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4 이상을 가둔 감옥 /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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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4-8 비상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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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 층 핵심 실험실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꼭대기 층 핵심 실험실

거대한 실험실 안, 새하얀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먼지 한 톨 없는 공간을 환히 비췄다. 그리고 실험 작업대들이 그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수년간 잠들어 있던 실험실이 마침내 재가동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숙원을 이루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준비를 마쳤다.

델로리스는 실험실 위층에서 조물주처럼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온 이 순간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델로리스는 곧 자신이 바라던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능까지 손에 넣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아낼 "그릇"인 베로니카가 실험실 중앙에 놓인 투명한 밀폐 캡슐 속에 의식 없이 갇혀 있었다.

실험의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수많은 연결선과 속박 장치에 휘감겨 중앙에 서 있는 베로니카는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처럼, 사냥꾼에게 삼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가 곧 시작되는데, 아직 "손님" 한 분이 오지 않았잖아. 어서 모셔 오도록 해.

델로리스의 말이 끝나자, 실험실의 무거운 차단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세라가 말없이 "감시관"에게 끌려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야, 이건 축하할 순간이야.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자, 가서 네 친구 베로니카를 깨워.

세라를 향해 미소 지은 델로리스는 베로니카를 가리켰다.

하지만 세라는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감시관이 다가와 위협하듯 세라를 내려다보았다.

엔지니어 세라, 명령을 수행하라.

하지만 세라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어서 마치 조각상 같았다.

"감시관"이 자신의 권한으로 억지로 세라를 명령에 따르게 하려던 순간, 주인이 다소 나무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됐어. 됐어. 집사, 손님의 기분도 좀 헤아려야 하지 않겠어?

이제부터는 나와 그녀에게 맡기도록 해.

네. 주인님.

"감시관"이 자리를 떠나자, 델로리스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심정이 어떤지 알아. 하지만 세라,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다시 일어서서 달리기 위해 난 내 몫의 대가를 치렀어.

그런데 넌? 네 이상을 아직 기억하고 있니?

...

델로리스는 고개를 돌려, 세라와 함께 눈앞의 밀폐 캡슐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베로니카가 의식 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인간은 하늘의 축복을 받지 못했으니,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진정한 "날개"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해.

델로리스의 얼굴에 다시 불쾌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듣기 거북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우리 약속했잖아. 그렇지?

...

고개를 돌린 세라는 텅 빈 눈동자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델로리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에 수많은 관이 연결된 델로리스가 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델로리스의 정교하고 연약한 얼굴은 도자기 인형 같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고 있어.

확답을 들은 델로리스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앞의 투명 유리를 일반 거울 상태로 전환했다.

난 잠깐 "눈 좀 붙이고" 올 테니까,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해~

실험 시스템이 나 대신 널 "보살펴" 줄 거니까, 얌전히 말 잘 듣도록 해.

그럼, 내가 깨어났을 때 새로운 모습으로 너와 마주할 순간을 기대할게.

델로리스의 목소리가 거울 너머로 사라지고, 실험실은 다시 깊은 정적에 잠겼다.

세라는 실험실 중앙에 놓인 투명한 밀폐 캡슐에 다가갔다. 그 안의 베로니카는 여전히 의식 없이 휴면 상태에 있었다.

미안해. 베로니카.

세라는 손바닥으로 캡슐 벽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괜찮아. 이젠 나한테 맡겨.

세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솟아오른 콘솔에 손을 뻗었다.

콘솔 위로 관련 조작 터치패널이 나타났다. 이미 전자동화된 단말기 프로세스가 모든 실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빽빽한 데이터와 그래프들이 실시간으로 변하며, 델로리스의 신체 상태와 베로니카의 기체 데이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조작하기만 하면, 기계체 내부의 의식 데이터가 완전히 삭제되고 인간의 의식 데이터로 교체될 것이었다.

예전 수족관에서 본 소라게처럼, 쓸모없어진 껍데기를 버리고 새로운 껍데기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처럼 집중해 본 적이 없었던 세라는 기체 모듈의 온갖 데이터와 지표를 빠르게 훑으며, 기억 속 베로니카의 기체 데이터와 계속해서 대조했다.

