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4 이상을 가둔 감옥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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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4-13 차가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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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 속, 한 소녀가 쓸쓸하게 엄마의 묘비 앞에 서 있었다.

엄마의 모든 것이 차가운 글씨로 변해 꽃으로 둘러싸인 묘비에 새겨졌다.

이사벨·에버렛, 이곳에 잠들다.

차가운 빗줄기가 델로리스의 머리칼과 손에 든 꽃다발을 적셨지만, 그녀는 여전히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아가씨, 인제 그만 돌아가시죠. 비가 많이 옵니다.

매년 이날만 되면 혼자 하루 종일 이곳에 서 계시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아신다면 분명 마음 아파하실 겁니다.

에드먼드 집사, 이 묘비 아래에 엄마의 시신이 없다고 하던데,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에요?

누가 그러던데요, 아빠가 여기에 빈 관만 묻었다고.

...

전 금시초문입니다, 아가씨.

델로리스는 지친 기색을 보이며 냉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겠죠. 그게 사실일 리 없잖아요. 엄마는 분명 이곳에서 편히 쉬고 계실 거예요.

...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오늘은 아가씨의 성인식이 있는 날입니다.

저택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많은 분이 오늘 밤 연회에 함께해 주실 겁니다.

알겠어요.

델로리스는 슬픔 어린 눈길로 어머니의 묘비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 밤 연회에는 여느 성대한 파티와 달랐다. 밤새 이어지는 웃음소리도, 떠들썩한 분위기도 없었고,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노래와 춤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옷차림의 손님들은 짧은 인사와 형식적인 식사를 마친 뒤,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둘 핑계를 대며 떠나갔다. 그렇게 저택 밖 주차장은 다시 텅 비었다.

에버렛 가문의 델로리스 성인식은 화려함 속에 스며든 쓸쓸함과 함께 조용히 막을 내렸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델로리스는 긴 테이블 끝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정성껏 준비된 음식들은 이미 식어버렸고, 생일 케이크 위의 초에는 불도 붙이지 않았다.

성인식에 참석했던 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 화려하지만 생기라곤 찾을 수 없는 저택에 델로리스는 홀로 남았다. 델로리스의 머릿속엔 손님들이 나누던 속삭임만 맴돌고 있었다.

에버렛 가문의 주인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외동딸의 성인식인데 얼굴도 안 비추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지. 저 어린애를 내세워 홀로 이 많은 손님을 맞이하게 한다니. 그 집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걸!

허! 다들 모르고 있었나 보네. 그 "라이너스 님"이라는 작자 말이야. 명문가 출신은 무슨, 그냥 얹혀 들어온 처가살이 신세라고 하던데!

듣자 하니 예전에 무슨... 인간의 의식을 기계체에 옮기는 그런 연구를 하던 괴짜였는데, 일자리도 구하지 못해서, 밥도 사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대.

그러다 에버렛 가문의 이사벨 아가씨 눈에 들게 돼서 연구를 계속하라며 돈을 퍼부어 준 것도 모자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까지 하게 된 거라지 뭐야!

참 별일이네, 외모 하나로 먹고사는 녀석이네? 운도 좋아... 아내가 죽고 나니 하루아침에 에버렛 재단의 주인이 된 거잖아!

이사벨 부인도 참 박복하지. 기껏 재단을 물려받았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불치병에 걸리고 말이야. 그 뒤로는 내내 휠체어 신세를 지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잖아.

그것만이 아니야. 그자가 아내 시신을 집에 두고 무슨 "이상한 실험"을 한다던데?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쉬, 쉿... 조용히 해! 이 집 딸이 저기 있잖아. 들으면 어쩌려고...

이 집 딸도 참 불쌍하지. 엄마는 죽고, 아빠는 괴짜야. 이건 뭐... 부모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소문에 의하면, 엄마의 병이 유전병이라던데... 그럼, 이 집 딸도 똑같은 병에 걸리는...

...

델로리스는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이 불쾌한 말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했다.

델로리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항상 그랬듯, 집사가 조용히 델로리스의 뒤에 서 있었다.

에드먼드 집사님.

