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2 성화의 귀결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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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2-13 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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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검붉은 허무가 그물을 짜기 시작했다.</i>

<i>세포와 세포가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그 주요 부분과 다시 이어졌다."</i>

눈꽃은 여전히 느긋하게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달리며 일으킨 바람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노약자들이 가득한 차 안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듯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진 것 같았다.

달려온 이들은 차 가장자리에 쓰러진 켄트의 시신과 필사적으로 딸과 함께 살아남으려 했던 그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모두가 중심을 잃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

여자아이는 텅 빈 눈으로 어머니의 시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헤인스는 켄트에게서 빼앗은 총을 혼자만 손에 쥐고 있었다. 켄트의 뒤통수에 난 탄흔으로 보아,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총구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너희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지.

그녀는 내 첫 번째 분골쇄신을 막았었지. 이번 "마무리"도 방해하러 왔다니... 인연이 꽤 질기군.

……

베라는 이를 악물며 라이어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오른손은 무기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넌 그때처럼 젊고 날카로운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수십 년 전에 죽어야 했을 것이... 너도 그때랑 다를 게 없네. 헤인스. 네 복제 계획을 지원하는 게 누구지?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은 둘은 수 미터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베라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헤인스는 베라의 기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구조체... 그 가증스러운 교수가 연구했던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술 중 하나가 되다니.

구조체가 되는 건 어떤 느낌이지? 내가 그때 말했던 것과 같나?

연약한 육신을 금속으로 교체하면서 그 강을 건널 수 있었나?

그러니까... 그 야망을 놓치지 마. 진화의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돼.

이를테면 이 나약한 육체를 개조하고, 불완전한 유전자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그 아이를 내놔!!

흠... 넌 아직도 강물 속에서 방황하고 있군.

하지만 저 여자는 너보다 훨씬 통찰력이 뛰어나. 그렇지, 바네사? 이름이 맞다면 그렇게 불러주지.

헤인스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이들 중에서 은백색 머리의 소녀를 포착했다.

너의 생각은 단순해. 쓸모없는 건 버리고, 쓸모 있는 건 지키는 거지.

이제 이 차에 있던 쓸모없는 것들은 다 죽었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켄트, 울며불며 징징거리기만 하는 늙은이들과 아이들 그리고 방해만 되던 여자까지 말이야.

헤인스는 "방해만 되던 여자"를 언급하며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순수하게 미친 바보였지.

자, 이제 이 아이도 마찬가지야. 짐 덩어리일 뿐이지.

헤인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자,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총구가 여자아이의 피부를 지져버렸다.

바네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엿듣기만 하던 놈이... 우리의 대화에 흥미라도 생긴 건가?

처음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여자아이가 헤인스의 침 뱉음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극도의 분노가 여자아이의 얼굴에 나타나면서 순진함은 사라졌다. 어머니의 분노를 온전히 물려받은 것 같았다.

죽어버리세요. 죽으라고요!!

이 자를 죽이세요! 죽여 버리라고요!

헤인스는 여자아이의 목을 꽉 쥔 뒤, 총의 개머리판으로 여자아이의 뺨을 가격했다. 그러자 막 나온 영구치가 부러져 버렸다.

쿨럭!

짐 덩어리는 조용히 해. 그리고 너희들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원하는 게 뭐지?

조금 전에 말했잖아, 못 알아들었어? 어떤 관념이 우세할지 보고 싶어.

짐 덩어리를 구하고 싶다면, 저 빨간 구조체를 보내. 할 말이 있으니까.

헤인스가 베라를 가리켰다.

전에는 네 이름을 묻지 않았어. 하지만 "하운드"라는 코드네임도 꽤 어울리는군. 날카로운 칼이든, 말 잘 듣는 개든, 다 쓸모가 있지.

그녀를 "넘겨주면", 이 아이는 살려주겠다.

"하운드", 네가 저자를 믿는다면, 그게 진짜로 어리석은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

베라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온통 폐허뿐이었다.

헤인스는 진작에 모두를 죽여야 했어. 저 여자아이를 남겨둔 것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거야.

