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노 지상 연구개발 기지■■
"무신" 테스트기 기동일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 몇 명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초당 갱신되는 데이터를 각 상하위 담당자에게 실시간으로 동기화하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상황이 좋지 않나요?
그렇게 낙관적이진 않아요. 하지만 이번 기체 테스트 중에선 가장 좋은 결과예요. 반나절 만에 의식의 바다 데이터 동기화가 75%에 도달했으니까요.
구조체 대부분이 75%도 버티지 못했고, 그중 상당수는 50% 이하에서 광화 제어 불가 상태가 됐어요.
동력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뒤, 역원 장치의 "각"도 과장될 정도로 커졌어요. 이것저것 다 합치면 의식의 바다에 대한 요구가 너무 높아요.
그녀가 눈뜰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가능할 거예요. 하드웨어 성능이 기준에 못 미친다 해도, 그녀의 의식의 바다의 "내성"은 믿을 만해요.
일단 믿어보죠. 그녀는 쿠로노의 "하운드"니까요.
작업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따라 테스트 룸을 들여다보니, 눈을 감고 있는 붉은 기체 두 대가 새 기체 적합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 속에서 떠 있던 "그녀들"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고, 각자의 연결선이 탯줄처럼 더 큰 장비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똑같은 두 얼굴은 보이지 않는 바다가 영혼 사이에 가로놓인 것처럼, 서로의 거울상이 되어주고 있었다.
……
BPN... 13...
수행 프로그램 실행... "하운드". 이제 일어나야 해요.
……
제 말 들려요?
……
베라는 "투명한 방울" 속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시각 모듈을 천천히 움직여서 주변 환경을 살폈다.
이곳은 차갑고 경비가 삼엄한 독방이었고, 밖의 사람들은 방 안의 통신 장치를 통해 베라와 원격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온 세계가 "해리증"과 같은 낯선 감각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나세요?
베라가 입을 열자 작은 공기 방울들이 피어오르면서 발성 장치가 점차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 지금 새 기체 적합 테스트 중이야.
새 기체는 특수 모델이라, 이전의 보조형과는 완전히 달라요. 적응할 수 있겠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
좋아요.
잠깐만요. 아직 베라의 의식의 바다가...
아니요. 바로 이런 극한 환경에서 테스트해야 해요. 그러니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초기 판단은 "하운드"의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이네요. 기준치 테스트를 시작할게요.
창밖의 남성 연구원이 베라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하운드", 키워드에 주목해 주세요.
"나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연작의 그림자고, 범인은 유리창의 거짓된 하늘빛이다."
기억했어...
테스트를 시작할게요.
"전장에서는 때때로 퍼니싱에 침식된 동료를 직접 살해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행위를 인정합니까?"
베라가 눈을 살짝 깜빡였다.
살해할 거야.
"여러 전장을 겪으면서, 심리적 그림자나 의식의 바다에 더 심각한 편차 증상이 생겼다고 생각합니까?"
그림자...
베라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다.
"쿠로노 그룹을 위해 싸우면서, 이 모든 것이 허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허위...
"당신의 존재 역시 허위일 수 있습니다."
허... 위...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든 베라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저절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으윽...
의식의 바다 편차가 약하게 발생했어요!
이게 뭐지?
힘겹게 고개를 든 베라는 새 기체의 가슴부위에 "플러그" 형태의 장치가 연결된 것을 보았다.
베라는 물의 저항을 뚫고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 던져버리고 싶었다.
BPN-13만이 이 개조를 견딜 수 있는데, 테스트를 서두르려고 베라를 이렇게...
"당신은 세계와 주변의 모든 것에 관해 원망을 품고 있어서, 유리창을 깨부수기로 결심했습니다."
의식의 바다 감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섰어요! 테스트를 중단해야 해요!
중단... 테스... 아니.
"당신은 세계와 주변의 모든 것에 관해 원망을 품고 있어서, 유리창을 깨부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리...
후!
