하지만 산송장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쓰러진 동족의 시체들을 짓밟으며 끊임없이 다가왔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거친 괴성이 고성 안에 격렬하게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산송장들을 총알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반즈는 곧바로 총을 집어넣고는 오른발로 산송장의 머리를 걷어찼다.

산송장의 일그러진 얼굴이 썩은 살점과 함께 떨어져 나오더니 벽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쓰러진 동족의 시체들을 짓밟으면서까지 달려드는 이유가 고작 생살 한 점을 뜯어먹기 위해서라고?

비참하군... 그렇지만 너희를 용서하겠어.

안식하거라!

반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산송장이 달려들었고, 의사는 순식간에 박살 냈다.

격렬한 전투 속 산송장들이 날뛰는 틈 뒤로, 정체불명의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반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망쳐봤자 소용없어. 그냥 나오는 게 어때?

그림자가 숨은 방향으로 달려간 반즈는 칼을 뽑아 어둠 속으로 던졌다.

!!

어둠 속에서 몸을 움찔하던 그림자는 갑자기 튀어나와 반즈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또 다른 비수가 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

상대가 반격할 의사를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제단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반즈도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지하 깊숙한 제단 위에는 막 숨을 거둔 "제물"들이 놓여 있었고, 공간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제단 위에서는 몇 줄기의 불꽃이 가냘프게 일렁이고 있었다.

검은 로브 차림의 남자가 제단 한가운데에 서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 마!

반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남자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모두 튕겨냈다. 그의 칼날이 허공에서 몇 차례 섬광을 그리자, 총알들은 잘게 부서진 구리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공격을 멈춘 반즈는 신중히 대치하며 그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위대한 카르코사시여,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지만 남자는 반즈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가운데에 서서 묵묵히 기도를 이어갔다. 그러자 제단 위의 불꽃이 갑자기 치솟더니, 불길이 천장을 향해 퍼져나갔다.

상황을 확인한 반즈는 무기를 거두고는 남자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반즈의 공격을 피해냈다.

지금 무슨 의식을 하고 있는 거야? "카르코사"는 대체 뭐지!?

반즈의 공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남자는 기도를 이어가던 중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화르르!

제단 위 불꽃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제물"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켰다. 그러자 피와 살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 흑회색 재가 되었다.

그 광경에 미간을 찌푸린 반즈는 결국 옷 안쪽에 감춰 두었던 은침을 꺼내 들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잠들게 해주마.

반즈가 은침을 뽑은 순간, 등 뒤에서 낯선 한기가 느껴졌다.

!!

살의를 느낀 반즈가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 잠복해 있던 그림자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반즈의 가슴에 칼날을 꽂았다.

강철 칼날의 끝이 가죽 코트를 꿰뚫고 들어가 따뜻한 살결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뼈 아래 숨겨진 내장을 무자비하게 갈라냈다.

하지만 반즈는 그 따뜻함을 오래 느끼지 못했다. 칼자루를 쥔 자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자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았고, 반즈의 피가 공중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흩어졌다.

쿨럭...

무릎을 꿇고 간신히 고개를 든 반즈는 기습한 자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윽...

반즈는 두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지만, 따뜻한 피가 끊임없이 몸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자신을 고칠 수 없는 의사는 결국 가장 무력한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반즈의 시야에 비친 어두운 세상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카나리가 말했던 그 두 아이를... 아직... 쿨럭!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훔친 은발의 의사는 미치광이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외쳤다.

날... 제물로 바쳐라!

...

단 한 명이라도 대신할 수 있다면...

그 아이 대신 날 제물로 삼아라. 저항하지 않겠다. 어차피 저항할 힘도 없어.

반즈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패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이 남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지 모를 양심을 어떻게든 일깨워 보려 했다.

무고한 아이들을 세상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넌 절대...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길한 징조를 본 듯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반즈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 남자의 시선을 좇았다. 어두운 시야 속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남자의 얼굴에 스친 공포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

윙윙윙...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가 반즈의 귀를 스쳐 갔다.

반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살 너머를 바라봤다.

??

윙윙윙...

반즈의 시야 끝자락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번쩍였고, 다음 순간 온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익숙한 핏빛 비가 대지 위로 쏟아졌다.

멀리서 흡혈 메뚜기의 날갯짓이 울렸고, 천재지변의 집행자들이 검은 구름처럼 지상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흡혈 메뚜기의 광란이 지나간 자리에는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땅속 깊이 숨은 커다란 쥐마저 끄집어내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겼다.

익숙한 파도가 다시 한번 반즈를 덮치더니, 이곳에 기억과 꿈속에서 울려 퍼지던 소리가 함께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운명은 반즈에게 거래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단 한 명의 아이도 구하지 못하는구나...

