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층 경기 구역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상층 경기 구역
시즌이 중반을 넘었지만, 오늘 밤 격투장의 열기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관중들은 모두 "그녀"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관객들은 "베로니카"의 이름을 연달아 외치며, 통로에서 나타난 기계체를 흥분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기병창을 든 채 긴 꼬리를 끌며, 천천히 격투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격투장 중앙엔 평소처럼 기계체 괴물을 가둔 팔각 철창이 올라오지 않았고, 격투장 반대편 통로의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기를 든 기계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섰다. 그것은 외형이 괴상한 기계체 괴수가 아닌, 베로니카와 같은 인간형의 모습을 한 기계체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밤은 베로니카 대 "윈치"의 대결입니다! 숨 막히는 이 혈투를 마음껏 즐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결국 이렇게 됐군.
윈치는 묵직한 걸음으로 베로니카에게 다가가며, 시각 모듈로 "격투 상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승률을 분석합니다.
대결 대상은 CTX-V 기능 강화형, 코드네임 "베로니카"입니다. 본 기체가 "베로니카"와 대결할 경우, 승률 분석 결과는 0.0032%입니다.
"윈치"의 전자 음성과 함께, 팔각 철창이 바닥에서 솟아올라 두 기계체를 가두었다. 곧이어 격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격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장면을 본 관객들은 순간 흥분을 참지 못했고, 잔혹한 장면을 갈망하는 욕망이 환호의 물결로 변하며 격투장을 휘감았다.
가자, 베로니카! 절대 봐주지 마!
그렇지! 우린 네가 이길 거라는데 걸었다!
본 기체가 "베로니카"와 대결할 경우 승률은 0.0032%입니다.
승리하여 다음 경기에 진출하고, 자유를 쟁취하겠습니다.
공격 자세를 취한 "윈치"는 무기를 휘두르며, 베로니카를 향해 돌진했다.
비좁은 철창은 결승전의 "무대"로 변했고, 승자는 환호를 받겠지만, 패자에겐 심판받을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윈치"의 작동 부품과 기체 감도는 현저히 뒤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베로니카가 지금까지 쓰러뜨린 수많은 기계체 괴수보다 훨씬 열등했다. 그저 프로그램에 입력된 "공격 모드"에 따라,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는 게 전부였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반격하기만 하면, 나약한 상대 기계체는 압도적인 전투력 차이에 순식간에 고철 더미로 전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게 격투장에서 살아남아 다음 경기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같은 "동료"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난 널 공격하지 않을 거야.
승리하여 다음 경기에 진출하고, 자유를 쟁취하겠습니다.
하지만 윈치는 여전히 같은 공격 모드만 반복할 뿐, 베로니카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아직도 모르겠어? 넌 애초에 날 이길 수가 없다고.
목표가 고정되었습니다. 공격을 개시합니다.
"윈치"가 한 걸음 다가서며 들고 있는 무기를 내리쳤지만, 그의 공격은 베로니카의 기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이대로라면 넌 내 손에 죽어.
그들... 저 인간들은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보며 즐기고 싶은 것뿐이라고!
목표가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공격을 진행합니다.
베로니카는 논리 오류에 빠진 "동료"를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베로니카의 기병창이 허공을 가르며 곡선을 그린 뒤, 땅에 내리꽂혔다.
베로니카는 "동료"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당장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대결 상황을 분석합니다. "베로니카"가 공격 무기를 잃었습니다. 본 기체가 "베로니카"와 대결할 경우 승률은 0.089%입니다.
하지만 "윈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다시 한번 베로니카를 향해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베로니카는 철창 벽까지 밀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제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기가 기체를 가르는 소리가 사라지자, 순환액이 바닥에 떨어지는 희미한 소리만 들렸다.
베로니카의 가슴에서 복부까지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균열이 생겼다. 그곳으로 내부 부품이 드러나며, 순환액이 기체를 따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
대결 상황을 분석합니다. "베로니카"의 기체가 손상되었습니다. 본 기체가 "베로니카"와 대결할 경우 승률은 0.127%입니다.
