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2 성화의 귀결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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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2-6 혼탁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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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구석에서 몇 개의 투영이 차례로 비쳤다.

그림자들이 원탁 주위에 모여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며 신원을 확인했다.

한 명이 없네. 좀 더 기다려보자.

……

1분이 지나자, 회의 주최자가 모두의 침묵 속에서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 녀석은 어디 간 거야? 더 기다려야 하나?

구석에 계시던 그 노인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

아니, 다들 왜 절 그렇게 쳐다보세요? 저도 조금 전에 알았다니까요. 장례식은 또 어떻게 치러야 할지...

요즘 쿠로노 고위층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상황인데, 수상한 프로젝트에 손대다가 업보를 받은 건지... 지금 분위기를 봐선 그 늙은이 장례식도 그냥 조용히 치러야 할 것 같네요.

정숙하세요.

그 청년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무심한 듯 던지던 조롱도 함께 잦아들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최근 연이은 피살 사건을 맡은 담당자, 네가 먼저 말해봐.

보니까... 오로라 부대에서도 지원 소대를 보냈더군. 담당자도 같이 브리핑해.

알겠습니다. 자원이 공짜는 아니네요.

조용히 해! 너한테 발언권을 준 적 없어.

아니, 담당자가 전데요?

능글맞은 말투와 함께 젊은 남자는 자신의 투영 권한을 활성화했다.

그 순간, 회의 참석자들의 눈앞에 이 젊은 남자의 실제 모습과... 그가 있는 장소가 드러났다.

젊은 남자가 있는 곳은 마치 감옥 같았다. 수상한 그물 더미 위에 앉아 있었고, 머리 위 녹슨 철창에는 꼬들꼬들하게 말라붙은 생선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어디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절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하니프라고 합니다. 지금은 쿠로노 본부 소속이고요. 제가 맡은 일은... 음, 오로라 부대의 일부 분대를 지휘하는 겁니다. 원래는 그 비행 요새 소속 비밀 부대에서 활동했었는데, 뭐, 독립한 지는 꽤 됐어요.

용건이나 말해.

요즘 수상한 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쿠로노를 죽도록 증오하는 놈이 있는데, 그 자식이 우리 조직원들을 하나둘씩 암살하고 있습니다.

사실 "암살"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죠. 범인이 워낙 대담하거든요. 대놓고 다음 타깃이 누군지 예고를 하니까요. 보세요, 여기 계신 분들, 혹시 다음 차례가 자기일까 하고 불안해하고 계시잖아요? 하하.

하니프의 투영이 거리낌 없이 팔을 휘저으며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참석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범인이 마치... 어둠 속의 유령처럼 숨어있어서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대로 된 정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너...

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최근 희생된 분의 시체에서 강력한 퍼니싱 반응이 검출됐거든요. 이런 퍼니싱 반응은 지금까지 승격자 근처에서만 발견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니프의 이 말에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투영된 참석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위기 상황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또 다른 승격자의 존재"에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잠깐만요, 토론은 좀 나중에 하시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승격자일 수도 있고, 누가 조종하는 퍼니싱 창조물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든 우리가 타깃이란 건 분명합니다. 지금은 여러분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범인이 우리를 점점 더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쿠로노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얼마 전엔 제가 있는 오로라 부대 기지까지 찾아냈습니다.

며칠 전에는... 임무 나갔던 오로라 부대 대원들의 시체를 "인수"했습니다. 거기에 특별한 메시지가 있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을 위한 거였습니다.

하니프가 목을 가다듬었다.

적이 배 한 척을 요구했는데요. 다이달로스가 남긴 "소형 실험선"입니다. 혹시... 어떤 배인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적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공개되자 회의장은 오히려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니프는 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럼 제가 설명해 드리죠. 그 배는 원래 카퍼필드 산하의 작은 의료 생명공학 회사 소유였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회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황금시대 말기에, 그러니까 퍼니싱이 발생하기도 전에, 쿠로노 소속이었던 다이달로스에 매각됐더라고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배였을 텐데도, 사용권까지 "철저하게" 이전됐다고 하더군요.