단순히... 나와 옛날얘기나 하자는 건 아닐 거야!

뭔가가 있을 거야.

가슴 속에서 익숙한 조급함이 터져 나왔다. 베라의 의식의 바다는 엉망진창이었고, 서서 헤인스와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한 방에 죽일 수만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이득을 취하는 걸 좋아했잖아? 영웅이 되고 싶어 했잖아? 늘 모든 이의 앞에 서고 싶어 했잖아?

자,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들에게 보여 줘.

인간은 베라가 쥐고 있는 양날의 검의 손잡이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분노에 찬 힘이 검 손잡이를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이건 베라가 공격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흥...

네가 뭘 생각하는지 맞춰볼까?

헤인스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혼잣말하는 미친 노인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넌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른 속도로 날 죽여서,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여자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

입 닥쳐!!!

양날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헤인스의 가슴을 강하게 관통했다.

치가 떨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갈비뼈가 부서지고, 심장이 찢어지고, 척추가 산산조각 나면서, 헤인스의 몸이 순식간에 차 안으로 꽂혀 들었다.

쿨럭!

헤인스가 조직 파편이 섞인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그 순간 미묘한 균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체가 가득한 차량을 향해 달려가 여자아이를 구출하려 했다.

헤인스도 끝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목표는 정면이었다.

총알이 날아가며 양날의 검이 가른 기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오직 인간의 시야 끝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발견한 뒤에야 그 총알의 진짜 목표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베라도 그 총알을 보았다. 시각 모듈이 이미 흐려졌음에도 그 비행 궤적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베라는 피할 수 없었다.

양날의 검을 던진 그 일격으로 기체의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린 베라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져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수십 년 전부터 이어진 악의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펑!

인간은 베라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부조화한 금속 충돌음과 함께 총알은 그 샘플 상자를 뚫고 지나가 인간의 몸을 관통했다.

둘 다 힘이 빠졌고, 인간은 팔을 벌린 채 쓰러지는 구조체의 매트가 되어주었다. 둘은 그렇게 뒤엉켜 바닥에 쓰러졌다.

베라는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인간의 외투와 셔츠를 찢어냈다.

너 총에 맞았어!

한편, 새로운 재앙은 그 누구에게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안 돼! 모두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헤인스의 위장 속 어떤 용기도 방금 전 공격으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헤인스의 눈빛은 점점 흐려졌지만, 쉰 목소리는 여전히 켄트의 통신 장치를 통해 모두에게 들려왔다.

역시... 넌... 구할 수... 있다고...

헤인스는 베라에게 말하고 있었다.

전부... 틀렸어.

헤인스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둘을 응시했고, 베라는 여전히 불꽃처럼 붉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널 지지해 줄 이를 찾았다고 생각해?

이제는 당당히 모든 이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해?

넌 진흙탕으로 돌아가 산산조각 나서, 수많은 짐승들에게 짓밟혀 뜯어먹힐 존재야.

그 붉은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곧 그녀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마땅해... 하...

신의 사자가 이미 나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헤인스의 마지막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폐허가 된 건물 꼭대기에서 한 쌍의 눈이 움직이지 않고 바로 아래에서 벌어지는 이 "재앙"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은 헤인스의 퇴장을 인정하듯, 팔을 들어 다음 목표를 가리켰다. 헤인스는 마지막 순간, 그것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하하하... 내가... 해냈다. 새로운 씨앗이... 이미...

블랙홀이 물질을 빨아들이듯, 헤인스의 복부 중심에서부터 부패가 끔찍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의 뼈와 내장, 지방, 피부를 모두 집어삼키며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울부짖는 여자아이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자폭 공격과 함께 현장에 있던 모두의 퍼니싱 농도 경보가 일제히 울렸다.

아이가 아직 안에 있어요!

저 아이가...

헤인스의 몸 안에도 샘플이 있어! 모두 멀리 떨어져!!

이상한 기운을 느낀 왕 할머니는 발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두 젊은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바네사의 손이 차량 보호판에 닿자마자 농축된 퍼니싱의 고통이 손끝에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피가 그녀의 장갑을 적셨다.

!

