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층 격투사 정비 구역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하층 격투사 정비 구역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세라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격투장의 최하층에 있는 기계체 정비 구역으로 향했다.
늘 함께하던 "망치"도 데려오지 않고 혼자 내려온 건, 오늘이 베로니카와의 둘만의 "약속"을 지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쓸데없는 환상에 빠져있지 마, 꿈속에서 "날아올라 이곳을 벗어난다"라는 소원이 이뤄지길 기다리지 말라고.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날 찾아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베로니카는 휴면 상태가 아닌 채로 있었다. 마치 세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왔네.
한참 더 기다려야 올 줄 알았는데.
당연히 와야지. 네가 말했던 "그 문제"에 대해 이제 확실히 이해했거든.
그리고 그걸 위해 "준비"도 다 끝냈어.
그게 뭔데?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 사실은 다른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여기 오면 "업무"만 생각나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거든.
?
베로니카는 말을 돌리며 횡설수설하는 세라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그냥 농담한 거야.
가볼까? 시간은 잠깐이면 돼. 내가 말했던 그 "시뮬레이션 천막"에 같이 가볼래?
세라는 웃으면서 주머니 속에서 교란 칩과 만들어둔 물건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
베로니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세라는 머쓱해하며,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음... 싫으면...
그때 베로니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세라에게 어떤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뒤 밖으로 향했다.
기계체의 발걸음은 빠르면서도 안정적이었다. 베로니카는 세라를 데리고 벽에 바짝 붙인 채 움직였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감시기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하며 경계했다.
둘의 발소리가 텅 빈 곳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꼭대기 층으로 이어지는 출입문 앞에서 둘이 멈춰 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뮬레이션 천막으로 향하는 출입문이 붉은 빛을 발하며 잠긴 상태를 알렸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베로니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세라가 급히 나서서 베로니카를 말렸다.
쉿, 그렇게 하면 엄청 시끄러워질 수도 있어.
세라는 작은 터치패널을 꺼내 출입문 시스템에 연결하더니, 능숙하게 명령어를 입력했다.
직원 신분이 인증되었습니다. 통과해 주세요.
출입문 시스템에서 맑은 전자음이 울리면서, 잠긴 상태를 알리던 붉은 빛이 출입할 수 있다는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세라는 베로니카를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만능 세라"를 막을 수 있는 기계는 없으니까.
꼭대기 층 시뮬레이션 천막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꼭대기 층 시뮬레이션 천막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둘 앞에 펼쳐졌다. 관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꼭대기 층에서는 시뮬레이션 천막이 시스템에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밤낮과 사계절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뮬레이션 천막은 칠흑 같은 밤으로 변해 장막처럼 고요히 머리 위를 뒤덮었고, 그 위로는 찬란한 보석처럼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세라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반짝이는 별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와~ 너무 예쁘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한쪽으로 가서 앉은 뒤, 시뮬레이션 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자리를 비워두고 앉은 베로니카는 세라에게 그 옆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세라는 베로니카의 긴 꼬리에 닿지 않으려 조심하며,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시뮬레이션 별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은 희미하지만 부드럽게 퍼지면서, 주변 모든 것을 은은하고 차가운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라는 베로니카의 차가운 겉모습과 냉랭한 말투 속에서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따스함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오늘은 왜 굳이 여기서 말하려는 거야? 어디서 해도 똑같은 얘기잖아.
왜냐하면 오늘 내 생일이거든, 친구와 같이 보내고 싶었어.
세라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기계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별이 가득한 하늘만 바라보며, 세라가 "친구"라고 말한 것에 대해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생일이라고?
생일이 뭐냐면, 그 기계체의 "기동일"과 같은 거야. 베로니카, 네 기동일이 언제였는지 기억나?
기억나.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날, 난 이 격투장의 가장 아래에서 깨어났어. 그다음 일은 너도 다 알잖아.
...
생일이든 기동일이든, 평소와는 달라야 하는 거잖아. 봐, 오늘은 이 "새처럼 생긴 무인기"의 기동일이라고 할 수도 있어.
세라는 발치에 두었던 공구함에서 로코 아저씨가 선물로 준 새처럼 생긴 무인기를 꺼냈다. 그리고 오일이 묻은 겉면을 정성스레 닦아냈다.
세라가 조심스레 컨트롤러를 조작하자, 투박한 외형의 새처럼 생긴 무인기가 천천히 떠올라 둘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날갯짓하며 날아오른 무인기는 은빛 몸체에 반사된 시뮬레이션의 별빛을 아래로 퍼뜨리며, 반짝이는 빛 조각들을 둘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
세라의 말에 더 이상 답하지 않은 베로니카의 시선은 드넓은 시뮬레이션 별하늘을 벗어나, 날개를 펼친 무인기에 머물러 있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날개"는 투박해 보였지만, 무인기는 그 날개로 하늘을 날았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그 "새"를 바라보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러다 갑자기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찰칵.
새처럼 생긴 무인기가 베로니카의 머리 위에서 멈추더니,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냈다.
...
비행을 멈췄네... 고장 난 거야?
아니, 조금 전에 들린 건 무인기의 셔터 소리야. 지금 우리 위에서 사진 찍고 있었거든.
