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14-14 어두운 밤
몇 년이 흐른 지금, 한때 번영을 자랑하던 에버렛 저택은 이제 스산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오가는 손님들의 발길은 끊겼고, 호화로운 저택에서는 웃음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저택의 주인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외동딸마저 중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이 쇠락한 저택의 지하에서 거대한 비밀 실험실이 밤낮으로 불을 밝힌 채, 긴박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젊은 연구원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실험 패널을 조작하면서도, 이따금 천장의 감시기 카메라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희미한 붉은빛을 깜빡이는 그 장치가 두려운 것 같았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총 담당자"가 늘 감시기를 통해 이곳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연구원이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실험에서 실수를 저지른 몇몇 선배들이 집사처럼 보이는 인물에게 불려 나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높은 급여를 받는 만큼, 업무 스트레스도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몇몇 선배들은 이제 더 이상 에버렛 재단의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연구원은 자신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연구원은 자신이 아직 젊고, 앞으로의 과학 연구의 길에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고, 이 연구 프로젝트야말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라고 여겼다.
연구원은 몇 년 전 갓 졸업했을 때처럼, 이름 없는 실험실을 전전하며 허드렛일만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묻어두는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젊은 연구원은 더 높은 과학의 경지에 오르기를 갈망했기에, 매일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연구원은 모든 데이터와 실험 과정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었다.
...
연구원은 생각을 정리하고 실험 데이터 조정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어서 그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시뮬레이션 의식 데이터를 기계체에 옮기는 실험을 다시 시작했다.
시뮬레이션 의식 데이터 매칭을 시작합니다. 제167차 연동 테스트입니다.
연구원의 조작에 따라 실험 패널의 데이터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연구원은 변동하는 데이터 진행률 표시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임계점을 돌파하여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고, "매칭 성공" 수치에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을 기대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이번엔 반드시...
연구원은 실험 데이터에 힘을 불어넣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잠시 뒤, 일정하게 움직이던 진행률 표시줄이 갑자기 멈췄다.
이후 초록색 표시줄이 빠르게 되돌아가더니, 눈부신 붉은색으로 변했다.
큰일 났다! 매칭 계수가 떨어지고 있어. 어서 신호 대 잡음비를 낮춰야 해!
붉은색 진행률 표시줄은 여전히 되돌아가고 있었다.
왜 아직도 떨어지는 거야?! 안 돼. 이래선 안 돼!
다시 신호 입력 강도를 높이고... 잡음을 줄이고...
진행률 표시줄이 결국 시작점으로 되돌아갔다.
...
연구원은 실험 패널에 잇따라 나타나는 오류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167차 연동 테스트... 실패했습니다.
연구원은 풀이 죽어 힘없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이게 몇 번째 시도인지... 기존 파라미터를 아무리 조정해도, 시뮬레이션 의식 데이터를 기계체에 불러오기만 하면 정보 노이즈가 급격히 증가해 버려...
실험 파라미터를 어떻게 바꿔도, 전혀 매칭이 안 돼.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거야. 상부에 보고해야겠어.
그때, 같은 실험실에 있던 몇몇 동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다가왔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이 프로젝트가 안 되는 게 우리 잘못도 아니잖아. 자책하기보다는 프로젝트 자체를 의심해 봐야지.
맞아. "인간의 의식 데이터를 기계체에 옮긴다"라는 건,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최첨단 개념의 프로젝트잖아. 이렇게 빨리 성과를 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어.
듣기로는 재단에서 예전에 이 프로젝트에 투자했다가 별다른 진전이 없어서 중단했다더라.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지금 다시 시작하다니 참 별일이야.
알 게 뭐야. 어차피 월급 잘 나오잖아, 재단은 돈이 남아돌고 말이야.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나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괜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어?
돈을 많이 주긴 하는데, 그래도 이 비밀 유지 협의는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외출도 금지하고, 외부인과 연락도 금지하는 거면, 이건 그냥 감옥살이잖아! 우리도 엄연히 과학 연구원인데...
저번에 그 선배들, 실험 데이터가 별로라서 잘린 거라던데? 어디로 이직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연락도 안 되더라.
