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은행 깊숙한 곳, 어떤 방에서 앙상한 노인이 흥분된 모습으로 눈앞의 선반을 쓰다듬고 있었다.
선반 위에는 그의 소중한 실험체들이 특수 배양액 속에서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첫 번째 아이... "이브"는 성공적으로 나갔어. 이제 너희 차례야.
너희들도 태어나면 이브를 따라가거라. 이브는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너희와 기꺼이 나눌 거다. 그러면 너희는 함께 새로운 인류로 진화할 수 있어.
왜 진화를 미리 시작하는 거지?
승격자의 목소리를 들은 노인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즉시 돌아섰다.
에피알테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지?
네가 원하던 그 인간도 데려오지 않았잖아. 그 몸도 새것 같은데, 이전 몸이 파괴된 건 아니겠지? 꽤 고생한 것 같군.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데려오지 못했는데, 누구의 유전자로 촉매를 만든 거지?
승격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압박감이 방 전체를 채웠다.
하... 하하하...
노인은 공포를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네가 알아채지 못했다고? 내 배아를 사용했다. 순수한 "나" 그 자체지. 다른 이의 유전자는 전혀 섞이지 않았어. 내가 바로 그들의 창조주야!
노인은 광기 어린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자기 행동에 깊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네가 떠났을 때 내가 "텅 빈 공간"에 더 많은 배아를 쌓아뒀지. 나조차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말이야. 만약 전부 부화한다면... 이 섬의 힘만으로도 바깥의 돼지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어. 하하하!
……
방의 다른 구석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둘은 식은땀을 흘렸다.
숨죽인 하니프는 인간에게 계속 눈짓을 보냈다.
저기 있는 배아들이 전부 부화하고, "이브"가 그들을 전부 동화시킨다면...
갑자기 품 안에 있던 위치 추적기가 살짝 떨렸다.
지휘관이 고개를 숙여 확인하자, 깜빡이는 붉은 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휘관은 승격자와 노인의 대화에 다시 집중하려고 했다. 노인의 말을 다 듣고 난 승격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너의 망상증 증상을 너무 가볍게 본 것 같군.
뭐?
네 광기가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냈어. 지금 "이브"가 보이는 상태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네가 "텅 빈 공간"에 더 많은 배아를 준비한 것도 모두 잘못된 방향이야.
미치광이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승격자가 헤인스의 행동을 부정하고 떠나려 했다. 그러자 헤인스가 소리를 질렀다.
난 미치광이가 아니야!
노인은 격앙되기 시작했다.
에피알테스, 날 거부하겠다는 거냐?!
너는 이 진화의 종착점을 보고 싶지 않은 거냐?
한때 우리는 목표를 공유한 협력자였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각자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네가 원하는 건 순수한 진화가 아니야. 인간 문명의 진화 따위도 전혀 관심 없어.
넌 자신이 삼브라의 망명 왕이라는 망상에 빠져 너를 전심으로 숭배하는 왕국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넌 어떤 것도 더 나아지길 바라지 않아. 그저 이런 방식으로 네가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을 뿐이지.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 인간만 제때 데려온다면, 이 진화는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어.
개돼지의 배설물로 가득한 "인간 문명"이 대체 무슨 진화가 더 필요하단 거지? 네가 가는 길이야말로 크게 잘못됐어!
노인이 큰 소리로 반박했다.
승격자, 네 새로운 육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건가!
이 모든 시간 동안 그 고철 덩어리를 내가 관리해 준 거야!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네 남은 육체들은 언제든 파괴할 수 있어!
네가 미쳐서 다른 기체들을 파괴해 봤자 소용없다.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이것도 퍼니싱으로 만든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면 돼. 내 본체는... 더 이상 너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협력은 끝났다. 헤...
승격자는 말을 끝맺지 않고 방의 다른 구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벌레처럼 거기 숨어있다니... 듣고 싶었던 답은 다 들었나?