수많은 "탯줄" 같은 연결선들을 뿌리친 베라는 온몸에 가득 찬 분노를 억누르며 "투명한 방울" 한가운데에 주먹을 날렸다.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지만, 더 많은 연구원이 야망에 걸맞은 흥분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에는 불꽃이 타올랐고, 창문의 균열과... 구조체의 광기가 비쳤다.
유리... 창...
!
하, 하하하!
보셨나요! 테스트...
테스트 통과!
데이터 동기화 진행도: 76%
으윽!
한동안 멍해졌던 베라는 갑자기 그 자리에 서서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억 데이터가 순식간에 다시 한번 흘러갔다. 베라는 눈을 감고 현실을 붙잡으려 애썼다. 조금 전 왕 할머니가 그녀를 062번 보육 구역으로 데려왔고, 그녀는 "샘플 운송" 임무를 끝내려 했다. 그 후에...
그 후 몇 마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파오스 군사 학교 출신의 몇몇 소년·소녀들에게 방해를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침식체의 기습이 눈앞에 닥쳤다.
손을 내린 베라는 눈을 떠보았다. 시각 모듈이 몇 초간 흐릿했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후.
(갑자기 왜 기체 적응 테스트 때의 일이 떠오른 거지?)
(이 기체는 아직 통제하기가 너무 어려워.)
베라는 창으로 침식체 하나를 날려버렸다. 겉보기에는 의식의 바다가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시끄러워! 나도 다 보인다고!
이번 침식체의 기습은 예상 밖이었고, 모든 이가 새로운 전장에 휘말리게 되었다.
또다시 최전방으로 달려 나간 베라는 이전처럼 혼자서 앞에서 싸우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베라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운드", 너와 저기 있는 지휘관은 왼쪽으로 가서 길을 뚫어!
왕 할머니가 모는 차가 굉음을 내며, 급급히 합류한 켄트와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침식체 무리 속으로 돌진했다.
차량 천장의 선루프로 몸을 반쯤 내민 바네사는 이어폰으로 앞에 있는 베라와 연락하면서, 동시에 원시적인 확성기로 뒤쪽의 혼란스러운 난민들에게 소리쳤다.
움직일 수 있는 무장 인원은 전부 켄트를 따라 최전방으로 이동해! 나머지는 왕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철수해! 그리고 나와...
네 멋대로 지휘하지 마! 이 침식체들이 다르다는 건, 너도나도 알잖아. 평소에도 버티지 못하는 쓰레기들은 지금 앞으로 나가봤자 방패막이나 하다 죽게 될 뿐이야!
쓰레기? 이 보육 구역 사람들 대부분이 쓰레기이긴 하지.
눈살을 찌푸린 바네사가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드물게 의견이 일치했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네 생각도 너무 구식이라 지금은 쓸모없어.
나와 전술 토론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손을 들어 왼쪽에서 달려드는 침식체를 베어낸 베라의 기체는 힘과 장비 면에서 쿠로노의 현재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 기체를 베라는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잘난 척 좀 그만하지. 내가 구조체에게 전술 자문할 정도로 떨어진 것 같아?
네가 살아남으면, 그때 가서 눈길 한 번 줄지 고려해 보지.
내가 군사 전술을 배울 때, 너 같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어!
꺼져! 가서 다른 이나 귀찮게 해! 난 도움 필요 없으니까!
비명을 지르는 침식체를 한 번 더 걷어찬 베라의 가슴은 뜨거웠다. 최근 며칠간의 고강도 전투로 그녀의 기체는 비정상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베라의 움직임이 너무 큰 나머지, 인간의 몸이 휘청거렸다.
쳇, 짐 덩어리까지 있네! 왜 밧줄로 묶어놔서...
베라의 품으로 끌려 들어가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휘청거리며 총을 쐈다. 그러자 총알이 구석에 숨어있던 침식체의 코어를 정확히 맞혔다.
네가 뭐든 상관없... 으윽!
참견할 필요 없어!
침식체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 그물망을 빠져나온 침식체 하나가 베라의 생체공학 피부 한 조각을 찢어 버렸다.
후... 넌 왜...
또 그런 눈빛이야. 으윽!
