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 직전의 인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폐로 들어찬 짠 바닷물이 극심한 고통을 안겨줬고, 평소엔 냉철했던 머리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방금 베라와 하니프와 함께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배에 올랐다. 모든 게 순조로웠고 공중 정원도 배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승격자가 만든 바다 안개 속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상한 이합 생물들이 계속 문을 두드렸고, 결국 위험한 바다 위에서 승격자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승격자가 낫으로 배를 두 동강 내버렸고, 거센 파도가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키고 흩어놓았다.
지금은 "승격자를 어떻게 물리칠까?" 보다는 "어떻게 살아남을까?"가 더 시급했다.
수압에 귀가 꽉 막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 어렴풋이 죽음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몇 초만 더 물속에 있으면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주변에선 이합 생물들이 날뛰고 있었다. 하나가 이미 발목을 감아온 듯했지만, 피부가 썩어 들어 가는 고통 따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거대한 잔치 전에 맛보는 에피타이저일 뿐이었다.
마지막 공기 방울이 빠져나갔다...
그때 갑자기 한 손이 바닷물을 가르고 들어왔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거대한 힘으로 바닷물을 갈랐다.
이어서 그 구조체의 손이 인간의 손목을 붙잡고, 강력한 힘으로 순식간에 물 밖으로 끌어 올렸다.
숨을... 쉬어...
날... 봐...
누군가가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 감기지 못하게 했다.
선홍빛 형체가 흐릿하게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계속 뺨을 적셨지만, 이런 작은 자극에 인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숨 쉬어, 코랑 입안의...
힘 있는 두 손이 인간의 가슴을 눌렀다. 심장이 다시 정상적으로 뛰게 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계속 압박을 가했다.
둥둥, 둥둥.
그리고 다음 순간, 부드럽지만 차가운 감촉이 인간의 얼굴에 닿았다. 이내 입과 코를 덮으며, 간절히 원하던 공기를 기도로 불어 넣었다.
일어나!!
짠 바닷물이 마침내 목구멍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폐를 태울 듯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몸의 순환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축하해, 살아났네.
이제 눈도 떴으니까 맞춰볼래? 천국이랑 지옥 중에 하나 골라봐.
얼른 몸 상태부터 확인하고, 정신 좀 들면 말해.
짧은 기억의 조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인간은 시야가 아직 흐릿했지만, 본능적으로 비요 기체에 새로 생긴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선명했다.
지금 설명하기는 좀 복잡해. 우리 모두 그 승격자 때문에 이 섬으로 휩쓸려 왔어. 나머지는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베라가 옆으로 비켜서자 뒤쪽의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이합 생물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군복 조각으로 보아 병사로 추정되는 인간의 시체도 몇 구 섞여 있었다. 하니프가 쪼그려 앉아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더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는 이합 생물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무리 지어 조금 떨어진 바위 해변에 엎드려 있었고, 이쪽 바위 해변의 몇 명의 인간형과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라의 기창 "불사조"는 승격자 "로이드"의 가슴을 꿰뚫은 채 그를 땅에 박아두고 있었다.
하니프가 일어나며 인간을 향해 비웃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제때 깨어나셨네요. 아니었으면... 이 여자가 저를 토막 내서 화풀이했을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훨씬 더 끔찍해질 뻔했죠.
전 운이 좋았어요. 파이프 하나 붙잡고 금방 해안가로 떠밀려 왔거든요. 근데 지휘관님은 큰 파도에 휩쓸리자마자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탐욕스러운 이합 생물이 한동안 수심 깊은 곳으로 끌고 갔던 것 같습니다.
발목이 따끔거렸다. 퍼니싱의 침식이 폐와 머리의 고통마저 덮어버릴 정도였다.
그놈은 이미 난리통에 도망쳤어.
이 섬 근처의 이합 생물들은 전부 좀 특이해... 역겨운 것들.
살갗만 조금 긁힌 걸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인 줄 알아.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네 다리 하나를 통째로 뜯겼을 거야.
베라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일단 이 빌어먹을 승격자 얘기부터 하자. 처음엔 꽤 골치 아플 거라 생각해서 널 구하러 갈 틈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근데 잠깐 싸워보니까 정체가 드러나더라.