승격자는 엿듣던 둘이 즉시 뛰쳐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구석에서는 오히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
엿듣고 있던 둘은 당연히 승격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식은땀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였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움직일 수 없어서였다. 그들이 찾고 있던 "이브"가 스스로 찾아와 지금 인간의 바로 뒤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인간은 위치 추적기의 붉은 점이 자신의 위치와 빠르게 겹치는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뒤돌아보니, 아직 진화가 완전하지 않은 그 얼굴이 이미 자신의 뒤에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너무 가까워요.
하지만 둘의 예상과 달리, 이브도 동시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인간의 동작과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허리" 쪽을 만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인간의 발목에 있는 상처는 여전히 아픔을 내뿜고 있었고, 조금 전 그것이 "핥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나와라. 이왕 제 발로 찾아온 거...
밖에서 기다리던 승격자는 인내심이 바닥이 난 나머지 엿듣던 둘을 가리고 있던 선반을 베어버렸다!
재빨리 반응한 인간이 눈에 보이는 둘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동시에 하니프를 데리고 찬장에서 굴러 나와, 화약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한편, 이상하게도 인간을 계속 공격하지 않던 "이브"는 상황이 급변하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같이 뛰쳐나갔다.
잠깐만요. "아이들"도 여기 남겨두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한 하니프는 총구를 들어 올려 보이는 곳의 모든 선반과 알 수 없는 병들을 파괴했다.
너...
다시는 보지 말자!
하니프는 총구를 휘두르며 앙상한 노인 앞에서 과장된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런 뒤, 인간을 따라 연막 속으로 사라졌다.
방금 그 이합 생물은 미친 건가요? 그게 "이브" 맞나요?
둘은 "이브"가 바닥에 남긴 축축한 흔적을 따라 달렸다. 인간은 베라를 업은 채로 빠르게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더 많은 난제가 눈앞에 함께 쌓여 있었다.
다 들었죠! 그 승격자는 육체가 여러 개고, 그 노인한테는 "아이들"이 더 있고, 배아도 더 있다고 했어요. 더 많은 이합 생물 예비군이 소위 "텅 빈 공간"이란 곳에 있다고 한 것도요!
더 중요한 건, 그 승격자가 지휘관님을 계속 잡으려 한다는 거예요!
상황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백 배는 더 나쁜 것 같네요!
정말 운도 없네요. 앞에는 이상한 이합 생물, 뒤에는 악착같은 승격자...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어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허리띠에 제 목숨을 매달고 있는 기분이에요!
아직 겁에 질려 쓰러지지 않은 건, "피할 수 없는 건 오게 돼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진흙탕에서 오래 허우적거리다 보니, 뭐라도 믿지 않으면 정말 끝장이거든요.
그런데, 제 신조는 한 마디가 더 있어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하니프의 눈빛이 유성처럼 빛났다.
찰칵. 총알이 장전되면서 조준경이 자동으로 맞춰졌다.
"오려고 하는" 나쁜 것들은 피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들을 진흙탕으로 때려 박아 버리는 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죠!
엎드리세요!!
강화 탄이 화염과 함께 총구를 빠져나가더니 갑자기 앞쪽에서 나타난 이합 생물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러자 역겨운 진흙 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합 생물이 또 나타났어요! 역시... 상황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나쁜 것 같네요. 백이십 배는 될 것 같아요!
인간은 하니프의 너무나 갑작스러운 총격에 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휘청거리다가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베라를 등에 멘 채 바닥을 굴렀다.
……
마인드 표식이 살짝 움직이더니 베라의 고요한 의식의 바다에서 미세한 반응이 돌아왔다. 기체 데이터 동기화 속도가 어떤 장벽을 넘은 듯 갑자기 가속되기 시작했다.
베라의 데이터 전송이 어디까지 됐죠! 이합 생물이 너무 많아서 그녀의 전투력이 필요해요!
데이터 동기화가 90%에서 잠시 멈췄다가 눈에 띄게 가속되고 있었다.
정말 희소식이네요!