더 이상한 건 퍼니싱이 발생하고 나서도 그 배가 꽤 자주 운항했다는 겁니다. 아마 다이달로스가 뭔가 중요한 물건을 실어 날랐던 것 같은데... 뭘 운반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여기 계신 분들은 저보다 연배도 있으시고... 표정을 보니 뭔가 더 많은 걸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

아,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제 얘기를 먼저 들어봐 주세요. 그 배를 조사하다가 중요한 걸 하나 발견했거든요.

그 배에는 특별한 "열쇠"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열쇠" 없이는 아예 시동도 걸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다이달로스가 쿠로노에서 독립할 때, 일부러 그 "열쇠"를 하나 더 복제해서 가져갔다고 하더라고요.

들리는 바로는 쿠로노 본부에서 그 불법 복제된 "열쇠"를 회수하려고 몇 년을 고생했답니다. 나중엔 쿠로노 특별 작전팀에서 제일 실력 있다는 구조체 특별 작전 소대까지 보냈다는데...

결과는... 거의 전멸이었죠.

하니프의 "과장된" 설명에 쿠로노 조직원들은 진절머리가 난 듯 이마를 짚었다.

그 배와 관련된 일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얽힌 게 많긴 한데, 최근 사건이랑은 연관 없을 거야.

어차피 그거랑 연관된 살아있는 자... 그러니까 살아있는 구조체도 그 녀석 하나밖에 안 남았고.

그럼... 지금 쿠로노에서도 그 "열쇠"를 포기하겠다는 거네요?

하... 나이만 먹었지 별 도움이 안 되네요.

……

그럼 제가 꼭 알아내야 한다면요? 지금 적이 그 배를 콕 찍어서 요구하는데, 구체적인 정보 하나 없이 조사하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검은 그림자들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 진짜 아무것도 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알아서 해결하라"는 건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다 만 얘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하니프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적이 쿠로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이 정보를 공중 정원에도 흘렸더라고요.

공중 정원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쇠"를 회수할 자들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가진 원본이 아니라, 다이달로스가 복제해 간 그 복제품을 찾으러 간 거 같습니다. 그 배를 연구할 생각인가 봐요.

우리가 예전에 못 찾았다고 해서... 공중 정원이라고 못 찾으란 법 있나요?

…………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마치 "이야기 들려주듯" 늘어놓는 이 대화에 회의 주최자가 결국 화를 냈다.

이런 중요한 정보는 회의 시작할 때 바로 말했어야지! 아직도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 어서 다 말해! 여기가 네 놀이터야?!

알겠습니다! 이번엔 진짜 한 번에 다 말씀드릴게요!

하니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공중 정원에서 보낸 사람이 바로 전 쿠로노 특별 작전팀 소속이었던 구조체 [베라]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복제 열쇠 회수 작전"에 참가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베라 말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베라란 분,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엄청 빠르게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당시 특별 작전팀을 망하게 한 배신자를 바로 찾아냈다니까요.

그리고 베라가 그 배신자한테서 정보를 다 뽑아냈다고 하니까, 아마 복제 "열쇠"도 벌써 찾았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회의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찾아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배도 이미 찾았을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베라가 그 배를 몰고 출항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 하니프!

아, 잠깐만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공중 정원에서 이 임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까지 비밀리에 투입했다고 하는데요...

하니프!!!

아, 잠깐만요! 아직 말씀드릴 게 남았습니다!

진정하시고, 일단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저한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놓치고, 둘이 움직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라며 화내시기 전에 한 가지는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번 임무, 저 정말 잘 해냈습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중 정원 작전에 직접 끼어들어서, 베라랑 그 지휘관한테 꽤 많은 도움을 줬거든요.

복제 "열쇠"랑 배를 찾은 건... 우리 쿠로노의 공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공중 정원 쪽에서 먼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쿠로노의 관련 자료를 받겠다고... 앞으로 공중 정원과 좋은 협력 관계가 될 것 같습니다.

……

휴! 자,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그 오래된 일들도 파헤쳐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 어쩔 수 없이 파헤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실험선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 걸까요? 자동 항행 시스템은 달려있었는데 목적지는 없더라고요... 혹시 이 목적지가 바로 여러분들이 숨기고 싶었던 진짜 비밀 아닌가요?