뼈도 남지 않을 때까지 부식당하고 싶다면 계속 여기 있어!

…………

바네사와 시몬은 빠르게 끌려갔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헤인스와 여자아이는 썩어 문드러진 채 베라기 던진 양날의 검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가까운 곳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인간의 억눌린 감정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입 다물어. 더 이상 말하지 마!

이를 악문 베라는 인간의 셔츠를 찢어 총상을 살폈다.

베라 조차도 이 저주받은 광경이 다시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며칠 동안 인간은 이미 두 번이나 그녀를 위해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주었다.

잘못이라면...

총알구멍은 인간의 옷과 피부에 검게 그을린 자국을 남겼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아니, 피가 없었다.

피가 없어. 뭔가가 막은 것 같은데...

무엇이 총알을 막은 걸까?

끔찍한 직감이 베라의 의식의 바닷속을 스쳤고, 그녀는 즉시 인간의 손에서 샘플이 든 상자를 잡아챘다.

잡아채는 힘이 약해서인지, 상자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베라의 눈앞에 총알구멍이 나타났고, 그곳으로 안정제가 빠르게 새어 나가고 있었다.

내 잘못이야.

왕 할머니! 침식체 무리가 다가오고 있어요!

라이어가 구조체답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공격을 감지했다.

침식체 무리가 접근하는 게 감지돼요.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는 없을 텐데... 철수할 시간이 없어요!

즉시 대열 재정비해! 전원! 전투 준비!

왕 할머니가 차량 쪽으로 돌아보니, 헤인스의 살점이 아직도 끔찍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핏빛 물과 퍼니싱에 섞여 폐허의 틈을 따라 스며들고, 스며들고, 또 스며들었다.

그 위를 밟고 선 이들은 이미 곤경에 빠져있었다.

혹시... 내가 조금 전에...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했나?

제가 차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제가 차 안에 있었더라면...

헤인스가 운전하던 전차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몇몇 젊은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으로 인해, 그것은 궤도를 따라 원을 그리며 모든 갈림길의 무고한 이들을 짓이겼다.

정말 누군가가 퍼니싱을 이 정도까지 "이용"할 수 있다는 거야?

왕 할머니의 경험으로 볼 때, 이는 헤인스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헤인스 뒤에는 분명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어서 이 모든 혼돈을 조종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파헤칠 시간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이제는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 되었다.

왕 할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은 아직 너희 손에 있어. 그러니 들어라! 이제 우리가 다시 몸부림칠 차례야!

거기 둘! 일어날 수 있겠어?

……

가까이 있던 인간과 구조체 둘 다 대답이 없었다. 베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목양견

멍! 멍!

셰퍼드가 갑자기 인간의 곁으로 달려가더니, 바닥의 샘플 상자를 향해 쉴 새 없이 짖어대며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왕 할머니가 앞장서 다가서자, 모두 그녀를 따랐다. 곧 그들은 둘이 상자를 미친 듯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

상자의 검은 탄흔에서 헤인스의 조소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물러서!

왕 할머니는 문제를 눈치챘고, 재빠르게 다른 이들을 막아섰다.

베라는 여전히 그 탄흔을 응시하고 있었다. 헤인스는 대지 깊숙이 박힌 마침표처럼, 수십 년이 지난 또 다른 겨울날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말하고 있었다. 몸부림의 결말은 칠흑처럼 어둡다고.

기억은 익숙한 겨울밤으로 되돌아갔다.

의사 그웬니스...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었던 그녀는 재앙이 터지자마자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 후 베라는 퍼니싱에 맞서는 군대에 입대해 자발적으로 동의서에 서명하고 개조를 받아들였다.

베라는 구조체로서 첫 전장에 선 순간부터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자기 팔을 떼어 동료들에게 주어도 "평범한 얼굴"의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배신자라는 죄명을 짊어질 각오를 했어도 "허밍버드"와 "모스"는 살아남지 못했다.

이 바보 같은 희극 배우들을 위해 전력을 다해도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을 뿐이었다.

"붉은 머리의 사신"은 저주였다. 누군가는 진작 그걸 알아봤던 것이다.

