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14-1 격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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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렛 격투장 상층 경기 구역
밤이 깊었지만, 격투장은 여전히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강렬한 조명과 요란한 음악이 관객들의 흥분을 더 고조시켰다.
흥분한 관객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열릴 첫 기계체 격투 경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격투장 중앙으로 쏠린 관객들의 시선은 주체할 수 없는 열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치열한 "기계체 격투"가 빨리 시작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기계체의 부품이 산산조각 나고, 순환액이 바닥을 가득 적시는 광경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가장 자극적인 "오락"이었기 때문이다.
격투장 곳곳의 스피커에서 웅장한 전자음이 울려 퍼졌고, 치열한 격투 대회가 곧 막을 올릴 것이란 걸 예시하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에버렛 격투장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시즌의 첫 기계 격투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전 시즌과 동일한 규칙으로, 승자는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고, 패자는 아쉽게 탈락하게 됩니다.
이번 시즌에서 승리한 행운의 주인공은 대상을 얻게 될 예정인데요, 그건 바로—— 자유입니다!!
승리한 기계 격투사는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행운의 격투사에게 베팅한 관객분들도 상금 풀의 푸짐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최고의 오락을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모두 좋은 밤 되십시오!
가상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격투장 중앙을 비췄다. 여러 갈래의 빛이 서서히 열리는 바닥 장치를 비추자, 거대한 팔각 철창이 지하에서 천천히 솟아올랐다.
철창 안에 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기괴하고 거대한 기계체 괴물이었는데, 긴 꼬리를 가진 거미 모양의 기계가 철창 안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며, 날카로운 관절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주위 인간 관객들의 환호를 감지해서 그런지, 기계 거미의 발성 모듈에서 귀를 찢는 포효가 터져 나왔고, 마치 아직 등장하지 않은 "사냥감"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귀를 찢는 포효와 함께, 격투장 한쪽 통로의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어두운 통로 너머로 묵직한 발소리와 금속 바닥을 긁는 무기의 마찰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은 정말 볼만하다고 하던데, 이번엔 누가 나오려나?
지난주에만 열 대 넘게 박살 났잖아. 오늘은 분명 새로운 게 나올 거야!
쳇! 새 시즌이 시작된 지 벌써 석 달이나 지났는데, 두 번째 경기까지 살아남은 놈이 아직 하나도 없네.
기껏 첫판 이겨봤자 다음 판에서 박살 나 버리니, 볼 맛이 안 나!
난 저번 시즌에 덩치 큰 놈들한테 몇 번 베팅했었거든? 겉보기엔 다 이길 것 같았는데, 한 놈도 못 이기더라!
그럼, 오늘은 베팅할 거야? 말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 좀 보고 정하자! 더 이상 돈 날릴 순 없다고. 그나저나, 넌 지난번에 얼마나 잃었는데?
그 얘긴 꺼내지도 마. 야, 저기 봐! 격투사가 등장한다!
가면을 쓴 여성 기계체가 기병창을 손에 쥔 채 어두운 복도 속에서 걸어 나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섰다.
저번 시즌에 등장했던 일반 코팅을 장착하거나, 간신히 인간 형태를 갖춘 기계 격투사들과는 달리, 인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형태였다.
그녀의 외형도 아주 독특한 편이었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특이한 형태의 "뿔"이 튀어나와 있었고, "긴 꼬리"가 뒤로 늘어졌다.
이때 문 위의 스크린에 생소한 이름이 나타났다.
"베로니카"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전에 설정된 프로그램인 "원한"이 활성화되며, 거대 기계 거미는 더욱 광폭해졌다. 이어 날카로운 다리로 금속 바닥을 긁으며,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을 냈다.
기계 거미는 격투장의 철창을 미친 듯이 들이받으며 날카로운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면서 철창 밖 기계 격투사를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내고 싶다는 듯한 광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베로니카"라는 기계 격투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석 여기저기에서는 불만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쯧, 고작 이런 수준이냐?
여기 오면, "용맹한 기계 격투사의 치열한 격투"를 볼 수 있다더니, 저 덩치로 뭘 보여주겠다는 거야? 지난번에 열 번 연속으로 상대를 박살 낸 그 이형 거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내 말이! 그렇게 홍보하더니, 고작 이딴 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 젠장, 당장 내 푯값 물어내!
뭘 그렇게 투덜대? 이제부터가 진짜야. 맨날 그 이상하게 생긴 기계체끼리 머리 터지는 것만 보는 게 뭐가 재밌냐?
저거 봐. "인간"과 똑같이 생겼잖아. 게다가 꼬리도 달려 있으니, 얼마나 독특해. 저런 기계체는 처음 봐.
이따가 저 거대한 거미한테 갈가리 찢겨서 삼켜질 걸 상상해 봐... 정말 짜릿하겠지!
그런 장면은 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어. 이게 바로 "기계체 격투"의 묘미라고!
젠장, 또 그렇게 생각해 보니 재밌을 거 같긴 하네.
야, 그렇게 말하니까 기대되긴 하네. 네가 뭘 좀 아는구나?
방금 언급했던 장면을 상상한 관객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격투장 한가운데를 향해 외쳤다.
야! 그 뭐더라... 베로... 꼬리 달린 쇳덩어리! 내 푯값 아깝지 않게, 죽기 전에 발버둥이라도 쳐라!
난 자극적이고 더 짜릿한 걸 보고 싶단 말이야! 알겠냐?!
