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면서, 인간의 비명이나 기계의 윙윙거리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베로니카의 발걸음이었고, 그녀는 곧장 델로리스 앞까지 걸어갔다.
연기가 자욱하게 흩날리며, 거대한 기계체는 잔해로 변해 버렸으며, "감시관"의 부서진 기체는 무너진 격투장처럼, 영원한 폐허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감시관"이 모든 게 붕괴되기 전 그녀를 위해 공격을 다 막아서 그런지, 델로리스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우아한 상태를 유지했다.
델로리스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 그런 자세를 유지하면 둘 사이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옷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몸이 델로리스의 진실된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난...
델로리스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강력한 힘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재산이었던 기계 격투사가 어느새 그녀의 목을 거칠게 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등 뒤에 연결된 파이프들이 함께 팽팽해지더니, 파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베로니카의 손에 붙잡힌 채,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려졌다.
인간, 다른 방법이라도 더 있나?
원래부터 연약했던 델로리스는 극심한 고통에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생존 본능에 이를 악물고는 손에 쥔 리모컨의 버튼을 간신히 눌렀다.
탕.
약한 총성과 함께 델로리스의 자리 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로니카는 경계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시각 모듈을 고정했고
그녀의 인조 피부에 탄흔이 하나 더 생겼다.
델로리스의 자리 밑에 숨겨져 있던 원격 공격 모듈은 베로니카의 기체에 별다른 손상을 주지 못했다.
이게 다야?
베로니카는 손에 힘을 살짝 풀어서 델로리스에게 참회의 말을 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델로리스는 전혀 두려워하거나 애원하는 기색이 없었다. 담담하게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얼굴에 점차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띨 뿐이었다.
하...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할까?
베로니카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델로리스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 담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가에는 광기가 피어올랐다.
넌 그냥 기계일 뿐이야... 고철로 만든 도구에 불과해.
그런 도구 주제에 감히 주인 머리 위에 올라서려 들어?
하하하하하하...
델로리스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베로니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아귀에 더 강한 힘을 주었고
델로리스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는 곧바로 사라졌다.
켁...
목이 점점 세게 조여지면서, 델로리스의 눈빛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하지만 델로리스의 얼굴엔 고통스러운 표정 대신, 오히려 곧 해방될 거라는 듯한 안도감이 보였다.
그 순간, 베로니카는 깨달았다.
예전에 격투장에서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패배를 앞두고 논리가 붕괴하기 시작한 기계체들도 마지막까지 반항할 방법을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인간은 단지 해방만을 바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쿵...
베로니카가 손의 힘을 풀자, 델로리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쿨럭, 쿨럭... 하하하! 왜? 겁나서 못 죽이겠어?
역시 도구는 도구일 뿐이야.
넌 정말... 쓸모없어.
날 자극하고 싶나 보네.
베로니카는 델로리스의 도발을 차갑게 끊어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분노에 차 있던 베로니카는 어느새 침착해졌고, 기체에서는 서늘한 냉기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
원하는 "새로운 몸"을 얻지 못하니까, 차라리 죽고 싶겠지.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택한 거잖아.
델로리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농담하는 거지?
괜히 핑계 대지 말고, 차라리 죽이지 못한다고 말해!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연민 대신 냉소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격투장에서 기계체들이 서로를 파괴하고 죽였고
세라와 로코 같은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베로니카는 의식 모듈에서 이 생각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었고, 이윽고 돌아서 격투장 밖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조금 전 격투장에서 시작된 이상 징후가 어느새 베로니카의 곁까지 다가와 있었다.
동력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감시관"의 시각 모듈에서 눈부신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곧 무거운 기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계체가 곧 제어 불가한 상태가 된다는 징조였다.
...
잠깐! 베로니카!
델로리스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겁에 질린 눈빛으로 "감시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델로리스는 점차 회복되고 있는 "감시관"에게서 더 멀어지기 위해, 힘겹게 몸을 비틀었다.
지금껏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집사"였고,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도 "감시관" 덕이었음에도...
...
베로니카... 가지 마!
제발... 날 죽여 줘.
하지만 이미 뒤돌아선 기계체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제어 불가 상태가 된 "감시관"이 과거의 인간 주인을 향해 거칠게 돌진했다.
아!!
베로니카의 등 뒤로 생명이 꺼져가는 인간의 처절한 비명과 기계의 낮은 포효가 뒤섞여 격투장의 배경음이 되었다.
격투장 한가운데, 델로리스의 몸에서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때 격투장의 "주인"이었던 인간은 지금 처참한 시체 한 구만을 남겼다.
베로니카는 기병창을 거두고 폐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시각 모듈로 차갑게 굳어버린 시신들을 훑어보았다. 그 얼굴들에는 숨이 멎는 순간의 공포와 절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관객석에 거만하게 앉아, 격투장 아래의 기계체들에게 서로를 찢고 부수라며 환호를 질러댔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을 잃은 인간들이나 멈춰 선 기계체들이나 모두 똑같이 격투장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침내 폐허 위에서 걸음을 멈췄고, 차갑게 부서진 강철과 피와 살점이 뒤섞인 잔해들 사이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밤색 머리의 인간 소녀가 조용히 땅에 누워 있었는데, 마치 지친 아기새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온한 꿈속에서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본 듯, 소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라.
영원한 잠에 빠진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세라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기체의 손끝이 마른 피와 창백한 얼굴에 닿자, 자신의 기체와 같은 차가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부드러운 하얀 점들이 세라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었다. 의식 모듈 속에만 존재하던 그 광경을 처음으로 현실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덧없이 짧았던 그 "꿈" 속에서 베로니카는 이토록 부드럽고 부서지기 쉬운 하얀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세라는 그것이 "눈"이라고 알려줬었다.
부서진 격투장의 천장 틈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흘러들었고, 그 사이로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베로니카와 세라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유"로 향하는 길은 지금, 이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녀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가자.
베로니카는 몸을 숙여, 얼어붙은 세라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등 뒤에 있는 "용의 날개"를 펼쳐 단숨에 날아올랐다.
격투장 꼭대기 층 위에 선 베로니카는 처음으로 자유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끝없는 설원이 베로니카의 눈앞에 펼쳐졌고, 눈앞의 광경은 기계체의 시각 모듈과 모든 연산 능력을 총동원해도 그 경계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격투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은 그녀의 등 뒤에서 먼지와 잔해로 변해 있었다.
눈발이 땅 위로 내려앉으며 넓은 설원 위 모든 것을 서서히 뒤덮었다. 아직 싹트지 않은 식물이든, 폐허가 된 건물이든, 끝없이 내리는 하얀 눈에 모두 덮여 있었다.
이 끝없는 설원 위에 인간의 발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퍼니싱이 인간이 주도하던 시대를 끝내고, 살과 강철로 뒤얽힌 혼돈의 새 장을 열었다는 사실을, 그 시절의 베로니카는 알지 못했다.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이 기계체의 시각 모듈로 쏟아져 들어왔고, 인공 광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두 날개를 펼쳐 자유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