헤인스

너의 날카로움도 결국은 이 비극적인 결말에서 무뎌질 수밖에 없어.

상자를 뚫어지게 쳐다본 베라는 이를 악물며 억눌린 소리를 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아직 끝났다고 말하기엔 멀었다고. 난 이런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베라가 상자를 휙 낚아채자, 인간도 본능적으로 반대쪽을 붙잡았다.

놔! 안정제가 아직은 완전히 새어나가지 않았어. 지금 가면 너희는 살 수 있어.

샘플은 내가 안전한 곳에 버릴게.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해. 하지만 난 절대로 그 실수 때문에 멈추지 않을 거야. 이 샘플은 이제 전달할 수 없게 됐어. 최대한 멀리 버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보상이야!

인간이 상자를 되찾았다. 안정제가 급속히 새어나가고 있었지만, 상자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인간은 홱 고개를 들어 베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

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인간은 그녀의 눈에서 확신에 찬 답을 읽어냈다.

[player name] 님, 뭐 하시는 겁니까?

잠깐!

너...

모두의 충격에 찬 시선 속에서 인간은 갑자기 상자를 자신의 상처 난 복부에 세게 눌렀다.

왜 그러시는...

미친 거야!

시몬과 바네사는 동시에 동창이 미쳤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안간힘을 써서 샘플 상자를 잡아당겼다.

옆구리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인간은 이를 악문 채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

베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눈앞의 인간을 "살펴보았"다.

이렇게라도 샘플을 꼭 전달하고 싶은 거야?

…………

베라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을 듣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도 허리를 굽히며 터져 나오려는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흐흐흐... 하...

하하... 하하하하!!!

결국 내뱉지 못한 모든 질책과 혼자 짊어지려 했던 모든 책임이 거대한 웃음소리가 되어 폐허 위로 울려 퍼졌다.

재료가 버틸 수 있는 최대 시간은 6시간이야. 왕 할머니, 시간이 될까?

……

왕 할머니는 베라의 생각을 이해했다.

안 돼. 분석 능력을 갖춘 기지에 도착하기 전에 침식체들이 따라잡을 거야. 지금부터는 싸우면서 후퇴하는 것도 불가능해.

왕 할머니는 확실하지만, 유감스러운 판단을 내렸다.

그럼, 우리가 후위에서 침식체들을 막아준다면?

인파 속에서 은백색 머리의 소녀가 한마디 던지면서 손을 뻗어 베라를 거칠게 잡아챘다.

바네사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고, 장갑에서는 피가 배어 나와 베라의 갑옷에 심각한 흔적을 남겼다.

아직 전투 보고서 쓸 때도 아닌데, 하나둘씩 공적을 세우려고 하다니... 진짜 역겹군!

세계를 구하는 대영웅이라도 된다고 자신을 생각하는 건가? 우리 같은 공중 정원에서 온 "귀한 자제분"들은 다 네 뒤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네 그 잘난 척하는 모습이 정말 못 견디겠어.

내가 처음 지상에 온 거라 해도, 난 절대 쓸모없는 폐물이 되지 않을 거야.

바네사는 분한 듯 얼굴을 한 번 훔쳤다.

조금 전에 네가 라이어와 보육 구역 사람들에게 철수할 시간을 벌어준 것처럼, 나도 할 수 있어!

여기 있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다고!

바네사는 팔을 휘둘러 뒤에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뒤에 서 있던 모든 난민이 이들의 끈기와 차량에서 벌어진 참극을 모두 목격했다.

지금 모두가 말없이 끝없는 도망은 더 이상 선택하지 않겠다는 각자의 답을 보여주었다.

왕 할머니, 이 정도면 됐지!

모든 자원을 수송차 한 대에 집중해!

왕 할머니께서 명령을 내리자, 모두가 침묵 속에서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도...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고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수송차는 목적지까지 도착하지 못할 거야.

어느 정도는 너희가 직접 가야 할 거다.

내가 그를 업고 달릴 수 있으니, 내 속도로 계산해 봐.

안 돼. 지금 네 상태로는 정상적인 구조체의 이동 속도를 낼 수 없어.

