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동기화 진행도: 49%
베라는 천천히 오늘의 두 번째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 단순한 손놀림이 익숙해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퍼니싱이 터지기 전날 밤처럼, 그녀는 또다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거의 이야기를 꾸며내려 했다.
칼날 아래 사과 껍질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고, 그녀는 머릿속에 간략한 "줄거리"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부모의 품에서 자랄 기회조차 없었어.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잃어버렸거든.
뭐가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그다지 좋은 시작은 아니지?
날 위로하는 거야?
베라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마음대로 해.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 있든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어릴 적부터 먼 친척 집을 떠돌며 살아왔으니까. 이 집이 싫다 하면 다음 집으로, 그곳에서조차 나로 인해 불편함이 생기면 또 다른 곳으로 밀려났어. 마치 "짐짝"처럼 말이야.
어차피 어릴 적부터 먼 친척 집을 떠돌며 살아왔으니까. 이 집이 싫다 하면 다음 집으로, 그곳에서조차 나로 인해 불편함이 생기면 또 다른 곳으로 밀려났어. 마치 "짐짝"처럼 말이야.
부모님이 날 위해 상당히 많은 재산을 남기셨대. 그래서 그들이 날 달갑지 않아 하면서도, 그 유산 앞에서 잠시간 억지로 나를 받아들였지. 이익 앞에서 체면도 없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어.
다행히도 황금시대의 마지막 빛줄기가 내게 닿아 나를 비춰줬어.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성장한 뒤엔 그들에게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찾아내게 되었지.
그때는 아무도 퍼니싱 재앙이 다가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눈앞에는 그저 전대미문의 평화로운 시대가 펼쳐져 있었을 뿐이었지.
그런 시대에는 대부분이 더 안정된 삶을 꿈꾸며 살아갔고, 나 역시 그랬어. 성적도 체력도 괜찮은 편이라 정규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 당시의 용병 제도와는 꽤 달랐지만, 어쨌든 안정적인 진로를 계획하며 나아가고 있었어.
귀찮기만 했던 친척에게서 벗어나 정부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었고, 성적만 유지하면 여유로운 지역에서 장교로 몇 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해? 정말 내가 진지해 보이는 걸까?
음... 반쯤 맞췄네.
베라는 신중히 말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스로 만들어낸 "줄거리"와 그녀가 직접 겪은 "진실"의 경계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난 학교 수업에는 정말 진지했어. 다른 일에서도 스스로 꽤 "신중하다"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그때 여러 재단과 기관에서 제안이 들어왔었어. 그들과 계약만 하면 꽤 괜찮은 물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마침 학교를 선택하면서 소모한 자금과 "손실된 재산"을 어느 정도 회복할 기회였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어. 한편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생각했거든. 누군가 계약을 이용해 날 속이거나 부당한 일을 꾸밀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 "아무 계약만으로도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상황"은 퍼니싱이 터지고 나서야 흔해졌으니까. 질서와 번영은 늘 함께하는 법이잖아. 황금시대엔 분명한 장점으로 작용했지.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꽤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나만의 특별한 생존 방식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사실은 뭐든 1등을 해서 선택의 기회를 최대한 넓히고 싶었던 거였지.
쓰레기 같은 선택권이었어. "선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너무 수동적이었지.
베라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의 손은 사과 껍질을 벗겨내다 한 조각을 잘라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동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졸업 후 후방 같은 비교적 안정된 자리로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 하지만 그런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는 누군가 더 "험난한 전선"에서 모든 부담을 떠안아야 했어.
리더십이 뛰어난 동기들도 많았어. 그들의 인생 목표는 단 하나, 가능한 한 높은 자리까지 오르는 거였지. 전선이든 어디든 상관없었고, 오직 큰 권력을 잡는 게 중요했으니까. 이런 부류는 대개 자신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곤 했지.
그래서... 여러 동기나 전우들이 나 같은 존재를 눈여겨봤어. 성적은 뛰어난데, 배경도 없고, 의지할 가족이나 친구도 거의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관대한 척하며 초대장을 "건네줬지". 대부분은 이익을 나누자는 명목이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길 바라는 눈치였어.