베라는 승격자의 몸을 꿰뚫은 기창을 꽉 잡았다.
……
기창이 흔들리자 로이드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을 감싼 빛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퍼니싱으로 만든 위장이 벗겨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처음엔 기세 좋게 덤비더니 실전은 오래 버티지도 못하네... 이게 네 본모습이었어?
승격자, 남의 이름 훔쳐 쓰더니 그것도 내가 박살 내줬다.
베라가 창 손잡이에 힘을 주자, 날카로운 칼날이 금속 흉갑을 조금씩 파고들며, 치가 떨리는 끔찍한 금속음이 울렸다.
절대로 저를 죽일 수는 없을 겁니다. 제 가슴을 완전히 박살 내고 온몸을 산산조각 낸다 해도, 저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 몸뚱이는 언제든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으면, 통제를 잃은 이합 생물들이 계속 당신들을 공격할 겁니다.
베라는 앞에 엎드려 있는 이합 생물들을 흘깃 보더니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인간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이 묶인 상황도 짜증 나는데, 방금 해상 전투로 기체까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베라의 조급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쯧... 알았어.
승격자도 베라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시선을 곧장 뒤에 있는 인간에게로 돌렸다.
제 의견은 변함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고, 여전히 평화로운 협상을 원합니다.
결국 목적이 저 녀석을 데려가는 거라면 꿈도 꾸지 마.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죠. 조금 전 그 사람을 공격한 이합 생물은 첫 번째로 상륙한 "새로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죠. "앵커 포인트" 없이도 새로운 진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죠.
……
거짓말은 아닙니다. 당신도 다르다는 걸 느끼셨을 텐데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으셨겠죠.
네 창조물이야?
……
이 질문에 "로이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얼굴에 미묘한 당혹감과 고민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요... 제 아이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저보다 먼저 선택을 했더군요.
저기, 죄송한데요. 이 양반 말투가 좀 듣기 거북하네요. 제가 잠깐 끼어들어도 될까요?
좋은 소식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요. 어떤 걸 먼저 들으시겠어요?
……
……
하니프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하니프는 스스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이 병사들이 전부 쿠로노 소속이라는 겁니다. 이 섬이 쿠로노의 구역이었던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예전에는 쿠로노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시체 숫자로 봐서는 섬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이합 생물들한테 당한 것 같습니다. 제가 쿠로노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은 도움받을 데가 없다는 거죠.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바다 안개가 걷히니까 통신도 돌아왔습니다. 방금 해상에서 통신이 교란된 건 아마 저기 창에 꽂혀있는 그자가 장난친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베라가 당신을 구하러 뛰어들었을 때, 제가 공중 정원에 연락을 해뒀습니다.
별말씀을요. 다만 공중 정원 지원군이 금방 올 것 같진 않네요. 눈앞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게 없습니다. 승격자의 위협이 아직도 우리 머리 위에 있잖아요. 그렇죠, 승격자 형님?
모두의 시선이 다시 "로이드"에게로 쏠렸다.
당신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너무 많이 준 모양이군요.
희미한 달빛이 베라의 처참한 상처들을 비추었고, 멀지 않은 곳의 이합 생물들도 위험한 파도처럼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베라가 쳐다보자 인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공중 정원
공중 정원
공중 정원에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비를 오가며 수많은 정보 중 핵심적인 내용들을 추려내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감사원 스태프가 로비 중앙에 곧게 서 있는 여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데이터 동기화는 끝났나?
네. 감사원에서 쿠로노 쪽에 해당 섬의 모든 정보를 요청했고, 총사령관님께서도 수송기를 보내 전원 철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좋아. 그 자원 센터 관련 자료 이리 줘 봐.
스태프가 바로 낡은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힐다가 문서 맨 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래전 과거에 묻혀있던 특별한 이름이었다.
헤인스.
힐다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헤인스"... "연구원"... 모두가 퍼니싱을 피하려 할 때, 이자는 오히려 그것을 조종해서 더 진화시키고 확산시키려 했어...
그가 퍼뜨린 변이된 퍼니싱 샘플로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지상의 대형 보육 구역 두 곳이 파괴될 정도로...
