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4 이상을 가둔 감옥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ER14-2 자물쇠 없는 우리

>

...

산산이 부서진 꿈속에서 그녀의 의식은 떠다니는 조각들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길도 방향도 모른 채,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눈부신 빛 한 줄기가 거대한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자, 그 빛이 한층 더 밝아졌고, 마치 행진할 방향을 알려주듯 했다.

다음 경기에 진출했다. 베로니카.

계속 나아가라. 최종 승자가 되면 보상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선언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기병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최종 승리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그녀는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격투장의 단단한 금속 바닥에 베로니카의 발걸음이 닿는 순간, 빛 아래 드러난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팔각 철창이었다.

하지만 철창 안에 있는 "상대"는 흉악한 기계체 괴수가 아니었다. 베로니카와 똑같이 생긴 기계체가 눈을 감은 채, 의식 없이 잠들어 있었다.

철창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 또 다른 "베로니카"가 눈을 떴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시각 모듈의 빛 대신, 끝없는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또 다른 "베로니카"는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갇혀 있던 철창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속박용 목줄에서 강한 교란 전류가 흘러나왔다.

계속된 전류의 충격 속에서 "베로니카"의 몸은 부서져 흩어졌다. 하지만 그 공허한 눈동자는 여전히 베로니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불빛이 꺼지고, 모든 게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의식이 급격히 흐려지면서, 어둠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size=40>코어 시스템을 스캔합니다.>>>>>>></size>

76%...

92%...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size=40>모듈 자체 교정을 시작합니다.>>>>>>></size>

자체 교정이 실패했습니다.

일부 모듈 기능 손상을 감지했습니다.

<size=40>재귀 복구 명령이 감지되었습니다.>>>>>>></size>

자체 복구 진행률은 85%입니다.

관객들

좋았어! 죽여! 찢어버려!

피를 보여줘! 더 많은 피를 보여줘!

하하하하! 짜릿하다, 짜릿해!

좋았어! 끝까지 버텨서 이겨! 초반에 쓰러지지 마. 그러면 다음 판에 볼 게 없어지잖아. 하하하!

그녀는 눈을 뜨고 붉은 눈동자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모듈의 자체 검사가 완료되자, 혼돈 속 의식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그 사이로 스며 나오는 순환액을 가만히 응시했다.

바로 그때,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시각 모듈을 안정화하기 위해, 기계 코어를 더욱 빠르게 가동하려고 했다.

꿈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속박용 목줄의 힘에 소멸하는 데이터 화면이 의식 모듈 속에서 여전히 떠다니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본능적으로 목덜미에 단단히 채워진 속박용 목줄을 만졌다. 그것은 그녀가 작동하기 시작한 날부터 얽매고 있던 족쇄였다.

이딴 목줄로 날 속박하겠다고?

젠장.

베로니카의 날카로운 손톱이 목덜미의 인조 피부를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힘으로 목줄을 억지로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목줄에서 강력한 교란 전류가 즉시 흘러나왔다. 극심한 고통이 의식 모듈을 끊임없이 강타하자, 베로니카는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윽!

이 자식들, 젠장... 모조리 부숴버려야겠어.

베로니카가 있는 이 격투장의 하층 구역에는 관객들의 소란스러운 함성도, 기계체 괴수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없었다.

좁은 공간이 짙은 어둠에 잠겨 베로니카를 감싸고 있었다. 이곳에는 격투장의 팔각 철창이나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격투 규칙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그녀의 "감옥"이었다.

기계 격투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방 안에는 거칠게 부서진 부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오일과 녹이 뒤섞인 냄새로 가득했다.

그들에게 이곳은 "정비 구역"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웠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는 격투장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었는데, 감시기가 쉬지 않고 작동하며 이 구역의 모든 미세한 움직임까지 주시하고 있었다.

