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2 성화의 귀결 /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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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2-8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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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동기화 진행도: 65%

어두운 수면이었다. 인간은 수면 아래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

이런!

???

괜찮아, 그냥 돌덩이였네.

"이런!"하는 소리와 함께 심한 흔들림이 느껴졌고, 인간은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며 눈을 떴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인간의 이마에 얹어져 있었다.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이 차 뒷좌석에 누워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앞쪽 조수석 등받이 틈새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방금 이마에 손을 댔던 자였다.

인간은 폐허에서 또 한 번 "기억 재가동"을 겪었지만, 다행히 구조체 "하운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은 기억에 남아있었다.

엄마, 저 사람 깼어요.

쉿... 조용히 해야지.

그제야 인간은 뒷좌석의 다른 둘을 발견했다. 뒷좌석은 원래 꽤 넓은 편이었지만, 부상자의 상처가 눌리지 않도록 많은 공간을 비워둔 상태였다.

모녀는 구석에 서로를 껴안고 있었고, 소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하운드"도 손을 거두고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계속 열이 나서 4시간이나 잤어, 네가 완전히 기절한 줄 알았다고.

우리 모두 운이 좋았지, 이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평소 독설을 자주 내뱉던 베라도 이번만큼은 왜인지 머뭇거리며 운전석을 가리켰고, 어떻게 상대를 소개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일계 늙은이뿐이니, 굳이 젊은 호칭은 필요 없어.

멍!

그래, 그냥 왕 할머니라고 부르면 돼.

마침 내 차가 화물 트럭이거든, 그래서 사람들을 뒤쪽 짐칸에 태웠어. 그나저나 너희들도 참 대단한걸. 그런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다니.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은백색 머리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웨이브를 넣었고, 또렷한 눈썹 문신에 "빨간 립스틱"까지 바르고 계셨다.

그리고 원래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야 할 강아지는 황금시대에 흔히 볼 수 있던 애완견 품종으로, 마치 부드러운 극세사 천 같은 갈색 곱슬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녀석의 자리를 베라가 차지하는 바람에, 지금은 베라의 다리 위에서 으스대며 서 있었다.

멍멍!

보아하니 베라는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얘는 "셰퍼드"라고 해.

난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 이 녀석 아니었으면 폭격 구역엔 발도 안 들였을 거고, 너희들을 발견할 일도 없었을 거야. 어서 셰퍼드한테 고맙다고 해.

지휘관은 슬쩍 시선을 왕 할머니의 손 쪽으로 돌렸다.

그곳엔 묵직해 보이는 저격총이 수동 브레이크 옆에 비스듬히 고정되어 있었다. 왕 할머니께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의 놀란 시선을 의식한 듯, 왕 할머니는 뒷좌석을 흘깃하더니, 뜻밖에도 윙크를 날렸다.

이 총이랑 함께한지 꽤 오래됐어. 퍼니싱이 폭발했을 때, 해변에 위치한 집 한 채랑 바꿨지. 꽤 비싼 물건이야.

놀랍고 기쁜 마음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몽롱한 혼란감이었다.

더 자세히 물어보기도 전에 붉은 머리의 구조체가 먼저 그의 단말기를 건네주었다.

먼저 네가 요즘 쓴 메모부터 봐. 네가 알고 싶은 건 다 거기 적혀 있을 거야. 걱정 마, 난 안 봤어. 볼 수도 없고.

지휘관이 단말기를 열어보는 동안, 왕 할머니께서 자진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이 구조체한테 들었는데, 네가 공중 정원 파오스 학교에서 온 학생이라며? 게다가 머리도 다쳤다면서? 여기가 당연히 낯설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퍼니싱 사태 이후로 줄곧 이 근처를 지켜온 병사란다. 이곳이 번화한 도시에서 폐허가 되고, 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재건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봤지.

며칠 전, 이상한 침식체 무리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평소보다 공격성도 강하고 확산 속도도 빠르다고 하더라고, 근처 보육 구역까지 영향을 미쳐서, 셰퍼드랑 한번 둘러보러 온 거야.