어라? 네가 답을 알고 있을 줄이야!
베라는 상대방을 흘긋 보고는 사과 껍질 깎기를 다시 이어갔다.
네 말이 맞아. 난 너무 "눈치가 없었지".
그들은 화가 나서 내 앞길에 작은 돌멩이들을 하나둘씩 놓기 시작했어. 나를 걸려 넘어뜨리려는 거였지. 훈련 중 실수를 유도하거나, 작은 작전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결국 "악의적인 경쟁자"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했던 거야.
내가 거미줄 속에서 끝까지 발버둥 치며 버티니까,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나와 가까워지려는 이들까지 괴롭히기 시작했어.
결과는 뻔했지. 혼자서 시작했고, 결국 혼자서 끝났어. 중간에 몇몇이 동행했지만, 다양한 이유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어.
사과 껍질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깎여 나가더니, 가볍게 접시 위로 내려앉았다.
그 시절의 베라는 분명 거미줄을 끊어냈을 테지만, 그 끝은 더 어두운 나락으로 추락하는 길이었을 뿐이었다.
흥,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떤 질서든 퍼니싱이 모조리 박살 냈으니까.
믿을지 말지는 너에게 달렸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문득 상대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병상을 보니 순간 멈칫했다.
파오스에서 온 "꼬마 지휘관"이 방금 잘라준 사과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믿었어?
베라의 말에 지휘관도 당황했다.
이 순간, 베라의 귓가에 수년 전 그 남자가 남긴 말이 은은히 메아리쳤다.
거짓말이지? 굶주린 자가 진수성찬을 상상하지 못하듯, 네 이야기는 허술하기 그지없어. 너는 진정한 애정을 모르는 게 분명해.
인간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한 베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놀라움이 번져가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이야기는 인간의 반응 하나하나에 따라 점점 더 진실처럼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농담이야, 속인 건 아니고, [이야기]는 내가 말한 대로야.
인간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한 베라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놀라움이 번져가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이야기는 인간의 반응 하나하나에 따라 점점 더 진실처럼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응, 정말이야. [이야기]는 내가 말한 대로야.
그래서,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싶었던 걸 결국 알게 된 거야?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네. 네가 궁금한 게 이 "임시 동료"의 과거야? 아니면 황금시대의 끝자락이 어땠는지 알고 싶은 거야?
베라는 무심한 표정으로 잘린 사과를 접시에 담았다. 조금 전 이야기가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 듯했다.
인간은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무심한 행동을 잠시 지켜보다가 문득 "조금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야? 내가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
아니면 "이런 경험"을 겪으면 꼭 "염세적인 결말"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정말 정원 온실에서 자란 티가 나는구나. 아직 파오스도 졸업 못 했으면서 경험이 풍부해 봤자... 매일 그깟 평가 성적이나 걱정하고 있을게 뻔한데. 하지만 모든 난관이 꼭 "그런 결말"로 이어지는 건 아니야.
난 전혀 실망하지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한 적이 없으니까. 세상의 본질이 어떤지 늘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퍼니싱이 터졌을 때도 나한테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어. 어차피 세상 속 존재들은 어디서나 똑같으니까. 그저 한 거미줄에서 다른 거미줄로 옮겨갔을 뿐이야.
대체 왜 이렇게 끝까지 파고드는 거야, 꼬마 지휘관?
베라는 사과를 힘주어 깨물었다.
꼭 말해야 한다면, 난 세계의 인간 문명 자체가 혐오스러워.
베라는 사과를 힘주어 깨물었다.
꼭 말해야 한다면... 난 세계의 인간 문명 자체가 혐오스러워.
말하기 전에 단어를 신중히 골라야 할 거야. 위선적으로 "화해"를 운운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
뭐가 다행이야?
베라는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했다. 준비해 둔 빈정거림은 무색해져, 결국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수년간 베라는 배신자들을 추적하며 "범인들"을 심문하고, 수많은 이들과 대치해 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그녀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짧은 대화 속에서 반복되는 당혹감에, 그녀는 어느새 알 수 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정말 그런 걸까?)