"감옥" 자체에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더라도, 목덜미에 채워진 속박용 목줄이 기계 격투사들의 탈출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긴 복도 양쪽에는 비슷한 구조의 방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중 일부 방에는 휴면 상태로 들어가, 조용히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기계 격투사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 외에 빈방도 있었는데, 이전 "주인"이 격투장에서 산산조각 나, 부품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새로운 기계 격투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거였다. 이곳은 다음 격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들을 붙잡아 두는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은 오직 격투장에서의 "승리"와 "패배"에 의해 결정될 뿐이었다.

죽은 듯 고요한 어둠 속, 저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끽...

어둠 속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금속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베로니카의 예민한 감각 모듈이 이상을 감지했다. 이런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어떤 기계체였고, 그녀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 끊어질 듯한 소리는 맞은편이 아닌 바로 베로니카의 발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기계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반쯤 으스러진 머리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앞다리 하나만이 남아있었고, 그곳에서 불꽃이 희미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기계체의 잔해에서는 순환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뒤로 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목에 채워진 속박용 목줄이 기계체의 부적절한 행동을 감지한 듯, 전기 충격을 계속 가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전기 충격에 부서진 기계체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손상된 발성 모듈에서는 음성이 끊기고 불규칙하게 흘러나왔다.

패배... 기계 격투사는... 처형을... 당한다.

본 기체... 생존... 불가.

해방될 수... 없다... 자유... 결말...

대상 감지... 모델 분석.

번호... CTX-V 기능 강화형... 코드네임... 베로니카.

기체 상태 안정성... 검사... 강도... 양호.

포위 돌파... 시도 제안... 성공률... 0.019%.

강제 폐기... 프로세스... 회피...

또 한 차례 강한 전류가 흘러가자, 그 기계체는 더 이상 고강도의 전기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발성 모듈에서 흘러나오던 끊어질 듯한 음성도 완전히 멈춰버렸다.

부서진 몸에서는 순환액이 더 많이 흘러나와 베로니카의 발밑에 탁한 "거울"처럼 고였다. 그 위에는 베로니카의 분노에 찬 얼굴이 비쳤다.

베로니카는 손에 쥐고 있던 금방 기계체를 처형한 전기 충격 목줄을 뒤틀어 부숴버렸다. 그러자 단말기 시스템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

그만.

몇 시간 전, 베로니카가 어둠의 꿈속으로 가라앉던 그 순간, 밖에 있는 격투장에서는 그녀의 수많은 "동료"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에버렛 격투장

몇 시간 전

에버렛 격투장 몇 시간 전

관객들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격투장은 이제 텅 비어 있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여전히 격투장 한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강렬한 조명 아래, 한 줄로 늘어선 기계 격투사들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생명 없는 물건처럼 보이는 그들의 기체는 저마다 다른 정도의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감시관"의 거대한 강철 몸이 손상된 기계 격투사들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짧은 스캔 과정을 거친 뒤, "감시관"의 처리 코어가 곧바로 그들의 신분 코드를 확인했다.

이어서 감시관은 통신 단말기를 켜고, 맞은편에 있는 "주인님"에게 명령을 요청했다.

처리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종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주인님.

꼴도 보기 싫은 쓰레기들, 당장 치워 버려.

쓸모없는 더러운 것들, 전부 쓰레기 더미에 처박아 버려.

네. 주인님.

종료 프로그램 실행을 연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기체는 아직 격투 경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추가 경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요청을 기각한다. 지금부터 종료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지지직. 지지직.

"감시관"이 명령하자, 기계 격투사들의 목줄에서 초고압 전류가 동시에 흘러나와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모든 기계체의 에너지 코어가 전기 충격에 의해 꺼지면서, 무거운 몸체들이 고철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감시관"이 시스템 단말기에 명령을 내리자, 텅 빈 격투장에 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수많은 스크린이 걸려 있는 공중 가로대에서 거대한 유압 프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압 프레스가 무거운 프레스 장치를 끊임없이 내리눌렀다. 장치가 기계체들에 닿자, 금속으로 된 기체가 종잇장처럼 찢기고 뒤틀렸다.