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저와 함께 성인식의 개막 무도회를 춰 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그 역할은 원래 아버님께서 하셔야 하는 것으로, 감히 제가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이 저택의 집사일 뿐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아빠를 본 지 정말 오래된 것 같은데요.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도, 아빠는 늘 실험실에만 계시잖아요.

에드먼드 집사님, 사실 저는 그동안... 집사님을 "아빠"라고 생각해 왔어요.

절 걱정해 주고, 지켜주신 건 집사님뿐이었잖아요.

...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언제까지나 아가씨께 충성을 다할 겁니다.

집사는 델로리스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의 늙은 목소리에는 울컥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델로리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생일 케이크 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일렁이는 불빛이 델로리스의 얼굴을 비추었다.

촛불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델로리스는 소원을 비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고는 흔들리는 촛불을 껐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에버렛 가문의 일에 관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빠가 언제까지나...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게 둘 수는 없어요.

델로리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뒤따라오려는 집사를 멈춰 세웠다.

에드먼드 집사님, 괜찮아요. 아빠한테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집사는 굳이 함께 가지 않으셔도 돼요.

몸을 돌린 델로리스는 저택의 지하실 쪽으로 혼자 걸어갔다.

델로리스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사용이 시작된 아빠의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여느 때처럼 굳게 닫혀 있었고, 아빠는 단 한 번도 델로리스가 이곳에 들어오는 걸 허락한 적이 없었다.

델로리스, 아빠 허락 없이는 방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두꺼운 문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딘가 이상했다.

다들 뒤에서 아빠를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그리고... 우리 집안을 두고 뭐라고 말하는지 아냐고요!

델로리스는 마음속 불쾌함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아빠는...

아빠, 들어가게 해주세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델로리스의 앞에서 무거운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빠는 한층 더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델로리스는 그의 얼굴에 깃든 표정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아빠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네 엄마는 멀쩡히 살아 있어! 델로리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라고 했니?

자, 와서 네 엄마 옆을 지켜줄래.

아빠의 말투에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온화함"이 담겨 있었다. 오래전, 어린 델로리스에게 말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빠는 눈앞에 서 있는 딸이 이제 어엿한 소녀가 되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델로리스는 망설이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실험실 안으로 들어섰다.

델로리스가 생전 처음 발을 들인 이곳은 창백한 불빛 아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험 기구와 온갖 기괴한 기계체들로 가득했다.

거대한 실험실 한가운데, 수많은 관에 둘러싸인 기계체 한 대가 실험 캡슐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체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이너스는 그 기계체에게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이사벨, 일어나봐. 우리 딸이 왔어.

아빠의 목소리가 잠들어 있던 기계체를 "깨운" 듯, 그것이 천천히 눈을 떴다.

생기라곤 없는 시각 모듈이 방 안을 천천히 훑다가, 이내 눈앞의 델로리스에게 고정되었다.

기계체가 천천히 입을 열더니, "엄마"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톤과 말투는 전혀 인간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

오늘 날씨는 맑음이고, 기온은 25도입니다.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기체 모듈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기 전에 반드시 "정비 모드"로 전환하십시오.

잘 자라, 우리 아가.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행복이 너와 함께할 거야.

장미 한 다발, 백합 한 다발을 우리 아가가 눈 뜨면 전부 다 줄게.

기체 코어 온도가 정상 수치를 벗어났습니다. 자가 복구 모드를 시작합니다.

복원 중입니다. 복원 중입니다. 복원 중입니다.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

기계체가 차가운 목소리로 두서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델로리스는 그 익숙한 음성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델로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내디뎌, 기계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 엄마 맞나요?

정말... 이 안에 있는 거예요?

델로리스, 엄마야.

이리 와, 엄마한테 와.

엄마...

델로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엄마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불러본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기계체가 델로리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예전에 어머니가 항상 그녀를 맞아 주던 익숙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

델로리스는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기계체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차가운 금속으로 된 몸이었지만, 델로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기계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울지 마, 우리 딸.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델로리스는 기계체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감촉은 차가웠지만, 그 다정한 손길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기계체의 두 손이 부드럽게 델로리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곱게 땋아 내렸다.

기계체는 델로리스의 머리를 계속 땋으며, 부드럽게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 세상의 모든 따스함과 행복이 너와 함께할 거야.