힐다가 곧바로 파일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부검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시체의 반 이상이 퍼니싱에 침식됐지만, 감사원 지시로 부검을 진행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스태프가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이 헤인스... 여전히 과한 짓을 했네.
스태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헤인스"라고요?
파일 속 이 "헤인스" 말고도, 같은 이름의 다른 연구원이 있었어. 퍼니싱 발생 직전에 내가 다뤘던 마지막 사건의 인물이지.
"황금시대 말기, 한 불우한 과학자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며 직접 만든 '아이들'을 회사 본사에 투입했다."... 하지만 그 모든 증거와 후속 처리는 퍼니싱 발생 초기의 재난 속에 묻혀버렸지.
묘하게도, 그때 그 "헤인스"도 이미 죽은 몸이었지.
힐다는 부검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다 서명란을 가리켰다.
당시 헤인스 부검에 참여했던 자들은 아직 있나?
지금은 안 계시지만,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힐다는 스태프가 건넨 또 다른 파일을 훑어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쿠로노가 관련되어 있었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섬에 관한 정보뿐만이 아닌 것 같네.
힐다는 자료를 스태프에게 돌려주고 공항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군부에서 강력한 지원 부대를 보낼 거야.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케르베로스 소대를 파견한다고 하더군. 감사원은... 지금 당장 쿠로노의 담당자들과 면담해야겠어.
그 사이, 언급된 사람들은 조금 전의 그림자 회담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가장 성가신 하니프는 납치를 당하고, 마이크도 꺼지고, 회의에서도 쫓겨났지만, 조용해져야 할 현장은 오히려 "열기로 가득했다".
감사원이 요구한 자료 정리는 끝났어. 그 섬에 있는 무슨... 무슨 "유전자원 센터"? 유전자은행이었나?
맞아, 반지하에 있는 유전자은행이야. 황금시대에 수집한 인간 유전자 샘플이 잔뜩 있었는데, 퍼니싱 사태 이후로는 외부 출입을 완전히 차단했어. 보안 요원 교대 정도만 있었지.
하니프가 말한 그 배엔 목표 좌표가 그대로 남아있었어. 베라랑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보내 놓은 것도 모자라 엄청난 문제를 일으켜버렸네.
"엄청난 문제"라니, 얼마나 큰 문제인데? 공중 정원에서 임무 등급을 최상으로 올렸다던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우리한텐 말해주지 않았어.
아주 좋아. 여태껏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섬 지도랑 유전자은행 설계도를 한꺼번에 감사원에 넘기자고?
……
다른 한편에서는, 긴장된 표정의 다른 조직원이 마이크를 켜고 발언을 시작했다.
방금 들은 소식인데,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바다에서 만난 자가 자기를 "로이드"라고 소개했대. 새로운 승격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불사신 로이"? 그놈은 이미 베라가 처리하지 않았나? 니콜라가 직접 내린 임무였는데.
그게 누군지 어떻게 알아? 공중 정원에서 만들어진 "영웅 로이드"가 한둘도 아니고, 밖에서 망가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놈들은 더 많잖아.
게다가 "로이드"에 관해서, 내가 로프라도스 외곽에서 정화 부대가 발견한 "에덴 Ⅲ형"의 잔존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
이 데이터들을 분석해 보면, 우리가 전부터 의심했던 게 맞았어... 최초의 "로이드"가 그곳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아.
낙관적인 쿠로노 조직원은 이 이름을 듣자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하, 만약 그 "원조 로이드"가 진짜로 승격자가 됐다면, 진짜 끝장이야... 그 자식은 정말로 독벌레 둥지에서 기어 나온 진짜 독충 같은 놈이거든.
로노 조직원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방금 그 건방진 젊은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요즘 쿠로노 고위층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상황인데, 뭔가 수상한 프로젝트에 손대다가 업보를 받은 건지...
하니프 말이 맞았어. "업보를 받은 거지".
그럼 내가 감사원을 상대하면서 사건의 근원을 로프라도스 프로젝트로 몰아가지. 유전자은행 정보를 전부 넘기긴 곤란하니까.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더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있지, 있어. 이것보다 더 최악인 소식이 하나 있다고.
