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공중 정원의 지원 대부대가 섬에 도착했고, 두 집행 소대의 대원들은 자신들이 걱정하던 이들에게 달려갔다.
과학 이사회 인원들은 베라의 새 기체를 보고 숨을 들이켰고, 생명의 별 대원들은 책임을 다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을 구조했다.
다행히 꼼꼼히 수색하던 수색대가 "텅 빈 공간" 아래의 좁은 홈에서 미세한 생명 신호를 탐지해 냈다.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보다 더 위독한 상태의 한 인물을 끌어올렸다.
모든 부상자들은 공중 정원으로 후송되었다.
<size=29>한 달 후, 여러 가지 고려 끝에 그 섬에서 일어난 일은 "사고"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size>
<size=29>미지의 승격자와 맞서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늙지 않는 자"를 제거한 후, 셋은 뜻밖의 사고에 휘말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희생되지 않았다.</size>
<size=29>어떤 면에서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size>
<size=29>쿠로노는 작망 기체의 디자인 정보를 제출했고, 감사원 측에서 압박했다고 한다. 어쨌든 과학 이사회는 결국 기체의 모든 권한을 획득했다.</size>
<size=29>하니프는 퇴원 후 엄격한 심사를 받게 될 예정이다.</size>
그리고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하얀 병실에서 조용한 오후, 지휘관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흐릿한 꿈은 파오스 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과거로 지휘관을 데려갔다.
그때도 조용한 오후였고, 심지어 같은 병실이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갔는데도 살아 돌아오다니... 목숨이 참 질기네.
깨끗하고 하얀 병실에서 지휘관은 흐릿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귓가에서는 세 젊은이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휘관이 처음으로 생명의 별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였던 것 같았다. 그때는 이런 상황이 미래의 일상이 될 줄 알지 못했다.
난 우리 목숨이 더 질긴 것 같아. 그 많은 침식체들 속에서 살아남았잖아. 갑자기 지원군이 나타나다니, 운이 좋았어.
브리이타가 왕 할머니와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어. 정말 멋있었는데... 어쩌면 수송 부대도 괜찮은 곳일지도 몰라.
강한 자는 어딜 가든 잘 살겠지만, "꼴찌"는 어딜 가든 망하기 마련이야.
……
시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좋아. 역시 나는 집행 부대에 가고 싶어. 수송 부대, 미안.
우리한테 왜 말하는 거야? 누가 물어봤어? 쓰레기들의 꿈 같은 건 듣기 싫어. 어차피 난 집행 부대에 무조건 갈 거야.
그럼, 너는 왜?
집에 철없는 인형이 하나 기다리고 있거든. 식스 원페어.
지휘관의 쉰 목소리는 풀무질하는 소리 같았다.
[player name](이)가 날 기억할까? 기지 밖에서 쓰러졌을 때, 내가 구조하러 갔었거든. 뭐, 내가 도착했을 땐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말이야.
글쎄. 의사가 두개골 내 혈종은 제거됐다고 했는데, 최근 며칠간 반응으로 봐서는 그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그럼, [player name](이)가 퇴원하면 내가 전해줄게.
이 쓸모없는 녀석한테 말하지 마.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왜? 네가 흑역사라고 생각한다고 우리가 언급조차 하지 못해? 난 분명히 직접 봤어.
바네사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설명해 주자면... 교관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윗선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유포하지 말라고 했대.
특히 그 두 구조체에 관해서는 더욱이... 그래서 우리는 쿠로노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어.
두 구조체?
"라이어" 말고도 하나 더 있어? 너희들 나한테도 알려주지 않을 거야? 아, 너무해!
쉿.
하, 바보들. 수다 떠느라 카드도 보지를 않네.
집행 부대에 무사히 들어가고 싶으면, 쿠로노와 엮이지 말라고 경고했었잖아. 이 병상에 누워 있는 반쯤 죽은 쓰레기를 귀찮게 하기 싫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오, 내가 이겼다.
바네사는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고 손을 털며 나갔다.
몇 분 후, 병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지휘관은 침대 옆 수납장 위의 새 단말기와 시몬이 놓고 간 꽃다발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상 시뮬레이션 훈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비어 있는 혼란스러운 느낌은 지휘관을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의사가 정기적인 재활 치료를 권했지만, 몇 달이 지나 졸업할 때까지도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지휘관은 뇌와 기억력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고 옆에서 지나쳐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지휘관이 타고 있는 수송차는 폐허 위를 한 시간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다 왔다. 신병들! 하차한다!