할 수 있어. 낼 수 있다고.

베라는 무기에 의지해 몸을 지탱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그와 의식 연결을 시도해 봤는데... 효과가 있었어.

연결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으면, 움직일 수 있어!

……

그럼...

왕 할머니는 혼자 고통을 견디고 있는 지휘관을 향해 돌아섰다.

너의 생각과 모두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너는...

……

인간은 자신과 베라를 이어주는 밧줄을 꽉 잡았다.

놈들이 왔어요!

헤인스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끌어들인 침식체 무리가 지평선 위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홍수처럼 이 폐허의 틈새를 따라 "흘러내리며" 밀려왔다.

왕 할머니는 어깨의 저격총을 내렸다.

좋아. 나와 셰퍼드는 상관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 수송 부대에 있을 때와 비슷하네.

자, 일어나! 당장 출발해야 해!

왕 할머니는 손을 들어 베라의 어깨를 잡았다. 오랫동안 총을 다뤄온 그 팔은 안정적이고 힘이 있었다.

무기를 땅에 찔러 넣은 베라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의 도주로 인해 기체가 한계치에 다다르면서 그녀의 힘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베라는 일어났다가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으윽... 일어나!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그를 향해 다시 일어섰다.

라이어, 와서 좀 도와줘라!

쳇!

너희 둘 평생 갚지도 못할 신세를 지게 된 거야. 알아둬!

바네사는 도움을 주는 대신 권총을 꺼내 들더니, 아직 싸울 수 있는 다른 난민들을 이끌고 앞으로 향했다.

약속하지. 반드시 모두를 살려낼 거야.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더라도, 난 이 사람들만큼은 반드시 살아남게 할 거야.

너희들은... 책임감에 숨이 막힐 것 같더라도, 목숨 걸고 달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

베라는 다시 한번 쓰러졌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어야만 했다.

다른 이들의 힘을 받아들이기로 한 베라는 인파의 중심에 누웠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팔다리와 무기를 붙잡고 힘 모으는 걸 받아들였다.

이와 동시에 위로 들어 올려졌다.

영웅에게 날카로운 검이 필요하다면, 모두가 칼을 그의 앞으로 받들어 올릴 것이다.

베라

이 며칠 동안 계속 생각했어.

그러다 시간과 경험이 한 인간을 만든다는 걸 깨달았어. 네 주변의 모든 이는 널 지지하지만, 내 주변의 모든 이는 나 때문에 목숨을 빼앗겼어.

그래서 네 본능은 "헌신"이고, 내 본능은 "약탈"이야.

베라는 자신의 운명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불운 속에 태어난 그녀는 가는 곳마다 고통만 가득했다. 그래서 오직 고통과 함께 끊임없이 약탈해야만, 그녀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현실을 삼킬 수 있었다.

베라

알겠어? 우리 둘은 서로 다른 갈림길을 걸어왔어. 그러니 우리는 완전히 달라. [player name].

조금 전에 바네사도 잘못 말했어. 난 무슨 영웅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

수많은 손이 베라를 인간 앞으로 들어 올렸고, 그녀는 바로 위에 있는 그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베라

봐. 그건 네가 되어야 해.

넌 모든 이의 시선과 가치를 네 주위로 끌어당길 수 있어. 너무나도 눈부셔서 오히려 짜증 날 정도로 말이야.

오는 동안 난 계속 "흔들렸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더 이상 너와 함께 이런 이어달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무슨 거창한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나는...

고통에 말도 못 하는 인간을 바라보며, 베라는 조금 전 이 인간이 자신의 살과 피로 빈 곳을 메우려 했던 그 순간을 계속 떠올렸다.

베라는 이 인간이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바다를 건너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태양은 반드시 그 날개를 녹여 깊은 바다로 추락하게 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베라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마인드 표식이 다시 한번 내려앉으며, 의식의 바다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마치 이 인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고통이 온몸으로 밀려오자, 베라는 점차 깨어났다. 그리고 힘도 함께 돌아오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베라

자, 와 봐.

베라는 이해했다.

몸에서... 살점 하나를 가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