기계체들

종료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는... 아직... 격투 경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장치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내려와 바닥에 밀착되었고, 기계체들의 소리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기계 격투사에 대한 "처형"이 끝나자, 유압 프레스는 다시 천천히 원래 위치로 올라갔다. 바닥에는 본래의 형태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기계체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주인님, 처리를 완료했습니다.

좋아. 그리고 네 말이 맞았어, 오늘 경기에서 확실히 새로운 걸 봤네.

그 코드네임 "베로니카"라는 기체 말이야. 확실히 더 큰 무대에 세울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곧이어, "주인님"에 의해 통신이 바로 끊어졌다.

하지만 "감시관"의 시각 모듈은 미세한 이상을 포착하지 못했다. 잔해로 가득한 그곳에서는 머리와 부서진 팔다리만 남은 기계체 한 대가 느릿느릿 바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감시관"이 떠나자, 격투장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유일하게 들리는 건, 프로그램에 따라 청소 임무를 수행 중인 청소 로봇 몇 대에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청소 로봇들은 기계 팔을 이용해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구조물을 분해한 뒤, 그 부품 파편들을 수거하여 뒤쪽 쓰레기통에 넣고 있었다.

청소 로봇들은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능숙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어진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청소 로봇들의 시각 모듈에 비친 "동료"의 잔해는 단지 처리해야 할 작업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참혹한 전장을 떠올리게 하는 금속 잔해 사이를 아담한 체구의 인간 소녀가 가볍게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아, 조금만 지나갈게.

잠깐만, 그거 버리지 마! 그 부품은 내가 쓸데가 있거든.

작업복을 입은 소녀는 바닥을 가득 메운 잔해와 청소 로봇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발밑의 부품을 밟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소녀는 가끔 몸을 숙여 부서진 부품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다 아직 쓸 만한 부품을 발견하면 집어 들고 표면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부품들을 정리한 후, 소녀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기도하거나 추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등에 멘 공구함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소녀는 자신만이 그 의미를 안다는 듯,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미안해. 조금 전에는 많이 아팠지?

하지만 이제 괜찮아. 모든 게 끝났으니까.

내가 너희를 기억할 거야. 그리고 너희 번호와 정비 기록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

특이한 외형의 꼬마 로봇 하나가 항상 소녀를 따라다녔는데, 그 로봇은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그 로봇엔 발성 모듈이 장착되지 않았기에, "인간 주인"과의 의사소통을 오직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맞아. 망치. 바로 이렇게 기체 번호가 붙어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해.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고마워.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칭찬 듣는 게 그렇게 좋아? 알았어. 내가 더 노력해서 나중에 발성 모듈 달아줄게.

소녀는 "망치"라 부르는 꼬마 로봇에게 친한 친구처럼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거친 기계 잔해 더미 속에 아담한 몸이 서 있는 모습은 금속 폐허 위에 조용히 피어난 작은 꽃 같았다.

하지만, 이 광경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경보가 울리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붉은 빛이 격투장의 모든 구석까지 뒤덮었다.

감시기 시스템

경보... 경보... 경보...

?

경보와 동시에, 격투장 위쪽 감시기 시스템에서 기계의 전자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시기 시스템

경보... 경보... 경보...

종료 프로세스가 완료되지 않은 기계체가 감지되었습니다. 대상이 코어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설... 설마 감시기 시스템이 내가 조금 전에 모은 부품들을 잘못 인식한 건 아니겠지?!

소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기계체 부품들이 가득 담긴 공구함을 품에 꼭 안은 채 놓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격투장 외곽에서 무거운 금속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 점점 가까워졌다.

망했다. 그 "감시관"이 오고 있어!

(긴장한 채로 제자리에서 빠르게 빙빙 돌았다.)

으아, 머리야. 진정해. 어서 방법을 생각해 봐.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소녀는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망치, 어서 가서 메인 차단기를 내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뒤, 격투장의 문이 쾅 하고 열리며 "감시관"이 들어섰다. 그러자 격투장이 순간 암흑으로 뒤덮였다.