베로니카가 관객의 말을 듣고 관객석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인간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 관객들 눈에 들어왔다.
던져진 가면이 바닥에 떨어져 "쿵" 하는 소리를 냈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서늘한 분노가 어리더니, 무례한 관객을 꿰뚫을 듯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베로니카는 묵직한 기병창을 들어 올려, 날카롭게 번뜩이는 창끝을 관객석의 인간을 향해 곧장 겨누었다.
닥쳐.
베로니카의 눈빛에 담긴 적의를 느낀 탓일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재수 없어! 고작 쇳덩어리 주제에 감히 날 협박하는 거야?
야, 저거 딱 네 취향 아니야? 너 저런 얼굴 좋아하잖아!
무슨 헛소리야? 저건 그냥 고철 덩어리일 뿐이라고! 어떻게 생겼든, 내가 쇳덩이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건방 떨기는, 저 거대한 괴물한테 어떻게 박살 나는지나 두고 보자고...
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앉아. 영상 찍고 있는데, 네가 화면을 다 가리잖아!
쯧... 푯값은 아깝지 않게 해야 할 텐데.
수많은 인간의 악의와 경멸, 거기에 폭력과 학살에 대한 갈망이 뒤섞여, 파도처럼 격투장을 휩쓸었다.
인간들은 기계체가 격투장에서 처참히 파괴되어 짓밟히며, 무자비하게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황금시대 말기에, 매일 밤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펼쳐지던 이 장면은 많은 인간들이 즐기는 "오락"이었다.
평범한 오락거리에 무뎌진 관객들은 이런 잔혹한 광경 앞에서만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폭력적인 오락에 빠져 있던 관객들은 자신들 역시 환호하는 그 장면 속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관객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머리 위 어둠 속, 거대한 단면 거울 뒤편의 방에서 "신비로운 귀빈"이 이 모든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수많은 스크린이 그 "신비로운 귀빈"의 눈앞에 보기 좋게 배치되어, 격투장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신비로운 귀빈"의 뒤로 거대한 기계체 한 대가 침묵 속에 서 있었는데, 기계체의 금속 외피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기계의 민감한 시각 식별 모듈은 인간의 가벼운 손짓에도 즉각 반응했다.
주인님, 현재 방 온도는 25℃이며, 습도는 55%입니다. 오늘은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이신데, 온도를 더 알맞게 조정해 드릴까요?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즌의 격투 형식이 워낙 격렬했던 탓에 일부 격투사들이 경기 도중 카메라 촬영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더 나은 관람을 위해 격투장에 카메라를 추가로 설치하여, 격투의 전체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네가 훌륭한 집사로서 이런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해 온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런 "기계체 격투사와 기계 괴물" 같은 형식는 이제 질렸다고, 뭐, 좀 새로운 거 없어?
주인님, "베로니카"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이 기체는 완전히 새로운 걸 보여드릴 겁니다.
제가 베로니카의 기체 파라미터를 기반으로 연산해 본 결과, 그녀가 주인님의 "그 계획"의 최종 목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하도록 하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네. 주인님. 그럼, 편히 감상하십시오. 잠시 후에 이번 경기의 상세 데이터를 분석해 보고드리겠습니다.
거대한 기계체가 "주인님"의 지시에 따라 방을 떠나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주인님"은 다시 시선을 눈앞에 있는 스크린으로 돌렸다. 수많은 스크린이 격투장의 전경을 생생히 비추고 있었다.
지금 모든 스크린이 첫 번째 격투를 앞둔 "베로니카"라는 기계체 격투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재미있네.
날 얼마나 놀라게 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볼까? "베로니카".
격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러자 거대한 기계 거미를 가두고 있던 철창 스위치가 열리더니, 견고한 쇠창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풀려난 기계 거미가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이내 단숨에 뛰어올라 기계 격투사 앞까지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격투장 위쪽 대형 스크린이 가동되면서, 격투장의 모든 광경을 사각지대 없이 수많은 관객에게 생생히 비춰 주었다.
관객석에 울려 퍼지는 열띤 환호가 뜨거운 공기와 함께 격투장의 구석구석을 휘감았다.
기계 거미가 앞에 있는 기계 격투사를 내려다봤다. 거미의 눈에는 길고 날씬한 베로니카의 그림자가 하찮기만 했다.
베로니카는 기병창을 단단히 움켜쥔 뒤 공격 자세를 취했고, 언제든지 눈앞의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거대한 거미의 사전 설정된 프로그램은 상대의 이런 행동에 거미의 "분노"를 자극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거미는 꼬리를 거세게 휘두르더니 채찍처럼 베로니카를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재빨리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자, 거미의 무거운 꼬리 침이 바닥을 강타했다. 순간,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공격이 빗나가자, 기계 거미는 분노에 휩싸였고, 날카로운 다리를 휘두르며 다시 베로니카를 향해 덤벼들었다.
예상 밖의 광경에 관객들은 더 큰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런 고철 덩어리를 상대로 시시한 게임을 해야 하다니...
시간 낭비가 따로 없네.
붉은 눈동자에서 강렬한 전의가 불타오르는 베로니카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기계 거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 순간, 베로니카는 기체에 응축된 힘을 터뜨려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서 공중에서 거대한 기계 거미의 코어를 향해 기병창을 겨눴다.
베로니카가 거대한 거미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순간, 격투장의 공기가 일시적으로 멈춰버린 것만 같았고, 관객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죽어라!
베로니카가 기병창을 힘껏 휘두르며 멈춘 것 같은 공기를 갈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