그러다 너희를 발견한 거지. 거기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셰퍼드가 너희를 찾아냈어. 정말 잘됐지 뭐야.

기분이 좋아진 왕 할머니는 신나서 휘파람을 불었다.

때맞춰 깬 것 같네. 우린 이 길로 몇 시간을 달려왔어. 이제 막 내가 주둔하는 제일 가까운 안전 보육 구역에 도착했어.

저기 앞을 봐, 저쪽이 바로 062호 보육 구역이야.

왕 할머니의 설명이 끝나갈 무렵, 차창 밖으로 차를 세우라고 손짓하는 주둔 인원들이 보였다. 난민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생존자들을 태우고 돌아온 트럭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왕 할머니가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밟자, 황금시대 말기의 화물 트럭이 임시 대피소 앞에 안정적으로 멈춰 섰고, 그녀는 이어서 차 문을 가리켰다.

축하해, 이제 재난 구역에서 벗어났으니,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거야.

자, 어서 내려.

왕 할머니는 말을 마치며 지휘관이 안고 있는 작은 상자를 힐끗 보았다.

지금 들고 있는 그 물건 말이야, 누구랑 의논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이 보육 구역에 수용된 난민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베라는 지휘관의 손을 꼭 잡고, 왕 할머니를 따라 빽빽한 인파를 헤치며 대피소로 행했다.

기억이 다시 한번 "재가동"된 지휘관은 최근의 메모들을 체크하며, 상황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왕 할머니가 구조해 온 난민들은 어느새 제각기 흩어졌고, 베라식 표현을 쓰자면... 드디어 "골칫덩어리들을 내려놓은 셈"이라 요약할 수 있다.

지휘관은 그 상자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왕 할머니는 즉시 인맥을 동원해 상자의 표식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보육 구역 "임시 담당자"를 찾아가 보라는 대답을 얻게 됐다.

또 사고 치지 말고, 바짝 붙어서 따라와.

지휘관은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베라에게 이끌려 인파를 헤쳐 나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들과 소음이 뒤섞이며 머리의 통증이 점점 심각해졌다.

앞서가던 구조체가 지휘관의 상태를 눈치채고, 손에 힘을 더 주어 그를 자기 쪽으로 바짝 당겼다.

여긴 전부 집을 잃은 사람들이야.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끼어들지도 마. 네가 어디서 왔는지도 절대 말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널 여기다 버리고 갈 거야.

상자도 이리 줘.

지휘관은 베라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상자 손잡이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며, 자신이 직접 들고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여기 안에 뭐 귀중한 게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 없길 빌어.

켄트, 왔어. 바로 이 학생이야.

왕 할머니는 두꺼운 입구 천막을 걷어, 찬 공기를 차단하고는 지휘관을 앞으로 살짝 밀었다.

무사히 가지고 돌아오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안에 있던 수심 가득한 남자가 급히 일어섰다가, 홀로 서 있는 인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저희가 보낸 사람들은요? 어째서... 샘플 하나만 돌아온 겁니까?

이 아이는 파오스의 재학생이고, 집행 부대의 대원, 그리고 동행한 그 연구원들은... 아마 돌아올 수 없을 거야.

……

이럴 순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 사람은 [player name](이)야. 파오스의 우등생이고, 나는 동행 중인 구조체 "하운드"야. 원래 파오스 이번 기수 학생들은 059호 보육 구역에서 지상 실지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보다시피 일부 학생들이 여기저기 흩어졌어.

우리는 여기서 4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변이된 침식체한테 습격을 당했어. 그 구역이 폭격당하기 전에, 내 지휘관이 본대에서 떨어져 있던 다른 학생 한 명을 만났는데, 그 학생이 우리한테 이 상자를 줬어.

내 지휘관은 다른 정식 집행 부대 대원은 한 명도 못 만났어. 아마 그들은 폭격 구역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었을 거야. 네가 말한 연구원이 누구인지 이름 한번 확인해 봐. 만약 그 사람이 맞다면, 이미 죽은 게 확실해.

베라는 명패 하나를 꺼내 켄트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그 사람 명패야. 내가 직접 떼어왔어.

……

반응 보니 맞나 보네.