공격을 계속합니다. 기체 출력을 높입니다.
승리하여 다음 경기에 진출하고, 자유를 쟁취하겠습니다.
됐어! 이제 진짜 그만해!
네가 해야 하는 건, 나와 함께 저 밖의 인간들을 상대하는 거야!
베로니카의 외침에 응답한 건, "윈치"의 또 다른 공격이었다. "윈치"는 모든 동력을 한데 모아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그 순간, "윈치"의 기체에서 금속이 비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재가동... 재가동을 진행합니다. 재가동을...
"윈치"의 움직임이 잠시 둔해지더니 멈춰 섰다. 그러다 그의 기체가 또 순간적으로 진동하더니, 다시 빠르게 가동되면서 돌격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다시 시작된 공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무기가 철창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고, 그것은 철창 틈새에 단단히 박혀 빼낼 수 없게 되었다.
고속으로 돌진하며 생긴 추진력에 무거운 기계체는 자신의 기체를 가눌 수가 없었다. 결국 속도를 전혀 제어하지 못한 채,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이내 제어불능의 거대한 기체는 자신의 무기에 꿰뚫렸고, 기체에 난 커다란 상처에서 순환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승리하여... 다음 경기... 진출... 자유를... 쟁취...
승리... 다음 경기... 자유...
승리하여... 자유... 자유를...
기체가 중상을 입으면서, "윈치"의 언어 회로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 결과, "윈치"는 대사를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했다.
끼익... 끼익...
그 소리는 "윈치"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기체를 꿰뚫은 무기를 억지로 뽑아내는 소리였다.
승리하여... 자유... 자유를...
베로니카를... 죽여... 승리... 자유를...
여전히 "공격" 모드를 유지하고 있던 "윈치"는 심각하게 손상된 기체를 베로니카 쪽으로 돌린 뒤, 또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이대로는 안 돼.
"윈치"의 기체는 논리 혼란으로 인해 과부하 상태에 돌입했다. 눈에서는 붉은빛이 미친 듯이 깜빡였고, 공격할 때마다 기체가 뒤틀리며 금속 마찰음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베로니카는 다시 기병창을 움켜쥐었다.
베로니카가 기병창을 강하게 휘두르자, 팔각 철창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거대한 충격파에 폭주하던 "윈치"가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처참하게 부딪쳤다.
"윈치"의 머리와 기체를 잇던 부품이 파손되어, 불꽃을 튀기는 몇 가닥의 전선만이 연결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윈치"는 여전히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를... 죽여... 승리... 자유를...
좋았어! 이겼다! 베로니카가 이겼어!
저 쓸모없는 놈을 죽여버려!
치열한 전투 끝에 승부가 뒤집히자, 관객들은 마침내 환호성을 터뜨리며 열광했다.
관객들은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며, 격투의 절정인 "처단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것은 승자가 무기를 높이 들어 패자의 기체를 완전히 파괴하는 잔혹한 의식이었다.
인간들의 눈에 손상된 기계 격투사는 파괴되면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구"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를 거머쥔 베로니카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을 뿐, 격투장의 규칙에 따라 치러져야 할 "처단의 순간"을 행하지 않았다.
관객들의 분노가 파도처럼 베로니카를 향해 밀려들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얼른 해치워!
야! 긴 꼬리 달린 X, 대체 뭐 하는 거야?!
...
베로니카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형의 압박감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격투장 관람석 어둠 속에 서 있는 거대한 "감시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감시관"은 마치 기계 격투사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신처럼 보였다.
모든 격투에서처럼, 인간에게 굴복한 "기계의 배신자"는 자신의 자리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격투장의 모든 데이터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녀는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패배한 기계 격투사를 유압 프레스로 "처형"하는 잔혹한 광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 모듈에서 영원히 각인된 "악몽"이었다.
베로니카, 명령을 따라라.
...
베로니카는 결국 천천히 기병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창끝을 발밑에 쓰러진 기계체의 동력 코어이자, "동료"의 심장을 정확히 겨눴다.