낙관적인 쿠로노 조직원이 기밀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파일 하나를 회의실 중앙에 띄웠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을 골치 아프게 만든 그 "빽 좋은 녀석"이 허상 속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참석자 모두가 잘 아는, 늘 뭔가 속셈이 있어 보이는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미친 듯이 비웃는 것 같았다.
왜 그놈 사진을 보여주는 거야?
설마 하니프가 끼어든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거야?
나도 조금 전에 알았어. 이 "빽 좋은 녀석"의 "빽"이 어디서 왔는지. 그 유전자은행의 기술 담당자가 황금시대 말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인물이었거든.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어.
이름이 "헤인스"야.
마른 노인의 사진이 한 장 띄워졌다. 하니프의 자료와 나란히 확대해 보니 둘의 눈동자 색이 완전히 일치했다.
이 "하니프"란 자가 벌써 감사원 눈에 들어왔는데, 감사원이 바보도 아니고 그냥 넘어갈 리가 있겠어?
…………
서로 다른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재빨리 정보를 모으고 공유하며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결국 모두 같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 그 섬에 있는 누구도 잃어선 안 된다.
일단 협조하는 수밖에. 공중 정원 지원군은 출발했어? 목표 섬까지 얼마나 걸린대?
신중한 쿠로노 조직원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기지 하나가 목표 지점이랑 제일 가까워. 공중 정원에 권한 넘겨서 자유롭게 쓰라고 했어. 소형 수송기뿐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해.
이제 이렇게까지 나서서 "열심히" 하는 척해야 해?
그런 건 아니야. 우린 단순히 구조하러 가는 게 아니거든.
쿠로노 조직원이 마지막으로 기존 기체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화면 속 붉은색이 눈부시게 선명했다.
쿠로노 창고에 있던 초기 실험 기체야. 첫 테스트 때 완전히 망가져서 회수된 물건이지.
근데 지금은 완벽한 "개선형"이 됐어. 여기에 승격자와 싸워본 구조체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까지 있으니 기체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 기체는 부작용이 심각해. 뭐 하나라도 더 잘못되면 감사원은 물론이고 우리 전부 의회에... 아니, 법정에 서게 될 거야.
낙관적인 쿠로노 조직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투표하자.
난 기권이야. 아는 정보는 다 공유했으니 먼저 가볼게. 감사원에서 벌써 연락 왔거든.
한 투영이 꺼지자 도미노처럼 두 번째, 세 번째... 회의 참석자 대부분이 하니프의 경고를 떠올린 듯,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기 보신을 선택했다.
결국 이 "주간 회의"에는 몇 명만이 남았다.
또 우리만 위험 떠안게 됐네.
난 이런 상황이 좋아. 다들 도전할 배짱이 없으니 자원은 점점 우리한테로 몰리겠지.
"가장 좁은 틈에서 최고의 기회를 잡는다"... 이게 쿠로노의 신조잖아. 우린 늘 그래왔고.
……
긴장한 쿠로노 조직원이 불안한 듯 맞은편 투영을 노려봤다.
하니프보단 차라리 너랑 일하는 게 낫다.
너도 요즘 애들처럼 좀 붕 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잖아. 매일 쿠로노 괴롭힐 궁리만 하는 그 녀석보다는 백배 낫다.
마침내 그가 손을 들었다.
BPN-13 테스트 기체 투입에 동의한다. 쿠로노 지원 수송기와 함께 즉시 투입하자.
하하하하...
낙관적인 쿠로노 조직원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좋아, 함께 "한때 우리의 발키리였던 그녀"를 전장으로 보내자고.
낙관적인 쿠로노 조직원은 오랫동안 봉인됐던 기체를 수면 캡슐에 넣어 예열하라고 지시했다.
자, 끝났어. 급한 불은 껐으니 결과나 기다려보자.
한편, 섬에 고립된 셋은 승격자가 방금 한 말을 "초조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베라가 다시 한번 힘을 주자 창끝이 "로이드"의 마지막 남은 팔마저 날려버렸다. 이제 평범한 구조체처럼 보이는 이 승격자는 사지를 모두 잃은 상태였다.
