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머리 이브를 죽인 뒤, 베라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이합 생물을 도살하다시피 하며 가장 단순하고 거친 방식으로 길을 열었다.
그리고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베라는 핏빛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양날의 검을 등 뒤에 매단 채 이합 생물들의 진흙을 밟으며 천천히 인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세 걸음 거리에서 멈춰 섰다.
베라는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른 듯 자신의 빗장뼈를 감쌌는데 그곳에서 붉은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인간은 복잡한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절에 관한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고 조각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상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선홍빛 형체가 달려와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양날의 검이 "철컹"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짙은 녹슨 냄새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고, 긴 머리카락이 인간의 귓가에 흩어지며 목덜미에 작게 말려들었다.
난 알아. 넌 아직 전부 기억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야. 아직 그 말을 할 때가 아니야.
베라는 인간을 꽉 붙들었다.
……
아직 시간이 부족해.
베라가 손을 놓았다. 조금 전 "달려와서 만류하는" 듯한 뜨거운 포옹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라는 반쯤 무릎을 꿇고 인간의 피로 흠뻑 젖은 옷을 찢었다.
살점에 단단히 붙은 천이 찢어지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합 생물에게 휘감긴 기분이 어때?
목숨 버리는 것에 그렇게 열심히 하길래 퍼니싱이 살점을 부식시키는 건 좋아하나 했는데.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베라의 이 익숙한 신랄함이 오히려 안심됐다.
내가 동기화를 조금만 더 늦게 완료했더라면, 네 내장은 퍼니싱에 잠식당해 구멍이 났을 거야.
베라는 소독약 한 병을 거의 다 부은 뒤, 독기 어린 모습으로 혈청 주사를 인간의 상처에 꽂았다.
교훈을 배우지 못한 녀석은 이렇게 다뤄야 해.
눈을 내리깐 베라는 붕대를 꺼내 인간의 허리와 다친 다리를 단단히 감았다.
인간은 베라의 눈을 살피면서 석류석처럼 붉은 눈동자에서 어떤 그림자를 찾으려고 했다.
난 변한 게 없으니, 그만 봐도 돼. 이 기체의 외형은 그때와 똑같고, 내부 시스템만 조금 업데이트됐을 뿐이야.
하지만 넌 변했어. 네 그림자가 변했거든.
베라는 인간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몇 년 전보다 더 성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보고 싶지 않았던 피로함도 더해져 있었다.
역시 이렇게 됐군.
일어설 수 있겠어? 네가 내 의식의 바다에서 얼마나 봤든, 네가 얼마나 기억해 냈든, 우리에겐 회포를 풀 시간이 없어.
먼저 현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줘. 특히 그 입만 살아있는 녀석은 왜 너보다 먼저 출발한 거야? 도망친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베라의 도움을 받아 일어서는 동안 인간은 빠르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과 하니프가 베라를 데리고 이 유전자은행에 들어온 일 그리고 승격자와의 협력을 파기한 나이 든 연구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일행이 발각되어 승격자에게 궁지에 몰린 과정도 설명했다.
그 늙은이가 새로운 헤인스라는 게 확실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기억을 쉽게 잃어버리다니, 인간의 뇌는 정말 허점투성이에다 손상되기까지 쉽군.
베라는 감정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 찾으러 왔었다고?
파직.
베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자마자, 손에서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 쓴 혈청을 그녀도 모르게 부숴버린 것이다.
!
베라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바닥을 다시 살펴봤다.
베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안전핀"이 있어야 할 빗장뼈 사이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기체마저 베라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하.
지휘관은 순간 마인드 표식이 급격히 하강하는 느낌을 받았다. 구조체와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감정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
아무것도 아냐. 그냥 손에 힘 조절을 못 했을 뿐이야. 전에 비요 기체 적응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흔히 있는 일이야.
됐어.
베라는 지휘관이 내민 손을 쳐냈다.
네 상처는 일단 응급 처치했으니, 어서 그 팔 잘린 녀석부터 쫓아가자. 난 그를 믿을 수가 없어. 게다가 그 몸 상태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야.
내가 업어 줄 테니까, 평생 다리 절기 싫으면 지금은 걷지 마.
베라는 지휘관이 하려는 말을 막고는 등에 업었다.
마지막으로 베라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