어서 해치워! 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를 박살 내 버려!
승리하여... 자유... 자유를...
기계체의 눈에서 비치는 붉은 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하지만 "윈치"는 여전히 끊어질 듯 말 듯한 음성을 반복했다.
깜빡이는 "윈치"의 시각 모듈에는 두려움도, 생존에 대한 애원도 없었다. 오직 프로그램에 깊이 각인된 "승리가 곧 자유다."라는 신념만이 남아 있었다.
죽어라!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베로니카의 기병창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순간 귀를 찢는 금속음과 함께 먼지가 치솟았고, 관객들의 함성은 그 순간 멈춰 버렸다.
하지만 기병창이 관통한 것은 기계체의 기체가 아니라, 그 옆 바닥이었다.
그렇게 분노를 쏟아낸 베로니카는 말없이 기병창을 거둔 뒤, 뒤돌아선 격투장을 떠났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더욱 격렬한 분노의 함성을 토해냈다.
제기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저 미친 쇳덩어리, 어디 고장 난 거 아니야?!
이 경기 인정되는 거야?! 이번 시즌에는 쟤한테 내 전 재산을 걸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그 돈 다 날리는 거잖아!
베로니카는 등 뒤로 쏟아지는 온갖 욕설을 외면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CTX-V 기능 강화형, 코드네임 "베로니카". 조금 전 네 행동은 격투장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했다.
처벌 프로그램을 시작하겠다.
배신자, 내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
베로니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을 조이는 속박용 목줄에서 강한 전류가 흘러나왔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그녀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처음은 경고고, 다음은 종료다.
극심한 고통에도 베로니카는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치켜들고, "감시관"을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이... 개자식!
목표의 저항 행위가 감지되었다. 처벌 프로그램을 상향 조정한다.
"감시관"의 시각 분석 시스템 속, 코드네임 "베로니카"는 강한 전류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병창을 짚고 천천히 기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뿐이야? 이런 걸로 날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우습군!
"동료"를 배신한 쓰레기... 지옥에서 참회해라!
베로니카는 기병창을 치켜들어 "감시관"의 코어를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하지만 계속된 전투로 손상된 기체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임이 둔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베로니카가 내리꽂은 기병창이 "감시관"의 코어를 향해 날아갔지만, 결정적인 순간 빗나가 버렸다.
윽!
시각 모듈은 더 심하게 흔들렸고, 극심한 고통이 의식 모듈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베로니카는 기체를 가누지 못하게 되면서 다시 무릎을 꿇게 되었고, 자신의 기체에서 흘러내린 순환액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베로니카는 "감시관"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목표의 저항 행위가 심화했다. 즉시 종료 과정을 실행한다.
"감시관"이 손에 든 에너지 총을 들어 베로니카를 겨눴다.
하지만 "감시관"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통신에서 최고 권한을 가진 인간의 음성 명령이 울려 퍼지며 그의 동작을 정지시켰다.
네 마음대로 굴면 곤란하지.
베로니카가 누구의 재산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인간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감시관"은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오늘 일은 좀 소란스럽긴 했지만, 오히려 베로니카에게 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예상했던 대로, 경기장에서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야.
베로니카를 다음 경기로 진출시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인간은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통신을 끊었다.
네. 주인님.
인간의... 졸개 같으니!
하지만 "감시관"은 베로니카가 아무 상관 없는 물건인 것처럼, 그녀의 저주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감시관"은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베로니카의 "진출" 데이터를 단말기 시스템에 업로드한 뒤, 아직 함성으로 가득 찬 격투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베로니카는 격투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인간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금속이 뒤틀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건 "감시관"이 격투장 위쪽에 있는 유압 프레스를 가동해, 패배한 "윈치"를 연달아 짓누르는 소리였다. 그렇게 "윈치"는 산산조각 난 부품들로 변하고 말았다.
좋았어! 계속해!
한 번 더 저놈을 뭉개버려! 그래! 완전히 박살을 내버려!
그만... 해.
