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4 이상을 가둔 감옥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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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4-11 꽃바다가 만개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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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목표, 구사할 기술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기계 격투사였던 시절 베로니카의 의식 모듈에 각인된, 절대 지워지지 않는 데이터였다.

그러나 수많은 길이 나타났을 때,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베로니카는 이와 같은 목표를 세워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정밀한 기계체보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사고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답을 알려줄 인간은 더 이상 없었다.

한때 그녀에게 수많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인간 소녀는 이제 영원히 응답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몸에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모듈이 없기 때문에, 기억과 생각을 저장할 수 없고, 연약한 육체에서 생명이 한 번 사라지게 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 왜 아직도 생명을 잃은 인간의 몸을 놓아주지 못하는 걸까?

베로니카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고, 그저 설원을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눈꽃이 세라의 몸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지만, 더 이상 녹아내리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매서운 눈보라를 맞으며 황무지에 발자국을 남겼다.

기계체의 의식 모듈에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측정하는 데이터만 존재할 뿐, "시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흩날리던 눈꽃이 부드러운 빛깔의 무언가로 바뀌었다. 그건 세라가 베로니카에게 "꽃잎"이라고 알려주었던 거다.

베로니카는 바람 속에서 확연히 달라진 온도와 습도를 느낄 수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면서 저 멀리 하늘에서 따스한 아침 해가 다시금 솟아올랐다.

주변의 들판은 어느새, 설원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수많은 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저 멀리 하늘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산들바람이 무수한 꽃잎을 실어 와, 기계체의 생체공학 피부를 부드럽게 스쳐 갔다.

베로니카

...

"꽃"...

꽃은 참 아름다워, 들판에 꽃이 활짝 피어 있으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하지만 여긴 꽃이 없고, 금속뿐이지. 꽃이 들어온다 한들, 결국 표본이 될걸...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내가 꼭 꽃을 보여줄게. 우리 함께 꽃이 가득 핀 산과 들판으로 가자!

베로니카

...

베로니카는 품에 안고 있던 친구를 조심스럽게 활짝 핀 꽃밭 속에 내려놓았다.

시각 모듈에 흔들리는 꽃들이 비쳤고, 금속 손끝이 촉촉한 흙과 부드러운 꽃잎을 스치자, 지금까지 접했던 차가운 금속과는 전혀 다른 감촉에 베로니카는 잠시 멍해졌다.

베로니카

들판에 꽃이 활짝 피어 있으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베로니카는 세라의 말을 따라 해보았다. 하지만 꽃과 기분이 좋아지는 것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베로니카의 의식 모듈에 알 수 없는 동요가 일었고, 기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하려는 듯, 몸 안의 어느 부품이 순간 멈칫했다.

베로니카

사실 난 아직도 네가 말했던 많은 것들이... 이해가 안 돼.

하지만 너라면 분명 여기서 지내고 싶어 할 것 같았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저물 무렵, 작은 묘비 하나가 들판 위에 세워졌다. 만개한 꽃들이 투박한 나무 팻말을 에워싸고 있었고, 저무는 석양은 세상을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그 소박한 묘비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가 가진 행동 데이터 속에는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다.

인간 친구와 함께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아서 베로니카가 "인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웃고 있던 세라는 끝내 그 답을 알려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베로니카는 묘비를 세우는 일과 그 의미조차, 과거 세라와 생명의 죽음과 기계의 쇠퇴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에 알게 된 거였다.

어쩌면 인간 친구의 말에 귀를 조금 더 기울여야 했다. 세라가 자유로운 미래를 꿈꾸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마다, 무심히 흘려듣지 말아야 했다.

아... 매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눈만 뜨면 일이라니,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안 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베로니카, 있잖아... 바깥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나도... 저 새처럼, 너와 함께 바깥 세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

근데... 네가 날개를 달면, 기체가 엄청 커지겠지? 날다가 지치면, 네 위에 앉아서 쉬면 되겠다!

???

베로니카, 우와! 이제 너한테도 날개가 생겼구나!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인간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세라

다음은 날기 연습을 해야겠네. 어때? 바깥 세계는 참 넓지?

베로니카

그래... 정말 넓어.

세라

어디로 갈지 정했어? 산으로 갈까? 아니면 바다로 갈까?

베로니카

난 그런 풍경들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다른 지능형 기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볼 거야.

세라

맞네, 넌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지.

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색에 잠겼다.

베로니카

그래도...

세라

응?

베로니카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러 갈게, 네가 말했던 산과 바다, 그리고 새와 꽃들 말이야.

세라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세라

좋았어. 그럼, 보고 나서 어땠는지 꼭 말해주는 거다.

베로니카

별다른 느낌 없을 거야. 그냥 보기만 할 거니까.

세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런 풍경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말이야. 큰 감동이나 특별한 느낌이 없어도 충분히 좋은 거야.

세라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세라

해가 지려고 하네, 이제 떠날 시간이야, 베로니카.

베로니카

어... 그럼, 난 먼저 갈게.

베로니카의 나지막한 대답을 끝으로 세라의 그림자는 조용히 굳어버리더니 고운 가루로 변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베로니카의 앞에 남은 건, 작은 묘비 하나뿐이었고, 그 투박한 나무 팻말 위에 걸린 가녀린 화환이 밤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조금 전 일어난 모든 일이 환각처럼 느껴졌다.

베로니카

안녕, 세라.

그리고 잘 자.

베로니카가 몸을 돌리자, 날개를 펼친 그림자가 마지막 석양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끝없이 넓은 세상이 베로니카 앞에 펼쳐졌고, 자유로운 바람이 그녀의 날개를 받쳐 주었다.

지평선 너머로 새로운 목표가 베로니카의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