(좋았어. 전기가 끊겼어. 그러니 바로 지금...)

"감시관"의 시각 모듈이 일반 모드에서 야간 투시 모드로 전환되는 찰나, 인간 소녀의 그림자가 감시관의 거대한 기체를 스쳐 지나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베로니카는 경보를 울리게 했던 목줄을 산산조각 냈다.

경보음이 멈추자, 격투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감시관"이 다시 야간 투시 모드로 구역 전체를 스캔했다. 하지만 바닥의 기계 잔해들과 작업 중인 청소 로봇 몇 대 외에는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감도에 대한 자체 검사를 진행해.

시스템을 다시 한번 스캔했지만, 이상 상태는 감지되지 않았다. "감시관"은 구역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자리를 떠났다.

에버렛 격투장

하층 직원 생활 구역

에버렛 격투장 하층 직원 생활 구역

소녀가 복도를 빠르게 내달리자 땋아 늘인 밤색 머리칼이 뒤로 흩날렸고, "망치"가 바로 뒤를 따랐다.

???

다행이야. 겨우 살았어~!

아야...

소녀는 복도 모퉁이에서 커다란 체격의 남성과 세게 부딪혔다. 뒤따라오던 "망치"도 멈추지 못하고 소녀의 무릎 뒤를 들이받았다.

소녀와 망치는 서로 뒤엉켜 바닥에 쓰러졌고, 그 충격에 그녀의 공구함이 튕겨 나가며 부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쏟아진 금속 부품들이 바닥을 굴러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아야야야! 아파 죽겠네. 아, 로코 아저씨! 왜 하필 거기 서 계신 거예요?!

세라! 이 녀석, 또 어디 가서 사고를 치고 온 거야? 쳇... 또 "쓰레기" 주워 왔네?!

허구한 날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니니?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도 왜 듣지 않아? 조심해. 그러다 "감시관" 그 기계 광한테 잡히면 큰일 난다고!

네가 재단 직원이라도 되는 줄 아니? 그쪽은 특권이 있어서 "감시관"이 신경 쓰지 않는 거지만, 우린 그런 거 없잖아!

넌 여기서 그냥... 하!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제가 그렇게 덜렁대는 줄 아세요?

그리고 이건 쓰레기가 아니라, 저한테 아·주 중·요·한 거·라·구·요!

매번 똑같은 소리만 하시니까, 지겨워 죽겠어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니까요. 아저씨, 제발 저 좀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좋아. 네가 어린아이가 아니면, 지금 몇 살인데?

아,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아저씨 말대로 할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제 됐죠?!

세라는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성에게 일부러 등을 돌리고,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떨어진 부품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로코 아저씨 발밑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바짓가랑이에 바짝 붙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망치"는 발성 모듈이 없는 대신 서툰 몸짓으로 둘 사이의 어색함을 풀어보려 했다.

...

로코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세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달려온 탓에 앞머리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코는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라와 같이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바닥에 흩어진 부품들을 주워 담았다.

그 부품들은 흔한 톱니바퀴나 너트가 아니었다. 대부분이 기체 번호와 코드네임이 새겨진 금속판이었다.

로코가 모아둔 부품들을 세라의 공구함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내내 말없이 있던 세라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전 그냥... 기계 격투사들이 그렇게 되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에요. 경기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부서져야 한다니...

그들은... 전부 제가 정비하고 업그레이드해 줬어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기억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그렇게 생각했어요.

넌 네 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았구나. 둘 다 고집불통이라, 웬만해서는 말을 듣지 않는구나.

아... 네 아버지가 지금 네 모습을 봤다면, 그때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훌쩍 자란 걸 보고 흐뭇해했을 텐데.

아무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잘 보살펴야 해.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널 부탁하고 갔으니까.

...

네. 아버지가 도박만 하지 않았더라면... 에버렛 재단에서 고리 대출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엄마도 지금 우리와 함께 있었을 거예요.