개자식...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면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모든 감지 모듈이 서서히 얼어붙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격투장의 소음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모든 것이 무거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그 순간, 베로니카는 익숙한 인간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 베로니카, 어떻게 네가 여기에...
이런, 큰일 났네! 괘, 괜찮아?
좀만 버텨봐.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베로니카는 인간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하지만 차가운 어둠이 그녀의 의식을 완전히 얼어붙게 했다.
...
끝없는 어둠 속에서 베로니카의 의식은 데이터 입자로 부서졌고, 끓어오르는 데이터의 바닷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다 흩어졌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기체를 느낄 수 없었고,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이 어두운 우리 속에 영원히 갇혀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베로니카...
끝없는 어둠 속에서 베로니카는 희미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혼란스러운 베로니카의 의식을 감싸며,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그러자 흩어진 데이터 입자들이 모여들더니, 다시 그녀의 몸과 의식을 이루어냈다.
이내 그 빛은 새의 형태로 변해 날개를 퍼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로 이끌어주었다.
베로니카의 의식 모듈을 뒤흔들던 고통이 잦아들었고, 몸을 옥죄던 얼어붙은 느낌도 서서히 풀려갔다.
베로니카가 눈을 뜨자,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아, 다행이다. 드디어 깨어났네!
너였어?
세라는 몸을 숙인 채 기쁨에 찬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환히 웃으며 일어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조금 전엔 정말 놀랐어. 한참을 애썼는데, 못 깨어나는 줄 알았다니까?
너 좀 전에 격투장 밖에서 쓰러져 있던 거 알아? 기체 손상도 엄청나게 심각했어. 내가 제때 널 데리고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근데 걱정할 거 없어. 손상을 고친 건 기본이고, 모듈도 잔뜩 업그레이드했으니까 말이야~
후, 진짜 힘들다. 그냥 누워서 쉬고 싶어. 망치, 에너지 드링크 하나만 가져다줘. 고마워!
세라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벽에 박혀 있는 휴식 캡슐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온 "망치"의 로봇 팔에서 음료를 받아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조금 기운을 회복한 세라는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베로니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베로니카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는 듯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베로니카는 이곳이 "격투사 정비 구역"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임을 알아챘다. 주위에는 생활용품과 정비 공구들이 뒤섞여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여긴 내 방이야! 좀 지저분하긴 한데... 이걸 "혼란 속의 질서"라고도 해. 겉으론 어질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난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거든!
날 왜 고쳐준 거지?
네 말대로라면, 이건 네 "근무 시간"에 포함되지도 않잖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가 위험에 빠졌는데,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근무 시간 따위가 뭐라고.
세라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베로니카가 그런 질문을 한 게 의외인 것 같았다.
세라의 말투에는 그동안 교류가 없었던 이 기계체를 어느새 진심으로 도와야 할 "친구"로 여기고 있다는 마음이 묻어났다.
인간과 기계체 사이에... 그런 의미 없는 호칭은 집어치워.
난 네 "친구"가 아니야.
미안. 내가 큰 실례를 했네.
세라는 전혀 낙담한 기색 없이, 장난스레 혀를 살짝 내밀었다.
세라는 몰래 베로니카를 살폈고, 다행히 상대방의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지 않았다. 이 기계체를 정말 화나게 했다면, 단순한 거절의 말을 듣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 기척도 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베로니카의 다리에 바짝 붙었다.)
"망치"라는 이름의 기계체는 이번에 베로니카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망치"의 데이터 논리 속에서는 앞에 있는 기계체를 단순히 "주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표시등이 천천히 깜빡이더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망치, 아주 잘했어.
...
한동안 말이 없던 베로니카는 결국 손을 내밀어, 꼬마 로봇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세라는 눈앞의 광경에 웃음을 터뜨리며 수면 캡슐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망치"는 곧장 자기 주인 곁으로 다가왔다.
세라의 얼굴과 옷에는 정비 작업 중 생긴 오일 얼룩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꼬마 로봇과 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세라는 때때로 고개를 돌려, 베로니카에게 자신과 "로봇 동료"가 하고 있는 게임에 함께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세라의 웃음은 밝고 순수했다. 그래서 눈앞의 "꼬마 로봇"을 생명이 없는 기계체가 아닌 소중한 친구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베로니카가 인간 관객들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런 표정이었다.