베라의 의식의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필 여유도 없이, 인간이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는 순간 마인드 표식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꽃이 휘감아 오르듯, "마인드 표식이 데이터를 견인하는" 상태가 역전되어 이제는 "데이터가 마인드 표식을 감싸며 질주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게다가 마인드 표식을 통해 간간이 인간의 눈앞에 베라의 기억 데이터 단편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인간은 충격을 받았으나, 그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단편들 속에서 거울을 보듯 익숙한 모습이 너무나 자주 비쳤기 때문이다. 그 인간은 바로 지휘관 자신이었다.
승격자들이 빨리 쫓아오지만 않는다면, 이 이합 생물 무리만 처리하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어떤 것이 "이브"인지 먼저 확인해 보세요! 놈이 그 안에 숨어든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인간은 머리에 있는 오래된 흉터를 붙잡았다. 이 흉터가 어떻게 생기게 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인간 자신조차도 졸업하기 전에 생겼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 지휘관님, 또 왜 그러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하니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색 머리의 익숙한 승격자가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난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다.
저것이 하는 말을 들으셨나요? 이 이합 생물은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네요!
[player name], 이번이 마지막 평화적인 초대다.
나와 방금 그 노인은 궁극적인 목표가 같았다. 하지만 너희가 방금 엿들었듯이, 내가 행동하기 전에 그자는 이미 다른 인간의 유전자 샘플로 진화를 촉진했다.
그것들은 아직 진화 중이지만, 대부분 불완전하고 방향을 잃은 상태다.
이게 뭐라는 거죠? "악당들" 사이에서 내분이라도 일어났다는 건가요?
고통을 참으며 일어난 인간은 베라를 한쪽에 내려놓고 승격자와 마주 섰다. 마인드 표식은 계속해서 베라의 기억 데이터 단편을 "읽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또 다른 이야기와 뒤섞인 것 같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웠지만, 양쪽 모두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player name], 난 이 "진화"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네가 필요하다.
승격자는 멀리 서서 인간을 향해 초대하는 손을 내밀며 다시 한번 그 말을 했다.
인간 혼자만 필사적으로 대책을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한 게 있는 듯한 하니프가 재빨리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들으셨죠? 밖에 있을 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퍼니싱에게 지휘관님은 그저 음식이고, 촉매제고, 배설물일 뿐이에요. 절대로 사람 취급은 하지 않아요. 승격자 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연극을 한 번 더 해볼까요?
잔재주라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어요. 한 가지 확실한 게 있거든요. 바로... 지휘관님은 승격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거예요!
순식간에 상황이 급변했다. 아군의 총구가 지휘관의 관자놀이에 닿았고, 하니프의 손이 인간의 목을 움켜쥐었다.
하니프가 승격자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최악이군. 난 이 지휘관의 부하가 아니야! 오히려 그의 반대지. 난 쿠로노에서 온 사람이고 이 지휘관을 주시해 왔어.
하니프는 옷깃을 활짝 열어 쿠로노의 표식을 승격자 앞에 드러냈다.
승격자, 공중 정원을 충분히 오래 관찰했다면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쿠로노도 "수석"을 만들고 싶어 해. 그래서 이 자의 껍데기, 유전자, 기억... 전부 다 중요하지.
게다가 난 한 가지 진리를 잘 알고 있어. 만약 위험한 상황에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확보할 수 없다면, 파괴해 버리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진리 말이야.
전 원한을 오래 품지 않아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당신이 그때 오로라 부대 대원들 앞에서 절 죽일 뻔했죠. 이제 그 빚을 갚아드리죠.
……
엎드려라. 아이들아.
이합 생물들은 본능적인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승격자의 위압에 엎드렸다.
단 하나만 예외였다. 그것은 승격자의 명령에 온몸을 떨면서도 여전히 서 있었다.
눈은 없었지만, 그것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인간은 느낄 수 있었다.
하니프는 인간을 인질로 잡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조금씩 안전한 거리를 확보했다.