에휴, 그런 거 생각해 봤자 소용없어. 그냥 하던 일이나 하자.
척 봐도 연차가 있어 보이는 선배 몇몇이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저마다 떠들어댔다. 그들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연구원의 침울한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불만을 쏟아낸 그들은 젊은 연구원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일에 완전히 이골이 난 선배들은 딴짓하는 법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매일 바쁜 척하며 프로세스대로 한 번 대충 돌린 뒤, 엉터리로 꾸며낸 오류 데이터를 제출하곤 했다.
진정한 연구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젊은 연구원만이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젊은 연구원은 큰 결심을 한 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자신의 단말기로 내선 번호 하나를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은 "에드먼드"라 불리는 그 남성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의 실질적인 담당자이며,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는 모든 절차를 그와 함께 진행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원은 에드먼드의 뒤에 진짜 실권자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쩐 일이죠? 실험실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에드먼드 님, 다름이 아니라... 총괄님께 보고드릴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됩니다. 어려운 게 있으면 저한테 말하고요.
하지만 실험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전혀 돌파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의 연구 기록을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됩니다!
젊은 연구원은 자신이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 여러 실험 방향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에드먼드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연구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팀 전체가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단말기 너머의 에드먼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 님? 듣고 계신가요?
곧 단말기 너머에서 새로운 통신이 연결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이어서 매우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봐요.
저도 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연구원은 통신에 갑자기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여 그는 다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제가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의식 전이 실험의 데이터 매칭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파라미터를 아무리 조정해도, 계속 정보 노이즈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그 젊은 여성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연구원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죠?
연구원은 단말기를 꽉 쥔 채, 용기를 내어 자신의 결론을 말했다.
제 결론은 이 실험이 단시간 내에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래요? 알겠어요.
훌륭하네요, 당신은 참 생각이 깊은 연구원인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의 연구 책임자로 임명하죠.
에드먼드 집사님, 저 연구원을 데려와 줘요.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그와 이야기할게요.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이전 데이터 보고서를 정리해서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단말기 너머의 젊은 여성이 통신을 끊었다.
곧,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 젊은 연구원은 의욕이 넘쳤다. 게다가 "연구 책임자"로 승진한다는 소식은 그에게 더욱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했다.
연구원은 재빨리 관련 데이터를 정리해, 손에 든 단말기에 옮겨 담았다.
동료들의 의아한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연구원은 잠시 후 어떻게 보고할지만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드가 나타나 젊은 연구원을 실험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둘은 미로처럼 얽힌 저택의 복도를 한참 동안 걸었다.
저... 에드먼드 님,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저는 프로젝트 총괄님께 보고드리러 가는 거라고 들었는데요?
바로 저 앞에 계십니다.
에드먼드의 싸늘한 표정에 젊은 연구원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연구원을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저택 지하실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오는 길에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윽고 막다른 어두운 지하 복도가 나타났다. 시선 끝에는 녹슨 거대한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문이 천천히 열리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퀴퀴한 냄새가 섞인 습기가 흘러나왔다.
총 담당자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 보세요.
여긴 도대체 어디죠? 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전 여기 일하러 온 거지, 당신들 같은 부유한 자들에게 해코지당하러 온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더는 못 하겠어요!
연구원은 용기를 내어 에드먼드의 말을 거절한 뒤,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등 뒤에서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구원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돌아서자, 에드먼드가 들고 있는 검은 총구가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들어가라고요.
에드먼드가 연구원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연구원은 그대로 발을 헛디뎌 어두운 방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공포에 질린 연구원은 자신이 잡동사니 더미 위로 쓰러진 것을 느꼈다. 문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그는 간신히 그 물건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평소에 자신이 입던 실험복 몇 벌과 신분증 몇 장이 있었다. 그런데 신분증에 적힌 이름들이 이전에 "사라졌던 선배들" 것이었다.
!
탕. 탕.
총성이 몇 차례 울리자, 연구원의 비명이 삼켜졌다.