세라는 강력하고 정교한 베로니카의 모든 세부 사항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된 일상 정비 작업과 모듈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치며,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낙인처럼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세라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 "쉽게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세라는 조작 패널 위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실험 시스템

목표 기체 상태 데이터 검사를 시작합니다. 검사 진행도는 12%입니다.

각 연관 모듈의 적합도 양호합니다. 검사 진행도는 97%입니다.

의식 주체의 생명 징후가 안정적입니다. 사고 지표도 정상입니다. 심도 마취 작업을 진행합니다.

이제 의식 데이터 전이 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직전, 세라의 손가락이 조작 패널 위를 날아다니듯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실험 시스템을 우회하는 명령어를 빠르게 입력하고 있었다.

세라는 맞은편의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잠자코 기다렸다.

실험 시스템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검사 프로세스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방대한 데이터 스트림이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며 변화했다.

거대한 시스템의 데이터 바닷속 가장 은밀한 곳에서 세라가 방금 입력한 명령어가 0과 1로 변환되어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물방울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듯, 데이터 해류의 깊은 곳에서 점점 더 거센 암류를 만들어냈다. 곧이어 연결된 기계체의 코어 모듈이 첫 에너지의 파동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베로니카, 일어나.

<size=40>감지 시스템을 불러옵니다.</size>

<size=40>모듈 자체 교정을 시작합니다.>>>>>>></size>

<color=#47f57fff><size=40>자체 교정에 성공했습니다.</size></color>

<size=40>시각 모듈을 가동합니다.>>>>>>></size>

<color=#47f57fff><size=40>가동에 성공했습니다.</size></color>

실험실 한가운데 서 있던 기계체가 천천히 눈을 떴고, 그 붉은 두 눈이 세라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베로니카가 눈앞의 광경을 파악한 순간,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격렬한 분노가 폭발했다.

이... 사기꾼!

이게 네 진짜 모습이냐!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지르던 베로니카는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방호벽을 뚫고 나가 밖에 있는 세라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하지만 속박 장치들이 베로니카를 단단히 묶어 두고 있었다.

죽어! 너희 인간들은 모두 죽어야 해!

실험 시스템

경고합니다. 기체 동력 모듈의 에너지 모드에서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실험 시스템

경고합니다. 경고합니다. 기체 동력 모듈이 계속 과부하 상태입니다. 곧 안전 한계치를 초과합니다.

베로니카를 속박하고 있던 장치들이 귀를 찢는 듯한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이어서 모든 연결선이 끊어지자, 뒤틀린 금속 잔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베로니카가 온 힘을 다해 방호벽을 향해 돌진하다가 고강도 차단 유리와 충돌했고, 순간 거대한 굉음이 실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방호벽 밖에 서 있는 세라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맞은편의 기계체를 어루만지려는 듯 투명한 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세라

베로니카...

베로니카

죽일 거야! 감히 날 속이다니!

베로니카는 손을 들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방호벽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마치 모든 분노와 증오를 그 벽에 쏟아내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고강도의 방호벽이라 해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이내 베로니카의 손 아래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만들어지고 사방으로 번져갔다.

세라

이제 됐어. 베로니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세라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곧 깨지려는 방호벽에 이마를 기댔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세라는 친구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변명, 애원, 작별 인사 없이, 세라는 그저 베로니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이 순간, 이 마지막 마음은 더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됐어. 이걸로 충분해. 조금 전 입력한 실험 시스템을 우회하는 명령어가 발동했어. 그 명령어는 베로니카의 기체 동력을 이론상의 임계치까지 끌어올려 줄 거야.

베로니카는 더 강해질 거야.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줄곧 그녀를 가둬왔던 이 우리를 손쉽게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거야.

그러니 내 몸을 밟고 가. 베로니카. 이것이 너를 위한 내 속죄야.

여길 떠나. 그리고 바깥의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

방호벽이 완전히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세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녕... 베로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