하니프의 "장난치는 듯한" 태도에 모두가 화가 나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된 이상"이라는 그의 말이 참석자들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니프는 마치 수다스러운 앵무새처럼 계속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쿠로노는 이제 의회에서 예전만 한 힘이 없습니다. 게다가 의회는 각 실험실의 관리 제도와 윤리 감사도 강화했고, 정화 부대랑 윤리 위원회, 각종 특별 감사팀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할 수 있을 때 빨리하는 게 좋은 법이죠. 지금 공중 정원이랑 손잡는 게 아마 최선의 선택일 텐...

삐...

회의 주최자는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났고,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하니프의 마이크를 끊어버렸다. 하니프의 투영은 여전히 말하고 있었지만, 회의장에는 마이크의 날카로운 하울링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 건에 대해서는 최대한 빨리 논의하고 표결을 하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네가 오로라 부대를 데리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금지다.

그리고...

회의 주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멈췄다. 하니프의 투영이 뭔가를 급하게 전달하려는 듯 양손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해 보였다. 엄청 급해 보였다.

할 말 다 했다면서? 또 뭔데?

회의 주최자가 하니프의 음성을 다시 연결하자마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절대로 "마음대로" 행동한 게 아닙니다.

?

그 미친 붉은 머리 여자가 저를 억지로 배에 태웠다고요. 맞아요, 지금 저는 그 배 안에 있습니다.

지금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자동 항해 중입니다. 공중 정원에서 항로를 추적하고 있는데, 목적지를 찾아내기 전엔 절대 안 멈출 것으로 보입니다.

삐...

하니프? 하니프!

하니프의 투영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번엔 회의 주최자가 끊은 게 아니었다.

붉은 머리 여자가 위험한 눈빛으로 하니프를 노려보더니, 그의 단말기를 구석으로 집어 던져 회의를 강제로 종료시켰다.

쿠로노 쪽에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까. 너도 이제 입 좀 다물어. 여기 상황은 더 이상 밖으로 새면 안 돼.

……

"착한 척" 할 거면 끝까지 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래?

베라가 옆을 바라보았다.

당장 찾아내서 처리해야 해. 퍼니싱 덩어리들이 더 커지도록 놔둘 순 없어.

그래. 쿠로노의 자료까지 얻으면 공중 정원에서 이 배에 대한 정보를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이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에 뭐가 있는지도...

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실의 불빛이 베라와 인간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바닥에 앉아 있는 하니프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하니프는 앞에 있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두 분은 늘... 이런 식으로 대화하시나요?

마침 거센 파도가 선체를 때리며 둔탁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배는 끝없는 바다를 외롭게 떠돌며 파도를 헤치고 비밀스러운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 파도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쉿, 뭔가 있어.

베라가 경계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의 항로 기록, 전부 공중 정원에 동기화했지?

인간이 단말기를 몇 번 두드려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쯧!

예상치 못한 일이 예상대로 일어나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이 임무 나가실 때마다 늘 이런... 으악!

꽉 잡아!

삐삐삐삐...

퍼니싱 탐지기가 갑자기 경고음을 울렸다. 주변 파도가 마치 불규칙한 퍼니싱 농도처럼 출렁이며, 작은 배를 거세게 흔들어댔다. 결국 모두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하니프는 발가락을 부딪친 듯했고, 연이은 흔들림에 일어서지도 못했다.

윽! 스읍...

단단한 거 찾아서 잡아. 넘어져서 다쳐도 못 도와줘!

거대한 파도가 선실 문을 때리며 천둥 같은 소리를 냈다.

베라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자세를 잡고 선실 입구를 노려보며 기창을 꺼내 들었다.

제 발이...

쿵쿵.

시끄럽네.

쿵쿵.

마치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뭐가 시끄럽다는 거예요? 방금부터 계속 이래왔...

그 입 좀 다물어!

베라가 창을 휘둘러 선실 문을 꿰뚫었다.

하... 들려. 더러운 것들이 선체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어.

베라가 창을 뽑아내고 발로 문을 차서 열자, 예상대로 인간형의 무언가가 밖 통로에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그것"의 가슴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방금 창에 찔린 자국이었다.

…………

단번에 제압했다.

됐어, 이제 위험하진 않아.

글쎄... 확실한 건.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거야.

베라는 기창 끝으로 이합 생물의 잔해를 건드려 배 뒤쪽 폐기물 더미로 휙 던진 뒤, 재빨리 문을 닫았다.