베라는 명패를 켄트의 손바닥에 던지듯 놓고는, 곧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간이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이제 목숨 걸고 가져온 이 "샘플"이 뭔지 말해봐.

저...

이 상황까지 왔는데 숨길 생각하지 마. 밖에서는 재난이 계속 퍼지고 있어.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다고.

보고는 여기까지야.

베라의 말투는 날카롭고 자세는 군인답게 꼿꼿했다. 왕 할머니조차 의아한 듯 쳐다봤다.

인간은 단말기에 기록된 내용을 떠올렸다. 베라는 늘 "모범" 군인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벽했고, 어린 시절부터 이런 군대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이 보육 구역 담당자잖아. 뭔지 알 텐데, 어서 말해.

켄트는 보고를 끝까지 듣고도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이 보육 구역의 정식 담당자가 아닙니다. 임시로 맡게 된 것뿐이에요. 왕 할머니도 아시다시피, 담당자님께서 어제 인원들을 데리고 나가셨는데 아직...

그 말을 들은 왕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의 저격총을 내려놓았다.

소식이 없다니, 말도 안 돼. 내가 직접 데리러 가야겠어.

소용없습니다, 왕 할머니...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제가 여기 앉아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들 아직 말씀드릴 기회를 못 찾았을 뿐입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마저 돌아오지 못하실까 봐 가슴을 졸였습니다.

……

왕 할머니는 움직임을 멈췄고, 손에 든 총을 바라보며 애써 이런 "익숙한" 소식을 받아들이려 했다.

이런 엉망이 된 상황을 제가 어떻게... 하, 제가 왜 하필 이런 중책을 맡게 된 걸까요?

켄트는 답답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인간이 들고 있는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긴...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죠. 말씀드리자면, 그 상자 안에는 극도로 위험한 퍼니싱 샘플이 들어있습니다.

이번 침식체 습격은 전례 없이 맹렬했고, 특정 지역에만 집중됐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게 "누군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죠. 상황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예상이 맞았어요.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 간 연구원들이 보고해 왔는데, 이 근처의 퍼니싱이 전부 "진화"한 것처럼 변이가 일어났다더군요.

그들이 먼저 변이의 근원지를 찾아냈습니다. 정상 가동 중이어야 할 지상 연구소였죠. 그곳엔 공중 정원에서 파견된 인원들만 있었는데도 퍼니싱 유출이 일어났습니다.

유출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유출 직전에 어떤 사람이 연구소를 빠져나갔다는 사실만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종적을 찾을 수가 없네요.

베라는 문득 이 "이야기"가 어디서 들은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서 비슷한 일을 겪었는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당장 쫓아가야 해.

라이어가 소식 듣자마자 바로 출발했어.

네. 저희는 그 사람에게서 단서를 찾길 바라며, 이미 구조체 한 기를 보내 찾도록 했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저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팀은 계속해서 발생 지점으로 가서 퍼니싱 샘플을 수집했는데... 작전 이틀째부터 연락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방금 얘기 들어보니까... 그 샘플이 파오스에서 졸업도 못 한 학생 손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당신이랑 당신 구조체한테까지 온 것 같네요.

지금 상황이 이렇습니다. 모든 게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러 가기에 바쁘고, 애도할 시간조차 없네요.

켄트는 "임시 담당자"라는 자리가 주는 중압감에 짓눌린 듯했다. 그는 불안과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 연신 얼굴을 문질렀다.

마침내 그는 여기까지 힘들게 온 일행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목숨을 걸고 변이된 퍼니싱 샘플을 가져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부상도 있으신 것 같으니 좀 쉬세요. 샘플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여기 남은 소염제도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

마지막 말에 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내려놓으려 했다.

좋아, 이 뜬금없이 생긴 일도 여기서 끝이네...

인간은 켄트가 상자를 받으려는 손을 막았다.

여긴 그냥 난민을 받아들이는 임시 안전 구역일 뿐이라, 연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력을 동원해서 공중 정원이랑 연락이 닿는 가장 가까운 기지로 보낼 예정입니다.