반즈는 지친 몸을 땅에 맡기고 눈을 감았다.

이런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가?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 반즈의 정신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고 의식은 깊은 심연 속에 잠겼다.

...

긴 세월 동안, 운명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가며 시간을 실처럼 엮어갔다.

찰나의 순간, 생명의 나무 아래에 머문 듯했고, 수없이 많은 꽃봉오리가 피고 지는 것을 목격한 것 같기도 했다.

꿈은 요람처럼 반즈를 감싸, 그를 포근한 고치 속으로 데려갔다.

반즈는 따뜻한 태내에서 물방울을 내뱉는 아기처럼 입을 벌렸다.

어느 순간, 반즈는 영혼 깊숙이 새겨져 있어야 할 고통을 "떠올렸다".

고통과 정신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의식의 고삐를 되찾는 순간, 몸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호박석이 산산조각이 났다.

반즈는 눈을 뜨고, 눈앞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

무표정한 소녀 천사가 성좌에 앉아, 반즈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반즈의 꿈에서 끝없이 반복되던 광경이었고, 그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이 악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쿨럭쿨럭... 날 배웅하러 왔나?

반즈는 말을 더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폐에서는 피 섞인 거품만이 터져 나왔고, 붉은 액체가 입가를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소녀 천사는 반즈의 말에 침묵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렸다.

금색 마법진이 빛을 발하자, 수백 개의 차가운 쇠못이 공중에 떠올라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반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쇠못이 떨어지기 전, 소녀는 작별 인사를 하듯 중얼거렸다.

이젠 다 끝났어...

수레바퀴의 회전이 갑자기 멈췄다. 순간 호박석에 가늘고 긴 균열이 생기며 그 틈으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반즈는 찬란한 빛 속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놀람, 망설임, 흥분... 가슴 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어떤 말로도 지금 반즈의 심정을 담아낼 수 없었다.

반즈는 동토 속에서 평생을 숨어 지내던 벌레처럼, 머리 위로 비치는 빛을 보며 봄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햇빛이 자신을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주저했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즈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뻣뻣해진 팔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결국 균형을 잃고,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호박석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듯 부드럽고 온화했다. 반즈는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반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마치 그의 몸속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만 같았고, 이내 새로 생긴 힘이 그의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반즈

모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과 함께, 빛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빛.

어린 새싹이 연약한 껍데기를 깨고 솟아나 반즈의 몸을 감쌌다. 찰나의 순간, 가지가 뻗어나가며 순백색의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만개.

순간, 반즈는 드림캐처에 걸린 풍령 소리가 그의 세계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반즈는 이 소리가 어린 시절 침대 머리맡을 지키던 풍령의 울림인지, 아니면 자신이 악마로 변해가는 징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신생

진흙 속에서 몸을 일으킨 반즈는 저 멀리 비치는 빛을 향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만 물었다.

반즈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인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자!

반즈

...

잠시 더 망설일 시간이 있었지만, 반즈는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잡아들었다.

반즈

좋아. 날... 네가 바라는 그곳으로 데려가 줘.

쾅!

성당의 돔이 뚫리더니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선 훤칠한 그림자가 끝없이 쏟아지는 쇠못들을 어깨로 막아냈다.

회색 망토를 걸친 인간이 몸을 돌려 반즈의 손목에 박힌 쇠못을 빼냈다. 그리고 새롭게 자유를 얻은 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깊은 꿈에서 깨어난 죄인은 천천히 인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반즈는 눈을 들어 혼돈의 심연에서 대화한 구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은 다시 태어난 "신의 아이"를 받아들였고, 계약이 성립되었다.

붉은 실이 두 사람의 혈관을 타고 심장에 닿자, 맥박이 광란처럼 요동쳤다.

마력이 빚어낸 총기가 둘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의 손가락이 맞물린 채 그들은 흔들림 없이 허공의 천사를 겨냥했다.

"역병의 기사"의 이름으로...

"역병의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레이 레이븐의 이름으로.

"역병의 기사"&그레이 레이븐

우린 너희들의 운명을 파괴할 것이다.

들리느냐? 창밖의 폭풍이 터뜨리는 분노를. 이는 해와 달이 정의의 몰락을 꾸짖는 소리다.

눈을 뜨고 보거라. 세상이 뒤집히고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그 찬란한 순간을.

<size=40>네가 방황하고 있다면, 우리의 이름을 크게 외쳐라.</size>

<size=40>우리는 다시 일어나 모든 것을 밝히는 등불을 들 것이다.</s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