좋아. 승격자. 당장 이 미친 이합 생물들을 물러나게 해. 그렇지 않으면 너나 나나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될 거야.
승격자는 하니프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심장이 강제로 쥐어짜이는 듯한 이상한 긴장감을 느꼈다.
[player name]... 곧 안전한 곳으로...
하니프의 시선이 인간의 얼굴로 향했다. 인간은 하니프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곧바로 제지하려고 했다.
으윽!!!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승격자는 뾰족하게 집중시킨 퍼니싱으로 하니프의 총을 든 왼쪽 팔뚝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살점과 뼈가 기화된 것처럼 공기 중에 흩어지면서, 끔찍한 텅 빈 공간만 남았다. 그리고 진한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엎드려 있던 이합 생물들이 광기 어린 울부짖음과 함께 고개를 들어 공중에 흩어진 피비린내를 맡았다.
극심한 고통에 지배당한 하니프는 총을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었다. 맞은편의 승격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방금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본 것처럼 서 있었다.
이런 수준으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데리고 도망치려 했나? 넌 그 헤인스와 똑같아. 전부 잔재주뿐이야.
나도 한 가지 진리를 잘 알고 있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어떤 계략도 의미가 없다.
승격자는 초대하는 손짓을 완전히 거두고 대신 인간과 벽에 누워있는 베라를 겨눴다.
인간이 베라를 향해 몸을 던지는 순간, 다른 한 발의 "포탄"이 그의 종아리 힘줄을 관통했다.
동맥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바지를 붉게 물들였다.
머릿속에 각인된 응급 처치법에 따라 인간은 종아리 상처를 눌렀다.
상황이 급격히 악화하였다. 더 심각한 부상자가 지휘관의 뒤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둔통이 느껴지는 마인드 표식을 통해 베라의 데이터 동기화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94%……
아아...
하니프는 아직도 고통에 빠져 있었고, 승격자와 이합 생물들의 위협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지만, 고통 때문에 오히려 머릿속 생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브는 승격자의 뒤에 서서 원숭이처럼 인간이 종아리를 움켜쥐는 동작을 따라 하며, 온몸을 떨면서 극심한 고통을 흉내 내고 있었다.
다른 이합 생물들도 떨기 시작했다. 몇몇 이합 생물들은 승격자의 명령에서 조금씩 벗어나 이브처럼 우스꽝스럽고 역겨운 방식으로 인간의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승격자가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너의 행동을 제한해야만 하겠다.
찰칵. 인간은 방금 바닥에 떨어진 총을 낚아챘다.
소용없어요. 어서! 도망치세요!!
그의 말이 맞아. 그런 건 내게 아무 소용 없어.
하지만 인간의 시선은 승격자와 그 주변에 있는 이합 생물들 사이를 계속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은 승격자를 공격하는 대신 총구를 자신에게 겨눴다.
……
크윽... 미쳤어.
자살로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
승격자는 인간의 반응에 살짝 실망한 듯했다.
이합 생물들은 충실하게 지휘관을 따라 하며, 자신들의 날카로운 "사지 끝"을 자기 머리에 겨누고 있었다.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브의 "입가"에는 심지어 인간의 바지에서 떨어져 나온 회색 천 조각이 걸려 있었다.
네 총은 여전히 너 자신을 겨누고 있어. 딴생각하지 마.
너 자신을 소중히 해라. 앞으로 넌 그들의 모체가 될 테니까. 진화의 근원이 될 테니까. 다리 아프지 않나?
끝까지 말할 필요 없다. 넌 이미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총을 내려놔라.
극심한 고통이 모두를 괴롭히는 와중에도, 인간은 살짝 고개를 기울여 뜨거운 총구를 관자놀이에 맞대어 붉은 자국을 남겼다.
동시에 잘 따라 하던 이합 생물들도 이브를 따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두 번째로 말한다. 총 내려놔라. 세 번째로 말하고 싶지 않다. 네 팔뚝도 날려버릴 테니까.