장미 한 다발, 백합 한 다발을 우리 아가가 눈 뜨면 전부 다 줄게.

"엄마"의 품에 안겨 어린 시절 들었던 자장가를 들으며, 델로리스의 마음은 잃었다가 되찾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인격 데이터의 편차가 감지되었습니다. 편차율은 14%입니다.

머리... 엉망... 엄마... 가... 빗겨... 게.

편차율은 36%입니다.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엄마? 왜 그러세요? 엄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델로리스는 "엄마"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되돌리려 했다.

아!

머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델로리스는 기계체의 무릎에 기대고 있던 자리에서 본능적으로 벗어났다.

기계체의 금속 손가락에는 델로리스의 머리에서 강제로 뽑힌 머리카락이 뭉치로 감겨 있었다.

!!

당신은 우리 엄마가 아니에요!

깜짝 놀란 델로리스는 손으로 입을 막고는 터져 나올 듯한 비명을 간신히 억눌렀다.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우리 딸 머리가 엉망이구나. 엄마가 머리 빗겨줄게.

그 기계체는 여전히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엄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온기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들려오는 건 차갑고 기계적인 반복뿐이었다.

델로리스는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생명이라곤 찾을 수 없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이 "괴물"이 두려웠다.

저건 기계체일 뿐, 진짜 엄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아빠가 델로리스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뒷걸음질 치려는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니?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는데,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고 싶지 않은 거니?

대체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손님들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었어요. 아빤 계속... 계속 엄마를 가지고 실험했던 거잖아요! 엄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델로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절규했다. 하지만 아빠는 실험 캡슐 속 기계체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딸을 향해 "쉿"하는 손짓을 했다.

쉿, 엄마가 시끄럽다고 하잖니.

라이너스는 무너져 내린 딸을 개의치 않고, 기계체를 향해 몸을 돌린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라이너스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인격 파라미터와 성격 모델은 왜 계속 조정에 실패하는 거야? 이상해. 분명 무언가가 잘못됐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다 떠올려 봤어.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뭐가 부족한 걸까?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거야?

이사벨, 말해줘.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거야? 제발 알려줘.

라이너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실험실 안을 정처 없이 맴돌았다.

그러다 이따금 멈춰 서서는 예전의 진짜 "인간"이자, 진짜 "아내"라도 되는 듯 그 기계체에 다정히 말을 걸었다.

라이너스는 기계체를 몇 번이고 다시 조정하며, 기계체가 내뱉는 음성 안내 하나하나에 신중히 귀를 기울였다.

정비 모드로 전환합니다. 의식 데이터에 관한 자체 검사를 시작합니다.

...

의식 데이터에 결함이 감지되었습니다. 복원이 필요한 핵심 파라미터의 비율은 23%입니다.

라이너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왜 이런 거지?

모든 의식 데이터의 전송과 시뮬레이션을 마쳤는데... 왜 아직도 결함이 발생하는 거야?

찾아야 해. 반드시 찾아야 해. 사라진 조각이 어디 있을 거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이사벨, 말해줘. 가장 중요한 그 의식 조각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라이너스... 당신과 함께여서, 난 정말 행복해.

나에겐 당신과 우리 딸... 델로리스가 있잖아.

정말 몇 년이라도 더 살아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어.

아빠!!!

저건... 저건 엄마가 아니라고요!

아빠 뒤에 무릎 꿇은 델로리스가 무너져 내린 채 목 놓아 울부짖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던 라이너스는 딸의 말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라이너스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딸을 바라봤다.

라이너스는 갑자기 눈앞에 있는 딸이 이사벨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알겠어. 이제야 알겠어. 실험이 어디서 막혔는지, 드디어 알아냈어!

인격 파라미터 조정이 실패한 건, 확보한 의식 데이터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것만 채워 넣으면 되는 거였어.

그래. 이사벨의 인격에서 부족한 부분의 데이터를... 채워 넣기만 하면, 이사벨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어.

하하하, 바로 이거였어!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라이너스는 갑자기 델로리스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의 눈에는 광기 어린 기쁨이 번뜩이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델로리스를 억지로 다시 그 기계체 옆으로 끌고 갔다.