……
인간도 뒤늦게 "잘 알지도 못하는 구조체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다"라는 걸 깨달은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둘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관찰하다가 마침내 어딘가 묘한 합의점에 도달했다.
너를 돌보는 건 내가 맡은 임무 중에서 제일 쉬웠어. 하지만 잡담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앞으로 공중 정원 연결 지점까지 어떻게 갈지 생각하는 게 좋겠어.
네가 충분히 회복되면 곧 출발해야 해.
베라는 쿠로노가 정해준 임무 기한을 확인했다.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마감 전에 그 테스트 재료를 반드시 제출해야 했다.
이틀... 아니면 사흘? 최소한 네 배 상처가...
갑자기 병상 머리맡의 등이 번쩍 켜지더니, 병실 밖 복도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
인간은 "근육에 새겨진 기억" 속의 경보음을 듣자마자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옆구리를 한 손으로 겨우 붙잡은 채 침대에서 내려왔다.
베라도 순식간에 일어섰다.
여기까지 퍼졌다면, 후방은 이미 통제불능이겠네... 이렇게 맹렬한 침식체의 습격은 처음 봐.
베라의 마음 한구석에 이상한 직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확히 뭔지는 잡히지 않았다.
흥, 잘 들어둬, 꼬마 지휘관. 네가 운 나쁘게 얽힌 이번 습격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야. 목숨 걸고 도망친다 해도 재앙을 피할 수 있을지 장담 못 해.
베라는 무기를 꽉 쥐었다.
무서워?
부상자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내가 먼저 나가서 복도 상황을 살펴볼게.
경보음은 이미 베라의 의식의 바다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병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문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그 문을 열 용기가 있나? 각오는 됐고?
!
베라가 문에 손을 댔을 때, 복도에서 괴상한 비명이 들려왔다. 곧이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퍼니싱의 그림자가 대지를 뒤덮은 지금, 이 세계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은 없었다. 이 임시 의료소도 곧 "연옥"으로 변할 것이다.
베라는 지상에서 긴 시간 동안 활동해 왔다. 2160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그날 밤 내리던 눈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해 왔다.
계획을 바꾸자. 복도는 안 되겠어. 여긴 높지 않으니까 창문으로 나가면...
베라는 문의 작은 창을 통해 복도 상황을 살피며 말을 던졌지만, 한참이 지나도 인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하하... 도망가지 않을 테니, 한번 뒤돌아볼래.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베라는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날과 비슷한 광경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베라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눈앞의 광경은 그때와 거의 똑같았다.
인간은 손에 작은 과도를 꽉 쥔 채, 그 자리에 서서 공격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너의 날카로움도 결국은 이 비극적인 결말에서 무뎌질 수밖에 없어.
하하하하...
베라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 지휘관, 설마 내 앞에서 자살극이라도 펼쳐서 내 지루한 인생에 재미를 더해주고 싶은 거야?
인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그녀의 터무니없는 질문에 대한 어떤 답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넌 저 망할 놈들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하하하...
인간은 베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썹을 찌푸리며 과도를 꽉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
인간도 베라의 시선이 향한 과도를 보더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흩날리는 핏방울도, 깨진 창문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도, 자살로 만족한 미치광이의 시체도 없었다.
그저 한낱 힘없는 인간 한 명이 전부였다. 학교도 아직 졸업하지 못했고,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데다, 부상까지 입어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과도 하나를 들고선, 베라 앞에서 "상황 판단" 같은 말을 진지하게 내뱉고 있었다.
그러더니 "길부터 뚫자"는 말까지 덧붙였다.
하하하...
베라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치 하수구에서 수년간 싸워온 "미친개"가 신분증을 내밀며 작은 칼을 휘두르는 "정규군"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베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이번 겨울은 예전과 전혀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아... 좋아! 도망은 지금부터야. 어떻게든 날 따라와, 죽을 각오로 따라와! 알았어?!