잠시 후 복도로 나온 에드먼드는 손을 뒤로 뻗어 무거운 문을 닫아버렸고, 고개를 들어 머리 위 감춰진 감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는 이제 실험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몇 시간 뒤, 여전히 공포에 질린 연구원은 저택 밖 숲에 숨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받으세요. 당신의 물건은 전부 이 가방에 넣어뒀습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다가 다른 도시로 가서 살아요.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마세요.
실험실에 남아 있는 이들도 기회를 봐서 하나씩 내보낼 겁니다. 명심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연락해선 안 됩니다.
당신들을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한 가지만 약속하세요.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겠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요... 왜 당신은 도망치지 않는 거죠?
절 구해주셨으니 착한 분이시겠죠! 지금이 기회예요. 어서 같이 도망쳐요!
하지만 에드먼드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멀리 저택을 바라보았다.
제가 떠나면 아가씨를 돌볼 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가씨는 오래 살지 못하실 겁니다.
에드먼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젊은 연구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석양 아래,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에버렛 저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드먼드는 말없이 저택 앞에 서서 꼭대기 층의 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델로리스가 조용히 에드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먼드 집사님, 이게 당신이 말했던 "충성"인가요?
델로리스는 들어오는 집사를 평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집사님께서 모두를 풀어줬던 거네요. 이전의 연구원들도 같은 방식이었겠죠.
제 계획을 방해하고, 죽어야 할 자들을 풀어주시다니... 이게 집사님이 말했던 충성인가요?
아가씨, 차가 식어버렸습니다. 새것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나이 든 집사는 허리를 굽혀 찻상 위의 식은 찻잔을 새것으로 바꾸려 했다.
대답하세요!
에드먼드가 끝내 대답을 피하자 격분한 델로리스는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두꺼운 카펫이 충격을 흡수해 버렸고, 찻잔은 바닥을 굴러갈 뿐 깨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발... 더는 실험을 계속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드먼드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직접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실험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한 모든 연구원의 결론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 부디 자신을 놓아주십시오. 저는...
저는 아가씨가 아버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거운 실험실 문, 희미한 조명 그리고 기괴한 기계체를 끌어안은 음울한 남자까지...
에드먼드는 자신이 평생 돌봐온 아가씨마저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 말씀은 그럴듯하시네요. 하지만 실은 에버렛 재단의 유산이 탐나서 그러시는 거겠죠!
이미 알고 있었어요! 집사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걸요! 까마귀 떼처럼 제가 굴복하길, 제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델로리스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고, 에버렛 재단을 노리는 "가족"들과 끊임없이 다투면서, 그녀는 의심이 가득한 괴팍한 성격이 되어버렸다.
아가씨, 그게 아...
쿵.
에드먼드를 향한 대답은 그의 앞으로 날아온 찻주전자였다.
하지만 찻주전자는 깨지지 않았다. 델로리스의 안전을 위해 깔아둔 두꺼운 카펫이 깨지기 쉬운 찻주전자를 그대로 받아냈다.
...
델로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굴러가는 찻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아가씨, 별일 없을 겁니다. 제가 가장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오겠습니다.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찻주전자를 집어 든 에드먼드는 델로리스를 진정시키려 했다.
당연하죠. 전 죽지 않을 거예요.
델로리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 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집사님은...
!
언제부터였는지, 검은 총구가 집사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탕.
아가씨...
전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장담할 수 없겠네요, 우리 에드먼드 집사님.
델로리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힘겹게 방을 빠져나가려는 집사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입가를 가리며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에드먼드 집사님, 전 집사님이 너무 미워요.
아빠, 엄마는 돌아가셨고, 저... 저도 곧 죽겠죠. 그런데 어째서 집사님은 이렇게 멀쩡하신 거죠? 왜 이렇게 건강하신 거예요?
전 모두가 미워요. 건강한 인간이든, 병에 걸리지 않는 기계체든 전부 다 밉다고요. 저만, 저 혼자만 이 저택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 모든 걸 가진 게, 왜 제가 아닌 거죠?!
컥...
입가로 피 섞인 거품을 흘리며 에드먼드는 닿을 수 없는 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카펫에 스며들고 있었다. 델로리스는 에드먼드의 싸늘한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집사님은 도망칠 수 없어요, 여기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연약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일어난 델로리스는 빠른 손놀림으로 집사의 시신에 실험 기기를 하나씩 연결하기 시작했다.