당신이 델로리스를 낳았잖아. 그러니 델로리스는 당신 삶의 연장선이야. 인격 데이터의 일부가 델로리스에게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지금 당장 델로리스를 당신에게 돌려줄게. 그러면 분명 좋아질 거야. 곧 괜찮아질 거야.

아빠!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미쳤어요? 이거 놔요!!!

아빠의 섬뜩한 말 속에 광기 어린 계획이 숨어 있음을 깨달은 델로리스는 절망했다.

눈앞에 있는 아빠는 더 이상 델로리스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라이너스는 딸을 실험 캡슐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무거운 격리문으로 부녀 사이를 갈라놓았다.

곧장 실험대로 돌아간 라이너스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작업 패널의 각종 파라미터를 조정했다. 그러자 그 기계체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아빠!!

아빠가 조작하자, 또 다른 기계체의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그 기계체는 차가운 음성으로 이 광기 어린 계획의 진행도를 알려주었다.

시스템 알림

피실험자의 뇌파 활성 데이터 검사를 시작합니다. 검사 진행도 21%... 57%... 88%...

전송할 인격 데이터의 활성 상태는 양호합니다. 의식 전송 실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피실험자의 인격 데이터 분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이 과정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델로리스는 투명한 실험 캡슐 문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두드렸다. 손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두드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붉은 자국이 유리 위로 서서히 번져갔지만, 라이너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 아빠 딸이잖아요! 아빠!

라이너스의 손가락이 작업 패널 위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 차가운 나머지, 델로리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

델로리스, 넌 애초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네 엄마는 원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널 낳으려다 더 안 악화된 거였어.

네 엄마와 난 원래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었다. 하지만 네가 갑자기 생기면서, 네 엄마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지. 어떤 일이든 너부터 챙기며 생각했고, 자기 몸은 전혀 돌보지 않았어.

네 생명과 네가 가진 모든 건, 전부 네 엄마가 자신을 희생해서 이루어 준 거야. 그러니, 이제 네가 그 모든 걸 엄마에게 돌려줄 차례야.

시스템 알림

피실험자의 인격 데이터 분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이 과정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안 돼요!!!

곧 끝나. 이사벨, 정말 곧 끝날 거야...

탕.

총성이 울리자, 라이너스의 조작이 멈췄다. 그는 가슴에서 번지는 피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또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아가씨!

집사는 실험대로 달려가 실험 캡슐의 문을 열었고, 풀려난 델로리스를 뒤로 숨기며,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고

곧이어 자신의 옛 주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죽어가던 라이너스는 바닥에 긴 핏자국을 남기며, 기이한 기계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기어갔다.

...

이사벨...

마침내 라이너스의 손끝이 기계체에 닿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라이너스는 자신의 삶과 이사벨의 삶을 이어주는 기계의 전기회로에 애절하게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발밑으로 피가 흘러내리더니 서서히 붉은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이사벨... 무서워하지 마.

라이너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두려워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

라이너스의 힘없는 목소리가 거기서 뚝 끊겼다. "사랑하는 이"를 꼭 끌어안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다시는 숨을 쉬지 않았다.

정비 모드로 전환합니다. 의식 데이터에 관한 자체 검사를 시작합니다.

자체 검사... 자체 검사... 자체 검사...

숨이 멎은 아빠와 의미 없는 말만 되풀이하는 "엄마"의 모습은 한 폭의 기괴한 그림 같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델로리스는 집사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고, 극심한 억울함과 두려움에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저 오열할 뿐이었다.

울다 지친 델로리스는 온몸에 힘이 다 빠졌지만, 집사의 옷깃을 붙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이제 괜찮습니다.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남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집사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주저앉은 델로리스를 조심스럽게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델로리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에는 공포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저... 일어나질... 못 하겠어요.

델로리스의 눈에는 전보다 더 깊은 두려움이 어렸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델로리스는 몇 번이고 일어서려 했지만, 매번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다, 다리에 감각이 전혀 없어요.

에드먼드 집사! 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델로리스는 절망에 빠져 소리 지르며, 자기 다리를 거칠게 내리쳤다.

그날 이후, 델로리스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에버렛 가문을 뒤덮었던, 델로리스가 잊어버릴 뻔했던 그 먹구름이 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그녀의 머리 위로 조용히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