운전석 병사가 차에서 내려 뒤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근처는 원래 파오스의 지상 실전훈련 기지 중 하나였지만, 몇 년 전 이상 현상으로 폐쇄됐다. 너희 중 직접 겪은 사람도 있겠지?
병사는 "당사자"가 왜 다시 이곳에 왔는지 의아하다는 듯, 지휘관을 이상한 눈빛으로 슬쩍 쳐다보았다.
자, 빠르게 임무를 완수하도록! 주변 보육 구역 재건에도 인력이 필요하다!
새로 받은 전술 단말기를 꽉 쥔 지휘관은 회색빛 폐허를 걸으며 탐색을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주변을 탐측하던 지휘관은 희미한 신호를 따라 폐허 속 좁은 틈을 발견했다. 지휘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좁은 입구로 기어들어 가기로 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이상한 익숙함이 밀려왔다. 특히 누군가가 남긴 마른 장작과 붕대 더미를 보고는 그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지휘관은 기대 없이 몇 번 외쳐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결국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
그 외에도 지휘관은 발치에서 수상한 검은 파편을 몇 개 발견했다. 얼굴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니 타버린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이게 불에 녹아버린 단말기라면, 그 안의 데이터는 추출할 수 없을 것이다.
폐허 아래에서 더 이상 찾을 만한 단서가 없자 지휘관은 풀이 죽었다. 그래서 콘크리트 덩어리를 붙잡고 지상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잡는 순간, 틈새에서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지휘관은 떨어지는 종잇조각을 잡았다.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비바람을 맞았는지 글씨가 지워져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휘관의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폐허 위를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조금씩 발걸음의 폭을 넓혔다.
미풍이 점점 휘파람처럼 울리기 시작했고, 발걸음의 폭은 더욱 커졌다. 그러다 지휘관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끊임없이 울렸다. 그때 지휘관은 얼마 전에도 이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렸던 것처럼 느껴졌다.
입가에 맴도는 이름이 있었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떤 구조체가 귓가에다 "빨리, 더 빨리"라고 말하며 카운트다운 하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하늘에서 눈이 다시 내릴 때까지 지휘관은 달렸다.
모든 폐허와 부패를 지나, 운명과 불완전한 기억을 넘어 지휘관은 달렸다.
마침내 폐허의 가장 높은 지점에 멈춰 선 지휘관은 눈앞의 부서진 벽을 향해 천천히 종잇조각을 들어 올렸다.
바스락.
종이가 손바닥에서 부서질 뻔했다. 하지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지휘관을 보지 못했던 순간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헉... 헉...
쿨럭...
베라의 입에서 순환액이 쏟아졌다. 손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하얀 폐허 위에 떨어졌다.
손을 내리고, 손바닥에 흐르는 붉은색을 바라본 베라는 비웃을 기력조차 없었다.
이게... 무슨 결말이지?
쿨럭... 그래도 더 나쁜 결과는 없어서 다행이네.
베라는 그 "꼬마 지휘관"이 결승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라는 잠시 눈을 감고, 다가올 일을 상상했다.
여기서 죽는 건 그저 그런데, 쿠로노에 다시 잡혀간다면...
그건 진짜 최악이야.
음... 이젠 질렸어.
잠시나마 동료가 있었다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아무도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웃긴 건, 지휘관은 밧줄이 끊겨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터무니없고 영웅적인 희생으로 가득한 도주는 결국 베라 혼자만의 추억이 되었다.
……
아니.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아니. 난 이런 결말은 싫어!
주변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베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쪽지를 남기려 했지만, 눈꽃이 떨어지면서 금세 젖어버렸다.
안 돼.
어떻게 해야 할까?
베라는 초조해졌다. 빨리 쿠로노를 벗어나 공중 정원으로 "추격"해 가서 그녀의 모든 영광과 전리품을 되찾아야 했다. 그리고...
베라는 갑자기 손바닥의 순환액을 보았다. 그러자 끓어오르는 의식의 바닷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
베라는 결국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장난이나 쳐볼까?
폐허 위에 선 지휘관은 조금 전 광란의 질주로 인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찬바람이 온몸을 아프게 했지만, 흥분한 심장은 이 평범한 육체에 뜨거운 피를 보내고 있었다.
손을 펼치자, 쪽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날아갈 뻔했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지휘관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커다란 "혈서"가 새겨진 무너진 벽이 있었다.