만약 쿠로노 고위층을 사냥하고 다니는 그놈이 승격자라면, 이 정도쯤은 할 수 있겠지.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지금은 공중 정원과 연락도 안 되고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쿵쿵.

베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배 안 셋의 시선이 자연스레 방금 창에 뚫린 구멍으로 향했다. 구멍 너머로는 안개처럼 짙은 미지의 무언가가 있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리는 장비를 꽉 쥐었고, 베라도 다시 기창을 들어 올렸다.

방금은 그냥 우연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기 밖에서 정말로 "노크"를 하고 있는 거 맞죠?

예의는 참 바르네. 그래서 뭐, 초대해서 차라도 대접할 생각이야?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간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쿵쿵.

마치 인간의 제안에 답하듯, 문밖 정체불명의 존재가 또 한 번 "예의 바르게" 노크했다.

쿵쿵.

하지만 노크 소리가 인간의 제안에 공손하게 반박하듯, 문밖 정체불명의 존재가 다시 한번 탐색해 왔다.

흥, 끈질기네.

스릴 즐기고 싶다면 상관없어. 대신 네 뒤는 못 봐줘.

베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지만, 손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그때 마침 파도가 덮쳐와 문 앞에 서 있는 인간형을 적셨다.

……

자, 대화나 좀 할까? 들어와서 좀 앉을래?

베라는 웃음을 지었지만, 손에 든 기창은 여전히 이합 생물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합 생물이 정말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베라의 말에 응답하려는 듯했다.

고도...

나는... 고도.

어라? 제법인데? 이름도 있어? 근데 왜 왔어? 누가 너를 보낸 거야?

고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목적... 없어.

그냥... 왔어.

곧... 떠날 거야.

고도는 "발"을 움직여 깊은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녀석... 누가 가도 된다고 했나?

베라는 다시 한번 기창을 던져 이 이상한 이합 생물을 꿰뚫은 뒤, 배 뒤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배 뒤편의 잔해 더미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자, 친절한 대화는 여기까지. 뭐 할 말 있어?

베라는 다시 한번 문을 닫으며 인간을 쳐다봤다.

혹시 저들이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쿵쿵.

……

이번엔 또 어떤 바보가 죽으러 온 거야...

베라는 짜증 난다는 듯 문을 열며 기창을 높이 들었다.

죽이지 마... 난 착해!

나는... 바다... 상인! 거래... 하자...

바다 상"인"이라고? 뭘 먹었길래 갑자기 인간 행세를 하고 싶어진 거야?

진짜야, 진짜! 물건도... 있어.

이합 생물이 괴상한 몸통을 뒤적이자 딸그락거리며 너트 더미가 쏟아져 나왔다.

너트많아... 교환하자...

저기 배 뒤편에 있는 물건이랑... 교환하자.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배 뒤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두 이합 생물이 쓰러져 있었다.

거절할게.

!!

남길 유언이라도 있어?

거절? 거절이라고?

?

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 바다 상인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걔들은... 동료... 친구야... 함께 겪었던... 뭘 겪었지? 즐거운 일? 맞아... 친구란 말이야!

경솔하게, 배에 오른 것, 널 화나게 한 것, 다 실수야. 하지만...

인간의 언어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이합 생물이 "흐느적거리며", 어색하지만 완전한 문장을 힘겹게 이어갔다.

그래서... 죽여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뭐? 너희 같은 이합 생물 놈들이 내 배에서 활개 치고 다니게 놔둬야 한다고? 1초라도 망설이는 건 퍼니싱에 대한 모독이야.

아니야! 틀렸어!

옳고 그름 타령은 집어치워. 여긴 내 구역이고, 내가 곧 "옳은 거"야. 내 말을 거스르는 건 전부 "틀린 거"고. 내가 처리하고 싶은 놈은 맘대로 처리해. 계속 쓸데없이 지껄이면 다음은 네 차례야.

틀렸어! 틀렸다고!

이합 생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잔해라도... 돌려줘! 잔해! 잔해!

이합 생물은 발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좋아, 한번 해볼 테면 해봐. 네가 가져갈 수 있나 보자.

역시... 무서운 여자! 이성도 없고! 나쁜! 나쁜 여자!!

베라는 기창을 앞으로 세우고 몸을 살짝 낮춰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합 생물을 도발하듯 손짓했다.

덤벼봐!

아아아아아... 스으읍!!!