집안 재산을 전부 잃지만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빚 때문에 재단의 노예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제가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고요.

콜록콜록. 조심, 말조심해라!

로코는 낮은 목소리로 세라를 말리며, 머리 위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라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알겠어요. 고귀한 에버렛 재단에서는 그걸 "자발적 노동을 통한 채무 상환 장기 계획"이라고 부르더군요. 말은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같은 말 아닌가요?

아버지가 모든 걸 버리고 "도망" 치지만 않았더라면, 제가 이곳에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20년 채무 계획을 대신 짊어질 일은 없었겠죠. 결국 아버지는 이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잖아요.

정말 잘도 도망치셨네요.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셔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잖아요. 이제는 아버지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리 "이건 전부 아빠 때문이야."라고 되뇌어도, 정작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어릴 적, 아빠가 목말을 태워주던 기억이 자꾸 떠올라요. 그 옆에서 엄마는 늘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셨죠.

그런데 왜 결국 이렇게 돼버린 걸까요? 아빠는 도박에 빠져 고리 대출에 허덕이셨고... 엄마는 집을 나가시면서 저를 짐이라며 두고 가셨죠.

정말... 무책임한 어른들이네요.

...

짜증 나네요. 이런 감정은 대체 뭘까요? 너무 피곤해서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세라는 지지 않으려는 듯 투덜거리면서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슬며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는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늘 고집 센 세라가 뜻밖에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자, 로코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 주인을 잘 보살피던 꼬마 로봇조차 두 인간 사이의 분위기를 분석할 수 없었고, 작동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 로코가 갑자기 격렬한 기침을 해대자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기침은 점점 심해졌고, 그의 안색은 조금씩 창백해졌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아, 아저씨, 괜찮으세요?

세라가 황급히 다가가 로코의 등을 두드리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대신 허리에 매고 있던 가방을 가리키며 안의 물건을 꺼내 달라고 손짓했다.

세라는 오일로 얼룩진 가방 속을 급하게 뒤지다가, 여러 정비 도구 사이에서 약병 하나를 겨우 찾아냈다.

로코는 기침으로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라벨이 흐릿해진 약병에서 조심스럽게 약을 꺼냈다.

로코는 약을 몇 알 집어 한 번에 삼켰다. 그러자 창백했던 얼굴색이 점차 제빛을 찾아갔다.

아저씨, 병이... 다시 나빠진 거예요? 왜 이렇게 약을 많이 드시나요?

괜찮아. 오래된 병이라 이제는 익숙해졌어.

아저씨,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어요. 어떻게 진통제만으로 버티려고 하세요? 계속 이러다가는...

괜찮아.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이제 3년밖에 남지 않았어. 마지막 3년 치 근무시간만 채우면... 콜록콜록... 이곳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

아... 근무 시간 채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버는 돈은 적은데 쓸 데는 많고, 담배와 술을 바꾸고 싶은데, 진통제는 또 바꾸지 않으면 안 되니...

이 3년 치 근무시간을 다 청산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아저씨...

흠, 벌써 여기서 10년 넘게 일했구나. 예전엔 네 아버지가 내 어시스턴트였는데, 이제는 네가 하는구나.

하하, 무슨 "자발적 채무 상환 장기 계획"? 그럴듯한 말이지만 결국 감옥살이나 다름없잖아. 갇혀 있는 기계 격투사들이나, 그 쇳덩어리들을 수리하는 우리나 다를 게 뭐니?

같은 인간이고 하는 일도 같은데, 재단 소속 직원과 우리는 대우가 천지 차이잖니.

그들은 시간에 맞춰 출퇴근하고, 휴가도 있고, 월급과 야근 수당, 보험까지 받잖아. 하... 아저씨도 젊었을 땐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내 잘못이야. 큰돈 벌어서 가족들 잘 살게 해주겠다는 욕심에, 고리대금에 빠져서 이 꼴이 됐지. 아내와 아이들은 다 떠나버렸고...