"베라, 정신 차려!"
"어서 의식 연결을 유지해!"
으으윽!
테이프가 되감기듯 혼란스러운 의식 데이터가 스쳐 지나갔다. 베라는 이 데이터들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어!
인간의 걱정스러운 물음이 들렸지만, 베라의 마음속엔 짜증만이 가득했다.
이 일을 끝내면, 너와... 얘기 좀 해야겠어. 이것들만 처리하고 나면...
하지만 그 "꼬마 지휘관"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왜 날 부정하는 거지? 왜 갑자기 내가 오랫동안... 태어날 때부터 계속 지켜온 생존 원칙을 부정하는 거야?
대체 무슨 헛소리를...
누굴 믿으라고? 차 몰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저 배우들을 말하는 거야?
나와 저들은 어울리지 않아! 저 쓸모없는 것들!
……
버티기 힘들면 알아서 뒤로 빠져. 망신이나 당하고...
이어폰 속의 소음을 견딜 수 없었던 베라는 그것을 홱 잡아 뽑았다. 그런 뒤 침식체 무리 속으로 던져버려서 침식체 무리가 그 젊은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를 찢어발기게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청각 모듈에는 침식체 무리가 뒤엉켜 내는 금속성 끽끽 소리, 뒤쪽 난민들의 비명, 엔진 소음이 여전히 가득했다.
이건 내 싸움이야. 그런데 왜 다른 이에게 의지해야 하는 거지?
침식체가 점점 더 많아지자, 베라의 파괴욕도 따라 끓어올랐다.
가슴 속 타는 듯한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지겨워.
널 만난 뒤로 이 망할 소꿉놀이에 강제로 휘말려, 위장하고, 속이고... "좋은 이" 노릇까지 해야 했어.
게다가 이 가면까지 써야 했어. 너희 같은 "깨끗한" 이들을 피하려고 말이야.
창끝으로 얼굴의 가면을 휙 던져버린 베라는 인간을 잡아끌어 석류석처럼 붉은 눈동자로 단서라도 찾으려는 듯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같은 인물이었기에 베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늦었어.
지금 확실히 너에게 말해줄게. 난 쿠로노의 구조체야.
맞은 편의 꼬마 지휘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베라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 기체는 전장에 처음 투입되는 거라, 임무도 간단했어. 몇 가지 자료와 재료를 가까운 기지에 전달하면 되는 거였어.
하지만 넌 침식체가 나타났을 때, 갑자기 영웅 놀이를 하더니... 그런 널 또 구하느라 그 재료를 네게 써버릴 수밖에 없었어. 정말 짜증 나!
이제 됐어. 기체 상태가 불안정해서... 초기 테스트 내용도 기억나지 않아!
흐릿한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과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유리 너머로 낯설고 흥분된 얼굴들이 의식의 바다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베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알았어. 이건 내가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아직 정신이 남아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줄을 끊고, 뒤로 가서 저 웃기는 코미디언들과 합류해.
"우스운 선의"와 "비참한 인연" 때문에 맺은 우리의 협력은... 여기서 끝이야.
하지만 베라가 한 번 더 인간을 보자,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앞에서 침식체들을 좀 더 막아줄 수 있어.
가슴에 손을 얹은 베라는 손가락을 구부려 빗장뼈 중앙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이 기체의 "안전핀"만 뽑으면 모든 게 끝나. 알겠어?
내가 아직 통제할 수 있을 때, 도망가서...
!
인간은 베라가 했던 모든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를 하기 전,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 이 말을 하는 순간, 베라는 의식의 바다에서 마인드 표식이 "착륙"하는 것을 감지했다.
왜 널 믿어야 하지???
무슨 소용이야?
베라는 성숙 단계에 접어든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 기체에도 마인드 표식 연결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으윽...
하지만 이미 착륙한 마인드 표식은 의식의 바다에 꽂혀 들어가 거센 파도를 잠재우려 했다.
기억 데이터가 "비틀거리며" 검색되었다. 베라는 인간이 의식 연결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녀의 과거를 어설프게 "훑어보며" 쓸모 있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널 믿어야 해?