아야야야! 망치, 상처 건드리지 마. 진짜 아프단 말이야!
꼬마 로봇과 신나게 놀던 세라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멈췄다.
그제야 베로니카는 세라의 하얀 목덜미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을 발견했다. 그건 세라를 처음 만났을 때, 베로니카가 남긴 "첫인사 선물"이었다.
그리고 세라의 손은 여러 겹 붕대로 감겨 있었는데, 이 또한 베로니카로 인한 상처였다.
세라는 베로니카의 시선을 느끼고는 황급히 흔적들을 가리며 살짝 민망해했다.
아...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근데, 너 힘 진짜 세더라. 그때 엄청나게 놀랐어.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인간의 몸은... 원래 나약하니까.
자존심 상하는 말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라는 쑥스럽게 웃을 뿐 전혀 반박하지 않았다.
너희 인간들 방식대로라면, 이런 상황에서... "미안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세라는 베로니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베로니카였지만, "미안해."라는 그 한마디에 세라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아, 괜찮아. 그땐 네가 화내는 게 당연했어.
애초에 여긴 엉망진창인 곳이잖아... 너희는 아주 불공평한 일을 겪고 있고, 그 누구라도 이런 대우를 받았으면 분노하는 게 당연하지.
세라는 위로하듯 미소를 지으며, 방 한쪽에 있는 작업대로 걸어갔다.
아무튼, 그것보다 내 작업을 빨리 끝내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
넌 여기서 좀 더 쉬었다 가도 돼~
조금 전에 시스템 일정을 확인해 봤는데, 오늘은 네 경기가 없어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감시관"도 여기에는 오지 않을 거야. 여긴 우리 "인간" 직원들의 휴식 구역이니까.
세라는 목에 걸고 있던 날개 모양의 펜던트를 풀어 손으로 조작했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던 "펜던트"에서 여러 개의 기체 설계도가 투영되었다.
세라는 작업대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각종 부품 모듈 속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그리고 투영 속 정보를 참고하며, 부품 모듈들을 꼼꼼히 조정했다.
세라는 작업에 깊이 몰두해 있었다. 그때 자신의 작업 위로 서서히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
세라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베로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인간과 기계체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는 베로니카가 언제부터 자신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무... 무슨 일이야?
베로니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숙여 작업대에 두 손을 짚었다. 그러고는 세라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으아... 뭐, 뭐 하는 거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저건 뭐지?
베로니카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세라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 뒤편의 무언가를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세라가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빛바랜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에는 석양빛 아래 펼쳐진 꽃바다를 날아가는 작은 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건 세라가 어렸을 때 그림책에서 뜯어낸 삽화로, 집을 떠날 때 서둘러 챙겨온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
아아, 이 그림 말하는 거야? 예쁘지?
세라는 벽에서 얇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어, 베로니카에게 내밀었다.
난 꽃을 제일 좋아하는데, 여기선 볼 수가 없어.
새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없어.
여긴 차갑고 딱딱한 금속뿐이라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내가 새라면 참 좋을 텐데. 그럼, 이곳을 벗어나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잖아.
날아...
맞아. 이 건물 꼭대기 층에는 시뮬레이션 천막이 있어서, 밤이 되면 별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해. 고위 직원들은 자유롭게 출입하며 휴식을 취한다는데, 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나도 "날아가서" 그 별들을 보고 싶어.
...
세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작업대 위의 정비 공구를 다시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에 두껍게 감긴 붕대 때문에 제대로 잡지 못하고 공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세라가 몸을 숙이기도 전에 베로니카가 먼저 그 공구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뭘 해야 하는데?
?
네 작업 말이야. 이제 뭐 해야 하는데?
네 행동 프로세스대로라면, 이 모듈들을 설계도 투영에 맞춰 차례대로 조립하려던 거지?
그런데 속도가 너무 느려.