……

인간의 날카로운 질문에 켄트는 자기도 모르게 밖에 있는 대피소의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밖에는 근처에서 도망쳐 온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노인이나 환자, 부상자들이 대부분이라 소염진통제조차 귀한 약이 된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샘플 호송대"를 꾸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 할머니는 주변을 둘러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다들 알아야 할 게 있어. 변이된 침식체의 공격 범위가 계속 확장되고 있어. 이 샘플을 운반하는 것 외에도, 우리가 지켜온 안전 수칙대로라면 보육 구역 이전도 시작했어야 해.

이렇게 하지. 샘플은 내가 맡을게. 나랑 셰퍼드가 다음 기지로 호송하도록 하고. 대신 이전 작업은 네가...

돌아와.

인간은 상자를 꽉 붙든 채 완강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인간에게 쏠렸다. 특히 베라는 화를 누르느라 애쓰는 게 역력했다.

파오스 학교에서 허세 부리는 것도 가르쳐? 처음 듣는데?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게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걸 알면서도 굳이 가겠다는 거야?

됐어, 뭐라고 해도 난 절대로 네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일 처리할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거야? 남은 약도 다 떨어져 가는데, 저 할멈은 계속 사람들만 끌어오고 있잖아. 데려오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런 것도 못 할 거면 차라리 빨리 결정권을 내려놓으라고! 진짜 다들 쓸모없어!

? 누구야?

멀리서 들려오는 욕설이 입구 천막 뒤에 있던 사람들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 소녀가 축 늘어진 소년을 끌고서 천막을 거칠게 젖혔다. 그 뒤로는 왕 할머니가 함께 구해온 모녀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소녀는 가슴에 달린 파오스 휘장을 가리키며 "명령"을 했다.

저 모녀 말로는, 나랑 같은 휘장 단 녀석이 사고를 쳤다면서? 그 할멈이 데려와서 여기 숨겨뒀다고? 어서 나오라고 해!

파오스는 공중 정원 직속 군사학교야. 그 학생이 지상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더라도 일단...

아니에요, 오해예요! 제가 한 말은 "사고를 쳤다."가 아니라 "사고를 당했다."라고요! 다쳤다니까요!

다 비켜! 내가 직접 처리할 거야!

어라? 당신이 왜 여기에?

바네사와 시몬은 인간을 보자마자 말을 멈췄다. 흙먼지 범벅이 된 세 학생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각자의 파오스 학교 휘장에서 반사된 빛이 서로의 눈에 비쳤다.

…………

하, 너였어?! 정말 질긴 놈이네!

5분 후...

알겠어. 완전히 이해했어.

샘플에 대한 설명을 들은 바네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단을 내렸다.

간단해. 지금부터 전부 내 지시대로 움직여.

이 쓰레기를 위해 한 번 더 설명해 줄게.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야.

첫째, 난민들 대피시키기. 둘째, "라이어"란 구조체가 범인 잡아 올 때까지 기다리기. 셋째, 이 쓰레기한테서 목숨 구하는 데 쓸 테스트 재료를 빼내서 제출하기.

그리고 제일 중요한 넷째, 변이된 퍼니싱 샘플을 근처 보육 구역이나 연구소로 보내는 거야.

첫 두 가지는 왕 할머니한테 맡기고, 우리 파오스는 샘플 호송에만 전념하면 돼. 마지막으로 저 녀석 배에 있는 특수 재료만 보내면 끝. 이게 최선이야.

조금 전까진 할멈이라더니? 귀염둥이 아가씨?

아직도 못 알아들은 사람 있어?

알았어요!

알겠어.

시몬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손목엔 깁스까지 한 상태라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바네사는 다시 한번 거만한 눈빛으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쓰레기가 제정신을 차렸네.

중상 입은 주제에 말대꾸야?

저기 있는 너, 한 번 더 설명 안 해도 되겠지?

……

바네사가 시몬을 끌고 들어올 때, 베라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가 모습을 바꾸고 나타났다.

왕 할머니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더 그럴듯한 계획을 내놓을 줄 알았더니, 역시나 죽으러 가자는 소리네.

뭐, 이해는 가. 내 꼬마 지휘관이 혼자 "공"을 세우는 게 배 아파서 그러는 거겠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끼어들고 싶은 거고.