기... 기억이 안 나.
그건... ■■■살해■■■■■그림자... ■■■유리창■■허위■■...
광활한 의식의 바다가 신호를 감쌌고, 그 인간... 아니. 지금의 인간은 빠르게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지직.
인간의 이어폰에서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전류음이 들렸다.
너희들... 여보세... "하운드"가 통신기를...
뒤쪽 난민들은 많이 대피했어. 앞쪽의 꼬맹이들은 아직 살아 있니?
잘 버텨줬다. 그러니 10초만 더 버텨.
9, 8, 7...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여러분 앞쪽 30미터에서 폭발이 시작될 거예요! 그러니 충격파에 대비하세요!
4, 3...
앞에 화려한 인간의 형상을 한 건 뭐야?
이상해요! 왜 우리 쪽으로 오는 거죠? 왕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멍?! 멍멍! 멍아아아앙!!
(당황하며 울부짖는다.)
통신 너머의 왕 할머니는 담배를 한 개비 물고는 팔을 대충 핸들에 걸친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 애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
다음 순간...
알록달록한 연기가 갑자기 피어오르더니, 반응할 틈도 없이 폭격이 시작되었다.
강풍에 날린 베라의 머리칼이 얼굴을 마구 때렸다.
!
주위의 침식체들이 날아가면서 베라는 잠시 숨돌릴 기회를 얻었다.
인간은 필사적으로 베라를 붙잡아 버티려 했고, 강력한 폭발이 뒤쪽 사람들을 공중으로 띄워버렸다.
제때 도착했네요~!
!!
으아...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멍!
(기쁘게 짖는다.)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 알록달록한 연기 속에서 부드러운 채찍이 튀어나와 모두를 휘감아 안전한 곳에 "무사히" 안착시켰다.
헤헤! 모두 구했어요!
알록달록하게 차려입은 소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스스로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이 혼란스러운 전장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둥둥둥, 쨍쨍쨍, 가장↗위험한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위대한 구조체!
이 얼마나 큰 공로인가! 어서 여러분의 라→이↗어 대영웅님께 감사 인사를 하세요! 슈슈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시몬은 한쪽 렌즈가 깨진 안경을 고쳐 썼다.
이분이... 왕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062번 보육 구역에 임시 주둔 중인... 특별한... 구조체인가요?
라이어는 기습 부대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침식체의 포위망을 뚫어냈다.
라이어와 베라 두 구조체는 전선에서 한참을 더 싸워 062번 보육 구역 철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베라는 보육 구역 사람들 대부분이 철수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후에야 라이어의 지원을 받아 인간과 함께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난민 대열의 끝으로 합류했다.
왕 할머니의 소형 트럭은 라이어의 무차별한 폭발로 폭파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할 수 없이 앞쪽 대형 수송차를 운전하게 되었고, 움직일 수 있는 다른 이들은 모두 대열 끝으로 "추방"되어 걸어가게 되었다.
모두가 베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설명에 따르면, 베라가 최근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체에 과부하가 걸렸고, 이로 따라 의식의 바다 편차 증상이 발생했다고 했다.
조금 전까지 가면을 쓰고 그렇게 신비스럽게 굴더니, 이제는 아예 숨기지도 않네.
……
흥, 무엇 하러 돌진한 거야? 결국엔 다들 붙잡아서 데려와야 했잖아?
"하운드"는 당장 휴식과 정비가 필요했고, 침식체가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에 좀 곤란했다. 구조체의 무게가 일반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베라를 등에 지는 주된 책임은 일단 같은 구조체인 라이어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인간도 고집스럽게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눈살을 찌푸린 바네사는 코를 잡고 라이어를 한참 동안 살펴보더니 신랄하게 말했다.
듣자 하니 넌 공중 정원 소속 병사도 아니고 그냥 왕 할머니한테 붙어 있다며?
음... 저도 공중 정원에서 살아보고 싶긴 한데, 아직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미루고 있어요.