세라가 반응하기도 전에, 베로니카는 세라의 손에서 아직 작업하지 않은 부품 모듈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세라가 하던 프로세스를 따라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고, 고마워.
세라는 베로니카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점점 실감했다. 반면 베로니카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든 작업을 순식간에 완료했다.
장난스럽게 혀를 내민 세라는 설계도를 띄우는 펜던트를 베로니카 쪽으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세라는 베로니카의 모든 동작을 주시하며, 공구를 바꿔야 할 때마다 필요한 것을 재빨리 손에 쥐여 주었다.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둘의 호흡은 점점 더 잘 맞아갔다.
그럼, 넌 인간이 아니야? 왜 여기서 계속 머무는 거야?
사실 우리 아빠가 에버렛 재단에 큰 빚을 져서 갚을 방법이 없었어. 그래서 재단에서 무상으로 일하면서 갚으라고 했지. 그런데 그 후에... 아빠가 돌아가셨어.
하지만 재단은 아빠의 빚이 그대로 남아있다면서, 내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아빠 대신 여기서 빚을 갚고 있는 거야. 기계 격투사들을 무료로 수리해 주면서 말이지.
어쨌든, 이 격투장에서 불쌍한 인간은 나와 로코 아저씨, 단 둘뿐이야. 난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나머지는 다 "인간 고위 직원"들이야. 나와는 달리 "감시관"의 통제도 받지 않지. 한마디로... 그들은 "자유로워".
...
넌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매일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너를 불쌍히 여겨주길 바라는 거야?
난...
이때 작업대 위의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부품 모듈을 다 처리한 둘은 자연스레 작업을 멈추게 됐다.
베로니카는 설계도를 띄우던 날개 모양의 펜던트를 들고는 세라에게 던졌다.
기계체들을 동정할 시간에 네 운명이나 신경 쓰지 그래?
내가 너라면, 여기서 막연한 "미래"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야.
우습군. 허망한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죄수인지 "기계체 친구"에게 하소연이나 하고 있다니.
난 그런 "동정" 따위는 바라지 않아. 이 감옥을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난 싸울 거야.
괜히 쓸데없는 환상에 빠져있지 마, 꿈속에서 "날아올라 이곳을 벗어난다"라는 소원이 이뤄지길 기다리지 말라고...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날 찾아와.
기계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세라는 베로니카의 그림자가 사라진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로니카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표시등을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난 괜찮아.
"날아서 도망친다."...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지. 단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뿐이야.
그런데 너도 같은 생각이었구나. 다행이다.
그럼, 난 이 "비밀 계획"을 계속해 볼게. 그러다 준비가 되면, 널 찾으러 갈게. 베로니카.
세라는 자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나지막이 말했다.
꼭대기 층 "주인님"의 방
에버렛 격투장
에버렛 격투장, 꼭대기 층 "주인님"의 방
자정을 넘긴 깊은 밤,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 아래에 보이는 격투장은 텅 비어 있었다. 매일 밤 정시에 열리던 격투 경기도 이미 막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이 방 안에서는 여전히 혼자만의 축제를 즐기는 누군가가 있었다.
눈앞의 수많은 스크린에서는 "베로니카"라 불리는 기계체의 영상들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은 그 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하고 있었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베로니카"라는 기계체는 자신을 무시하는 관객들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기병창을 휘두르며, 거대한 기계체 괴수들과 두려움 없이 맞섰다. 그리고 괴물들은 결국 베로니카의 공격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베로니카는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철창 안에서 다른 기계체가 가한 거센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베로니카는 기병창에 의지해 손상된 기체를 간신히 지탱했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처벌하려는 "감시관"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
재생이 끝나자, 화면은 마지막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 기병창을 손에 쥔 기계체의 당당한 자세에서는 전의가 느껴졌다.
수많은 스크린의 희미한 빛이 앞에 선 인간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비추고 있었다.
베로니카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 속에 새기려는 듯, 인간은 손을 뻗어 화면 속 베로니카의 실루엣을 따라 어루만졌다.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구나. 베로니카.
이젠 네가 점점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