이성을 잃은 이합 생물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바다 안개가 끓어오르듯 소용돌이치고, 새까만 바다 밑에서는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올라 배를 에워쌌다.

마치 바다 전체가 "격분"한 것 같았다.

딱 좋아!

바로 이거야! 다 걸려들었네!

어둠 속에 숨어있는 놈들은 이렇게 끌어내는 거야. 거미줄 건드리니까 기분 좋아? 이합 생물들?

베라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기창을 힘차게 던졌다.

스읍...

창날이 곧장 이합 생물을 향해 날아갔다. 바로 상처를 내기 직전...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베라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어라?

베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와 무기를 맞댄 채 대치했다.

안개 속에서 새로운 인간형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일그러지고 흐릿한 다른 이합 생물들과는 달리, 그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의 구조체였다.

그의 몸에서는 퍼니싱 반응이 전혀 없었지만, 오히려 급증하던 퍼니싱을 잠재우고 혼란이 더 커지는 것을 막는 듯했다.

또 만났네, 베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인간이 흩어지는 안개를 향해 총을 겨눴다.

……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인간이 흩어지는 안개를 향해 총을 겨눴다.

알고 있어.

갑자기 존댓말을 안 쓰네? 연기가 서툴기는 하다. "로이드".

인간형이 안개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며, "경솔했던" 이합 생물을 대신해 모두의 앞에 섰다.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죄송합니다만... 이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무기부터 내려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그건 원래 "제가" 당신에게 건넨 것이니까요.

베라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난 절대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아. 죽은 자들이 이렇게 되살아나 내 앞에 나타날 거라면... 그때 너희를 갈기갈기 찢어서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했어.

가루로 만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정신과 의지가 남아있는 한, 영웅을 따라 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테니까요. 그런 걸로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도 같은 "영웅의 굴레"에 빠진 것 같네요. 그 기창이 증거죠. 우린 원래 같은 부류였어야 합니다.

최근에 재밌는 소식을 들었는데. 쿠로노 고위층이 발칵 뒤집혔다면서? 네 짓이야?

그렇습니다.

훗, 잘했네. 몇 놈 죽은 건 아주 마음에 들어. 근데 여기까지 온 걸 보니 그저 자랑하러 온 건 아니겠지?

베라의 가슴속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그녀는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신들과 싸우고 싶진 않습니다. 대화가 필요해서 왔습니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

"로이드"의 시선이 베라 뒤에 있는 인간을 향했고, 베라는 한 발짝 옆으로 움직여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성의를 보이죠. 저와 단 두 가지만 거래하시면, 여러분 모두 안전하게 육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궁금해하시는 것들도 답해드리죠.

승격자들은 원래 다들 이렇게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나? 어차피 우리한테 다른 선택권도 없잖아.

베라의 시선이 양쪽을 빠르게 오갔다. 고농도 퍼니싱 경보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걸 보니, 이 작은 배는 이미 이합 생물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게 분명했다.

하니프 말이 맞았다. 바다 한가운데서 승격자와 싸움을 벌이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거래라... 방금 그 바다 상인이라던 이합 생물도 너를 따라 한 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퍼니싱으로 만든 하찮은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정도지, 진정한 "진화"와는 거리가 멀죠.

앞서 그 아이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배 뒤편에 있는 두 구의 시체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마침 파도가 배를 덮쳤다. 이 정도의 파도만으로도 작은 배는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을 터였다.

베라는 몸을 바로잡으며 로이드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거래 조건이나 말해. 욕심부리지 말고, "로이드".

동의하실 만한 제안입니다. 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교환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면, 제가 기록자가 되어 새로운 전설로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 지휘관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갑자기 지휘관님 운운하면서 친한 척하는 꼴이 역겹네.

곧 그렇게 될 테니까요.

"로이드"의 시선은 인간을 지나 저 멀리 수평선을 향했다.

이 끝없는 세계를 너무 오래 떠돌았나 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그리 재미있진 않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릴까요?

"로이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이 세계 어딘가에, 매일 같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먼저 그 끝도 없는 길의 끝에 도달해서, 그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 서로 경쟁했죠.

시작부터 재미없네.

더 재미없는 건 그다음이에요. 이 시합에선 단 한 명의 승자도 나오지 않았거든요. 누군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여기까지입니다.