날 떠난 게 당연해. 뭐... 지금쯤 아내와 딸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흠,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지. 나 같은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떨어져 지내니 전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을 거야. 콜록콜록...

...

항상 재치 넘치던 소녀가 언제부턴가 말이 없어졌다. 세라는 꼬마 로봇을 끌어안은 채, 얼굴에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내 잘못이구나. 이 아저씨가 원래 말재주가 없어서... 콜록콜록... 내 하소연만 하다가 네 마음을 더 무겁게 했구나.

만약 언젠가...

머리 위 감시기 시스템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전자 음성이 울려 퍼지며, 둘의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감시기 시스템

부적절한 언행이 감지되었습니다. 오늘 첫 번째 위반 사항으로 기록됩니다.

세라, 초급 엔지니어, 이번 분기 위반 횟수 17회로 근무 시간 120시간이 차감되었습니다. 로코, 중급 엔지니어, 이번 분기 위반 횟수 3회로 근무 시간 25시간이 차감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에버렛 재단 직원 수칙> 제5조, 직원 간에는 그룹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를 논의하거나 공유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한다는 조항을 위반하셨습니다.

야! 이건 너무하잖아! 어떻게 제멋대로 근무 시간을 깎아버릴 수 있어?! 뭐가 잘못됐다는 건데?

감시기 시스템

세라, 초급 엔지니어, 이번 분기 위반 횟수 18회로 근무 시간 150시간이 차감되었습니다.

<에버렛 재단 직원 수칙> 제14조, 감시 시스템에 대해 어떠한 의문 제기, 반박, 위협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위반하셨습니다.

젠장! 이런 미*...

하지만 맞은편에 있던 로코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눈빛으로 "그만해."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세라는 꾹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사방의 감시기 시스템은 평소엔 "감시"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말기에 탑재된 고감도 지능형 언어 식별 모듈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가동되고 있었다.

대화 중 규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단어가 포착되기만 하면, 즉시 "근무 시간 차감"이라는 처벌이 뒤따랐다.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보상은 전혀 없다. 이런 고통스러운 나날도 모두 "거액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보급마저, 간신히 채운 근무 시간으로만 바꿀 수 있었다.

단말기 시스템의 지능형 알고리즘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거대한 기계 격투장에서 돌아가는 작은 톱니바퀴로 전락해 버렸다.

...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얼른 쉬렴. 내일 아침부터 또 일해야 하잖니. 단말기 시스템이 벌써 다음 주 작업 할당량을 보내왔더라.

최근에 새 기계체들이 또 잔뜩 들어왔대. 이번 시즌도 연장된 모양이더라. 일이 쉽진 않겠지만... 힘든 게 있으면, 아저씨가 도와줄게.

내일 A 구역부터 F 구역까지 하렴. 나머지는 내가 할게.

나 먼저 가마.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단말기로 연락하렴. 난 무음으로 두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내일 봐요. 아저씨.

세라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 하나 없는 몇 평 남짓한 공간은 간단한 생활용품과 빼곡히 들어선 정비 장비들로 채워져 있었다.

환기팬이 윙윙대며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공기 중에 배어 있는 오일 냄새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망치, 어서 쉬자. 잘 자. 내일 아침부터 또 일해야 하니까.

(표시등이 조용히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충전 거치대로 돌아갔다.)

세라는 간단히 씻은 뒤,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몸을 뉘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라면 세라는 좁고 더러운 방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다. 그제야 그녀의 생각들이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올랐다.

세라는 더 이상 온몸이 오일로 얼룩지고, 자유가 없는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세라의 손이 날개를 펼치려는 듯한 깃털 모양 목걸이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께서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세라의 끝없는 상상 속에서

이 "날개"가 그녀의 몸에서 돋아난다면, 자유롭게 날아올라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라의 상상이 날개를 펴고 방을 떠나 격투장의 돔을 넘어, 마침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광활한 별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세라는 오랜 기간 자신을 가두고 있던 기계 격투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