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어둠, 이곳에는 오직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다시금 끝없는 어둠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i>
<i>하지만 의식 모듈에는 고통이나 혼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i>
<i>그저 부드러운 무언가 위에 편안히 누워 있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i>
<i>공기에서 기억 속 오일과 순환액 냄새가 사라졌고</i>
<i>미세하게 흐르는 기류가 기체의 표면을 스치며 서늘한 온기를 전했다.</i>
그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그 목소리가 베로니카의 의식을 조금씩 깨웠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자, 익숙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인간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 차가운 경계심이 순식간에 베로니카의 의식 모듈을 관통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곁에 있던 기병창을 잡으려 했지만, 손에 닿는 것은 부드러운 천뿐이었다.
여긴 어디야?
그 녀석이 우릴 어디에 가둔 거야?!
세라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또 "악몽" 꿨지.
?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매일 밤 이런 꿈을 꾸는구나.
괜찮아. 좀 더 쉬어도 돼.
베로니카는 낯선 주위를 경계하며 살폈다. 하지만 눈앞에는 총성도, 핏자국도, 실험실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차가운 금속으로 가득한 기계 격투장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허름하지만 부드러운 천이었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것도 높이 솟은 단단한 벽이나 천장이 아니었다. 몸을 감싼 것과 같은 천이 거센 바람에 쉼 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부드러운 하얀 것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격투장의 먼지처럼 베로니카의 기체 위에 내려앉은 그것은 차가운 감촉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은 먼지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베로니카, 저기 좀 봐. 눈이야, 밖에 눈이 오고 있어!
세라는 신이 난 듯 손끝으로 부드러운 눈꽃을 집어 들더니, 베로니카를 자리에서 일으켜 밖으로 이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느껴지던 한기가 순식간에 거세지더니, 자잘한 하얀 점들을 머금고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눈앞에 광활한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실험실에서 봤던 창백한 흰색이 아닌, 부드럽고 깨끗한 순백이 시각 모듈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까지 이어졌다.
시야에는 더 이상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보이지 않았고, 공기 속에서도 오일이나 순환액 냄새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금껏 한 번도 식별하거나 읽어 들인 적 없는 생소한 데이터였다.
"눈"이라 불리는 부드러운 하얀 점들은 바람에 실려 기계체 위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금속으로 된 기체 위에 얇고 섬세한 눈꽃이 점점 쌓여 갔다.
...
와,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건 처음 봐!
세라는 웅크리고 앉아 눈꽃을 두 손에 한 움큼 퍼 올렸다. 잠시 후, 그녀는 손안의 눈을 "새" 모양으로 만들어, 들뜬 얼굴로 베로니카에게 보여 주었다.
예쁘지?
하지만 베로니카는 세라의 즐거움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원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 내지 말고 숨어.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구나.
우린 이미 오래전에 그 격투장에서 빠져나왔어.
걱정하지 마. 거기 있던 모든 것은 전부 사라졌어. 이제 아무도 우릴 다시 잡아가지 못할 거야.
사라졌다고?
응. 그때 그... 미치광이가 우릴 가두려고 실험실에 불을 질렀잖아.
그러다 폭발이 일어났고... 살아서 나온 건 우리뿐이었어.
...
세라는 자신의 평온함을 전하려는 듯, 베로니카의 기체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찬 바람 속에 오래 있었던 인간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여기서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아.
이게 봄이 오기 전 마지막 눈일 거야. 눈이 그치면, 그때 다시 출발하자.
기계체는 앞에서 미소 짓는 인간을 바라보며, 굳어 있던 긴장을 서서히 풀어냈다.
둘은 어깨에 흩날리는 눈꽃을 맞으며, 부드러운 눈밭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어디든 상관없어. 세상은 이렇게 넓잖아. 그러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돼.
아니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지내도 좋고.
지금처럼 우리 둘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래...
가슴 속에 차오르는 행복 때문이었을까? 세라는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누웠다. 부드러운 눈이 그녀를 감싸왔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다.
세라의 웃음 가득한 눈동자는 넓은 자유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베로니카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봄이 오면, 여기에도 꽃이 잔뜩 필 거야. 전에 그 그림처럼 말이야.
그때가 되면...
기계체는 인간의 말을 받아, 대신 이어서 말했다.
그때가 되면, 우리 또 같이 사진 찍자.
석양이 내려앉을 무렵에 꽃바다 속에 앉아서.