갑자기 베라와 하니프를 끌고 뒤로 물러난 인간은 총구를 승격자에게 정확히 겨눴다!
도망가지 않고... 미친 거예요?! 다들 미쳤어!!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비키세요!!
하니프는 잘린 팔을 부여잡은 채 다시 한번 인간과 베라 앞으로 달려들었다.
탕...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 같았다. 하니프가 천천히 앞으로 뛰어들면서 승격자의 분노한 공격을 다시 한번 막으려 했다.
그리고 모두가 "절대 소용없다."라고 단정 지은 그 총알을 인간은 고집스럽게 발사했다.
총알은 퍼니싱과 피 냄새로 가득한 공기를 가르며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승격자를 향해 날아갔다.
소용없다!
종아리에서 피가 계속 흘렀지만, 인간은 굳건히 서서, 이토록 통쾌한 적이 없다는 듯 승격자를 향해 소리쳤다.
무용지물인 총알은 승격자 앞에서 멈춘 뒤, 퍼니싱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승격자 곁에 서 있던 이브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인간의 의성어에 맞춰 이브는 더욱 [흥분]하며 몸을 비틀었고, 위압과 목구멍의 으르렁거림을 참으며 날카로운 "손"을 그 총알이 원래 겨냥했던 곳으로 순식간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승격자의 흉강이 관통당했다.
어머니/아버지>...
!!!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던 것도 여기까지였다. 세계는 다시 한번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승격자는 이브에게 제압당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숨 돌릴 기회를 얻은 인간은 즉시 팔이 1.5개 남은 하니프를 땅에서 일으켰다.
지휘관님...
저항의 분노는 꺼지지 않고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인간은 승격자를 향해 남은 총알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다음 순간, 이브뿐만 아니라 이브에 의해 동화된 모든 이합 생물이 한꺼번에 폭동을 일으켰다. 핏빛 찐득한 파도처럼 치솟아 오르며 끔찍한 속도로 승격자를 덮쳤다.
이합 생물들이 특별한 존재인 이브의 인도를 따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끔찍한 광경에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저것들 미친 건가요?!
미치지 않았다면 왜 승격자를 죽이려 하는 거죠? 누구한테 배운 거죠? 지휘관님인가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낸 인간은 이합 생물들의 "집단 사냥" 소리 속에서 재빨리 다리의 동력 외골격을 벗은 뒤, 응급 의료 물품과 함께 하니프에게 건넸다.
네? 지휘관님은요?
인간이 뒤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승격자의 잔해에서 몸을 일으킨 이브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베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면 지휘관님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지휘관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지휘관님이 이브를 처리하는 데 실패하시더라도, 제가 "텅 빈 공간" 안의 배아를 파괴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이런 이합 생물 부대가... 너무 커지는 걸 막을 수 있을 테고...
하지만 마지막까지 가야 할 영웅은 당신이에요! 왜...
이것이 현재 제일 나은 선택이란 걸 알면서도 하니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프는 충혈된 눈으로 눈앞의 인간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재난을 겪었는지, 어떻게 유일한 영웅이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쉽게 새로운 기회를 자신에게 넘기려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저야말로 계속 "그림자" 자리에서 기다려왔는데...
인간은 팔뚝이 잘려 극심한 고통에 빠진 하니프의 얼굴을 세게 때려 정신 차리게 했다.
개미들이 뭉쳐서 불바다를 건널 때, 누군가는 가장 바깥층의 껍데기가 되어 주어야만 해.
억지로 깊은숨을 들이쉰 하니프는 인간의 다친 다리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다리 외골격을 집어 들어 착용했다.
저는 정말... 영웅이 되는 게 싫어요.
하... 지휘관님은 다 꿰뚫어 보시는 군요!
다시 말할게요. 지휘관님과 베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임무를 계속 수행할게요!
하니프는 이를 악물며 되풀이했다.
반드시 "텅 빈 공간" 안의 남은 배아들을 파괴할게요. 절대 재앙이 더 커지도록 두지 않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