떨리는 필체에서 특유의 악취미와 강한 불만이 느껴졌다.
화려한 붉은색을 입은 누군가가 간절한 바람을 숨기기 위해 도발적으로 남긴 "현상수배" 같았다.
결승점이 바로 앞에 있어. 넌 목숨을 걸어서라도 끝까지 가야 해.
그리고 우리는 더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날 거야.
지휘관은 황량한 폐허 위에서 웃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한 문장이 모든 혼돈을 뚫고 떠올랐다.
슬퍼하는 건, 단 1초만 할 수 있다. 그리고 1초 뒤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좋았어. "오랜만에 만났을 때" 첫 마디는 진부한 말로 해야겠지.
지휘관은 눈을 떴다. 완전히 눈을 떴다. 더 이상 꿈이 아닌, 진짜 현실이었다.
오랜만이야.
병상 옆 의자에 앉은 붉은 구조체가 붉은 사과를 깎고 있었다.
과일 먹을래? 참고로 사과밖에 없어.
베라는 지휘관에게 잘라놓은 사과를 건넸다.
그래. 여기가 어딘 것 같아? 천국이랑 지옥 중에 하나야.
하하하하. 맞았어!
베라는 지휘관의 대답에 만족한 듯, 드물게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대답해 줄게. 그리고 제한 시간은 3분이야.
이 기체는 힐다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과학 이사회에 인계되었어. 그때 다들 빠르게 움직여서 전체 기체 출력을 낮추고 생활 필수 모듈도 추가했어.
제어 불가 상태는... 다시 발생하지 않을 거야.
비요 기체는 거의 폐기 수준이라 아직 수리 중이고, 괴려 기체로도 돌아갈 수 없어. 과학 이사회는 기체 동기화 과정에서 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 일단 네가 퇴원한 후에 다시 고려하자고 했어.
그 승격자가 도망간 흔적을 남긴 것 빼고는 죽어야 할 건 다 죽었어. 모든 이합 생물과 헤인스들까지 말이야.
참고로 네 후배는 특수 병실로 이송됐어. 헤인스와 관련됐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더라. 감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더 맞겠네. 지금은 "하니프"만 고집하고 있어.
넌... 공중 정원의 지원이 조금만 늦었어도 내장이 퍼니싱에 다 먹혔을 거야. 다리 부상도 심했지만, 잘 회복한 것 같네. 역시 생명의 별 의료 기술이 좋아.
어서 물어봐. 3분 다 돼간다.
……
그때랑 같은 질문이네. 참 집착도 심해.
그럴 리가 있겠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데.
베라는 사과를 들고서 지휘관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했다.
음...
"내가 그것 때문에 화내며 울었지만, 비극이라고 할 수는 없어."
"굳이 정의하자면, 그건 누구보다 깊고 찬란한 내 삶이야."
갚아야 할 은혜는 갚았고, 해야 할 복수도 했어. 그리고 가야 할 길은 아직 가는 중이야.
가장 중요한 건, 그 길에 항상 누군가가 함께했다는 거야.
베라는 지휘관의 이마에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면서 말했다.
조급할 필요 없어. 기억이 돌아오면 매일 이렇게 옛날얘기 할 수 있어.
난 아직 네 운명의 끝을 못 봤어. 그러니까 그때까지 계속 곁에서 너를 지킬 거야.
그때 병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더 많은 이들이 들어왔다.
이제 귀찮은 면회 시간 시작이네. 오늘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성가신 셋이 임무 때문에 뛰어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말을 마친 베라는 사과를 접시에 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베라는 자유롭게 오갔다. 그녀의 인생에 내려진 수많은 축복이 드디어 효과를 보인 듯,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다.
의료 키트, 혈청, 사과, 구하고 싶은 사람까지 다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베라는 문틀에 손을 얹고 돌아섰다.
왜? 마지막으로 너의 쓸데없는 말 들어줄게.
하, 당연하지.
시작이 "베라"였으니, 끝도 "베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끝이 다가와도, 그 너머엔 항상 석류빛이 있을 것이다.
네가 죽을 뻔한 걸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애들 엄청나게 놀랐다며?
빈손으로 온 바네사는 병상 앞에 서서 비아냥거렸다. 밤비나타는 옆에 엎드린 채, "주인님"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불편한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걔네가 나가자마자 내가 들어왔다고? 어째 말투가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하지만 네가 날 반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너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어. 다음 달이 파오스 학교 졸업식이야. 너 우수 졸업생 연설할 거야?