한마디 하자면, 내 의견은... 굳이 왜? 체면이랑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해?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하운드"?

저 녀석이 머리를 다쳐서 그렇다 쳐. 우린 멀쩡하거든? 이번 실전 평가에 "구조체 배치" 같은 건 없었어. 모두가 "인형"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아. 근데 넌 마치 스스로 들러붙듯이 나타났잖아. 수상하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player name]의 목숨을 구한 것 같은데...

제가 봤어요! 빨간 머리 언니가 그 사람을 데리고 엄청나게 긴 길을 걸었어요. 진짜 좋은 분 같았어요... 어? 근데 언니 머리가...

쉿, 어른들 이야기할 때는 조용히 있어야지.

[player name] 님을 위한 특별 조치일 수도 있잖아? 모든 면에서 항상 최상위권이었으니까, 특별 임무나 훈련이 따로 있을 수도...

졸업 평가도 안 끝났는데, 그 꼴사나운 상처투성이를 수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부하로 삼고 싶으면 좀 더 쓸만한 애를 골라.

내 말은...

그렇게 단정 짓지 마. [player name] 님의 실력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늘 성적이 비슷했어도... 매번 네가 "조금씩" 뒤처졌잖아.

너 같은 건 구해주지 말아야 했어. 손목 부러진 채로 침식체한테 물려 죽었어야 해.

너...

너희들 그런 얘기에는 관심 없어...

그렇네요. 시간도 없으니 본론으로 돌아가시죠. [player name] 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운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봐봐, 속고도 도와주는 꼴이라니. 네 몸에 갑자기 생긴 "테스트 재료"가 뭔지는 생각도 안 해봤어? 난 들어본 적도 없는데. 너 지금 실험체로 쓰이고 있는 거 알아?

그만 좀 억측하고 공격하지... 아니, 정말 못 참겠네요. [player name] 님, 샘플 호송을 계속하신다면 저도 꼭 함께하게 해주세요.

베라는 눈을 감았다. 이 젊은이들의 말다툼이 완전히 지겨워진 듯했다.

쓸데없는 말다툼은 그만해. 난 더 이상 너희들이랑 놀아줄 기분이...

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어. 이거.

우아한 외모에, 분명 좋은 집안에서 자란 듯한 여학생이 갑자기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은색 수갑을 꺼내 들고는, 베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으로선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어. 확실하게 통제해 두는 게 최선이야. 좀 도와줘. 여기 묶어둬야 해. 데리고 갈 순 없으니까.

말도 안 돼... 이건 너무하잖아! 바네사,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시몬도 눈을 감은 채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

…………

베라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금속 관절로 된 손목을 움직였다. 이제는 말할 가치도 못 느끼는 듯했다. 이 철없는 녀석들의 행동이 우스울 뿐이었다.

한번 해볼 테면 해봐. 지금까지 그런 짓을 감히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걸로 날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정말 생각해?

당연히 안 되겠지. 하지만 네 반응이 중요해. "인형"의 본분이란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거니까. 네가 계속 반항한다면, 그게 바로 네가 문제가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베라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아이고, 이제 싸움판이 벌어지려나 보네.

갑자기 밧줄 하나가 베라의 허리를 감쌌다.

베라가 뒤돌아보자 인간이 진지한 표정으로 밧줄의 다른 한쪽 끝을 자신의 허리에 꼼꼼하게 묶고 있었다.

그건 또 어디서 꺼낸 거야?

인간이 밧줄을 살짝 당기며 베라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 순간, 베라는 이 사람이 뭔가를 이미 눈치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혹시 벌써...

고개를 들자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032번 보육 구역 근처의 높은 폐건물 옥상에서 한 구부정한 그림자가 햇빛을 받으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두 소절짜리 짧은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226|153|170}~

~Burn it all……

그거 무슨 노래야?

음? 나도 잘 모르겠네. 누구한테 배운 건데... 어때, 괜찮아?

꽤 고급스러운데? 마치 황금시대 부자들이 부를 법한 노래 같아.

? 하하하하... 그래, 네 말이 딱 맞아.