게다가 왕 할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죠. 그분께서 셰퍼드를 데리고 저를 구조하셨는데, 전 그날부터 그분을 따르기로 마음먹었거든요! 기체 정비 부품도 있고, 온갖 보급품도 있잖아요. 게다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뒤에서 받쳐 주시고...
왕 할머니가 참 착한 개를 키웠네. 뼈다귀 하나만 던져 줘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놈은 찾기 힘든데.
저기요? 혹시 저를 얘기하시는 건가요?
졸지에 "좋은 개처럼 부림 당한" 라이어는 자기 코끝을 멍하니 가리켰고, 그 동작 때문에 그녀의 등에 업힌 베라가 떨어질 뻔했다.
봐. 너더러 "하운드"를 좀 더 잘 부축하라고 한 게 맞았잖아. 라이어한테만 맡길 순 없어.
"하운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디서 가져온 거야?
바네사는 베라를 가리키며 핵심을 짚었다.
난 믿지 않으니까, 설명해 봐.
설명해 봐.
그건 어렵겠어. 이건 네 책임이야. 다른 이에게 같이 짊어지라고 하지 마. 그리고 이건 복귀한 뒤에 판단해야 할 문제야.
듣자 하니 네 마음대로 베라와 최신형 마인드 표식 연결을 시도했다며? 파오스에서는 기껏해야 시뮬레이션으로만 연습해 봤으면서... 그녀를 "치료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거야?
인간은 뒷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방금 베라가 빗장뼈 부분의 장치를 뜯으려 했던 모습이 생생했다.
너희 둘 서로 약점이라도 잡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야, "하운드". 귀먹은 척하지 마. 난 구조체 의식의 바다 혼란 임상 증상에 관해 공부한 적이 있거든. 넌 지금 분명 내 말이 들릴 거야.
베라가 살짝 눈을 뜨며 반응했다. 하지만 시각 모듈의 흐릿함은 사람의 "뇌진탕" 상태와 가까워서, 주변을 잠깐 훑어보다가도 어지러워져서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고견이라도 있는 거야?
방금도 말했지만, 난 아직 구조체와 전술을 토론할 만큼 떨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눈길 한 번 정도는 줄 수 있어.
지금도 네 이론이 맞다고 생각해?
……
네 전술은 개인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 너 혼자만 버틸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은 전부 보호 대상으로 분류해서 네 뒤에 세워둬도 된다고 생각하지?
역시 황금시대에나 있을 법한 개인영웅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걸 보니 네 나이도 대략 짐작이 가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가 배운 것도 완전히 달라.
지상 환경은 복잡해서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해. "쓰레기"는 희생시키고, 중요한 사람들을 지키는 게 최선이야.
너도 있었다는 걸 하마터면 잊을 뻔했어.
바네사는 비꼬듯이 베라와 다른 인간의 허리를 묶은 밧줄을 가리켰다.
하나는 황금시대의 불쌍한 유물이라 머릿속이 구시대적 영웅주의로 가득하고, 또 하나는 허황한 생각에 빠진 순진한 아기라 종말의 시대에 가치 없는 희생으로 명예를 얻으려 하고 있네.
너희 둘 정말 잘 어울려. 그러니 한 줄에 묶여 있는 것도 당연해.
……
걱정하지 마. 공중 정원으로 복귀하면 상부에 네 작풍 문제를 낱낱이 보고할 거니까. 기괴한 복장, 왜곡된 사상, 악의적 경쟁까지...
베라는 바네사의 말에 반박하던 중,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바네사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난 너와 저 꼬마 지휘관 둘 다 공중 정원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만든 뒤, 지상에서 썩게 할 수도 있어.
큰소리는... 방금도 말했지만 해볼 테면 한번 해봐.
베라와 바네사가 팽팽하게 대치하는 순간, 갑자기 알록달록한 형체가 끼어들더니 둘을 아래에서 위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베라를 업은 채 둘의 일그러진 표정을 진지하게 관찰했다.
세상에, 말투가 이렇게 거친 여성분들이 동시에 둘이나 계시다니요!