아, 사진 찍을 땐 좀 웃어봐. 넌 왜 맨날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네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사진?
응. 봐봐.
세라는 손에 쥐고 있던 컨트롤러를 베로니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작은 화면 속에 정지된 한 장면이 보였다.
시뮬레이션 별빛 아래, 긴 꼬리를 가진 기계체와 인간 소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세라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기계체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네가 웃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
됐어.
기계체는 여전히 웃음을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그 순간, 세라는 자신과 베로니카 사이에 뭔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세라의 조작에 따라 새처럼 생긴 무인기가 천천히 내려와, 베로니카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베로니카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무인기를 들고 침묵을 지켰고, 세라는 그 옆에서 작은 화면으로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있잖아, 베로니카. 우리가 찍은 이 사진의 배경을 노을 속 꽃바다로 바꾸는 건 어때?
그러니까... 내 방 벽에 걸려 있는 그림처럼 말이야.
상관없지 않을까... 뭘로 바꾸든, 어차피 찍히는 건 우리 둘이니까.
세라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늑한 밤하늘 아래에서 두 팔을 펼치며 눈을 감았다.
베로니카, 혹시 그런 꽃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걸 상상해 본 적 있어?
...
세라는 베로니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가슴속 깊이 담아둔 생각들을 쏟아내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상상해본 적 있어, 매일 밤 꿈에서 그런 생각을 해.
꽃이 가득 핀 잔디밭에 누워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거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말이야.
해가 지면서 얼굴에 닿는 느낌은 따스하고 아주 포근하겠지?
그리고 난 꽃을 한가득 꺾어 화환을 만들어서 머리에 쓰고 싶어.
뭘 하든 상관없고,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어. 마음껏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무는 거야.
서둘러 끝내야 할 임무도 없고, 규칙을 강요하는 큰 기계체도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그런 노을 아래서, 너와 또 사진을 찍고 싶어. 베로니카.
그때는... 꼭 웃어야 해!
알겠어.
세라는 들뜬 마음으로 다시 베로니카 옆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뮬레이션 천막에는 화려하고 찬란한 별들이 가득했다. 그때, 가상의 "유성"이 지나가면서, 오로지 둘만이 아는 "약속"을 새기는 것 같았다.
너도 이 무인기처럼 날개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세라는 새처럼 생긴 무인기를 들어 올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기체는 그렇게 작지 않아.
음, 그렇지. "날개"가 생긴 베로니카는 어떤 모습일지 한번 상상해 볼게.
세라는 눈앞에 있는 기계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알겠다! 분명 "드래곤"이랑 비슷할 거야!
드래곤?
응! 어릴 때 그림책에서 "드래곤"을 본 적이 있거든. 날개가 달려 있고 긴 꼬리를 가진 그런 드래곤 말이야.
네 기체에 "날개" 한 쌍을 달면, "드래곤"처럼 진짜 멋있을 거 같은데?
아, 내가 그려서 보여줄게.
세라는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얇게 쌓인 먼지를 "스케치북" 삼아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라의 손끝을 따라 투박한 선들이 이어지더니 그림이 나타났다. 그런 뒤, 세부적인 모습이 점점 채워져 갔다.
세라는 기억을 더듬어 긴 꼬리와 날개를 가진 드래곤의 형태를 먼저 그린 뒤, 그 옆에 베로니카의 모습을 그렸다.
자... 먼저 이렇게 하고, 여기에 디테일을 조금 더 추가하고...
어때? 닮았지?
세라의 작업 끝에, 그림 속 베로니카의 등에는 한 쌍의 "날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위에 그려진 그림은 투박했지만, 특징은 정확히 살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그림 속 베로니카의 당당한 모습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활짝 펼쳐진 날개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뿔 그리고 등 뒤로 이어진 긴 꼬리가 어우러져, 베로니카는 전의를 가득 품은 "드래곤"처럼 보였다.
기병창을 든 베로니카의 모습은 모든 걸 지배하는 전사 같았고, 그 무엇도 그녀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기세를 보였다.
하층 직원 생활 구역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하층 직원 생활 구역
"비밀 약속"을 품은 세라는 깡충깡충 뛰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계는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세라는 흥에 겨워 노래를 흥얼거렸고, 목에 걸린 날개 모양의 펜던트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던 중, 복도 끝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고, 세라는 순간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시간에 인간 직원이 복도를 돌아다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라는 벽 모서리로 몸을 숨기기도 전에, 발소리를 낸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로코 아저씨였고, 세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로코도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태연한 척했다.
작업 시작까지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이 시간에 로코 아저씨와 마주치는 건 참 수상한 일이었다.
어? 아저씨,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아... 약도 떨어졌고,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잠도 오지 않더라고. 그래서 그냥 잠깐 나와봤다. 쿨럭쿨럭...
아저씨, 정말 괜찮으세요?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요! 이거 받으세요!
제 근무 시간으로 바꿔온 약이에요. 우선 이거라도 드세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더 바꿔다 드릴게요!
...
아, 이제 좀 졸리네요. 작업 시작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자야겠어요. 아저씨, 혹시 제가 나중에 제때 일어나지 못하면 단말기로 꼭 깨워주세요~!
그래...
세라는 손을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