베로니카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바라보며, 의식 모듈 속에 이곳이 꽃으로 가득한 모습을 그려내려 했다.
석양과 별빛 아래서 넓은 꽃바다가 서로 다른 색깔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 곁에는 지금처럼 나란히 앉아 있는 밤색 머리칼의 인간 소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새처럼 생긴 그 무인기는?
지금 한 장 찍자.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세라는 처음 누웠던 그대로 부드러운 눈밭에 누워, 눈을 감고 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 위로 차갑게 흩날리는 눈꽃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눈발은 점점 거세졌고, 잠시 후 세라의 얼굴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내리는 눈이 조금씩 세라의 얼굴을 덮어 가더니, 이내 창백하게 얼어붙은 가면처럼 변했다.
춥지 않아?
베로니카는 손을 내밀어 눈더미에 묻혀 있는 세라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유빙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의식 모듈에서 환상을 그리던 얼음층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흰색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자유로운 설원의 깨끗한 흰색이 아닌 금속과 강화 방호벽으로 둘러싸인 실험실의 창백한 흰색이었다.
베로니카가 붙잡은 가녀린 손목의 감촉과 온도는 자신과 똑같이 차갑고 단단한 금속으로 변해 있었다.
!
의식 모듈에 다시금 격렬한 통증이 몰아쳤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기체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시각이 감지한 신호는 매우 선명했고, 어떠한 교란의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는 분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크지 않은 체구에 평범한 도색의 기계체가 베로니카 앞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외부 자극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꼭 휴면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기계체의 의식 모듈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고, 민감하게 감지하던 모든 것이 완전히 정지한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얼어붙은 정적을 깨뜨린 것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인간의 목소리였다.
드디어 정식으로 만나게 됐네. 베로니카.
내 소개를 좀 하지. 난 이 격투장의 주인인 델로리스라고 해.
그 인간의 목소리가 독사처럼 소름 끼치게 베로니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베로니카가 급히 몸을 돌려 기병창을 뒤쪽으로 겨눴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병창 끝은 허공만 찔렀을 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다시 울려 퍼지며 실험실 안을 가득 메웠고, 베로니카는 그 기이한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디에나 있는 듯하면서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인간의 목소리는 끈적이는 거미줄처럼, 좁은 실험실 구석구석을 조용히 휘감았다.
가느다란 거미줄이 순식간에 베로니카의 기억 모듈 속 데이터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전에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기이한 인간의 목소리를 포착해 냈다.
그것은 어둠의 혼돈 속에서 베로니카의 모든 저항 의지를 끊임없이 짓밟으려 했던, 바로 그 인간의 목소리였다.
너였냐!
분명 약속을 했는데, 그 아이는 끝까지 지키지 않더라.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그래서 약속을 어긴 아이에게 "잘못"의 대가가 무엇인지 조금 알게 해줬지.
그 아이의 의식을 저 기계체의 기체에 가둬 놓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조용히 반성하게 했어.
처음에는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소리가 점차 뚜렷한 방향에서부터 전해졌다.
베로니카 앞에 놓인 거울 너머에서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베로니카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쨍그랑.
베로니카가 기병창을 휘둘러 거울을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난 거울 뒤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엔 다른 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왠지 그 웃음에는 끝없는 통쾌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서 나와!
비열한 쥐처럼 어둠 속에 숨어 있지 말고
남길 유언이 있다면, 지금 내 앞에서 전부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내 기병창이 네 목을 꿰뚫고 나면, 다시는 말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돌아온 건 웃음뿐이었다. 델로리스의 웃음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베로니카, 그거 알아? 넌 이 격투장에 있는 다른 기계체들과는 달라.
다른 기계체들은 전부 쓰레기야. 쇳덩어리에 불과한 쓸모없는 것들이지.
닥쳐!
내가 널 이렇게 아끼는데, 넌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는구나.
너의 소중한 친구 세라... 그 아이는 내 앞에서 아주 공손했는데 말이지.
넌 지금 내 목을 조르면서 "내 친구를 돌려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악역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은 내가 주도할게.
자, 베로니카. 네 "소중한 친구"를 만날 준비됐니?
일어나거라, 나의 "세라".
귀를 찢는 듯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 휴면 모드 상태였던 기계체가 천천히 일어섰다.
...
주인님... 명령... 대기 중입니다.
공격 목표... 확인... 필요합니다.
네 목표는 베로니카다.
지금 당장 베로니카를 죽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