공중 정원에 계신 분들은 다 이렇게 말하나요? 아니면 이것도 일종의 유행인가요? 정말 고급스러운 것 같아요.
미적 감각도 형편없고, 산만한 네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또 시작이네요.
창백한 얼굴의 시몬이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그는 부상자라 원래는 차에 타 있어야 했지만, 심한 멀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걷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이 "산산조각" 난 파오스 소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왕 할머니 밑에 있다고 안심하지 마라. 내가 졸업하면 다시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평생 내 손에 걸리지 않게 기도나 해.
저를 뭐 어쩌시려고요?
제일 먼저 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조해서 그 촌스러움부터 없애주마.
그게 다예요?
?
너무 좋아요! 역시 공중 정원에서 오셔서 그런가 대범하시네요!
경고를 받은 라이어는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나서 바짝 다가왔다.
[player name]님이 증인이세요. 제가 할 일 다 마치고 공중 정원의 상류층에게 저를 의탁할 때, 바로 바네사 님을 찾아갈 거예요!
?
라이어와 바네사는 동시에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하나는 손이 자유롭지 않아서, 다른 하나는 손을 들기 귀찮아서였다.
쓸모없는 "임시 담당자" 켄트가 앞쪽 수송차에서 감시하고 있어.
걱정 마세요. 그 범인은 제가 꽁꽁 묶어놨어요.
"범인"이라고? 그에게 문제가 있는 걸 확인했어? 그가 자백했어?
혼자서 중얼중얼하면서 무슨 "신의 사자"니, "퍼니싱의 올바른 용도"라느니... 완전 망상증에 걸린 미치광이예요.
너희가 말했던 그... 미리 떠난 "연구원" 말하는 거야?
간신히 눈을 뜨고 앞쪽의 대형 수송차를 바라보던 베라의 마음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마치...
유출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유출 직전에 어떤 사람이 연구소를 빠져나갔다는 사실만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종적을 찾을 수가 없네요.
라이어가 소식 듣자마자 바로 출발했어.
네. 저희는 그 사람에게서 단서를 찾길 바라며, 이미 구조체 한 기를 보내 찾도록 했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저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눈보라가 치던 황금시대의 마지막 그날 밤, 군 병원 멀리에서 붉은색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해.
베라가 라이어의 등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어? 내려오고 싶으세요? 괜찮으시겠어요?
켄트가 전에 설명할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작은 연구원 하나가 이런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으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분명 그의 뒤에 누군가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라이어가 정말 목표 대상을 잡아 왔다면...
그날 밤, 베라가 창문을 열자, 손등에 떨어진 눈꽃의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긴장된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금도 몇 개의 눈송이가 베라의 속눈썹 위로 날아오는 걸 보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그가 정말로 이런 큰일을 저지를 만한 혐의가 있다면, 우선 감시와 심문이 필요해.
베라는 노약자들이 가득 탄 앞쪽 수송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등 뒤의 무기를 더듬었다.
베라는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되면, 이 겨울날의 마지막 도주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허약한 대열은 또 한 번의 타격을 견딜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이 든 권총을 꺼낸 인간은 앞으로 가서 살펴보기로 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말해봐!
음... 마른 체격의 노인이에요.
다시 생각해 보니 좀 무섭긴 하네요. 제가 찾았을 때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거든요.
상황 발생! 모두 조심해!
3호 수송차에서 총성이 들렸어. 켄트가 그 차에 타고 있는데 응답이 없어. 난 다른 차들을 멀리 대피시킬 테니, 너희는 어서 가서 확인해 봐.
갑자기 모든 이의 통신 시스템이 일제히 켜졌다. 켄트의 채널이 자동으로 열린 거였다.
불안한 비명이 들리는 가운데, 한 노인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뒤에 있는 모든 이의 귀에 들려왔다.
베라도 그 노래를 들었다.
{226|153|170}~
{226|153|170}~
그건 무슨 노래야?
내가 만든 거야. 신경 쓰지 마.
라이어는 다가오는 위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순진하게 목표 대상의 이름을 읊었다.
이름이...
헤... 인... 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