……
하니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승격자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베라가 사지를 잘라내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감히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들었지? 승격자, 한 번 더 말해봐. 그 배로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 사람을 이 섬의 "유전자원 센터"로 데려오려고 한 거였다고?
승격자는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 섬에는 쿠로노 소속 유전자원 센터가 있죠. "삼브라의 텅 빈 공간"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제가 필요한 건 오직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한 명뿐입니다. 당신이나 헤인스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잠깐! 전 하니프라고요! 착각하지 마세요. 전 당신을 본 적도 없다니까요!
하니프는 베라를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베라를 향해 필사적으로 자신이 "로이드"의 계획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하려 했다.
그자의 말에 속지 마세요. 전 무슨 승격자 같은 건 모릅니다. 제가 그런 대단한 인맥이 있었다면, 진작에 쿠로노에서 잡일이나 하고 있진 않았겠죠. 게다가 방금 바다에서 저까지 공격...
아직 네 차례 아니야. 입 다물어.
하니프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맞습니다. 여기만큼 적합한 곳은 없으니까요.
……
"로이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인간을 한번 훑어보더니, 마치 신뢰라는 도박을 걸기로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이 섬에 있는 어떤 자의 기술을 이용했습니다. 그는 퍼니싱이 필요했고, 우리는 서로 협력하기로 했죠.
협력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적절한 인간을 "모체"로 삼아 유도하는 것뿐이었죠.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당신을 데려오기도 전에 섬에서 진화가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누군가 저보다 먼저 움직였다고요.
맞습니다. 다만 왜 그가 그렇게 서두르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그가 고른 "모체"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모방"을 더 잘하는 개체들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제가 보기엔 성공작은 겨우 하나뿐이었죠.
그때, 인간의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합 생물이 발목을 감아올 때, 퍼니싱으로 인한 역피드백이 뇌를 찌르듯 아팠다. 마치 누군가가 지휘관의 머릿속에 낯선 기억을 강제로 밀어 넣으려는 것만 같았다.
베라를 마주할 때면 도망치고 [공포]에 질리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퍼니싱의 본능인 "인간 공격"보다 그런 감정이 더 강했어요. 그 개체는 이미 그 정도로 고차원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녀석은 도망쳤어.
베라가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저런 이합 생물이 섬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풀리아 삼림 공원의 불빛이 베라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죽여야 할 놈들이 점점 늘어나네... 너도 죽어야 하고, 죽은 척하고 도망친 그 자그마한 이합 생물도 없애버려야겠어.
베라의 눈빛에서 살의가 더욱 짙어졌다.
이미 늦었습니다. 새로운 "진화"가 한번 시작되면 계속 가속화될 뿐입니다. 섬의 모든 새로운 이합 생물들이 그것을 따라 하고, 이해하고, 결국 그것이 되어갈 거예요. 근원을 찾는 건 불가능해질 겁니다.
그 녀석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이브"가 될 자격이 있죠.
공중 정원에서 당장 우주 무기로 이 섬을 바다에 가라앉히지 않는 한, 당신들은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이브"를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흥... 내겐 다 똑같아. 전부 다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기체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한계가 있죠.
조금 전 바다에서 당신의 기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을 텐데요.
……
지원군도 금방 올 리 없고... 설령 당신들이 기다리는 "천군만마"가 나타난다 해도 진화 속도를 따라잡진 못할 겁니다.
승격자는 베라의 통제 아래 마치 꼭두각시처럼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실제 상황은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시간 싸움이에요. 당신들은 이미 졌습니다.
포기하세요, 베라.
말을 마친 "로이드"는 다시 인간을 응시하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잘 들으셨죠, [player name]? 빠르든 늦든 당신의 운명은 같은 결말로 향할 겁니다. 반드시 우리의 "저 언덕"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당신은 반드시 "앵커 포인트"가 되어 진화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게 될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결정하셨나요? [player name], 마지막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그들을 지키고 싶다면,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닥쳐!
베라는 분노를 터뜨리며 발로 승격자의 머리를 모래사장에 처박았다.
설마 승격자 말에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누구도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두진 않을 거야!
한 번 더 경고하죠. 여기서 거절하시면, 바로 사냥이 시작됩니다.