델로리스는 시스템의 지시를 따라 기기를 조작하며, 광기 어린 눈빛으로 제어 패널에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데이터들을 훑어보았다.
실험 진행률 표시줄이 느리게 차오르다, 결국 "임계치"를 돌파했다. 하지만 몇 초 뒤, 다시 서서히 멈춰 버렸다.
쳇.
델로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제어 패널의 버튼을 계속 눌렀다.
그러다 잠시 후, 멈춰 있던 진행률 표시줄이 느리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의식 데이터를 불러왔습니다. 의식 데이터 매칭 계수는 45%입니다. 일부 기억 데이터가 손실되었습니다.
강제 구동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진행하실 경우, 일부 기억 데이터는 영구적으로 손실됩니다.
델로리스는 망설이지 않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아... 아가씨.
데이터 로딩 막대가 끝에 다다르자, 델로리스가 미리 준비해 둔 반대편의 기계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가씨... 안녕... 안녕하십니까?
에드먼드?
안녕... 하십니까. 저는 에드먼드, 당신의 집사입니다.
무슨... 무슨 일이 있든... 전 언제까지나 아가씨께 충성을 다할 겁니다.
하, 그래. 그건 당신이 전에 했던 말이잖아. 에드먼드, 당신은 정말 언제까지나 나에게 충성을 다할 거지?
기계체가 캡슐에서 빠져나와 소리 없이 델로리스의 뒤에 자리 잡았다.
그래야 마땅하지, 에드먼드.
지난 일은 묻지 않을게. 하지만 당신이 그 연구원들을 놓아줬으니... 이제 당신이 그들의 몫까지 해내야 돼.
과거의 실험 데이터와 프로세스가 파일화되어 기계체의 전자두뇌에 입력되었고, 델로리스의 명령에 따라, 기계체는 희망 없는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에버렛 저택은 여느 때처럼 스산했다.
델로리스는 "에드먼드"를 불러들였다.
현재 실험 진행도로는 턱없이 부족해. 이 프로젝트에 더 많은 기계체를 투입해야겠어.
가장 강력한 기계체만이 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 기계체들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준비해야겠네.
델로리스는 눈앞의 스크린에 비친 "격투장"의 영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적막했던 에버렛 저택은 뜻밖에도 새로운 유행의 발원지가 되었다.
기계 격투장! 전율할 만한 경험! 피가 끓어오르는 절대적 쾌감을 보장합니다!
"격투장"의 짜릿한 쾌감을 느껴보고 싶으십니까? 호르몬이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맛보고 싶으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에버렛 격투장으로! 마음에 드는 격투사를 선택하시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 주세요!
열정과 피가 맞부딪치는 순간! 당신의 뜨거운 피를 폭발시키세요!
가상 사회자의 목소리는 두꺼운 유리에 막혀, 꼭대기 층 관제실에 이를 때쯤 다소 왜곡됐다.
...
감시기 스크린 속 격투장에서는 기계체들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코뿔소를 닮은 기계체의 외뿔이 장검으로 변했다. 이어 분노에 찬 포효를 터뜨리며, 맞은편의 인간형 기계체를 향해 돌진했다.
눈 깜짝할 사이, 무기를 들고 있던 인간형 기계체가 강철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일부러 붉은색으로 만든 오일이 사방으로 튀며,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더 "자극"적인 "경기"를 요구했다.
에드먼드, 저것 좀 봐.
네. 주인님.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우린 더 많은 실험 재료를 확보할 수 있고, 저 멍청한 관객들에게서 돈도 뜯어낼 수 있잖아.
일거양득 아닌가?
맞습니다. 주인님.
격투 경기가 끝나자, 관객들은 환호하며 다음 희생자가 등장할 순간을 기다렸다.
그럼, 이 최고의 오락을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모두 좋은 밤 되십시오!
가상 사회자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새로운 격투 경기가 다시 막을 올렸다.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기병창을 든 여성 기계체가 격투장 중앙의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격투장으로 향하는 그 여성 기계체를 바라보며, 델로리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떤 서프라이즈를 안겨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볼까? "베로니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