? 진짜 재미없는 결말이네.

네, 마치 작가가 작품이 강제로 끝나거나 크게 수정 당하는 걸 참지 못해서, 그 분한 마음을 담아 억지로 만들어낸 열린 결말 같죠.

이 정도 이야기로 거래해도 될까요?

좋아, 그러면 나도 그만큼이나 형편없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베라는 기창에 몸을 기댔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실패란 걸 모르는 최고의 킬러였어. 맡은 일은 무조건 성공했지.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재난이 닥쳤고, 그녀는 뜬금없이 나타난 이상한 사람이 베푼 선의 덕분에 구조됐어.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그 과정에서 크게 다쳤지.

그렇군요. 그녀가 "빚"을 지게 된 거군요.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그 사람은 죽진 않았는데, 배에 구멍이 크게 났고 머리도 다쳤어. 멋대로 선심을 쓴 그 사람의 빚을 갚겠다고, 킬러는 어쩔 수 없이 그 짐 덩어리를 돌보면서도 임무를 계속해야 했지.

말 그대로 모든 게 꼬여버렸어. 킬러가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귀찮은 상황이었달까.

그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로이드"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재난이 임시 의료소까지 퍼졌고, 킬러는 그 이상한 사람을 끌고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로 도망쳐야 했어.

그리고 나서는요?

베라는 갑자기 뒤에 있는 인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래, 너한테 묻는 거야. 그다음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들었지? 뒷이야기 따위는 없어. 끝이야.

이것도 똑같이 종잡을 수가 없네요.

당연하지. 네가 대충 잘라먹은 이야기만큼이나 찜찜하잖아.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여기 진심으로 거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너도 마찬가지고.

다음 거래도 똑같이 위선 떨 거 뻔하니까, 그냥 본론이나 말해.

……

"로이드"는 손을 들어 올려 인간을 가리켰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베라는 다시 기창을 들어 올리며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 마치 한심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괜히 쓸데없는 얘기나 하면서 시간만 낭비했네.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게 했으니, 어떻게 보상할 거지? 로이드를 흉내 내기나 하는 짝퉁아?!

로이드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베라가 던진 기창이 그의 귓가를 아슬하게 스치며 갑판을 꿰뚫었다. 창대 끝에서 뻗어 나오는 엄청난 진동이 주변 공기까지 흔들었다.

착각하고 계시네요.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 이름은 애초부터 제 것이었어요.

닥쳐!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다시 한번 번개가 치는 순간, 맨 앞에 서 있던 베라가 뒤돌아 외쳤다.

조종실로 가서 신호 다시 잡아! 내가 막을 테니까!

인간은 격렬하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 비교적 안정된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승격자는 안타깝다는 듯 바라봤다.

이런 헛된 저항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이게 통했다면, 제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만두시죠, 인간.

로이드가 번개와 빗줄기를 뚫고 나왔다. 베라가 남긴 상처로 온몸이 만신창이었지만, 그의 동작은 여전히 날렵했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로이드의 손에는 낫이 쥐어져 있었고, 그는 낫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절단.

쾅!!

낫 날이 배의 한가운데를 내리쳤고, 순식간에 갈라진 틈으로 바닷물이 솟구쳐 올랐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 주변을 살폈다. 베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하니프는 이 난리통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튼튼해 보이는 파이프를 꽉 붙잡고 있었다.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오히려 인간 자신이었다.

인간은 급히 베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철썩...

하지만 이미 늦었다. 거센 파도가 인간을 삼켜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갔다.

인간은 이미 숨을 참을 준비를 했지만, 배 밑에 숨어있던 이합 생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라도 받은 듯, 그들은 본능적인 살의를 억누르고 인간을 당장 물어뜯지는 않았다. 대신 인간이 든 칼을 산산조각 냈다.

그중 하나가 인간의 외투를 움켜쥐고는 미친 듯이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입에서 새어 나온 공기 방울들이 위로 흩어졌지만, 이제는 수면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발버둥 치는 힘이 서서히 약해졌고,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견디다 못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려 했지만, 짜디짠 바닷물만이 폐 속 깊이 밀려들었다. 기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

인간의 몸이 점점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물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위에서 내려오는 흐릿한 물거품이 보였다. 누군가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주변의 이합 생물들을 쓸어내고는, 차가운 손으로 인간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