네 맘대로 해. 나는 네 의견만 파오스에 전달하면 되니까.
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갈게.
쾅!
병실 문이 큰 소리와 함께 열렸다.
바네사 지휘관님, 역시 여기 계셨네요! 크, 큰일 났어요!!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그녀가 또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상자 안에 틀어박혀서 아예 나오지 않으려고 해요. 주인님이 임무를 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안 듣겠대요!
라이어가 백로 소대의 또 다른 구조체를 병실로 끌고 왔다.
……
위축된 눈빛이 차원을 초월한 블랙홀 속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
바네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상황을 알아차린 밤비나타는 조용히 물러났다.
저기요. 제가 나오라고 해야 나오실 거예요?
지휘관은 바네사가 "저기요."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어서인지, 충격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블랙홀 같은 "자기 비하"가 몇 초간 침묵하더니,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와!
안 되겠네요. 저 물 좀 마시고 잠깐 쉬어야겠어요. 지휘관님, 안녕히 계세요. 바빠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침대 머리맡으로 간 라이어는 물을 찾았다. 온몸의 엔진이 윙윙거리고 있었고, 동료를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꽤 힘을 쓴 듯했다.
구조체가 무슨 물을 마셔? 너도 나와.
바네사는 양쪽 모두에게 화가 났다. 한 손으로는 대원에게서 거대한 "자기 비하"를 떼어내고, 다른 손으로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라이어를 잡아끌었다.
(물을 마셨다.)
이상하네요. 상류층이 마시는 물은 더 맛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맛이 없죠?
라이어, 네가 이 녀석 책임지고 빼내. 못하면 내일 백로 소대에서 쫓겨날 줄 알아.
바네사 지휘관님, 왜 또 제가 책임져요!
바네사 지휘관님, 전 안 나갈 거예요! 바네사 지휘관님, 잘 좀 대해주시면 안 돼요? 바네사 지휘관님~~~
삐삐삐...
침대 머리맡 단말기가 갑자기 울렸다. 확인해 보니 발신자 표시 제한 통신이었다.
상대방은 병실의 소란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시끄럽죠? 매일 지휘관님을 찾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귀찮지 않으세요?
……
지휘관의 날카로운 의심을 눈치챈 하니프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불길한 웃음을 지었다.
네. 그들 말이 맞았어요. 전 천성이 나쁜 놈이라 통제받는 걸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네. 맞아요. 농담이에요. 저 도망가지 않았어요. 보세요. 아직 병실에 있잖아요.
하니프는 단말기를 돌려 주변 환경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헤인스와 관련된 모든 조사와 처벌에 협조할 거예요.
요즘 계속 병상에만 갇혀 있으니까, 좀 답답했어요. 그래서 다른 이의 단말기를 구했어요.
지휘관님 쪽은 매일 시끌벅적하다길래, 저도 좀 끼어볼까 해서요. 이 정도는 괜찮죠?
모르겠어요. 어쨌든 쿠로노에 남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어디로 갈지를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질문이 갑자기 그렇게 바뀌나요?
제가 뭐라고요.
생각해 볼게요.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백로 소대의 혼란 속에서 통신 너머의 하니프는 조용해졌다. 빈 소매를 감싼 그의 모습이 왠지 우울해 보였다.
헤인스에 관한 조사가 아직 진행 중이라, 언제 다 끝날지 잘 모르겠어요.
하니프의 반응을 지켜보던 지휘관은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쁜 소식부터 들을래요. 더 나쁜 소식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좋은 소식은 뭐예요?
…………
괜히 연락했네요.
삐. 통신이 끝났다.
발신자 표시 제한 통신이 끝나자, 바네사에게 문어처럼 붙어 있던 라이어가 갑자기 머리를 탁 쳤다.
아,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네요!
라이어가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매니큐어, 머리핀, 귀걸이, 목걸이... 마지막으로 작은 종이 상자를 찾아 지휘관에게 건넸다.
이거 지휘관님 택배예요. 간호사실에서 갖다주라고 해서, 제가 가져왔어요.
지휘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택배를 받자, 안에서 뭔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병실의 조명이 반사되어 빛나는 금속 명패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지휘관은 명패를 자세히 살펴봤다.
지휘관이 명패들을 한 움큼 쥐어서 확인하니 그 위에 새겨진 이름은 모두 같았다.
"로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