노인이 고개를 돌려 옥상 가장자리에서 다가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기어 올라온 거야?

올라오는 길을 다 막아놔서 이렇게라도 올라와서 잡아야 했잖아, 헤인스!

날 잡겠다고? 난 너희가 도움을 청하러 올 줄 알았는데. 참 안타깝네. 또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황금시대 때는 자가 진화를 금기시하더니, 퍼니싱이 터지고 나서는 또 퍼니싱을 마치 재앙처럼 여기고...

왜들 이렇게 멍청한 걸까? 적극적인 변화만이 올바른 길이란 걸 왜 모르는 거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

……

헤인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구조체가 자신이 말하는 위대한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문득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다른 붉은 머리 소녀가 그리워졌다.

됐다...

어차피 신의 사자가 내게 퍼니싱의 올바른 용도를 보여줬으니, 너희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날 방해할 수 없... 윽!

라이어가 발길질로 헤인스를 땅바닥에 쓰러뜨리자, 대화는 그대로 끝이 나버렸다.

뭐라고 하든 수상한 놈들은 다 문제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연구소에서 미리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어서 말해! 퍼니싱 샘플 어딨어? 아직도 그 연구소에 있는 거야?

콜록, 콜록콜록! 누가 벌써 가져갔다고!

! 그들이 해냈구나! 다행이다.

라이어는 순식간에 헤인스를 몽둥이처럼 묶어서 어깨에 메었다.

나도 내 임무를 마무리해야지. 지금 바로 데려갈 테니까 가는 길에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

스읍, 좀 살살해! 도망 안 가! 내가 도망가려고 했으면 진작에 아무도 못 찾았을 거야!

괜히 허세는...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여기가 제일 높아서 멀리까지 다 보이거든.

라이어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이 난리를 구경하고 있었다는 거야?

당연하지. 신께서 내 노력을 보셔야 하고,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나도 봐야 하니까.

하하... 마치 영웅이 이름 없는 폐허를 지나, 결국엔 제일 높은 곳에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것처럼 말이야.

넌 어느 보육 구역에서 온 거야? 내 계산으로는 그 녀석들 속도라면 이제 062번 보육 구역만 남았을 텐데?

헤인스는 자신이 만든 "위험한 나라"에 완전히 도취하여, 아래에 있는 "멍청한" 인간들을 비웃듯 큰 소리로 웃어댔다.

! 큰일 났다!!

한편 062번 보육 구역에서는 베라가 둘의 허리를 묶은 밧줄을 보며 "목이 메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멍청한 녀석...

목양견

멍! 멍멍!

급하게 나누던 대화는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셰퍼드의 다급한 짖음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군.

왕 할머니가 총을 메고 나갔다. 입구 천막을 걷자마자, 피난민들이 술렁이며 왕 할머니와 켄트에게 달려왔다.

침식체들이 보육 구역에 침입했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요!

벌써요? 라이어도 아직 안 돌아왔는데, 지금 우리 힘으로는 난민 대피도 어려울 텐데요!

베라는 바깥의 소란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게 만드는 이 개떡 같은 상황, 진짜 짜증 나네.

이제 역할놀이는 그만하자.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지금은...

베라는 인간을 끌고 입구 천막을 걷으며 나갔고, 말하는 사이 이미 양날의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따라와!

베라는 잠시 멈칫했다. 밧줄 끝에 묶여 있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뭔가 달라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겉모습은 전혀 변한 게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미숙함은 사라지고 성숙함이 늘어난 듯했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피로한 기색이 더 짙어져 있었다.

……

베라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때로는 베라조차도 자신이 늘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운명에 떠밀려 달리기만 하는 것 같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듯이 앞으로 달리지 않으면 운명이 자신을 따라잡을 것만 같아서, 그저 정신없이 달려왔다.

문득 베라는 기회가 된다면, 뭐든 "알았어.", "그래.", "걱정하지 마."라고 다정하게 답해주는 이 인간과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쿠로노 직원으로서의 계획만 설명하려던 게 아니었어.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렇게 달리고 또 달려서 결국 도착하게 될 곳이 어디일지, 이상하게도 이 사람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