승격자는 이 대화가 지겨워진 듯 눈을 감았다.
아무도 제 결정에 영향을 줄 순 없습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하니프가 갑자기 손에 든 물건을 보더니 손을 들었다.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 더 있는데요...
닥쳐! 지금 우리가 얼마나 바쁜지 안 보여?!
이번엔 진짜 중요합니다. 믿어주세요.
방금 말씀하신 그 이합 생물 "이브"... 제가 제대로 들었다면, 조금 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그 개체 맞나요?
하니프가 물에 젖은 위치 추적기를 들어 올렸다. 화면 중앙의 작은 빨간 점이 깜빡거렸다. 마치 숨어있는 이합 생물들처럼 조용히 "숨 쉬는" 듯했다.
좋은 소식은, [player name] 님께 인공호흡 하느라 바쁘실 때, 제가 공중 정원에 연락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체에 위치 추적기도 달아뒀다는 겁니다.
나쁜 소식은 뭔데!!
베라는 폭발 직전이었다.
나쁜 소식도 그렇게까진 나쁘지 않습니다! 위치 추적기가 물에 젖어서 정확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쓸 만은 합니다!! 이게 전부예요, 더는 없어요!!
베라와 인간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로이드"도 다시 눈을 떴는데, 처음으로 그의 눈에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거의 즉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베라는 승격자 주변의 퍼니싱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걸 감지하고는, 망설임 없이 창으로 그를 바위 해변에 다시 박아 넣었다!
소용없습니다!
승격자, 네 장황한 설명 다 들었어. 네가 왜 그랬는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근데 한 가지는 분명해... 넌 진짜 완전 미친놈이야!
하니프는 재빨리 위치 추적기를 인간에게 던지고는, 자신의 이어폰을 가리키며 특별한 수신호를 보냈다.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긴 "대화 치료"가 효과를 봤네요!
인간은 던져진 위치 추적기를 한 손으로 받아 들고, 하늘을 향해 총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인간이 하늘을 향해 쏜 신호탄이 어둠 속에서 터지며 지원군들에게 위치를 알렸다.
"로이드"는 승부의 결말을 직감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참 실망스럽군요.
괜찮습니다. 우린 곧 다시 만날 테니까요... 다음엔 친절한 "로이드"는 없을 겁니다.
인간들이 만든 이 비극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 손으로 끝내겠어요.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입니다. 구 인간보다 더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걸 곧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리고 오늘, 바로 당신들이 그 증인이 될 겁니다...
퍽...
베라는 창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온 힘을 실어 내리꽂았다. 승격자의 마지막 말은 뱃속에서 끊겨버렸다.
지겹게 떠들었어!
인간의 눈빛을 확인한 베라의 창이 승격자의 몸을 완전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붉은 사신처럼 베라는 분노에 찬 듯 "로이드"의 목, 가슴, 배, 사지를 차례로 관통했다. 그러고는 도자기 파편처럼 부서진 그의 몸을 휘저어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하! 진작에 이래야 했는데!
퍼니싱이 시체의 조각들 사이로 새어 나와 돌 틈새를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붉은 안개는 시냇물처럼 흘러 순식간에 섬 전체로 뻗어갔다.
퍼니싱 농도 경보가 다시 울리자, 하니프는 총을 들어 조금 전 물러났던 "이합 생물의 물결"을 겨눴다.
스읍...
미묘한 균형이 깨지자, 이합 생물들의 인간을 잠식하려는 본능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바위 해변의 세 마리의 "작은 벌레"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레 접근하던 것이 순식간에 광란의 돌진으로 바뀌었다.
큰일 났습니다!
살아남을 자격을 증명하겠다고? 웃기고 있네! 결국엔 남한테 휘둘리는 벌레일 뿐이잖아!
너희 둘 다, 살고 싶으면 내 뒤로 와!
베라가 인간 앞을 가로막고, 창을 휘둘러 밀려드는 퍼니싱을 흩뜨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인간도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 말을 듣자 베라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
이런 상황, 낯설지가 않네... 하하하...
좋아... 그래! 이제부터가 진짜 도망이야. 죽을 각오로 날 따라와! 절대로 내 뒤를 놓치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